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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애를 뽑고 싶어 (83)화 (83/192)

#83

솔에게도 눈치가 있기는 했다. 그간 은겸과 부딪힐 때면 늘 생글생글 웃던 지호의 표정에 작게나마 그늘이 생기곤 했다. 그런 변화뿐만 아니라 은겸의 말 한마디에 묘한 정적이 찾아오거나 별것 아닌 평범한 일에 다들 잔뜩 움츠린 것처럼 예민하게 반응할 때가 있었다. 바로 지금처럼 말이었다.

무언가 자신이 모르는 일이 있었던 게 분명하지만,  대놓고 무슨 일이 있었냐고 묻기엔 또 난감했다. 그도 그럴 것이 언제 그랬냐는 듯이 은겸도 지호도 휙휙 얼굴을 바꾸고 아주 밝게 웃으며 예의를 차리고 평소처럼 인사를 주고받으니 도리어 솔은 자신이 이상하게 바라보았나? 하며 흐지부지 털어 버리게 되었다. 늘 둥근 호선을 그리던 지호의 눈썹이 사납게 뻗는 것을 보고 솔이 두 손을 내저으며 황급히 말을 이었다.

“아니? 그런 거 아니야. 그런 건 아니고 그냥 내가 마음에 걸려서. 도움을 많이 받았는데 돌려줄 길이 없는 것 같아서 그래.”

솔이 손사래를 치며 해명하자 언제 그랬냐는 듯이 지호의 눈가가 둥근 호선을 그렸다. 그러자 지호는 생글생글 아주 활짝 웃으며 지극히 상식적이고 평범한 대답을 돌려주었다.

“솔아, 혹시라도 은겸 선배가 뭘 부탁하거나 그러면 꼭 얘기해 줘. 너뿐만 아니라 우리도 도움을 받았잖아. 같이 보답해야지.”

듣고 있자면 무척 타당하고 평범한 이야기였지만 어쩐지 조금 찜찜했다. 가끔 지호에게 이런 기분을 느낄 때가 있었다. 딱히 문제가 될 내용은 아니기에 솔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솔은 절로 고개가 끄덕여지는 지호의 말에 내심 역시 맏형이구나 하며 속으로 소소한 감탄을 뱉었다.

제 한 몸 건사하기 힘들어 모든 것에 자신을 기준으로 두고 생각하는 솔과 달리 지호는 태오처럼 주변을 챙기는 일에 익숙했다. 태오와 다른 점이 있다면 먼저 나서는 일이 드물다는 점뿐이지 지호도 리더 못지않게 멤버들을 살뜰히 챙겼다. 생글 웃는 지호를 보며 솔은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지호는 ‘꼭’이라며 솔에게 거듭 당부했다.

그렇게 짧은 대화를 주고받은 두 사람은 세트장에서 이는 소란에 서로에게서 시선을 돌렸다. 한참 흘러나오던 은겸의 솔로 곡이 멈추고 세트장에 설치된 가구들이 이리저리 옮겨졌다. 솔은 이런 것에 대해 잘 모르지만 대충 감독과 스태프들이 주고받는 말을 듣고 있자니 설치된 조형들이 화면에 썩 이쁘게 잡히지 않는 듯했다. 가구의 위치가 바뀌고 사람들의 위치도 바뀌었다. 얼굴에 검은 천을 뒤집어쓴 득용이 팔을 툭툭 털더니 ‘하’ 하며 숨을 내뱉는 모습이 보였다. 그러자 하얀 입김이 얼굴에 두른 천을 뚫고 나와 허공으로 흩어졌다.

그것이 신기한지 막내는 제 옆에 서 있는 가람과 태오를 툭툭 치더니 보란 듯이 다시 입김을 뿜어냈다. 참 별것도 아닌 일인데 멀찍이 보이는 득용의 몸짓이 즐거워 보였다. 득용이 몇 번 더 입김을 길게 뿜어내자 그 모습을 지켜보던 가람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서로 대화가 오가는 것 같더니 가만히 서 있던 태오에게서도 입김이 났다. 보이지 않지만, 그가 방금 웃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런 장난도 잠시, 다시금 음악이 시작되고 촬영이 재개되었다.

지호와 서서 멤버들과 은겸의 촬영을 지켜보는 것은 그리 지루하진 않았다. 촬영이 중단되었다가 다시 반복하기를 여러 번. 당사자들은 그 상황이 힘겹겠지만 대열을 맞춰서 안무를 소화하는 모습을 반복하여 보다 보니 솔은 그 안에서 나름 개선점들을 찾을 수 있었다. 다소 아쉬운 부분, 혹은 어떤 식으로 동작을 처리했을 때 좀 더 매끄럽게 보일지 같은 것들 말이었다. 그리고 지치고 짜증이 날 법도 한데 재촬영이 거듭될 때마다 더욱 손끝에 힘이 들어가는 멤버들을 보고 있자니 뿌듯함이 들었다.

왜 자신이 뿌듯한지 솔은 설명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작은 역이라도 열심히 하는 멤버들이 멋져 보였다. 그리고 그 모습에서 그들이 가진 꿈의 무게가 얼마나 무거운지도 솔에게 전해졌다. 무엇 하나 허투루 하고 싶지 않은 그런 마음들이 느껴졌다. 멤버들의 얼굴을 싸맨 모습을 보고 실망했던 자신이 무색했다. 정작 본인들은 최선을 다하고 있는데 말이었다.

솔이 잠시 스태프의 부름에 가발을 벗으러 대기실에 다녀온 사이. 세트장을 옮기기도 여러 번, 어느새 촬영이 막바지 돌입했다. 솔은 영호가 잔뜩 사 들고 온 핫 팩을 뜯어 지호와 함께 힘껏 흔들었다.

세트장 안이 추워도 너무 추웠다. 두꺼운 패딩을 입고 있는 자신도 썰렁한데 촬영하느라 외투도 입지 못하고 계속 서 있었을 태오와 가람, 득용이 걱정되었다. 손에 쥐고 흔든 핫 팩에서 열이 오르는 것이 느껴졌다. 솔과 지호는 멤버들의 외투에 핫 팩을 넣어 촬영이 끝나고 추위에 떨 친구들을 맞이할 준비를 했다.

잠시 뒤 감독의 OK 사인과 은겸의 ‘수고하셨습니다’ 하는 인사가 떨어지자 모두의 입에서 탄성이 내뱉어졌다. 다들 내색하지 않았지만 힘든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인 듯했다. 촬영이 끝나자 감독에게로 달려가는 은겸과 달리 가람을 비롯한 멤버들은 솔과 지호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얼굴에 뒤집어쓴 검은 천을 벗으며 가람과 득용이 웃으며 솔에게로 달려왔다. 그 뒤로 태오의 모습도 보였다. 제일 먼저 뛰어온 득용에게 솔이 핫 팩을 건네자 득용은 그와 지호를 와락 끌어안았다.

“으아아. 형 너무 추워요.”

춥다는 말이 거짓은 아닌지. 끌어안은 득용의 몸이 차디찼다.

“어이구. 추웠어요.”

“너무 추워.”

지호가 고생한 득용의 등을 토닥여 주며 맞장구를 쳐 주자 득용은 몰려오는 추위에 몸을 떨며 발을 굴렀다.

“다들 붙어, 붙어.”

지호의 말에 감격의 재회를 하는 세 사람을 멀뚱히 보고 있던 가람과 태오가 쭈뼛쭈뼛 솔과 지호에게로 다가왔다. 큰 키의 두 사람이 다가오자 지호가 팔을 쭉 뻗어 끌어안았다. 그러자 지호와 가람, 태오 사이에 끼인 득용이 ‘아악’ 하며 장난스러운 소리를 내었다. 그 소리에 사이에 끼어 있던 솔도 웃으며 지호처럼 팔을 쭉 뻗어 멤버들을 힘껏 끌어안아 주었다. 팔을 최대한 뻗어 보았지만, 워낙 커다란 덩치들이라 모두를 다 끌어안기엔 버거웠다. 간신히 손끝이 태오와 가람의 등에까지 닿아 솔은 손목만 까딱까딱 차가운 등을 두들겨 주었다.

“다들 너무 고생했어.”

“솔은? 우리 준비하느라 솔 촬영하는 거 못 봤어.”

가람은 아쉬움이 가득 담긴 목소리로 솔에게 물었다. 득용에게 가려져 보이지 않는 솔을 보려 가람이 목을 길게 빼고 애써 그의 얼굴을 찾았다. 그건 태오도 마찬가지였다. 온종일 정신이 없었기는 매한가지라 지호에게 부탁해 놓고 조금도 신경 쓰지 못해 걱정되었다. 자기 얼굴을 확인하려 하는 두 사람의 모습에 솔은 배시시 웃으며 안심이 될 만한 말을 건넸다.

“지호 형이랑 은겸 형이 도와줘서 나도 잘 끝냈어.”

“그래. 솔이도 너희도 다들 잘했어.”

지호가 솔의 말을 거들어 주자 솔도 가만히 듣고만 있을 수가 없었다.

“다들 멋있었어.”

“와. 솔이 형, 나 멋있었어요?”

솔의 칭찬에 득용이 덩치에 맞지 않게, 천진난만하게 굴었다. 가운데 끼인 득용이 방방 뛰자 솔까지 덩달아 튀어 올랐다. 솔까지 방방 뛰자 멤버들 모두가 제자리에서 같이 뛰게 되었다. 솔은 아이처럼 웃음이 나왔다.

“멋있었어. 누가 누구인지 다 보였어. 다들 엄청 열심히 하고 잘하더라.”

“솔도. 솔 촬영하는 건 못 봤지만 멋있었을 거야.”

“당연하죠. 솔이 형, 완전 화보 찍었을걸?”

“솔이가 카메라 씹어 먹었잖아.”

지호의 말에 멋쩍어져 솔은 고개를 휘휘 저었다. 고개를 크게 젓자 제일 뒤편에 있는 태오와 눈이 마주쳤다. 별다른 표정은 없었지만, 자신을 응시하는 까만 두 눈엔 확신과 믿음이 서려 있었다.

“와. 궁금해요. 이거 우린 언제 볼 수 있을까요.”

득용의 물음에 가만히 모두를 끌어안고 있던 태오가 대답했다.

“우린 아마도 공개되어야 볼 수 있지 않을까?”

“벌써 기대돼요. 아, 내일 당장 공개됐으면 좋겠다.”

누군지 분간이 되지 않을 모양으로 아주 짧게 스쳐 지나가듯 나올 게 분명한데 득용은 그런 것 따위 상관없이 정말 기대가 된다는 듯이 설렘을 가득 담아 말했다.

커다란 다섯 남자가 똘똘 뭉쳐 서로를 둥글게 끌어안고 있는 모습이 퍽 이상했지만, 멤버들 모두 신경 쓰지 않았다. 옹기종기 붙어 있자니 조금 추위가 가시는 것도 같았다. 본인들의 감상과 상관없이 그 모습이 퍽 우스운지 주변을 지나다니던 스태프들이 웃음소리를 내며 흘끔거렸다.

“얘들아. 추운데 뭐 하고 있어. 감기 걸릴라 어서 옷부터 입어.”

촬영 내내 관계자들에게 핫 팩과 따뜻한 음료를 돌리고 감독 근처에서 있던 영호가 멤버들에게로 다가왔다. 아직 얇은 옷차림으로 서로 한데 엉켜 있는 멤버들을 발견한 그는 지호와 솔이 미리 핫 팩으로 덥혀 두었던 외투를 멤버들에게 건넸다.

“대기실 비는 대로 바로 옷 갈아입고 돌아가자. 힘들더라도 조금만 참자, 얘들아.”

“네.”

그가 건네는 외투를 주섬주섬 걸치며 동시에 대답했다. 가장 막내나 마찬가지인 멤버들이 먼저 대기실을 차지해 정리를 시작하기엔 눈치가 보였다. 구태여 설명하지 않아도 영호의 말에 담긴 의미를 이해한 태오와 지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높낮이가 다른 목소리가 합창하듯 대답하자 주변의 시선이 다섯 사람에게로 몰렸다. 이런 사소한 것에서도 합이 맞는 모습에 영호가 한 명 한 명 어깨를 두들겨 주었다.

“어유. 진짜 다들 고생했다.”

“영호 형도 고생하셨어요.”

영호의 말에 태오도 그에게 인사를 건넸다. 솔은 별도 촬영이라 보지 못했지만, 영호도 영호 나름 멤버들을 스태프들에게 각인시키고 좋은 인상을 남기려 분주하게 촬영장을 돌아다녔다.

“몸 좀 녹이고 따뜻한 데서 쉬고 있어. 뭐 마실 거라도 줄까?”

“아니요. 괜찮아요.”

“그래. 잠깐 쉬고 있어. 금방 올게.”

정리가 한창인 스태프 무리가 있는 방향으로 영호가 다시금 달려갔다. 영호가 사라지자 득용이 촬영하고 있었던 일들을 미주알고주알 지호와 솔에게 일러바쳤다.

“아니, 아까 촬영하다가 가람 형이 제 바지 밟은 거예요. 여기 봐요. 발자국.”

“진짜.”

득용이 다리를 들어 올리며 바짓단 끄트머리를 가리켰다. 까만 바짓단에 먼지로 뽀얀 신발 자국이 정말 너무 선명하게 찍혀 있어 솔은 저도 모르게 감탄사를 내뱉었다. 너무 또렷하고 선명한 발자국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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