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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애를 뽑고 싶어 (86)화 (86/192)

#86

“차만 타면 그런다는 게, 정확히 어떤 거야?”

태오의 물음에 솔은 눈을 번쩍 떴다. 순간 그제야 자신이 무슨 말을 했는지 확 와닿았다. 믿고 의지하던, 절친한 의찬에게도 제 입으로 제대로 말한 적 없는 것이었다. 교통사고의 트라우마. 몸에 남았던 상처들이 다 나으며 말끔히 털어 버린 척 누구에게도 말한 적 없는, 솔에게는 없는 병이었다.

이미 내뱉어진 말을 되돌리는 수는 없었다. 솔은 태오의 물음에 동그랗게 뜬 눈을 한 바퀴 데굴 굴리고는 그다지 심각해 보이지 않게, 웃음을 흘리며 별일 아닌 것처럼 대답했다.

“머리가 좀 아프고….”

최대한 괜찮은 것처럼 증상을 축소해 보려던 솔은 자신을 올곧게 쳐다보는 태오와 눈이 마주치자 말꼬리를 늘렸다. 그의 검은 눈동자가 솔직하게 말하라 종용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결국 태오를 속이는 기분에 불편해진 솔은 그의 시선을 피하며 증상을 하나씩 덧붙였다.

“어지럽고, 토할 거 같고…. 숨 쉬는 게 좀 답답한…… 그 정도?”

“…….”

물론 그 와중에도 차가 속력을 낼 때마다 당장에라도 사고가 날 것 같은 공포감을 느낀다거나 영화를 반복 재생한 것처럼 사고당한 당시의 모습들이 눈앞에 펼쳐진다는 것은 생략했다. 태오가 아무런 반응이 없자 솔은 늘 그렇듯, 어색하게 ‘하하’ 웃어 보이며 상황을 마무리해 보려 했다.

“‘그 정도’는 뭐야?”

자신의 증상을 이야기하는데 확신이 없는 ‘그 정도’라는 말이 붙자 태오의 이마가 살짝 구겨졌다. 솔은 태오의 눈치를 살피며 무거운 몸을 일으켜 세웠다. 더는 누워서 이야기할 상황이 아니었다.

“그쯤에서 더 못 참고 늘 내려 버렸거든.”

매사에 비겁하게 회피만 하던 사람이 바로 성솔, 자신이었다. 불편한 상황을 참고 견뎌 보려고 시도조차 하지 않았다. 스물다섯 살이 되도록 운전면허도 없었고, 버스를 타는 게 무서워 차라리 학교에 안 가는 걸 택했다. 어색함이 가득한 솔의 웃음에 태오의 짙은 눈썹이 찌푸려졌다.

깨끗한 이마 위에 유독 까맣고 짙은 눈썹이 자리해, 조금만 움직여도 곱절은 심각해 보이고 도드라졌다. 태오의 표정에 순간 불편함이 스쳤다. 처음 보는 표정이었다.

“나한테 이야기하는 이유가 뭐야? 그동안 멀미라고 했잖아. 숨기고 싶어서 그런 거 아니었어?”

그런 태오의 표정 때문일까. 그의 목소리는 평소와 다를 것 없이 무미건조했지만, 지레 겁을 먹은 솔은 주눅이 들어 침대에 앉은 채로 고개를 푹 숙였다. 반성하는 아이처럼 고개를 숙인 솔은 제 손가락을 괜히 꽉 잡아당기거나 누르며 태오의 궁금증을 해소해 주었다.

“…네가 리더니까. 나 때문에 곤란한 상황이 생기면 네가 제일 난감할 거 아니야. 그래서…. 너는 알고 있어야 할 것 같았어.”

풀이 죽은 솔을 빤히 바라보던 태오는 한숨을 내쉬었다. 태오의 그 숨소리에 솔은 더 쪼그라들었다. 누가 그의 머리 위에 못질이라도 하는 듯, 솔은 어깨를 웅크리고 머리를 침대에 닿을 듯 푹 숙였다. 대역죄라도 진 것 같은 그 모습에 태오의 미간이 더욱 깊게 파였다.

“내 어머니는 옆으로 빠르게 무언가 지나가기만 해도 놀라.”

“아!”

덤덤한 태오의 목소리와 달리 솔은 그의 말에 놀라 탄성을 내뱉었다. 딱히 태오에게 자신과 비슷한 가정사가 있어 말을 꺼낸 것은 아니었다.

“아직도 클랙슨 소리처럼 큰 소리가 나면 크게 놀라시고 그래. 교통사고 후에 흔히 겪는 일들이야.”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사고 후에 누구나 겪을 수 있는 후유증이었다. 자연스럽고 당연한 일이었다. 추운 날, 밖에서 덜덜 떨다 들어오면 다음 날 감기에 걸리는 것처럼.

“치료나 상담은 받았어?”

“아. 응……. 사고 이후에 정신과 다녔었어.”

이어지는 태오의 질문에 솔은 고개를 끄덕이며 빠르게 대답했지만 태오는 그의 말이 과거형인 것이 마음에 걸렸다.

“지금은?”

솔의 고개가 더욱 깊이 숙어졌다.

“사정이 좀…….”

사정은 개뿔. 무기력증은 날로 심해져 갔고 단순히 사고 이후의 PTSD만 문제인 게 아니었다. 사고 이후 가족을 잃었다는 상처도 상처였지만 사실 그때는 모든 것에 화가 나 있었다. 하필이면 여행을 가자 했던 자신에게, 아무 이상이 없는데도 무용을 하지 못하는 자신에게, 사고를 낸 가해자에게, 자신을 불쌍하게 쳐다보는 주변인들에게, 편하게 뭐든 말해 보라 하는 의사 선생님에게. 자신에게 벌어진 납득할 수 없는 일에 화가 나 있었다.

당연히 그런 상태로 받는 상담이 제대로 진행될 리 없었다. 보이지 않는 차도, 날로 심해져 가는 증상에 불신만 쌓여 갔고 그 와중에 솔이 만난 모든 의사가 이상적이지는 않았다. 무엇보다 가장 큰 문제는 주변의 도움 없이는 홀로 병원에 가기조차 어렵다는 점이었다. 그렇게 치료는 끝이 났다. 결국 이것도 도망친 셈이었다.

답답하기 짝이 없는 자신의 상황과 태도. 이해받길 원한 적은 없었다. 자신도 대체 왜 자신이 이렇게 살고 있는지 이해할 수 없는데, 누가 이해해 준단 말인가. 다만 솔도 사람인지라 욕은 먹기 싫었고 동정도 받기 싫었다. 태오를 비롯한 다른 멤버들과 요즘 사이가 좋았다. 정말 친구라고 말할 수 있을 만큼 가까워졌고 도움도 많이 받고 있지만 무엇보다 즐거웠다.

지금의 관계를 망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더더욱 자신의 답답한 흠을 숨기고 싶었는데, 대체 무슨 생각이었는지 생각 없이 제멋대로 말을 내뱉은 자신이 후회스러웠다. ‘구제 불능, 답도 없는 폭탄이라 생각하고 실망하면 어쩌지.’ 솔의 얼굴이 급격하게 어두워졌다. 가만두면 그대로 땅을 파고 그 안에 드러누운 뒤, 다시 스스로 흙을 덮을 표정이었다.

솔의 생각과 다른 이유로 태오의 표정도 심각했다. 과분한 참견, 혹은 솔이 기분이 상하지 않을까 하는 걱정에 태오는 선뜻 말을 꺼내기가 어려워 잠시 고민했다. 고개 숙인 솔의 얼굴이 급격하게 어두워지자 더더욱 쉽게 말이 안 나왔다. 하지만 태오는 이내 꼭 말해야겠다고 결론을 내렸다. 늘 진지한 그의 얼굴이 한층 더 심각해졌다.

“……그 정도로 차 타는 게 어렵다면, 치료 다시 받는 게 어때?”

이 말이 그렇게 어려웠다. 최대한 조심스럽게 말을 꺼낸다고 속으로 말을 고르고 골랐지만, 입 밖으로 튀어나온 목소리는 지나치게 무미하고 무뚝뚝했다. 다소 냉정하고 딱딱한 어조에 태오의 말을 지레짐작한 솔은 고개를 끄덕이며 씁쓸한 웃음을 흘렸다.

“역시 방해겠지……, 미안.”

솔의 사과에 태오는 다급하게 손을 뻗어 그의 손목을 붙잡았다. 하얗고 마른 손목이 태오의 큼직한 손안에 딱 들어왔다. 너무 마르고 창백해 세게 쥐면 부러질 것 같았는데, 손바닥 아래로 느껴지는 뼈대는 제법 단단해 남자인 티가 났다. 태오는 솔의 손목을 움켜잡고 굳은 얼굴로 말을 덧붙였다.

“방해라고 한 적 없어. 치료받으라고 한 거지. 우리나 회사 일정 때문이 아니라 너를 위해서 치료받으라고 말한 거야.”

태오에게 손목을 붙잡힌 솔은 그제야 고개를 들어 태오와 눈을 마주쳤다. 태오는 진지한 표정으로 고개를 위아래로 한번 주억거리고 단호하게 말을 이어 나갔다.

“지금 그거 아픈 거잖아.”

왜인지, 태오의 그 단호한 한마디에 솔은 할 말을 잃었다.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모르겠어 솔은 잠시 그냥 오도카니 앉아 태오를 바라보았다. 솔은 무슨 표정을 지어야 할지도 알 수 없었는데, 어쩐지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솔의 얼굴이 찡그려지자 태오는 한 번 더 단호하게 말을 내뱉었다.

“널 힘들게 하는 거잖아. 아프잖아.”

“…응.”

솔은 고개를 끄덕였다. 인정해 버렸다. 그간 교통사고의 트라우마는 솔에게서 없는 병이었는데, 태오의 단호한 말에 그간 숨겨 오고 변명한 것이 무색하게 인정해 버렸다.

자신의 손목을 잡고 두 눈을 똑바로 맞추는 태오를 보며 솔은 어쩐지 ‘사실 난 지금 게임 속에 들어온 거야.’라고 말해도 태오라면 진지하게 들어 줄 거란 생각이 들었다. 한번 저질러 보고 싶다는 마음이 불쑥 들었다. 이대로 더 있다가는 정말 저질러 버릴 것 같아 솔은 굳은 얼굴을 풀고 애써 웃어 보였다.

“졸리다.”

뜬금없는 말이었지만, 태오는 솔의 말에 담긴 뜻을 빠르게 눈치챘다. 더 이상 말하기 싫다는 단절의 의미였다.

“그래…. 하지만, 세수는 하고 자.”

더 이야기하고 싶지 않다는 사람을 붙잡고 이야기하는 건 강요가 되어 버린다. 태오는 움켜잡았던 솔의 손목을 놓아 주었다. 그러고는 덤덤한 목소리로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심각했던 그 이야기 전으로 돌아갔다. 자기 의사를 알아차리고 더불어 이해해 주는 태오의 말에 솔은 활짝 웃어 보이며 평소라면 하지 않을 애원조로 대답했다. 득용이 지호에게 하듯 말이었다.

“한 번만 봐줘.”

솔이 득용을 흉내를 내듯 말하자 태오도 그런 득용을 받아 주는 지호 같은 말투로 그의 투정을 받아 주었다.

“이것도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솔이 해맑게 웃으며 태오의 말을 끊었다.

“응. 나 위해서.”

“…….”

태오의 눈엔 훤히 보였다. 불편한 몸으로 깨어나지 않는 동생을 간호하며 애써 밝은 척하는 자신의 어머니처럼 웃고 있지만 조금도 기쁘지 않은 솔의 숨겨진 얼굴이 보였다. 익숙한 얼굴이었다.

“혹시, 리더로서 내가 더 알아야 할 거 있어?”

“어…. 무대 공포증? 카메라 공포증?”

불편한 상황이 일단락되었다고 생각했는데, 태오의 갑작스러운 질문에 솔은 눈에 띄게 당황하며 눈동자를 굴렸다.

“그건 알고 있고.”

“글쎄, 그 외엔 딱히 생각나는 게 없는데.”

“알겠어.”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태오의 반응은 담백한 ‘알겠어.’ 그게 끝이었다. 태오는 더 이상 솔에게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슬쩍, 눈을 굴리는 게 더 숨기는 것이 있는 티가 났지만 캐묻지 않았다. 오늘처럼, 조금 더 시간이 흐른다면 솔이 솔직하게 말해 줄 날이 또 올 것 같았다. 괜히 아픈 곳을 더 건드려 봐야 좋을 게 없었다.

그렇게 두 사람 사이에 고요가 찾아오자 태오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제 침대로 돌아갔다. 방 안에 울려 퍼지는 고른 숨소리에 솔은 이상한 기분이 되었다.

‘‘알겠어.’ 그게 끝이야?’

대화의 단절을 원한 것은 분명 자신이었는데, 지나치게 담백하게 끝을 낸 태오의 태도가 어쩐지 조금 서운했다. 대체 이게 왜 서운한지 스스로 생각해도 알다가도 모를 변덕이었다. 결국 이상한 마음에 잠이 홀라당 달아나 버린 솔은 앓는 소리를 내며 일어나 욕실로 들어갔다. 욕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리자 태오는 눈꺼풀을 꽉 내리감고 숨을 한번 길게 내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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