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최애를 뽑고 싶어 (84)화 (84/192)

#84

“실수 맞지 가람아? 김득용 뒤에 끌려가서 밟히고 온 거 아니야? 발자국이 너무 선명한데.”

“일부러 밟았는데.”

지호가 장난을 걸자 가람이 맹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웃음기 하나 없이 귀찮아서 마지못해 대답한 것처럼 툭 내뱉은 말이 정말 진심인 것 같았다. 하지만 이내 득용을 제외한 네 명이 눈짓을 주고받고는 웃음을 터뜨렸다. 그제야 득용이 형들의 짓궂은 장난에 입술을 대번 내밀었다.

“아, 가람 형! 지호 혀엉!”

득용이 볼멘소리 하자 둥글게 뭉쳐 있는 다섯 사람을 흘끔거리던 스태프들도 함께 웃음을 터뜨렸다. 작은 소란에 심각한 얼굴로 촬영분을 반복해서 돌려 보던 은겸의 시선이 그쪽을 향했다. 서로 부둥켜안고 웃음을 터뜨리는 그 모습이 퍽 사이가 좋아 보였다. 추운지 연신 발을 움직이고 입김을 내뿜으면서도 표정들은 하나같이 밝았다.

무엇이 저렇게 좋을까. 은겸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자신이었다면 지금 웃는 게 아니라 짜증을 내고 있을 것이다. 겨우 1초 동안 얼굴 한번 비춰 보자고 그 시간을 인내하고 연습했는데, 얼굴이 나올 기회는 없었다. 거기에 춥고 힘들기만 한 촬영 환경. 자신이 태오나 저기 웃고 있는 다른 녀석들이었다면 대놓고 내색하진 않겠지만 속에서 짜증이 치밀어 올랐을 것이다.

좋은 인상을 남겨 보려 스태프들의 뒷정리를 도우며 인사를 하겠지만 자신의 공을 알아 달라 힘든 기색은 내비칠 것이었다. 앓는 소리 한번은 해야 하는 법이었다. 묵묵히 제 할 일만 한다면 거기서 끝이다. 아무도 내 수고와 고통을 알아주지 않는다. 그런데 저 순진해 빠진 녀석들의 얼굴을 보자니 짜증이나 힘든 내색은커녕 내심 뿌듯해하는 것이 보였다.

그들의 반응에 짜증이 나는 건 오히려 은겸이었다. 무엇보다 그를 짜증 나게 만드는 것은 저보다 머리 하나는 큰, 덩치 산만 한 막내의 등을 토닥이며 웃는 솔의 얼굴이었다. 쓸데없이 웃는 얼굴이 이뻤다. 은겸이 모니터에 집중하지 못한다는 것을 눈치챈 감독은 그의 시선을 따라 솔을 비롯한 멤버들이 있는 방향을 쳐다보았다.

“애들이다. 풋풋하고 귀여울 때네.”

혼잣말처럼 감독이 중얼거리자 은겸은 시선을 여전히 솔에게 둔 채 맞장구를 치며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그러게요.”

“애들이 요즘 애들 같지 않게 착하고 수더분하더라.”

“그렇죠?”

감독의 말에 설렁설렁 대답하며 은겸은 핸드폰 카메라의 줌을 최대한으로 당겼다. 커다란 남정네들 사이에 파묻혀 있는 솔의 얼굴이 핸드폰 화면을 가득 채웠다. 활짝 웃는 솔의 모습을 핸드폰에 담은 은겸은 다시 방방 뛰고 있는 다섯 명 전체의 모습도 사진으로 남겼다. 언제고 도움이 될 때가 있을 것 같단 판단이었다. 자신에게나 솔에게나.

“사이도 좋아 보이네.”

감독의 말에 은겸은 그녀를 돌아보았다. 도둑이 제 발 저리다는 말이 달리 있는 것이 아니었다. 신인 때부터 오랜 시간 함께 작업도 많이 하고 사적으로도 시간을 함께하는 그녀기에 허투루 흘려들을 수가 없는 말이었다. 툭 내뱉은 감독의 그 말이 꼭 마치 저와 데이블락 멤버들을 겨냥해서 한 말처럼 느껴졌다. 은겸의 시선이 느껴졌는지 감독은 피식 웃음을 흘렸다.

“태은겸, 너도 저땐 그랬어.”

“제가요? 데이블락이 저랬다고요?”

감독의 말이 의외라는 듯, 은겸은 손가락으로 자신을 가리키며 되물었다. 그러자 감독은 고개를 끄덕였다. 전혀 아니었다. 은겸이 데이블락 멤버들과 처음 감독을 만났을 땐, 멤버들 모두 철저하게 비즈니스 관계였다. 저렇게 엉겨 붙어 웃을 정도로 돈독하지 않았었다. 물론 은겸은 그렇게 서먹한 티를 드러낼 정도로 허술한 인물은 아니었다.

“처음 촬영장 왔을 때 비슷했어. 하긴, 너는 좀 어른스러운 느낌이 있었지.”

감독이 처음 은겸을 만났을 때를 회상하는 사이. 은겸의 시선은 다시 멤버들에게 둘러싸여 웃음을 터뜨리고 있는 솔에게 고정되었다. 솔뿐만 아니라 나머지 네 명의 얼굴도 밝아 보였다. 감독의 말과 달리 은겸의 기억 속에 데이블락은 저렇지 않았다. 당시엔 나름의 이유가 있어서 다른 연습생들보다 지금의 멤버들과 더 가까이 지냈었다.

자신의 말이 먹히지 않는 태오 같은 인물보다는 그래도 제 뜻대로 움직여 주는 인물들이 낫다고 판단했다. 그리고 실제로도 그게 잘 먹혔고 지금 이렇게 성과를 낼 수 있었다. 물론 어디로 튈지 모르는 시한폭탄 같아서 지속적인 단속은 필요했다. 또 때로는 그 폭탄 같은 점이 은겸을 더 돋보이게 만들 때도 있었다.

데이블락에 대해 후회는 없었다. 매 순간 현명하게 판단했고 그 결과 지금의 태은겸이 있을 수 있었다. 이렇게 후배들에게 관대하게 기회를 줄 수 있는 위치의 태은겸 말이었다.

“처음 촬영할 때, 나는 네가 매니저인 줄 알았어.”

“이렇게 잘생긴 매니저가 어디 있어요.”

“그러잖아도 그때, 요즘 기획사들은 매니저도 다 얼굴 보고 뽑네 이랬잖아. 진짜야 호찬이한테 물어봐, 내가 그때 진짜 그랬어.”

감독의 말에 은겸은 허탈한 웃음을 흘리며 다시 솔을 바라보았다. 은겸의 뒤통수로 감독의 말이 박혔다.

“네가 추천한 애 말이야. 솔직히 외모야 말할 것도 없거든. 저런 애들이 작품이지. 근데 나는 아이돌로는 잘 모르겠다.”

확신이 없이 떨떠름한 그녀의 말에 은겸은 의문을 가득 담아 고개를 기울였다.

“솔이요? 왜요?”

“너무 숙맥이고 끼도 없어.”

“오늘은 처음이고 너무 긴장해서 그래요. 그리고 지금 분량이 이래서 그렇지, 연습할 때 보면 춤도 되게 잘 춰요. 끼, 재능, 외모 다 갖췄다니까요?”

감독의 냉정한 평가에 은겸은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면서 솔 대신 변명을 늘어놓았다. 안무를 소화할 때의 솔은 정말 날갯짓을 한다는 표현이 걸맞았다. 아직 개선해야 할 점이 분명히 있었지만, 그 가벼운 발놀림과 손짓을 보고 있으면 가슴이 간질거렸다. 물론 감독의 평도 이해는 갔다. 그가 오늘 촬영에서 보여 준 모습이 지나치게 소극적이고 수동적이었다.

“글쎄. 네가 보내 줬던 화보 사진은 정말 이상적이었어. 그런데 오늘 보니까 딱 거기까지야.”

은겸이 더 설명해 보라는 듯, 감독을 쳐다보자 감독은 오늘 짧지만, 솔과 함께 촬영하며 느낀 점을 늘어놓았다.

“일단 연기가 안 되잖아.”

“처음부터 잘하는 사람이 어딨어요. 다 연습해서 만드는 거지.”

“너 있잖아. 너는 처음부터 잘했어.”

“칭찬해 주셔서 감사하네요.”

감독이 입에 발린 소리를 했지만, 기분이 마냥 좋지만은 않았다. 평소라면 제 칭찬에 어깨가 으쓱했을 텐데. 오늘 듣고자 했던 말은 자신의 칭찬만이 아니었다. 물론 자신이 주인공이기도 했지만, 솔이 그녀의 관심을 끌기를 바랐다. 떠오르고 있는 감독, 이제는 이름을 들으면 업계에선 다 아는 감독의 관심. 그러려고 태오를 욱여넣으려 하는 회사의 의견을 쳐 내고 솔을 밀어 넣기로 판을 짠 것이기도 했다.

“싫은 소리 했다고 표정 봐라. 태은겸.”

“제가 뭐 어쨌다고요.”

“내가 너 욕했냐?”

“그러게요. 제 욕은 아닌데 어째 기분은 제가 욕 들어 먹은 기분이에요.”

감독의 말에 은겸은 제 어깨를 들어 올렸다가 축 늘어뜨렸다. 오늘 하루 자신의 변화가 은겸도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평소와 다른 생각과 반응. 저 자신이 낯설 정도였다. 거기에 지금처럼 표정을 숨기지 못하는 것도 낯설었다. 감독의 지적에 은겸은 언제 그랬냐는 듯, 황급히 굳은 표정을 풀고 사람 좋게 웃어 보였다.

“누가 보면 네가 키운 애들인 줄 알겠어. 너도 막 공로 인정받아서 사내 이사 이런 거 하는 거 아니야?”

어림도 없는 소리. 이 회사는 그럴 만한 배포 따윈 없었다. 그래도 은겸이 벌어 온 돈으로 일군 것이나 마찬가지이니 그를 완전히 배제하고 무시할 수도 없었다. 은겸은 감독의 말에 손을 휘저었다.

“아니에요. 그냥 정말 아끼는 친구라서 그래요.”

“너도 아낀다는 말, 하긴 하는구나?”

또다시 은겸을 뜨끔하게 만드는 비수 같은 질문이었다.

“그럼요. 저도 아끼는 게 있죠.”

그녀의 그 말이 새삼 자신이 그간 걸어온 길을 돌이켜 보게 만들어 은겸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혼잣말을 하는 것처럼 웅얼거렸다. 은겸의 표정을 한번 확인한 감독은 고개를 저었다.

“그래, 내가 뭘 알겠냐. 회사에서 알아서 하겠지. 또 저렇게 웃고 노는 거 보니까 괜찮아 보이기도 하고. 얼굴만 뜯어먹어도 뽕은 뽑겠다.”

“뜯어먹고, 뽕이라뇨. 그렇게 말하니까 되게 몹쓸 짓을 하는 거 같네요.”

“맞잖냐. 아무튼 개인적인 평으론 얼굴 하난 죽인다. 그런데 파고 싶냐고 물으면, 그 옆에 갈색 머리를 고를래.”

감독의 턱짓에 은겸은 솔에게서 시선을 옮겨 지호를 바라보았다. 자신과 지나치리만치 닮아 있는 인물이었다. 본래 인간은 자신과 닮은 모습을 싫어한다고 포지션이며 캐릭터며 외모며 비슷한 점이 많았던 은겸은 지호가 지금도 싫었다. 하지만 인정해야 할 것은 인정해야 했다. 지호와 자신은 꽤 닮아 있었다.

자신과 닮은 지호가 저 무리에서 솔과 어울려 활짝 웃는 모습을 보자니 은겸의 기분이 괜히 어수선했다. 자신이 지호의 자리에 있었다면. 저렇게 솔과 함께 어울려 웃고 장난쳤을까?

은겸은 솔에게서 시선을 돌렸다. 저 꼴을 더 지켜보면 괜히 오늘 하루가 울적할 것 같았다. 잠시 눈을 지긋이 감았다 뜬 은겸은 다시 감독이 빠르게 돌리는 화면에 집중했다. 자신이 나오는 장면의 작은 부분도 빼놓지 않고 관찰하던 은겸은 제 옆에 바짝 붙어 앉은 감독을 흘긋 보고 장난스레 물었다.

“감독님, 어디 가면 취향 소나무라는 소리 듣죠?”

“응. 나한테서 송진 냄새 난대.”

은겸과 지호는 퍽 닮아 있었다. 여러모로 말이었다. 은겸이 감독과 모니터를 응시하는 사이 영호가 멤버들을 데리러 왔다. 댄서들이 한바탕 휩쓸고 간 대기실에서 옷만 갈아입은 멤버들은 스태프를 비롯한 감독과 은겸에게 거듭 인사를 하고 숙소로 향하는 밴에 올랐다.

히터가 빵빵하게 틀어진 차에 오르니 몸이 노곤하게 녹아 모두 의자에 늘어졌다. 가죽 시트에 몸을 기댄 멤버들이 따뜻한 온기에 안락한 휴식을 가질 때, 오직 네 바퀴 불신자 특성이 발동된 솔만이 안락할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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