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
“더 하얀 건 없나? 그냥 탈색시킬 걸 그랬어.”
“오늘 결정된 거라 준비 시간이 너무 짧았어요.”
“쯧, 어쩔 수 없지.”
솔이 쓴 가발의 머리 끝단을 툭툭 건들며 감독이 색이 아쉽다며 작은 푸념을 했지만 더는 문제 삼지 않았다. 대신 솔의 주변을 한 바퀴 빙 둘러 관찰하고는 손짓했다.
“그거 벗고 이쪽으로 따라와 봐요.”
그 지시에 솔이 반응하기도 전에 지호가 마치 숙련된 집사처럼, 솔의 어깨에 걸쳐 있던 패딩을 벗겨 주었다. 감독을 따라 세트장으로 걸음을 내디디며 솔은 지금 안정의 포션을 사용해야 하나 고민했다. 지난 첫 촬영처럼 완전히 굳어 버리면 어쩌지. 계속 멤버들과 촬영에 대한 대비를 해 왔지만 아직은 갈 길이 멀었다.
안정의 포션 사용을 망설인 솔은 타이밍을 놓치고 어영부영 감독을 따라 세트장 안으로 들어갔다. 순백으로 꾸며진 세트장은 너무 새하얘서 신발을 신고 밟아도 되나? 하는 걱정이 들 정도였다. 솔이 발을 쉽사리 내려놓지 못하고 더듬거리자 감독이 답답하다는 듯이 손짓했다.
“별거 없으니까 잘 들어요. 여기 앉아서 카메라만 똑바로 바라보면 돼요. 몇 초 안 돼. 쉽죠?”
“…네!”
솔은 정신을 일깨우려 일부러 고개를 크게 흔들었다. 감독이 가리킨 의자에 씩씩하게 앉은 솔은 긴장한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정면을 응시했다. 성큼 걸음을 뗐던 감독이 두어 걸음 옮기지 않아 다시 솔에게로 돌아오기 전까지 솔의 표정은 비장하기까지 했다.
“설명 듣지 않았어요?”
“들었습니다.”
“지금 본인이 앉아 있는 자세가 어떻다고 생각해요?”
“…….”
감독의 말에 솔은 자신의 모습을 점검했다. 고개를 똑바로 들고 정확히 정면을 보고 있었고 두 다리는 착 붙여 가지런히 두었다. 딱히 문제 되는 부분은 없었다. 솔이 이해하지 못한 듯, 슬쩍 눈치를 살피자 감독은 한숨을 한번 쉬었다. 기운 빠져 보이는 그녀의 모습에 솔은 윽박이나 더 강한 지적이 돌아올 거로 생각하고 어깨를 움츠렸다. 하지만 다행히도 감독은 윽박지르기 대신 조금은 딱딱한 어조로 솔을 일깨워 주었다.
“본인 역할이 지닌 키워드가 치명, 카리스마 이런 거라고 듣지 않았어요? 그런데 지금은 학교에 처음 온 초등학생처럼 앉아 있네요.”
“아, 아아! 네. 이해했습니다.”
“짧은 컷이니까 시간 끌지 말고 한 번에 끝내요. 우리.”
“네.”
솔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하자 감독은 손가락 두 개를 둥글게 붙여 O를 만들어 보이고는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막상 대답은 했지만, 어찌 자세를 바꿔야 할지 솔은 고민스러웠다. 살짝 삐뚤게 앉아도 봤다가 허리를 빼 영 불편한 자세로 앉아 봤지만, 엉덩이가 연신 의자에서 미끄러지기만 할 뿐이었다. 갑자기 머리가 아파져 오는 것 같고 뒤늦게 걱정이 밀려들어 솔을 불안하게 만들었다.
머릿속에 ‘안정의 포션’이 계속 둥둥 떠다녔다. 지금이라도 포션을 사용해야겠다는 생각에 솔은 속으로 ‘안정의 포션’을 되뇌며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순간 아이템을 사용할 거냐는 알림 창이 떠오름과 동시에 솔은 멀찍이서 패딩을 든 채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지호와 눈이 마주쳤다. 지호는 고개를 살짝 끄덕이고는 주먹을 불끈 쥐어 보였다. 지호의 그 모습을 보니 프로필 촬영 날이 떠올랐다.
[‘안정의 포션’을 사용하시겠습니까?]
[ 예 | 아니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