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
“춤출 때와 별로 다를 거 없어. 솔아. 라이벌이 애매하면 미운 사람 없어? 너무 미운 사람. 나랑 카메라가 그 미운 사람이라 생각해 봐.”
은겸의 말에 솔은 잠시 고민하다 고개를 끄덕였다. 너무 미운 사람. 성인군자도 아닌데, 없을 리가 있을까. 솔은 문득 태오에게 가장 미운 사람이 누구냐 물어보고 싶어졌다. 사고를 낸 가해자라고 할까?
솔의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가는 얼굴이 많았다. 어린 시절, 무용 학원에서 유난히도 자신을 괴롭혔던 사람. 자신을 혐오하고 비웃던 대학 동기, 심지어는 주환과 결혼하던 그 여자. 잠깐 다니다 옮긴 정신과 의사의 얼굴까지. 하지만 모두 부질없었다. 솔에게 있어 가장 미운 사람은 바로 타인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었다. 모든 걸 망친 건 바로 자기 자신이었다.
솔은 멀어지는 은겸을 보면서, 매일 아침 화장실에서 노려보며 시작하는 그 익숙한 얼굴을 떠올렸다. 칙칙한 검은 머리카락에 음울하고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사람인 것 같은 그 얼굴. 벗어나고 싶으면서도 벗어날 수 없고 벗어나려고도 하지 않는 무감각한 자기 모습.
순간 솔의 얼굴이 한없이 가라앉아 얼어붙었다. 저 먼 극지의 얼어붙은 바다처럼, 그 깊이를 가늠하기 어려운 바다처럼 차갑고 고요히 어두워졌다. 딱히 화를 내는 표정도 그렇다고 노골적인 경멸을 나타내는 표정도 아니었다. 단순한 무표정에 불과했지만 가라앉은 두 눈은 싸늘하기 그지없었다.
온몸에서 색이 사라진 듯 시리도록 새하얀 솔은 의자에 늘어지듯 거만하게 앉아 다리를 꼰 채 카메라를 응시했다. 크레인에 매달린 커다란 카메라가 가까이 다가올수록 그 까만 렌즈 안에 솔 자신의 얼굴이 비쳤다. 솔은 그 렌즈에 비친 자신을 노려보았다.
매일 아침, 세안을 하기 전에 버릇처럼 하는 그 행동이었다. 감독의 OK 사인이 떨어졌지만, 솔은 요지부동이었다. 은겸이 만져 준 자세 그대로 가만히 앉아 있자 촬영이 연달아 이어졌다. 대기하고 있던 다른 엑스트라들이 세트장으로 밀려들었다. 다들 하나같이 솔처럼 새하얀 의상을 입은 엑스트라들이 빈자리를 채웠지만 당연하게도 솔이 가장 도드라졌다.
솔의 지척에선 엑스트라들이 차분하게 가라앉은 솔의 얼굴을 연신 흘끔거렸다. 뒤를 이어 다른 사람들과 달리 화려하게 치장한 은겸이 다소 껄렁거리는 걸음으로 세트장을 가로지르며 걸어 들어왔다.
거기까지였다. 이게 솔의 분량의 전부였다. 감독의 호쾌한 목소리에 엑스트라들이 웃으며 자리를 빠져나가자 솔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니, 일어나려 했다.
걷는 법을 까먹은 사람처럼, 갓 태어난 사슴처럼 은겸이 꼬아 둔 두 다리가 풀리지 않았다. 솔이 쉽사리 일어나지 못하고 자리에 앉아 있자 이상함을 느낀 지호가 그에게로 걸음을 옮겼다. 세트장 단상에 다다랐을 무렵, 솔의 앞을 은겸이 가로막았다. 은겸은 솔의 앞에 다리를 굽히고 앉아 그와 눈을 맞췄다.
“다리가 안 움직여? 엄청 긴장했나 보다.”
솔이 홀로 일어서 보려 몸을 들썩여 보였지만 돌이 되어 버린 것처럼 옴짝달싹도 할 수가 없었다. 온 힘을 다해 보아도 상체를 굽히고 엉덩이를 살짝 들썩이는 게 고작이었다. 그러자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은겸이 웃으며 솔의 무릎을 조심스레 주물러 주었다. 고장 난 인형처럼 그의 도움을 받는 솔을 보며 은겸이 살짝 미소 지었다.
마냥 다정한 그 미소에 오히려 솔은 아무것도 제대로 한 게 없는 주제에 손만 많이 가는 골칫덩이가 된 기분이 되었다. 솔의 얼굴이 시무룩해지자 은겸이 작게 ‘나도 그런 적 있어.’ 하고 속삭였다. 그의 말에 담긴 배려에 솔은 살짝 웃음 지었다. 은겸은 솔이 다리를 움직이는 것을 도와주며 말을 이어 나갔다.
“사실 도와주고 싶어서 이런 일을 벌이긴 했는데, 아까 촬영 들어가니까 그제야 오히려 내가 너를 괴롭힌 게 아닌가 싶은 거야.”
“괴롭혀요? 절?”
“아직 이쪽이 익숙하지도 않은 너한테 너무 부담을 준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이제야 들더라. 그리고 네가 나한테 도와 달라한 것도 아니고….”
생각지 못한 말에 솔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은겸의 안무 팀과 함께 연습하는 내내, 매니저인 영호는 입이 닳도록 이게 얼마나 큰 기회이고 감사한 일인지 떠들었다. 수도 없이 선배인 은겸에게 깍듯이 인사해야 한다며 신신당부했었는데, 오히려 감사 인사를 받아야 하는 은겸이 내뱉은 말에 솔은 어리둥절했다.
“아무도 원치 않는 도움은 때로는 폭력이 되기도 하니까.”
“아니에요. 고마워요. 매니저 형이 정말 큰 기회라고 했어요. 그리고 같이 연습하면서 많이 배우기도 했고요.”
혹 은겸이 오해할까 싶어 솔은 두 손을 휘저으며 황급히 감사 인사를 전했다. 허둥지둥하는 솔의 모습에 은겸은 느닷없는 질문을 던졌다.
“즐거웠어?”
“네?”
“연습하는 거랑 촬영하는 거.”
은겸의 질문에 솔은 지난 기간을 떠올려 보았다. 연습이 끝나고 돌아오면 우리 음악 방송도 같이 나가는 거냐며 방방 뛰던 득용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런 득용의 모습에 호들갑 떨지 말라고 했었지만 다들 이렇게라도 경험해 볼 수 있음에 즐거워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자신도 함께 연습하는 내내, 옛 생각이 나 나쁘지 않은 기분이었다.
주환과 의찬 모두와 함께 연습하던 시절이 떠오르기도 했고 솔의 사정을 대충 알고 있는 은겸이 이것저것 많은 배려를 해 주어 한결 편안하기도 했다. 열심히 하던 멤버들의 모습을 하나씩 떠올려 보던 솔은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 촬영은 사실 아직 좀 그래요. 근데 형이랑 멤버들이랑 같이 연습하는 건 즐거웠어요.”
솔이 웃으며 대답하자 은겸은 그제야 이를 드러내며 활짝 웃음 지었다.
“이제야 형이라 부르네. 친구 하기로 해 놓고 사람들 있을 땐 꼬박꼬박 선배님, 선배님. 서운해질 뻔했어.”
“매니저 형이 버릇없어 보인다고 깍듯이 대하라고 했어요.”
“알아. 모든 걸 다 조심해야 하지. 말 한마디, 숨 쉬는 것도 눈치 봐 가며 쉬어야 하잖아. 나 그렇게 엄한 선배 아닌데. 아무튼 그렇게 말해 주니까 다행이다. 천천히 일어나 봐.”
어느새 솔의 두 다리가 가지런히 땅을 딛고 있었다. 그제야 긴장이 풀렸는지 발바닥이 저릿저릿했다. 은겸은 솔에게 손을 내밀었다. 제 얼굴 앞에 내민 큼직한 손을 솔은 이전과 달리 덥석 잡고 몸을 일으켰다. 맞잡은 은겸의 손이 너무 뜨거워 솔은 그제야 자신의 손과 몸이 얼음장 같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입김이 솔솔 나오는 세트장에서 얇디얇은 재킷 하나만 걸치고 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다리 완전 풀렸네.”
은겸의 말에 솔은 제 두 다리를 내려다보았다. 추워서 떠는 것인지 그의 말대로 다리가 풀려 떨리는 것인지 맥없이 덜덜거려 볼썽사나웠다. 아무래도 두 가지 모두인 듯했다.
“창피해요.”
“뭐가?”
“은겸 형도 있고, 지호 형도 지켜봐 주고 있어서 멋지게 잘하고 싶었거든요.”
“아니야. 잘했어. 조금 전에 표정 되게 좋았어. 감독님 조용하잖아. 마음에 안 들면 엄청 시끄럽게 굴거든. 내 뮤비에 나와 줘서 영광입니다.”
“제가 감사해야죠. 저야말로 고마워요. 전에도 그렇고 매번 이렇게 도와줘서.”
은겸이 도와주지 않았다면 아직도 감독님께 혼이 나고 있었을 것이다. 하나부터 열까지 은겸이 도와주어 만들어 낸 결과였고 자신이 한 일이라곤 아무것도 없었다. 솔이 멋쩍어 씁쓸하게 웃자 은겸이 제 손바닥 위에 올려진 솔의 손을 한결 더 꽉 감싸 잡았다. 솔의 손이 시려서일까, 은겸의 체온이 유별나게 높은 걸까. 마주 잡은 손이 홧홧하리만치 뜨거웠다.
“솔아.”
“네?”
“나는 네가 좀 걱정됐었거든. 아무래도 우리 처음 만났을 때 상황이 좀 그렇기도 했고.”
“걱정…될 만했죠.”
지난 일을 떠올리며 솔은 눈동자를 굴렸다. 다시 생각해 보니 너무도 꼴사나웠다. 그리고 또 한편으론 그날 그 연습실에서 만났던 게 주환을 닮은 은겸이라는 게 다행이다 싶기도 했다. 다른 사람이었다면 절대 그런 말들을 쏟아 내지 않았을 것이고 이렇게 친구가 되지도 못했을 것이다.
“저번에도 말했지만, 많이 좋아진 거 같아서 다행이야. 사실 너무 확 달라져서 좀 질투는 나거든.”
“질투요?”
“아, 내가 여기서 솔이 첫 번째 친구였는데. 너무 잘 지내서 친구 많이 생긴 거 같아서 질투 난다고. 울면서 친구 없다고 한 사람이 누구였더라.”
“그게 뭐예요.”
은겸의 장난스러운 말에 솔은 얼굴을 붉히며 웃음소리를 내었다. 꼭 제 머리칼처럼 잘 어울리는 은회색의 머리카락이 흔들리며 곱게 접힌 두 눈이 조명을 받아 밝게 빛이 났다. 보기 좋은 모양의 붉은 입술이 부드러운 호선을 그리고 그 사이로 하얀 이가 살짝 내비치는 그 모습이 순수했다. 순간 은겸의 얼굴에 놀람이 짧게 스쳐 지나갔다.
“질투는 나는데, 전처럼 많이 걱정은 안 된다. 그래서 기분이 나쁘지 않아.”
“처음 만났을 때… 은겸 형이 그런 말들 안 해 줬으면 그날 도망쳤을지도 몰라요.”
“나 멋있는 선배지?”
“네. 많이요.”
솔은 목울대를 울리며 웃음소리를 내고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언제 긴장했었냐는 듯 맞잡은 손을 타고 온기가 전해져 온몸이 느슨해지는 기분이었다. 그렇게 은겸과 얼굴을 마주 보고 웃고 있는데 패딩을 든 지호가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들었다.
“솔아. 춥지? 어서 입어.”
“고마워. 지호 형.”
솔은 은겸의 손을 놓고 지호가 건네주는 패딩을 걸쳤다. 일부러 덥혀 두기라도 한 것인지 포근하리만치 따뜻했다. 주머니에 손을 넣으니 따뜻하다 못해 뜨거운 온기가 느껴졌다. 훌쩍. 얼어붙었던 몸이 녹으며 솔이 코를 훌쩍였다.
조금 전까지는 괜찮았는데 온기가 온몸에 퍼지자 이가 딱딱 부딪힐 만큼 늦은 추위가 느껴졌다. 솔이 입술을 떨자 지호가 제 주머니에서 핫팩을 꺼내 솔의 주머니로 옮겨 넣었다. 은겸이 더 하고 싶은 말이 있는 듯 솔을 바라보았지만, 이윽고 등 뒤로 울려 퍼지는 ‘댄서들 준비해 주세요.’ 하는 목소리에 솔과 지호는 고개를 꾸벅 숙여 보이고 세트장에서 내려왔다.
“많이 춥지?”
“괜찮아. 따뜻해.”
“영호 형이 핫 팩 사 왔더라고. 너 추울까 봐 미리 덥혀 놨어.”
은겸을 뒤로하고 지호와 솔은 어깨를 나란히 한 채 지호가 서 있었던 자리로 걸음을 옮겼다. 조금 전까지 자신이 촬영했던 세트장의 조명색이 바뀌는 것을 보며 솔은 주변을 두리번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