#88
다섯이 뭉쳐 있는 모습을 떠올리며 흐뭇해하는 영호의 앞에 선 태오가 머뭇거렸다. 영호가 봐 온 태오는 인내심의 한도가 높았다. 다른 사람이면 힘들다며 울고불고할 일도 덤덤히 견뎌 내곤 했다. 우는 아이 떡 하나 더 준다고 알아서 스스로 해결하고 어지간한 일은 참고 버티는 태오에게 상대적으로 손이 덜 가는 것이 사실이었다.
다만 태오는 자신이 해결할 수 있는 선을 넘어선 것에 대해선 아주 직설적이고 솔직하게 요청하는 타입이었다. 거침없이. 영호를 찾아오기 전에 충분히 심사숙고하여 결론을 내린 것이기 때문에 대개 망설임이 없었다. 하지만 오늘은 왜인지 영호의 앞에서 어물쩍거렸다.
오랫동안 태오를 봐 왔지만 이런 모습은 딱 한 번 봤었다. 솔이 오기 전, 연습생을 이쯤에서 그만두고 현실을 봐야 할 때가 된 것 같다고 말했던 날이었다. 태오의 모습에 도리어 영호가 좌불안석이 되었다.
대체 무슨 어려운 이야기를 꺼내려 이리 망설이는지 심장이 덜컥 내려앉을 것 같았다. 또다시 포기하겠다는 말을 입에 담는 것은 아닐까 조마조마했다. 지난번 태오가 그런 말을 꺼냈을 때, 좀 더 어른답게 대처했어야 했는데 속 타는 마음에 괜히 다른 녀석들에게 감정풀이했었다.
안타까운 마음에 속이 타들어 가는데 득용이를 비롯한 아이들이 웃고 있는 걸 보니 감정이 치밀어 올랐었다. 태오도 그만둔다는데 뭐가 좋아서 그렇게 웃냐고 화를 냈던 기억이 떠올라 영호는 침을 꼴깍 삼켰다. 그 이후로 태오가 같은 말을 할 땐 어떻게 답하고 설득할지 꽤 많이 고민했었다.
잘 지낸다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빨리 미리 고심해 두었던 말을 꺼내게 될 줄은 몰랐다. 태오의 망설임이 길어질수록 영호의 얼굴은 사색이 되었다. 이번엔 정말 심각한 듯했다. 자신이 준비한 설득이 통하지 않으면 어쩐담. 매도 빨리 맞는 것이 낫다고 영호가 먼저 선수를 쳤다.
“태오야, 무슨 일 있어?”
영호의 물음에 태오가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쉽사리 입을 열지 않았다. 애가 닳은 영호는 제 발 저려 태오의 답을 기다릴 만큼 여유가 있지 못했다.
“저번엔 형이 실수했어. 이번엔 그런 일 없으니까, 편하게 말해 봐. 무슨 일 있는 거야?”
“별일 아니에요.”
“그…럼? 별일이 아니면…?”
영호의 오해에 태오는 덤덤히 대답했지만 정작 본래 찾아온 용건을 꺼내지는 못했다. 여전히 망설이는 태오의 모습에 영호의 눈동자가 더욱 불안하게 흔들렸다. 영호의 머릿속에 온통 ‘온다! 더 크게 오는 거야!’ 하는 생각이 점령했다.
“태오야, 제발 혼자 고민하다가 터뜨리지 말고 제발, 제발 말해 줘. 나 지금 심장 마비 올 것 같다.”
“…….”
늘 굳게 다물어지는 태오의 입술이 오늘따라 더욱 꽉 다물려 있었다. 영호는 손에 잡히지도 않는 머리카락을 쥐어뜯으며 거의 울부짖었다.
“제발!”
여기서 입을 다물었다간 영호가 온종일 쫓아다니며 무슨 일이 있는 거냐고 닦달할 기세였다. 결국 태오는 짧은 한숨을 쉬고 쉽게 꺼내지 못했던 말을 끄집어냈다.
“별거 아니에요. 다들 성솔을 걱정하고 있어서, 점심도 챙겨 줄 겸, 숙소에 다녀올까 해서요.”
“뭐?”
태오의 말대로 정말 별일 아닌 일이었다. 머리를 쥐어뜯은 것이 허탈해진 영호는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태오를 쳐다보았다. 허탈해진 반발 때문일까, 영호는 태오에게 평소라면 늘어놓지 않을 잔소리를 늘어놓았다. 아니, 애초에 태오에게 이런 잔소리를 개인적으로 하는 것 자체가 처음이었다. 오히려 이런 종류의 잔소리는 태오가 다른 멤버들에게 할 법한 말이었다.
“태오야, 그 시간에 연습을 더하고…, 아니다. 연습은 알아서 충분히 하니까. 그런 신경 쓸 시간에 눈을 좀 붙이든가 쉬어야지.”
“아, 네.”
“…그래, 착하다. 친구 챙기는 거 좋은 일이야. 그런데 너한테도 좀 신경 써라. 너네도 어제 추운 데서 벌벌 떨면서 촬영했어. 그럴 여유 있으면 숨이라도 돌려야지. 솔이는 내가 잘 챙겨 줄 테니까 걱정하지 마.”
“네.”
영호의 말에 태오는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태오가 망설인 것도 그 때문이었다. 영호가 하는 말에 태오의 머리도 전적으로 동의하고 있었다. 다들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고 연습에도 그다지 집중하지 못했다. 구태여 숙소까지 가서, 번거롭게 점심을 먹는 것보다는 그 시간에 눈이라도 붙이거나 체력을 아끼는 것이 효율적이었다. 머리로는 이해가 되었는데, 제 뒤에서 조잘거리던 멤버들의 말이 정확히 그의 마음과도 같아 태오를 영호에게까지 오게 했다.
“그럼 돌아가 볼게요. 성솔 신경 써 주세요.”
“그래. 태오야. 그거 말고는 정말 별일 없는 거지?”
영호는 괜히 불안한 마음에 한 번 더 되물었다. 태오는 덤덤히 고개를 끄덕이고 몸을 돌렸다. 한 발짝 걸음을 떼었을까 태오가 멈칫하더니 이내 돌아서 영호를 다시금 불렀다.
“영호 형, 혹시 성솔이 먼저 개인적으로 병원 가야 한다거나 치료받아야 한다고 한 적은 없죠?”
“어어. 따로 전달받은 거 없는데? 왜?”
전혀 들은 바가 없다는 영호의 표정에 태오는 아주 잠시 고민하다 말을 삼켰다. 지난밤 솔이 했던 말이 걸렸다. 자신의 참견이 주제넘어 솔에게 상처가 될 수도 있다는 생각과 그에게 도움이 필요하단 생각이 양립했다. 고개를 끄덕이고 돌아서려는 태오의 걸음을 영호의 목소리가 붙잡았다. 영호는 손뼉을 짝 소리 나게 맞추며 떠오르는 것이 있다는 듯 탄성을 내뱉었다.
“아. 그, 최 실장님이랑 대표님이. 솔이 스카우트할 때 무슨 재활? 도수 치료 뭐 이런 병원에서 만났다고 그러던데…. 재활이면 어디 다쳤었나? 그동안 생각을 못 하고 있었네…. 혹시 솔이가 어디 아프대?”
하지만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은 태오가 생각했던 것과 거리가 멀었다. ‘재활’과 ‘도수’라니. 아무래도 솔이 회사에 밝히고 싶지 않은 것이 분명했기에 태오는 이쯤 말을 접었다.
“아뇨. 이번에도 그렇고 너무 무리하는 건 아닌가 싶어서요.”
“그러게, 늦게까지 연습하고, 어제도 그 추운 데서 고생하더니 결국 이렇게 되네. 영양제 같은 거라도 챙겨 줘야 하나…. 좀 든든하게 먹이고 그래야겠다.”
“아무튼, 솔이 부탁드립니다.”
영호가 말을 계속 늘어놓자 태오는 과할 정도로 고개를 숙여 태오에게 솔을 부탁했다. 태오의 그 모습에 영호는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뭘 부탁이야. 내가 너희 챙기는 게 당연한 거지. 이건 한번 따로 물어봐야겠다. 아무튼, 솔이는 내가 죽 사다 먹일게.”
자신답지 않게 괜한 참견을 했다 싶었는데, 신경 써 챙기겠다는 영호의 말을 들으니 마음이 조금 편안해졌다. 조금 홀가분한 마음으로 오늘 트레이닝을 받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조금 가벼워진 발걸음으로 돌아서려는데 영호가 사람 좋은 얼굴로 허허 웃으며 태오에게 손짓했다.
“태오야.”
“네?”
“까짓거. 그래도 다 같이 갈래?”
“……네.”
영호의 제안에 태오는 고개를 끄덕였다. 영호가 뿌듯한 눈길을 태오에게 보내며 그의 너른 등을 툭 쳤다.
이불을 둘둘 온몸에 만 채로 솔은 소파에 누워 끙끙거렸다. 모처럼 혼자가 된 솔은 어른거리는 시야를 바로 잡아 보려 애쓰며 상태 창과 그간 차곡차곡 쌓인 아이템을 확인했다. 하지만 이내 얼마 지나지 않아 눈앞에 민트색으로 떠오른 창을 한참 노려보다가 덮어 버렸다. 역시나 아이템들을 선뜻 사용하기엔 조심스러웠다. 열이 올라 뻑뻑한 눈을 내리감고 얇은 눈꺼풀 위를 살살 문지르던 솔은 갑작스레 들리는 소리에 몸을 벌떡 일으켰다.
도어 록의 비밀번호가 눌리는 소리. 이불을 한껏 끌어안고 자리에서 일어난 솔은 멀뚱한 얼굴로 현관문을 쳐다보았다. 문이 벌컥 열리며, 득용이 뛰어 들어왔다.
“솔이 형, 밥 먹었어요!?”
“어…?”
양손에 흰 봉지를 든 득용을 선두로 연습실에 있어야 할 멤버들이 줄을 지어 들어왔다. 차례대로 문지방을 넘는 멤버들이 저마다 한마디씩 거들었다. 솔은 얼빠진 얼굴로 덩그러니 서서 자신에게 한마디씩 내뱉는 멤버들을 바라보았다.
“왜 나와 있어! 따뜻한데 누워 있지!”
지호의 잔소리가 채 끝나기도 전에 가람이 다정하기 짝이 없게 말했다.
“솔, 우리가 죽 사 왔어. 죽 먹고 약 먹자.”
영호가 손을 흔들자 득용이 양손 가득한 봉투를 들어 올리며 방정을 떨었다. 득용은 어쩐지 잿밥에 더 관심이 있는 듯했다.
“영호 형이 특전복죽으로 사 줬어요.”
영호와 지호, 득용이 주방으로 들어가고 맨 마지막으로 태오가 숙소로 들어왔다. 솔이 얼빠진 얼굴로 태오를 바라보았다. 태오는 평소보다 더 엄숙하리만치 심각한 표정이었다. 태오의 표정이 너무도 심각해 솔은 지금의 상황이 그가 원치 않은 일이었나 싶어 긴장했다. 태오는 굳은 얼굴로 솔에게 고개를 까딱여 보였다.
“…다들 걱정해서.”
“아. 그렇구나.”
어색하게 마주 보고 선 두 사람의 어색한 대화에 가람이 끼어들었다.
“태오도 솔, 걱정했어. 그렇지?”
“…….”
태오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까만 머리카락 옆으로 보이는 태오의 귀가 순간 새빨개졌다. 그 모습에 솔의 긴장이 싹 풀려 버렸다. 이불을 몸에 돌돌 말고 태오의 눈치를 살피던 솔은 배시시 웃음 지었다.
실수하는 걸 싫어하는 인간 윤태오. 오랜 시간을 봐 온 가람에겐 태오의 속내가 조금 보였다. 정신이 다른 곳에 팔려 제가 짠 안무의 순서도 틀리고 본인도 똑같이 솔을 걱정했으면서 그 감정을 내비치는 것이 어색해 이렇게 딱딱하게 굴었다.
“뭐 해, 얘들아. 어서 와서 먹어.”
주방에서 영호가 부르는 소리에 가람은 솔의 등을 떠밀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고 선 태오도 열이 오른 제 귓바퀴를 한번 매만지고는 식탁에 둘러앉은 멤버들과 영호의 옆으로 다가갔다.
포장해 온 죽을 공기에 더는 지호를 보며 득용이 되지도 않는 애교를 부렸다. 저는 쓸 일도 없는 숟가락을 입에 물고 불쌍한 척 울망울망한 눈으로 모두를 한 번씩 둘러보았다.
“김치 낙지죽. 한 입만 꿔 주면 안 돼요?”
“그렇게 쳐다보면 무섭다 득용아. 꿔 주면 갚을 거야?”
“닭 가슴살로 갚을게요.”
“되겠니?”
지호의 싸늘한 대답에 득용이 숟가락으로 전복죽을 가리키며 재차 애원했다.
“아, 진짜 너무해. 그럼 전복죽.”
“솔 거야. 건들지 마라.”
이번엔 가람이 그의 숟가락을 쳐 냈다. 그 모습이 너무 짠해 솔이 조심스레 득용의 편을 들어 주었다.
“같이 나눠 먹으면 안 돼요?”
솔의 말에 득용의 얼굴이 눈에 띄게 밝아지며 다시 한번 엄격한 형들을 훑어보았다. 간절하기 짝이 없는 득용의 눈빛과 발그레한 솔의 얼굴에 결국 영호가 고개를 저었다.
“어휴. 먹어라. 먹어. 오늘만 봐줬다. 조금만이야. 솔이는 많이 먹고”
허락이 떨어지자 득용이 쾌재를 불렀다. 그 모습에 솔이 뜨뜻하게 열이 오른 얼굴로 살포시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순간 식탁 위로 볕이 들은 듯, 환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