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최애를 뽑고 싶어 (82)화 (82/192)
  • #82

    “지호 형, 다른 애들은?”

    솔의 물음에 지호가 손을 들어 반대 방향을 가리켜 보였다. 그 자리엔 검은색 일색의 옷을 입고 얼굴을 모두 가린 댄서들이 서 있었다. 얇은 검은 천으로 얼굴을 가렸지만, 앞이 보이기는 하는지 움직이는 데엔 큰 지장이 없어 보였다.

    솔은 잠시 할 말을 잃고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얼굴이 보이지 않아도 눈에 익은 체형과 움직임이 곳곳에 남아 있었다.

    “……저렇게 촬영하는 거야?”

    그간 함께 연습했던 댄서들과 멤버들이었다. 솔이야 동작에 담긴 특징들을 알아차리니 누가 누구인지 구분이 가능했지만 영상을 보게 될 사람들은 조금도 알아보지 못할 것이었다.

    “그렇지 뭐. 그래도 이런 경험이라도 해 보는 걸로 감지덕지지.”

    “그래도……”

    “뭘 그래도야. 그런 표정 하지 마. 이런 식으로라도 참여해 보는 게 어딘데, 이런 기회도 못 가지는 연습생들 널리고 널렸어.”

    머리로는 이게 은겸의 뮤직비디오라는 것을 알고 이해하고 있었지만, 막상 검정 일색으로 배경과 다름없는 모습이 된 멤버들을 보니 아쉬운 마음이 들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제야 돌이켜 보니 그간 관심도 없었기도 했지만, 자신도 다른 가수들의 뮤직비디오나 무대 영상을 볼 때 백댄서에 관심을 두었던 적이 한 번도 없었다는 걸 떠올렸다.

    어젯밤부터 설레서 방방 뛰던 득용의 모습과 조금도 설렁설렁 하는 부분 없이 모든 동작에 열심이던 태오, 계속되는 지적에, 연습에 연습을 더하던 가람의 모습이 자꾸만 생각이 났다. 그리고 바로 옆에서 그마저도 하지 못하고 자신과 함께 멤버들을 지켜보는 지호도. 검은 천을 뒤집어쓰고도 유난히 도드라지는 체형과 움직임에 솔의 시선이 태오에게 머물렀다.

    “……나 말고 태오가 촬영했으면 더 좋지 않았을까?”

    솔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다른 멤버들을 보고 있자니 자신에게 주어졌던 기회가 너무도 과분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눈앞에 저렇게 노력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 기회를 자신이 가져가는 것이 맞는지 의문이 들었다. 솔의 중얼거림을 들은 지호가 그의 옆구리를 팔꿈치로 살짝 찔렀다.

    “솔아, 아까는 내가 해야 한다며! 그리고 가람이랑 득용이 서운해한다.”

    쿡, 갑자기 옆구리를 찔린 솔이 지호를 돌아보았다. 지호는 보란 듯이 입술을 쭉 내밀고 삐쭉거리며 솔을 향해 눈을 흘겼다. 맏형보다는 막내가 좀 더 어울릴 것 같은 그 모습에 솔은 민망해하며 늦은 변명을 했다.

    “그냥. 나 말고 다른 사람이 했으면 더 좋았을 거 같아서. 다들 간절하잖아.”

    “어허, 성솔 씨 오늘부터 자낮 금지. 그리고 꼭 너는 간절하지 않은 것처럼 말한다.”

    “나야…… 뭐…….”

    지호의 말에 솔은 말꼬리를 흐렸다. 간절하지 않다고 말할 수가 없었다. 사실 목숨이 달려 있었으니 어쩌면 태오나 다른 멤버들보다도 더 간절했을지도 몰랐다. 필사적으로 보였을 것이다. 그리고 실제로도 필사적이었고. 다만 솔은 오늘을 돌이켜 보았다.

    오늘 이 촬영에는 그 어떤 퀘스트도 실패에 따른 죽음도 없었다. 하지만 그간 멤버들과 온 힘을 다해 연습했고 오늘 촬영도 잘하고 싶은 욕심이 가득했다. 물론 마음처럼 되진 않았지만. 자신의 마음을 자신도 결론지을 수가 없었다. 단순히 태오나 가람, 득용과 지호, 거기에 은겸. 자신을 도와주는 사람들을 실망하게 하고 싶지 않아서 열심히 했다기엔 어딘가 아쉬움이 남았다. 그렇다고 이제 와 아이돌이 너무 하고 싶어 그런 것도 아니었다.

    멤버들과 은겸, 그리고 다른 댄서들과 안무 연습을 하는 내내 태오의 말처럼 제자리를 찾은 것 같았다. 아직 부족함이 많았고 트라우마를 완벽하게 극복해 낸 것도 아니지만 트레이너도 태오도 다른 멤버들도 아주 느리지만 점점 나아지는 자신을 칭찬해 주고 도와주고 붙잡아 주었다.

    물론 어떤 종류의 춤이든 다시 춤을 출 수 있다는 즐거움도 없다고 할 수는 없었지만, 이 사람들과 함께 노력하는 그 과정이 좋았다. 이렇게만 자신을 지켜봐 준다면 얼마든지 지금과 다른 모습으로 하루하루 나아갈 수 있을 것 같단 생각이 들었다. 희망과 의지가 생긴 것이었다.

    조금 어두워지는 솔의 표정에 지호가 팔짱을 끼고 새침하게 콧방귀를 꼈다. 모르는 사람이 보았다면 재수 없다 느낄 만한 표정을 한 지호는 다소 과장된 몸짓과 목소리로 솔이 언젠가 했던 말을 되돌려 주었다.

    “전에 뭐라고 했더라. ‘나는 아이돌 별로!’ 이랬던가?”

    “내가 언제 그렇게 말했어.”

    “대충 비슷했어.”

    “지호 형.”

    그날의 그 상황이 떠올라 멋쩍어진 솔이 얼굴을 살짝 붉혔다. 그러고는 민망함에 지호가 자신에게 했던 것처럼 괜히 그의 이름을 늘여 부르며 팔꿈치로 팔을 살짝 툭 건드렸다. 솔의 반응에 지호가 웃음을 터뜨렸다가 제 웃음소리에 놀라 주변을 둘러보았다. 다행히 아직 촬영 준비가 한창이었다. 은겸을 포함하여 멤버들과 댄서 모두 스태프와 함께 촬영 위치를 잡는 데에 여념이 없었다.

    스태프가 배치해 준 자리에 서서 몸을 푸는 멤버들을 보며 지호가 말을 툭 내뱉었다. 퉁명스럽고 삐죽거리며 말했지만, 그 목소리는 한결같이 부드러웠다.

    “아이돌 할 생각 없는 애가 그렇게 밤낮 몸 혹사시켜 가며 연습하냐.”

    지호의 말에 솔은 대답 대신 시선을 세트장에 고정한 채 어물쩍 웃음만 흘렸다. 지호는 어색한 웃음을 머금은 솔의 얼굴을 흘긋 들여다보곤 그도 멤버들의 모습을 눈에 담았다. 아무래도 천으로 얼굴을 가려 버리니 시야가 썩 좋지 않은 듯 우왕좌왕하는 득용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운도, 인맥도 실력이야. 다 네가 열심히 해서 생긴 기회니까 네 것이고. 알았지?”

    “응.”

    “그리고 계속 그런 말 하면 태오랑 가람이는 오히려 화낼 거야.”

    “응.”

    대답은 넙죽넙죽 잘도 했다. 지호는 피식 웃으며 솔을 곁눈질했다. 제대로 눈도 못 마주치고 표정에서부터 어색함이 절로 느껴지던 솔이었다. 어쩌다 스치기라도 하면 움츠리는 게 티가 날 정도였고 대답보다는 고개를 끄덕이거나 말꼬리를 흐리며 어물쩍 넘어가는 일이 다반사였던 성솔. 애쓰는 모습이 저렇게 눈에 밟히도록 티가 나는데 어떻게 모른 척하고 미워할 수가 있을까. 또 솔의 생각이 저 바닥 밑으로 가라앉기 전에 지호가 장난스럽게 너스레를 떨었다.

    “얼굴 펴. 우리 뮤직비디오도 아닌걸. 우리 거에선 분량 안 뺏길 거야. 내가 다 독차지해야지.”

    “지호 형이 다 독차지하면, 형. 솔로로 오해받아.”

    “그러면 10초씩만 양보해 줄게.”

    “형…… 은근 쪼잔하네.”

    “쪼잔? 알았어. 솔이 너는 30초.”

    지호가 선심 쓴다는 듯이 솔을 향해 손가락 세 개를 펼쳐 흔들어 보였다. 그 모습에 솔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허술하게 웃음 지었다. 요즘 들어 부쩍 잘 웃어 보기 좋았다. 가뜩이나 훤한 얼굴인데 공들여 꾸민 걸로도 모자라 방긋방긋 잘 웃으니 보기 안 좋을 수가 없었다. 본격적으로 촬영이 시작되는지 분위기가 확 달라지고 은겸의 솔로 곡이 세트장 안에 울려 퍼졌다. 자신의 노래처럼 부를 수 있을 정도로 수없이 들은 노래였다.

    아무래도 여러 명이 움직이는 장면이어서일까, 촬영이 영 순탄하지 않았다. 특히나 주인공인 은겸이 계속해서 모니터링을 반복하며 감독과 이야기를 주고받고 다시 한번만 촬영하겠다고 사과이자 부탁을 했다. 멀찍이 지호와 나란히 서서 그 모습을 바라보던 솔은 새삼 은겸이 제 일에 확신을 가지고 제 몫을 하는 오롯한 어른처럼 보였다.

    저 나이의 자신은 저런 모습을 갖추지 못해서일까? 사실 그와 닮은 주환도 저런 모습을 보여 준 적은 없었다. 그래서일까, 진지한 그의 모습이 프로페셔널하고 멋져 보였다. 물론 멤버들도 마찬가지였다. 태오의 동작엔 어디 하나 흠잡을 곳이 없었고 지독하리만치 연습을 반복한 가람도 재촬영을 거듭할 때마다 조금씩 나아가고 있었다.

    방방 들떠 있던 득용도 퍽 진지한 모습이었다. 다만 한편으론 추운 세트장에서 마찬가지로 얇은 옷 한 벌만 입고 서 있는 멤버들이 걱정되기도 했다. 은겸과 모두의 모습을 관찰하기 바쁜 솔의 귓가에 나지막한 지호의 부름이 들려왔다.

    “솔아.”

    촬영하는 모습에 집중하기 여념 없었던 솔이 고개를 기울여 지호를 바라보았다. 지호는 잠시 머뭇거리더니 이내 늘 그렇듯 평소처럼 눈가를 활짝 휘며 솔에게 질문을 던졌다.

    “은겸 선배랑 아까 무슨 얘기 했어?”

    “그냥…… 잘했다고 칭찬해 주고 뮤비 촬영하는 거 부담스럽지 않냐고.”

    지호의 물음에 솔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다시 생각해도 은겸이 도와주지 않았다면 그 짧은 장면을 아직도 촬영하고 있거나 그도 아니면 세트장 위에서 끌어 내려졌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자신 때문에 멤버 모두가 미운털이 박혔을지도. 솔의 대답에 지호의 표정이 영 이상하다는 듯 찌그러졌다.

    “태은겸이?”

    “응.”

    떨떠름하기 짝이 없는 표정으로 지호가 재차 확인하듯 묻자 솔은 고개를 크게 끄덕이며 대답했다. 지호의 표정과 반응이 영 이상해 솔은 그의 눈치를 살피며 물었다.

    “왜 그래? 지호 형.”

    “아니야. 연습할 때도 그렇고 너한테 여러모로 신경 많이 써 주는 거 같아서.”

    솔이 지호의 눈치를 살피자 지호가 떨떠름한 표정을 풀고 눈썹을 들썩여 보였다. 지호의 말대로 연습 내내 은겸은 솔에게 무척이나 의젓하고 친절하게 대해 주었다. 성에 차지 않는 동작은 따로 조용히 불러 알려 주기도 하고 솔의 어려움을 알고 있어서인지 솔이 실수해도 그에게 큰소리 한번을 내지 않았다. 솔은 다정하기 짝이 없었던 은겸의 모습을 떠올리며 지호의 말에 동의했다. 그에게 너무 많은 도움을 받는 것 같아 마음이 무거웠다.

    “응, 그래서…… 너무 도움받기만 한 것 같아서 좀 그래…….”

    은겸에게 보답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아무리 친구고 후배라지만 너무 일방적으로 받기만 했다는 생각에 미안한 기분이 들었다. 나중에라도 보답할 수 있다면 좋으련만 아무래도 그런 날이 올까 싶었다. 솔의 표정이 무거워지자 지호가 솔의 팔을 붙잡고 대번 날카롭게 물었다.

    “왜? 너한테 뭐 해 달래?”

    지호의 표정뿐만 아니라 그 어조에서도 뾰족하게 날이 선 것이 솔에게 전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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