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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애를 뽑고 싶어 (85)화 (85/192)
  • #85

    숙소에 들어서자마자 솔은 제 방, 침대 위에 엎어졌다. 긴장이고 트라우마고 뭐고, 차에 오르고 몇 분 지나지 않아 따뜻한 히터에 녹아 혼절하듯 정신을 잃은 솔은 숙소 인근에 와서야 잠에서 깼다. 잠이 든 턱에 고비를 넘겼다고 안심한 것도 잠시. 늦은 귀가에 영호의 마음이 급했는지 밴의 속도가 점점 올라갔다.

    정신 차리고 차에 앉아 있었던 시간은 달랑 5분인데. 체력이 반토막이 나 버렸다. 잠들어 있는 멤버들을 보며 깨우지 않으려 혼자 이를 악물어 보았지만, 눈치 빠른 태오가 제일 먼저 눈을 뜨고 솔을 흘깃 쳐다보았다.

    어두운 도시를 달리는 차 안. 가로등과 자동차 라이트 불빛이 비칠 때마다 창백한 솔의 얼굴이 더욱 허옇게 떠올랐다. 태오를 시작으로 하나둘, 눈을 뜬 멤버들이 걱정이 가득한 눈으로 솔을 바라보게 되었다. 솔이 괜찮다는 의미로 손을 내저어 보였지만, 네 쌍의 눈이 모두 그에게로 집중되었다.

    결국 도착하자마자 솔은 밴에서 쓰러지듯 내려 간신히 땅을 디뎠다. 어지럼증에 쉽사리 걸음을 옮기지 못하고 휘청휘청하자 태오와 가람이 각각 한 팔씩 잡아들고 짐짝처럼 숙소로 옮겨졌다. 평소라면 괜찮다는 말이라도 한마디 더 했을 텐데 기진맥진이 된 솔은 축 늘어져 두 사람에게 옮김을 당했다. 그렇게 이제는 안락한 기분이 드는 제 방 침대 위에 누이게 되었다.

    피곤한 와중에도 아침에 정신없이 나가며 어질러진 숙소를 정리하는 소리가 들렸지만, 솔은 엎어진 채 죽은 듯 꼼짝도 하지 않았다. 손가락 하나 까닥하기 어려워 모른 척했다. 아직도 차에 타고 있는 것처럼 침대 매트리스가 덜컹거리는 것 같았고 귓가에 클랙슨 소리가 울리는 기분이었다. 눈앞이 어질어질했고 꽁꽁 얼어 있다 녹아 버린 몸에서 열이 나는 듯했다.

    얼마나 그렇게 있었을까. 노크하는 소리가 들렸지만, 솔은 여전히 눈을 감은 채 꼼짝도 하지 않았다. 문을 두드렸으나 아무 답이 없자 이내 방문이 벌컥 열렸다. 자기 방을 들어오는데 노크할 일은 없으니 태오는 아니었다. 발걸음 소리가 경쾌했다.

    “솔아.”

    카랑카랑하게 방을 울리는 시원한 목소리. 지호였다.

    “솔아? 옷도 안 벗고 이대로 자는 거야?”

    지호의 말에 솔은 자신이 아직도 패딩을 입은 채 침대에 누워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머리로는 ‘벗어야 하는데…….’ 했지만 입도 손도 발도 그 어느 것도 떨어지지 않았다. 오히려 침대 매트리스가 푸욱 꺼져, 땅바닥과 붙어 자신을 끌어당기는 것 같았다. 솔이 가만히 엎드려만 있자 지호는 몇 차례 ‘솔아?’하며 그의 이름을 더 불렀다.

    “완전 뻗었네.”

    지호는 한숨처럼 말을 내뱉고 솔의 팔을 잡아 올렸다. 떼쓰는 어린아이 옷 갈아입히듯, 지호는 솔의 외투를 벗겨 내었다. 바스락거리는 패딩의 모양을 잘 잡아 옷걸이에 걸어 두는 것까지 보지 않아도 소리로 다 알 수 있었다. 평소에도 숙소를 살뜰하게 정리하는 지호였다.

    “지호 형, 욕실 비었어.”

    “어어.”

    활짝 열린 문 안으로 수건을 뒤집어쓴 가람이 얼굴을 불쑥 내밀었다. 꼼짝도 하지 않는 솔을 더 이상 어찌할 수 없어 팔짱을 끼고 바라보고 있던 지호는 가람의 부름에 알았다는 의미로 손짓했다. 하지만 그 모습을 보고 가만히 지나칠 가람이 아니었다. 수건으로 젖은 머리를 털며 방 안으로 들어온 가람은 지호의 옆에 나란히 서서 시체처럼 엎드린 채 가만히 있는 솔을 바라보았다.

    “솔, 그러고 자는 거야?”

    “그런가 봐. 꼼짝도 안 하네.”

    “숨 안 막히나?”

    가람의 말에 지호는 피식 웃으며 그를 바라보았다. 뜬금없는 가람의 질문이 우스웠다. 그저 차에서부터 곧 쓰러질 것처럼 창백하게 질려 있더니 이렇게 옷도 갈아입지 못하고 잠든 게 짠해 외투만 벗겨 줄 생각이었다. 딱 거기까지 밖에 생각 못 했는데, 가람의 말을 듣고 나니 얼굴을 침대에 푹 파묻은 게 불편한 정도가 아니라 질식을 걱정해야 할 듯했다.

    “일단 앞으로 돌려 볼까?”

    “그래야 좀 편하지 않을까……”

    지호와 가람은 서로의 얼굴과 여전히 엎어진 솔을 번갈아 바라보며 서로에게 질문을 했다. 지호가 먼저 살금살금 다가가 솔의 어깨를 잡자 가람도 그의 다리를 잡았다. ‘깨지 않을까?’ 싶었지만 두 사람이 몸을 잡고 뒤집는데도 솔은 눈꺼풀조차 움직이지 않았다. 그 모습에 오늘 하루 종일 촬영장에서 솔을 인형처럼 다루던 은겸이 떠올라 지호는 괜히 입을 삐죽거렸다.

    무슨 시커먼 속내를 가지고 솔에게 접근하는 것인지 영 신경 쓰이고 성큼성큼 솔을 제멋대로 만지는 것도 찜찜했다. 누구보다 은겸을 잘 아는 지호이기에 그의 행동이 단순한 호의가 아니라는 생각이 머릿속에 맴돌았다. 지호가 은겸 생각에 눈을 게슴츠레하게 뜨고 서 있자 가람이 툭, 그의 팔을 건드렸다.

    “왜?”

    “아까는 창백하더니 지금은 좀 빨간 거 같지 않아?”

    “어디.”

    가람의 말에 지호는 솔의 얼굴을 가만히 쳐다보았다. 차 안에서는 정말 시체처럼 하얗게 질려 있었는데 그의 말대로 지금은 또 좀 붉은 거 같기도 했다. 하지만 그보다 지호의 머릿속엔 ‘메이크업 지우고 자야 하는데…….’ 하는 생각이 앞섰다. 가람이 손을 뻗어 솔의 뺨에 제 손등을 가져다 대었다.

    “열 있나?”

    “너무 추운 데 있다가 따뜻한데 들어와서 그런 거 아닐까? 그보다 메이크업 지우고 자야 하는데…….”

    “………….”

    잠시 가람과 지호는 말없이 잠든 솔을 얼굴을 바라보았다. 두 뺨이 발그레해서 고이 잠든 모습이 화폭이 따로 없었다. 어디 미술관에 전시되어 있을 것 같은 ‘잠이 든 천사’ 이런 이름의 그림 말이었다. 한참 그 자리에 서서 솔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던 둘은 말없이 눈짓을 주고받았다. 차마 깨울 수가 없었다. 말하지 않아도 뜻이 통한 둘은 고개를 끄덕이고 이불을 덮어 주고는 조용히 방을 나왔다.

    가람과 지호의 기척이 사라지자 솔은 크게 숨을 내쉬었다. 그러고는 까무러쳤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다시금 방문이 열리는 기척에 솔은 정신이 들었다. 잠깐 진짜 잠이 든 탓인지 온몸이 더 노곤했다.

    가람의 말대로 얼굴에 열이 오르는지, 감은 눈꺼풀 위에 열감이 느껴졌다. 방으로 성큼성큼 들어오는 걸음 소리가 태오였다. 제 침대에 눕겠거니 하고 가만히 그 소리만 듣고 있었던 솔은 태오의 걸음이 자신의 앞에서 멈추자 궁금증이 일었다. 하지만 몸과 눈꺼풀은 제 마음대로 움직여 주지 않았다.

    잠시 뒤, 태오의 손이 이불 속으로 불쑥 들어왔다. 그 거침없는 행동에 솔은 순간 심장이 쿵 하고 울리는 소리가 귀에 들리는 듯했다. 이불 속으로 들어온 태오의 손은 이불 안이 따뜻한지 확인하곤 쑥 빠져나갔다. 당황했지만, 솔은 아무런 반응도 하지 못했다. 그렇게 이제 각자의 자리로 돌아가나 싶었는데 얼굴에 차가운 무언가가 와닿았다.

    이번엔 제 마음대로 움직여지지 않던 솔의 눈이 저절로 떠질 수밖에 없었다. 눈꺼풀이 파르르 떨리더니 간신히 반쯤 열려 태오를 눈에 담았다.

    태오의 손에는 클렌징 티슈가 들려 있었다. 반쯤 감긴 눈꺼풀과 긴 속눈썹 아래로 솔의 까만 눈동자가 반짝였다. 솔이 깬 것을 확인한 태오는 그가 오해하지 않도록 손에 들린 티슈를 보여 주며 한마디를 덧붙였다.

    “대충이라도 지우고 자.”

    태오의 말에도 솔은 아무 대답도 없이 다시 눈을 감았다. 손가락 하나 까닥하기 싫었다. 얼굴에서 오른 열이 전신에 퍼져 녹아 버린 버터처럼 흐느적거렸다. 팔다리가 무거워 침대 아래로 가라앉을 것 같았다. 정신도 잠에 취해 몽롱했고 아직도 귓가에 클랙슨 소리가 맴돌고 눈꺼풀 위로 쏟아지는 천장 등 불빛은 촬영장에서 사용하는 조명처럼 강렬하게만 느껴졌다.

    솔이 별다른 반응이 없자 태오는 말없이 묵묵히 티슈로 그의 얼굴을 살살 닦아 내려갔다. 제 얼굴이었으면 벅벅 문질렀을 텐데. 가까이서 본 솔의 얼굴은 피부가 너무 얇아 보여 그리 거칠게 굴면 안 될 것 같았다.

    열이 오른 얼굴 위로 차가운 액체를 머금은 티슈가 지나가자 시원함이 느껴졌다. 솔은 마치 어리광 부리는 아이처럼 눈을 감고 가만히, 태오가 얼굴을 닦아 주는 대로 가만히 있었다. 얼굴 위를 누비는 손길이 어찌나 조심스럽고 간지러운지 솔은 입가를 씰룩거렸다. 붉은 입술이 꿈질거리고 반반한 이마에 그린 듯이 자리 잡은 눈썹이 찌그러졌다.

    태오는 솔의 그런 반응이 자신의 손이 너무 거칠었나 싶어 더욱 살살, 고가의 공예품이라도 다루듯 조심스럽게 굴었다. 결국, 간지러움을 참지 못하고 솔이 바람 빠지는 웃음소리를 내었다.

    “깼으면 메이크업만이라도 지우고 자. 피부 상해.”

    솔이 웃음을 터뜨리자 태오는 손에 든 티슈를 펼쳐 그의 얼굴을 덮어 버렸다. 여전히 눈을 감은 데다가 얼굴에 티슈가 덮인 솔은 보지 못했지만, 태오의 얼굴과 두 귀가 터질 듯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침대 밖으로 한 발짝도 못 나가겠어.”

    “들어올 때처럼 옮겨다 줄까?”

    태오의 말에 솔은 숙소에 들어올 때 짐짝처럼 들어온 자기 모습을 떠올리고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나지막이 대답하며 솔은 손을 들어 올려 제 얼굴을 덮은 클렌징 티슈를 거두어 냈다. 그러고는 무거운 눈꺼풀을 반쯤 들어 태오를 바라보았다. 은겸의 일정에 참여하게 된다면 앞으로 차 탈 일이 더 많아질 것이었다. 그때마다 이런 모습을 보여야 할 것이고, 최악의 상황이 발생할 수도 있는데, 리더인 태오는 알아야 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 이제야 들었다. 솔은 눈동자를 내리깔고 태오가 아닌 방구석 어딘가에 시선을 고정한 채 최대한 덤덤하게 말을 꺼냈다.

    “태오야… 나 사실 멀미하는 거 아니야.”

    “……그럼?”

    태오가 그의 손길처럼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솔은 특히 사고에 대해 타인에게 이야기하는 것에 거부감이 있었는데, 막상 내뱉고 나니 생각 외로 제 목소리가 덤덤해 놀랐다. 아니다. 어쩌면 잠에 취해서 그렇게 들리는 걸지도 몰랐다.

    “교통사고가 났었는데, 그 뒤로 차만 타면 그래.”

    최대한 별일 아닌 것처럼 툭 내뱉듯 말했다. 무대에 서는 것, 춤추는 것에 대한 어려움은 솔이 구태여 설명하지 않아도 미리 눈치챈 태오가 먼저 다가와 주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아니었다. 저 스스로 자신의 흠을 이야기하는 일이었다. 무대 공포증을 가진 멤버, 그거로도 벅찬데 수시로 타야 할 이동 수단도 제대로 못 타는 멤버? 데뷔만 바라고 있는 그에게서 날카로운 말이 돌아와도 할 말이 없었다. 태오가 제 말에 어떤 반응을 보일지 솔은 궁금하기도, 두렵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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