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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애를 뽑고 싶어 (79)화 (79/192)

#79

어쩐지 지호와 은겸, 두 사람이 풍기는 분위기가 비슷했다. 이전까지는 주환을 닮은 은겸이 커다란 강아지처럼 순하고 따뜻한 사람으로 느껴졌는데 어쩐지 지금은 은겸에게서도 처음 지호에게서 느꼈었던 꺼림칙한 느낌이 들었다. 그 불편한 느낌에 솔은 지호와 은겸 사이에서 좌불안석이 되었다.

“하루를 먼저 데뷔해도 선배님인데, 당연히 예의를 갖춰야죠. 하지만 그렇게 말씀해 주니 감사합니다. 선배님.”

지호는 방긋 웃으며 말했다. 연습생 시절 단 한 번도 편하게 지낸 적 따윈 없었다.

“그럼, 저희는…,”

“아, 가발!”

지호가 솔의 손을 덥석 잡고 은겸에게 다시 한번 고개를 숙여 보였다. 불편하고 껄끄러운 장소에서 지호가 솔을 이끌고 나가려 하자 은겸이 손가락을 딱, 소리 나게 부딪히며 탄성을 내뱉었다. 분주히 일하던 스태프들의 시선이 은겸에게로 쏠렸다. 은겸은 활짝 웃으며 정말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는 듯이 솔을 바라보았다.

“아까, 그 가발이요. 솔이가 쓰는 게 어떨까요?”

은겸의 말에 각자 제 일하기 바빴던 스태프들이 일제히 솔을 쳐다봤다. 은겸의 얼굴 위를 바쁘게 누비던 브러쉬들도 일제히 멈추어 섰다. 지호에게 잡혀 그 자리를 벗어나려던 솔은 자신에게로 몰려드는 시선에 그 자리에 굳어 버렸다. 눈만 데굴 굴리며 서 있는 솔의 손을 지호가 더욱 꽉 움켜잡았다.

“오전에 너무 튄다고 빼 버렸던 그 은발 말하는 거지?”

“네. 물론 지금도 충분하지만, 이렇게 보니까 솔이 분위기가 조금 밋밋한 게 머리 때문인 거 같아요. 너무 단정한 거 같기도 하고.”

“그러면 오히려 너무 튀지 않을까?”

“그러니까요.”

은겸의 의상과 물품을 확인하던 여성의 말에 은겸이 솔을 돌아보며 환하게 웃었다. 너무도 사람 좋아 보이는 친절한, 솔의 긴장마저 녹아내리는 미소였다. 주환을 닮았지만 주환은 아닌, 하지만 그를 연상케 하는 따스한 얼굴에 솔은 굳어 있던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솔이 은겸을 바라보자 은겸은 이를 드러내며 환하게 웃었다. 순간, 솔의 손을 쥔 지호의 손에 더욱 힘이 들어갔다.

“은겸아, 이거, 네 뮤비야.”

“그래도 후배들 도와주면 겸사겸사 저도 좋은 거죠. 오늘도 이렇게 다들 저 때문에 고생하는데, 잠깐 나오는 거지만 잘 나왔으면 좋겠어요.”

“하여간 너는 너무 착해서 탈이야.”

여성이 은겸의 맨 팔을 툭 치며 말했다. 그다지 세게 친 것도 아닌데, 은겸은 아프다는 듯 팔을 문지르며 마냥 순하게 웃었다.

“제가 뭘요. 다 친한 동생들인데 같이 잘 돼야죠. 그리고 이런 거라도 도와줘야죠. 제가 무슨 힘이 있어요.”

“그런 생각도 하고, 태은겸 정말 많이 컸네. 예전엔 너무 힘들다고 그런 말만 하더니.”

“그러니까요. 저처럼 너무 힘들지 않게 저 친구한테도 잘해 주세요. 부탁드려요.”

“걱정하지 말아. 내가 잘 준비해 줄게, 어서 갈아입고 나오기나 해.”

은겸과 꽤 오래 봐 온 것 같은 여성은 은겸에게 하의를 내밀며 못 말린다는 듯, 고개를 내저었다. 은겸이 커튼이 쳐진 탈의실로 들어가자 여성은 솔을 찬찬히 뜯어보곤 손짓을 했다. 솔이 멀뚱하게 보고만 있자 손을 맞잡은 지호가 솔을 여자의 앞으로 살짝 끌어당겼다. 솔의 머리를 넘겨 보기도 하고 여러 가지 가늠을 해 보던 여자는 ‘너무 비주얼 센데.’ 하는 혼잣말을 두어 번 했다.

“은겸이가 말한 거 일단 가져와 봐요. 씌워 보고 판단해야지.”

여성의 말에 스태프 중 하나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 짐들 속에서 가발을 가져왔다. 익히 말한 대로 은발에, 가람의 머리 길이 정도 되는 단발이었는데 조금 칙칙한 색상이었다. 가발이 등장하자 다시금 사람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한쪽에선 은겸의 의상 교체를 도와주는 무리가 바삐 움직였고 솔에게도 순식간에 두 사람이 빗을 들고 달라붙었다.

가발을 어설프게 머리에 얹고 그 모습을 이리저리 돌려 보던 여자는 옷 갈아입기 여념이 없는 은겸을 흘긋 보고는 ‘부탁이라는데 해 줘야지.’ 하는 말만 남겼다. 그렇게 다시금 솔의 머리카락이 헤집어졌다. 본래 자신의 머리인 검은 머리카락이 단단히 고정되고 그 위에 은회색 머리칼의 가발이 씌워졌다. 가발을 써 보기는 처음이었는데 어색하고 티가 날 거란 생각과 달리 가발은 꽤 자연스러웠다.

“우리 회사에 이런 마스크도 있고, 무슨 일이야.”

“그러게요. 진짜 예쁘네요.”

“이런 타입은 처음인데. 저는 너무 좋은 거 같아요. 완전, 은발 필수.”

“솔이? 너는 밝은색이 훨씬 낫다. 신인 개발 팀에 메모 남겨 둬야겠어. 커트 살짝만 해 줘요.”

원체 얼굴이 작은 탓인지 길이감이 맞지 않던 가발에 가위질과 약간의 손질이 더해지자 훨씬 더 자연스러워졌다. 칙칙한 톤의 은발이었지만 솔의 얼굴이 훨씬 환하게 살아났다. 더불어 섬세한 선 위에 은회색이 주는 특유의 서늘함이 더해져 날카롭고 차가운 느낌이 들었다. 조금 전까지 맑고 깨끗한 유리 조각이었다면 지금은 순식간에 얼어붙은 매서운 유리 조각이 되었다.

“아까도 미친 미모긴 했는데, 너무 여려서 의외다 싶었거든요? 근데 또 이렇게 해 두니까 의외로 냉미남 과?”

“좀 날카로워 보이지?”

솔의 머리를 손질하던 두 사람이 여성의 말에 ‘맞아, 맞아.’ 하며 맞장구를 쳤다. 얼굴로 곧바로 꽂히는 시선이 부담스러워 마스크든 뭐든 얼굴을 가리고 싶은 생각이 간절했다. 누군가 이렇게 얼굴을 빤히 들여다보는 것이 쉽게 익숙해질 것 같지 않았다. 자신을 쳐다보는 여성들과 시선을 맞추지 못하고 피하던 솔은 방해되지 않도록 멀찍이 떨어져 서 있는 지호를 곁눈질했다.

그간에도 지호가 잘 챙겨 주기는 했지만 막내인 득용을 챙기기 바빠, 솔을 챙기는 데엔 늘 태오와 가람이 앞장을 섰던 터라 크게 느끼지 못했는데 오늘은 이렇게 뒤에 지호가 서 있으니 태오 못지않게 든든한 기분이었다. 태오가 우직하고 든든한 버팀목 같은 느낌이라면 지호는 한결 편안하고 다정한 형 같은 느낌이었다. 지호는 솔과 눈이 마주치자 엄지손가락을 들어 올려 보였다. 득용이 봤으면 촌스럽다고 놀렸을 만한 제스처였다.

그사이 바지를 갈아입고 나온 은겸이 스태프들이 떠드는 소리를 듣고 끼어들었다. 버클이 여러 개 달린 가죽 바지를 입은 그의 다리에 두 사람이 달라붙어 옷매무새를 만지며 버클을 일일이 조였다. 꽤 입고 벗기 불편해 보이기도 하고 절대 평상시엔 입지 못할 바지였다.

“뭐예요. 저도 궁금해요. 솔이, 진짜 이쁘죠?”

“그래. 태은겸 보는 눈 있다.”

마지막 버클이 채워지자 은겸은 솔에게로 성큼성큼, 다가왔다. 상의며 하의며 워낙 버클을 비롯한 장식이 많이 달려 걸을 때마다 절그럭거리는 소리가 났다. 솔의 옆에 다가온 은겸은 허리를 숙이고 솔과 눈높이를 맞추었다. 살짝 처진 눈매가 부드럽게 휘었다. 늘 그렇게 웃던 주환이 떠올라 순간 솔의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역시, 우리 솔이 진짜 잘될 거예요. 그렇죠?”

“그래. 그럴 거 같다. 후배 사랑 그만하고 빨리 앉아. 다들 기다려.”

“후배 사랑을 어떻게 그만해요. 이렇게 이쁜데. 솔아, 금방 준비하고 나갈게. 먼저 가서 분위기 좀 보고 있어.”

“네, 네.”

은겸은 솔이 앉아 있던 의자를 살짝 돌리며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홀린 사람처럼 멍하니 은겸이 내민 손을 잡고 솔이 의자에서 일어나려던 찰나, 지호가 다가와 그의 팔을 잡았다. 팔을 덥석 붙잡는 지호의 행동에 솔은 그제야 화들짝, 은겸이 주환이 아님을 다시금 인지했다.

“수고하셨습니다. 감사합니다. 선배님. 그럼….”

어느새 솔이 벗어 두었던 패딩까지 챙겨 든 지호는 은겸에게서 교묘히 솔을 빼돌려 자리를 비켜났다. 솔이 일어선 의자에 은겸이 털썩, 앉으며 거울을 통해 지호와 솔의 모습을 빤히 쳐다보았다.

“어서 잠바 입어.”

“어차피 다시 벗어야 하는걸.”

“잠깐이라도 입고 있어. 여기 너무 추워서 감기 걸린다.”

“고마워. 지호 형.”

지호의 챙김에 솔이 배시시 웃음 지었다. 솔이 저를 보며 웃자 지호가 그의 어깨를 잡아 안으며 걸음을 이끌었다. 거울을 통해 그 모습을 바라보던 은겸은 지호의 모습이 대기실에서 사라지자 얼굴을 살짝 굳혔다. 때마침, 눈 감아 보라는 메이크업 아티스트의 지시에 은겸은 두 눈을 꾹 감았다.

눈을 감자 조금 전까지 눈에 담았던 지호를 보며 웃는 솔의 얼굴이 떠올랐다. 드문드문 마주칠 때마다 달라지긴 했지만, 솔은 처음 작은 골방 연습실에서 만났을 때와는 비교도 할 수 없게 밝아지고 편안해 보였다. 그때만 해도 이곳엔 자기 친구가 없다고 말하며 눈물지었는데, 지금 모습은 아무래도 새로운 친구를 제법 사귄 것 같았다. 그리고 아쉽게도 그 친구들이 은겸의 마음엔 썩 들지 않았다.

은겸은 눈을 감은 채 의자의 팔걸이를 토독 손끝으로 두들겼다. 저런 모습을 눈앞에서 보자고 솔을 도와주려 한 것은 아니었다. 든든한 조력자, 구원자, 한마디로 왕자님 노릇이 하고 싶었던 거였다. 자신에게 의지하는 그런 모습을 보고 싶었던 것이었는데. 분명 그랬는데….

막상 제 앞에서 자신이 아니라 다른 사람을 보며 웃고 있는 모습을 보고 있는데도 기분이 그리 나쁘지 않았다. 성솔의 웃음이 자신을 향하지 않았는데 어쨌든 많이 밝아지고 안정된 그 모습에 다행이란 생각이 먼저 들었다. 솔의 웃는 모습을 보는 것이 기분 좋다 느껴졌다. 영 이상한 기분이었다.

지호와 함께 세트장으로 나오니 순백색으로 꾸며진 공간이 솔의 앞에 펼쳐졌다. 흔히 말하는 바(BAR)나 클럽 같은 공간이었는데, 특이한 점이라면 진열된 술병부터 테이블, 의자 모든 것이 흰색 페인트로 칠해져 있었다. 순백으로 꾸며진 세트장은 조명 테스트가 한창이었다.

선명한 단색의 조명이 공간을 비추자 백색의 공간은 조명에 따라 새파랗게도 새빨갛게도 변했다. 무용에서 쓰이는 무대와는 사뭇 달랐다. 신기한 그 광경을 솔이 가만히 서서 바라보고 있자, 그를 발견한 감독이 큰 소리로 솔을 불렀다.

“솔아, 너 부르셔.”

지호가 손을 살짝 잡아당기지 않았다면 솔은 계속 넋을 놓고 색이 바뀌는 세트장만 바라보고 있었을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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