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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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솔.”
머리 위로 묵직한 목소리가 들렸다. 목소리의 무게와 상관없이 목소리가 빙빙 머리 주위를 돌다 귓가에 내려앉기는커녕 흘러 들어와 흩어졌다. 희미하게 들리는 목소리의 끝을 잡고 솔은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응.”
솔은 자신을 깨우는 태오의 목소리에 몸을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이불 밖으로 나온 솔의 얼굴은 평소의 창백함은 사라지고 어제, 촬영장의 붉은 조명 아래에 서 있었을 때처럼 붉었다. 거나하게 취한 사람처럼 불콰한 얼굴에 태오는 고개를 오른쪽으로 기울였다.
“너, 왜 이래?”
“집이 너무 추워.”
태오의 물음에 솔이 허탈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무슨 소리인가, 어젯밤 숙소로 돌아오자마자 춥다며 보일러를 밤새도록 돌렸다. 태오가 딛고 선 방바닥은 찜질방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절절 끓었고 열이 많은 득용은 덥다며 땀을 뻘뻘 흘릴 정도였다. 거기에 지난밤, 잠들기 전에 솔의 따뜻한 이불도 직접 확인한 태오였다.
태오는 손을 뻗어 솔의 이마에 얹었다. 전기장판처럼 따끈따끈한 이마에 태오는 고개를 저었다.
“영호 형한테 말할게….”
더 할 말이 없었다. 붉어진 얼굴과 뜨끈한 이마, 기운이 쭉 빠져 보이는 목소리까지 누가 봐도 ‘나 아파요.’ 하는 모양새였다.
어제 고생했다며 평소보다 여유 있게 멤버들을 데리러 온 영호는 이불로 온몸을 싸맨 한 명의 모습에 그렇지 않아도 영 걱정되었다는 말을 전했다.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쓰고 거실에 덩그러니 선 솔은 멤버들의 출근길을 배웅했다.
가람이 걱정이 아주 가득한 얼굴로 끝까지 솔에게 손을 흔들었다. 지호는 역시나 끝까지 엄마처럼 잔소리였다. 거실에 그러고 서 있지 말고 들어가서 누워라, 따뜻한 보리차를 조금 끓여 놨으니 찬물 마시지 마라. 그 잔소리에 솔은 고개를 설렁설렁 끄덕였다. 마지막으로 영호가 멤버들을 데려다주고 돌아올 테니 병원 갈 준비하란 말을 남기고 숙소에서 떠나갔다.
솔은 몸에 두른 이불을 여미고 텅 빈 숙소를 쭉 둘러보았다. 처음 여기에 왔을 때가 아직도 생생했다. 하지만 그때와는 많은 것이 달랐다. 이제는 곳곳에 자신의 물건들이 보였다. 따뜻한 방바닥, 지호가 조금 전까지 끓인 보리차 덕에 훈훈한 공기. 자신이 이곳에 스며들었다는 증거일 것이다.
팔다리가 축축 처지도록 무겁고 무릎이 시큰거리는 것이 영락없는 몸살감기였는데, 몸이 힘든 것과 상관없이 기분은 나쁘지 않았다. 마지막까지 늑장 부린 가람이 급히 갈아입은 점퍼가 소파에 걸쳐 있었고 식탁 위엔 득용이 닭 가슴살을 꺼내 먹은 흔적이 역력했다.
혼자 숙소에 남겨졌지만 혼자 있는 기분은 아니었다. 처음엔 시스템 때문에 타의로 등이 떠밀려 시작했지만, 지금은 자의인지 타의인지 그 경계가 모호했다. 어제의 촬영만 해도 그랬다. 오히려 이젠 자의에 기울어 있었다.
아직도 갈 길이 멀었지만 그래도 지금까지 쉼 없이 달려왔다고 생각했다. 물론 태오나 지호, 가람과 득용, 그리고 은겸처럼 꿈을 향해 정말 노력해 온 친구들이 본다면 솔이 뛰어온 길이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보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 사고 이후로 이렇게까지 오래, 무언가를 열심히 해 본 것이 처음이었다. 시도조차 처음이었고. 뛰는 법조차 잊어 어색한 걸음을 내디뎠었는데 어느새 이제 제법 그 예전, 무대를 멋지게 뛰어다니던 그때의 모습이 살아나 있었다.
더불어 지난밤, 취한 듯 태오에게 털어놓았던 일도 후회가 남지 않았다. 오히려 너무도 심플했던 태오의 반응이 도움이 되었다. 당시에는 너무도 덤덤한 그의 말이 오히려 조금 서운하기도 했었는데, 그렇게 마무리되었기에 오늘 아침 어색하지 않게, 평소처럼 대화할 수 있었던 것 같았다.
몸은 아팠지만, 머릿속은 그 어느 때보다 맑고 또렷했으며 조금의 우울감도 없었다.
솔을 그렇게 홀로 남겨 두고 연습실로 돌아온 멤버들은 모처럼 개별적인 연습 시간을 가졌다. 그간 계속해서 트레이닝과 은겸의 무대 지원을 준비했었는데, 은겸의 뮤직비디오 촬영이 아직 마무리 지어지지 않아 시간이 조금 뜨게 되었다.
연습실에서도 꽤 많은 것들이 달라져 있었다. 채민주가 촬영을 시작하면서 주말 평가와 트레이닝 내용들도 좀 더 개인적으로 바뀌었다. 멤버들끼리 어느 정도 합이 맞자 커리큘럼이 달라진 것이다. 이제는 안무를 직접 구성하기도 해야 했으며 단순한 보컬 트레이닝을 넘어서 편곡이나 작곡 등 한 발짝 나아가야 했다.
각자 자신의 위치에 필요한 연습을 마치고 결국 모인 곳은 늘 그렇듯, 연습실이었다. 거울 앞에 서서 재즈 느낌의 곡에 맞춰 안무를 추는 태오의 뒤로 가람과 지호 득용이 쪼르르 모여 앉았다. 며칠째 자신이 짠 안무의 완성도를 끌어 올리느라 거듭 동작을 반복하는 태오를 세 사람은 익숙하다는 얼굴로 지긋이 바라보았다.
한참 연습하다 점심시간 전에 숨을 좀 돌리려 고작 10분 앉아 있는 것인데도 태오는 그 잠깐도 스스로에게 허용하지 않았다. 묵묵히 태오의 모습을 지켜보던 세 사람 사이의 침묵을 득용이 먼저 깼다.
“솔이 형, 혼자서 괜찮겠죠?”
태오를 바라보며 툭 내뱉은 득용의 말에 지호가 고개를 끄덕이며 답을 했다.
“영호 형이 신경 쓴다고 했잖아. 애도 아니고 당연히 괜찮지.”
나름 만족스러운 답변이었는지, 득용과 가람이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대답한 지호도 같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잠시 다시 침묵이 찾아왔다. 오늘따라 멤버들 사이에 이상하리만치 침묵이 흘렀다. 분명 조잘조잘 잘 떠들고 쉬는 시간이면 장난치느라 바빴는데, 오늘은 어쩐지 다들 한 템포씩 처져 있었다. 침묵을 깨고 이번에는 가람이 입을 열었다.
“솔, 점심은 챙겨 먹겠지?”
역시나 화제는 솔이었다. 가람이 나른한 얼굴로 툭 내뱉은 말에 지호는 이 처진 분위기의 이유를 알았다. ‘성솔’이 없어서였다. 그리 말수가 많지도 않고 부끄럼도 잘 타는 성솔이 언제부터 멤버들 사이의 중심이 되었는지 모를 일이었지만 확실했다.
느지막이 합류해 아무것도 모르고 의기소침한 마지막 멤버. 원했든 원치 않든 그를 챙기고 돕다 보니 자연스레 늘 솔을 가운데에 두고 뭉치게 되었고 거의 말끝마다 성솔을 쳐다보며 ‘솔이는?’을 붙이게 되었다. 무슨 일을 할 때마다 그를 챙기고 확인하는 게 일상이 되어 버린 것이었다.
가람의 말에 지호가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정작 지금의 처진 분위기에 대해 분석하던 지호도 그 ‘솔이는?’ 현상에서 허덕이는 중이었다.
“어…… 그러게, 귀찮다고 거르는 거 아니겠지?”
“아플 때는 죽 먹고 약 먹어야 하는데.”
지호의 물음에 답을 준 것은 득용이었다. 쪼르르 나란히 앉은 세 사람이 서로의 말에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세 사람 모두 숙소에 홀로 남아 있는 성솔이 걱정되었다.
“…집중하자.”
한겨울, 난방도 하지 않는 연습실에서 땀을 흘리며 춤을 추던 태오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평소라면 연습실에 히터를 제일 먼저 틀었을 태오인데, 오늘은 솔이 없다고 그 히터도 틀지 않았다. 태오의 말에 득용이 입을 삐죽였다. 멤버가 아파 홀로 숙소에 남아 있는데 쉬는 시간에 걱정 정도야 충분히 할 수 있는 것 아닌가. 득용의 눈엔 연습 벌레 태오가 오늘따라 냉정하게 느껴졌다. 걱정하는 시늉이라도 하지.
그렇게 세 사람은 더 이상 아무 말 없이 태오의 움직임을 눈에 담았다. 오늘따라 더 열심이었다.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가람이 태오의 동작을 지적하며 앉은 채로 팔만 흔들어 동작을 흉내를 냈다.
“…그다음엔 이거 아니야?”
순서가 틀렸다. 제 머릿속에서 나오고 수십, 수백 번도 더 연습했을 동작. 그도 마음이 딴 곳에 가 있기는 마찬가지였다. 순간 태오가 멈칫하자 지호와 득용의 고개가 기울어졌다.
“태오야?”
“태오 형?”
두 사람의 물음에 태오는 움직임을 멈추고 숨을 골랐다. 오늘따라 영 집중이 되지 않았다. ‘집중하자.’라는 말은 제 뒤에 앉은 멤버들을 향한 것이 아니라 자신을 향한 말이었다. 제가 짠 안무를 틀려 머쓱해진 태오는 한참 그 자리에 서서 어깨만 들썩였다. 숨이 진정되자 태오는 괜스레 평소보다 더욱 진지한 얼굴을 했다. 멋쩍었다.
“잠깐…… 영호 형한테 다녀올게.”
한참 만에 내뱉어진 태오의 말에 지호가 고개를 푹 숙였다. 아닌 척 무게를 잡고 있지만 그도 자신들과 하나 다를 것이 없었다.
“왜 이래, 이 형. 갑자기 왜 웃어요.”
고개를 푹 숙인 지호가 어깨를 들썩거리자 눈치 없는 득용이 몸으로 지호를 툭 밀쳤다. 고개 숙이고 웃음을 삼키던 지호는 득용의 몸에 떠밀려 바닥에 풀썩 누워 버렸다. 차가운 연습실 바닥에 누운 채로 웃음을 흘리는 지호를 득용이 꺼림칙하단 얼굴로 쳐다보며 고개를 내저었다. 지호가 생각하기에 지금 이 변화가 그리 나쁘지 않았다.
자신의 뒤로 따라붙는 가람의 시선과 지호의 웃음을 뒤로하고 연습실을 빠져나온 태오는 영호를 찾았다.
“영호 형.”
“어어, 태오야. 왜?”
뭐든 알아서 홀로 척척한 장기 연습생. 오히려 회사에 대해 영호보다 속속들이 더 잘 아는 태오가 영호를 찾을 때는 무언가 자기 선에서 해결하기 어려운 일이 있을 때뿐이었다. 그런 태오의 부름에 영호는 긴장했다. 연습생의 부름에 긴장한다는 것이 우스웠지만, 태오의 부름은 영호에게 그런 느낌이었다. 그리고 태오가 자신을 찾는 이유 중 가장 빈번한 것은 안타깝기 그지없는 그의 가족 때문이기도 했다.
“성솔, 병원 다녀왔나요?”
역시나, 병원 이야기로구나 하고 고개를 끄덕이던 영호는 그 앞에 붙은 이름에 가슴을 쓸어내렸다. 큰일이 아니라는 것에 안도도 잠시 영호의 표정이 떨떠름해졌다.
“병원 안 간다고 하도 그래서 약만 챙겨다 줬다.”
“약만요? 열 많이 나던데요.”
“그러니까. 나도 그냥 속 편하게 병원 다녀오자고 몇 번을 말했는데, 걔도 은근 고집 있어.”
허여멀게 맹탕처럼 구는 솔이 은근히 고집이 있었다. 얼굴이 벌게서 열이 꽤 높은 것이 분명한데 한사코 약만 먹고 쉬겠다고 고집을 부렸다.
하여간 외모만 봐선 그다지 닮지 않아 보이는 이 팀의 공통점은 그거였다. 하나같이 고집 있는 것들만 모였다. 쫓아다니며 연습 좀 하라고 닦달할 필요가 없는 녀석들, 오히려 몸 상한다고 제발 쉬라고 말려야 하는 고집 있는 녀석들.
분명 서로 제각각의 모양인 단추들이었는데, 꿰매 놓고 보니 그 생김과 상관없이 정갈하게 열 맞춰 잘 여며졌다. 제법 구색을 갖춘 번듯한 한 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