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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애를 뽑고 싶어 (77)화 (77/192)

#77

경쟁 사회. 당연한 말이었다. 세상의 모든 것은 경쟁으로 돌아간다. 하물며 지호처럼 형제가 많은 집안에선 일상이 경쟁이었다. 모든 부모가 마음껏, 넉넉히 모든 아이들에게 기회를 고르게 줄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저 어느 순간, 소속사 내부의 시스템에 지나치게 적응해 버린 자신에게 거부감이 들었다. 새로운 연습생이 와도 이름이 무엇인지 그런 것 따윈 궁금하지 않았다. 그저 어디 소속사에서 옮겨 왔는지, 어떤 포지션을 자신 있어 하는지, 어느 정도의 실력을 갖췄는지가 궁금했을 뿐.

지금의 YC보다 훨씬 더 많은 수의 연습생이 들어왔다 빠져나가기를 반복해 나중에는 경쟁에서 도태된, 같이 숙소에 머물고 있는 연습생의 얼굴도 이름도 기억하지 못했다.

전국 단위의 경쟁만으로도 스스로가 우물 안 개구리였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느끼는데 하물며 세계 각지에서 몰려들 땐 어떠할까. 예민해진 아이들의 감정싸움은 극에 달했고 그것이 어떤 특정 약자들을 괴롭히는 행위로 변질하였다. 이를테면 의사소통이 원활하지 않은 외국인 연습생. 혹은…….

흘깃. 예전 생각에 잠시 잠겨 있던 지호는 솔을 바라보았다. 순간 그 시절을 떠올리며 ‘성솔처럼’이라는 말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그런 곳에 있었다면 솔은 아주 좋은 먹잇감이 되었을 것이었다. 이리저리 휩쓸려 다니고 괴롭힘당하다 결국 지금보다 더 망가지겠지. 그런 걸 보고 있는 것이 힘들었다. 그런 괴롭힘에 일조하지 않았지만, 방관도 죄였다. 수시로 가슴에 죄책감이 쌓였다.

그러면서도 은근 그 아이들을 재단하고 있는 자신이 너무 견디기 힘들었다. 집에 있을 동생들이 떠올랐다. 그럴 때마다 점점 연습생들 사이에서 약해지는 자신을 발견했다. 거기서 조금만 더 약해진다면 다음 먹잇감은 자신이 될 것 같았다. 말이 좋아 다른 소속사에 스카우트이지 엄밀히 말해 도태되기 전에 도망친 거다.

처음 YC에 와서도 지호는 그때의 그 태도를 버리지 못했다. 처음 대면한 다른 연습생들을 재단하고 트레이너처럼 평가를 매기고 속으로 1등부터 꼴등까지 줄을 세운다. 소규모 소속사의 연습생 풀이 거기서 거기지, 하지만 그 생각은 오래가지 못했다. 또다시 우물 안 개구리라는 말을 깨닫게 되었다.

지호가 YC로 옮겨 온 시점에 이미 은겸은 소속사 내에서 어느 정도 입지를 다진 참이었다. 모두의 기대를 받았고 모든 연습생이 ‘태은겸’ 하면 수긍할 정도로. 그런 은겸에게 대형 기획사 출신에, 오디션 프로그램에서 입증받은 지호의 등장이 위기감으로 다가오는 것은 당연했다.

대형 기획사에서 연습생들끼리 벌이는 온갖 기 싸움과 수작질에 익숙한 지호에겐 그런 은겸의 속내가 훤히 보였다. 아무렇지 않게 넘겼어야 했는데 어린 마음에 당시에는 그러지 못했다. 은겸 정도야 손바닥 안이라고 생각했다. 제가 뭐라도 된 것처럼, 사실은 경쟁에서 밀려난 어쭙잖은 사람일 뿐인데. 그날부터 은겸과 지호의 보이지 않는 기 싸움이 시작되었다.

하필이면 메인 보컬, 다만 분위기는 지호에게 유리했다. 더 큰 회사에서 더 체계적인 트레이닝을 받고 온 지호는 이미 잡은 물고기였던 은겸보다 신선했고 전반적으로 평이 좋았다. 상황이 반복되며 원하든 원치 않든 숙소 안에서 두 사람을 두고 파벌 같은 것이 자연스레 생겨났다. 그때 득용이 숙소로 들어왔다. 유난히도 어린 막내.

득용의 첫인상? 지호는 안도했다. 랩을 한다는 득용의 소개에 지호는 순간 안심하며 동생처럼 잘해 줘야겠다고 생각한 자신에게 소름이 끼쳤다. 싫어서 도망쳤던 이전 소속사와 똑같은 분위기를 자신이 조성하고 있었다. 은겸과 함께. 만약 득용이 보컬을 지향했다면? 위기감을 느낄 정도로 실력이 있었다면?

속으로 수없이 이러지 말아야지, 사람을 재단하지 말아야지, 되뇄지만 오랫동안 익숙해져 있던 사고방식을 벗어나는 것은 힘들었다. 물론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어쨌든 그날 깨달은 바가 있었다. 물론 사람이라면 누군가와 자신을 비교하고 경쟁하고 질투할 수밖에 없다. 당연한 이치였지만 그 질투와 경쟁에 사로잡혀 쓸려 가고 싶지는 않았다.

다른 사람들이 학원에 다니니까 나도 다녀야 할 것 같고, 다들 유행하는 브랜드의 옷, 가방을 들고 다니니 나도 사야 할 것 같고. 그렇지 않으면 뒤처지는 것 같고. 꼭 누군가를 찍어 누르고 이겨야 하고. 이상하게도 그러면 그럴수록 만족감은커녕 더욱더 퇴보하는 것은 아닐까? 혹은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 하는 불안감만 커진다.

한순간에 사람이 달라질 수는 없지만 적어도 이전과 같은 행동을 되풀이하지 않으려 매 순간 달라지려 노력했다. 그 노력은 지금도 현재 진행형이었다. 경쟁에서 지호가 한발 물러나 이탈했지만 은겸은 그럴 생각이 없었다. 한 발자국 뒤로 물러서자 은겸의 수작질이 더욱 눈에 잘 들어왔지만 지호는 대응하지 않았다. 물론 쉽지는 않았다.

착한 척 은근한 이간질이, 주변을 부추기는 그 행동이 거슬려 한동안 속에서 천불이 끓어올라 어찌할 바를 몰랐었다. 그때 눈에 들어온 게 윤태오였다. 누가 뭐라 하든 말든 세상 저 혼자 사는 것마냥 꼿꼿하게 제 할 일만 하는 놈. 얼굴 앞에다 욕을 해도 표정 하나 안 변하고 연습하러 가는 그 모습을 지호가 따라 하기 시작했다.

은겸이 무슨 짓을 하든, 묵묵히 할 일을 하는 태오의 옆에서 그를 따라 하다 보면 어느새 무엇에 화가 났었는지 잊히곤 했다. 그렇게 자연스럽게 지금의 멤버들이 태오의 옆에 남게 되었다. 지호는 어느새 메이크업이 끝난 솔을 바라보았다. 제 버릇 개 못 준다고 솔을 처음 만났을 때 이전처럼 굴어 버렸다.

시간이 지나고 보니 솔도 참 태오처럼 고달프게 산다 싶으면서도 같은 과라는 게 느껴졌다. 지내고 보니 성솔은 많이 위축되어 있고 어리숙할 뿐, 착한 녀석이었다. 지금도 자신만 놀고 있다고 하니 말은 못 하지만 불안하게 흔들리는 눈동자가 걱정을 가득 담고 있었다.

처음엔 알아채지 못했는데 시간이 지나니 솔은 태오와는 다른 느낌으로 말을 아끼는 편이었다. 특히나 자신이 느끼고 있는 감정이나 상태에 대해. 지호는 솔의 몫까지 두 배로 환하게 웃었다. 별거 아니라는 듯이 활짝 웃자 방황하던 솔의 눈동자가 떨림을 멈췄다. 지호는 대기실을 한 바퀴 휘 둘러보고 아무도 없는 걸 확인한 뒤에 솔에게 한쪽 눈을 찡긋해 보였다.

“원래, 이런 거는 회사에서 밀어주는 한 명 정도만 출연하는 게 보통이야. 우리 뮤비가 아니잖아.”

“…그래도 형만…,”

“태오가 있었으면 이런 기회가 있는 것 자체로 감사하며 열심히 하라고 할걸.”

“그건 그렇긴 한데…. 나보다는 형이 더 잘할 텐데….”

“당연히 나야 잘하지.”

지호가 여우처럼 눈을 활짝 휘며 웃고 뻔뻔하게 너스레를 떨었다.

“근데 너도 잘할 거야. 애들도 다 잘할 거야.”

“응. 다들 잘할 거야.”

지호의 말에 솔은 속으로 ‘나만 잘하면 돼.’라는 말을 되풀이했다. 멤버 중 자신이 커다란 문제를 가진 구멍인 것은 자명했다.

“아니다. 너무 잘하면 편집 당해. 적당히 잘해야 해. 그러니까 부담 가지지 말고 적당히 하자.”

“그게 뭐야, 형. 잘하라는 거야 못하라는 거야.….”

“진짜야. 주인공보다 튀면 싹둑 되는 거야.”

솔이 떨떠름한 얼굴로 지호를 쳐다보자 지호는 손가락으로 가위 모양을 만들고는 가위질하는 시늉을 했다. 긴장과 걱정의 기색이 역력한 솔의 얼굴에 지호는 그의 옆으로 바짝 다가가 어깨를 툭툭 두들겨 주었다. 솔이 지나치게 잘해야 한다는 부담을 가지는 것 같아 장난 반, 진담 반으로 뱉은 말이었다.

솔이 카메라 앞에 서는 걸 힘겨워한다는 걸 알기에 한 긴장을 풀어 줄 겸 한 말이었지만 엄연히 사실이었다. 지금 밖에서 먼저 촬영하고 있는 다른 멤버들도 컨셉이라는 이름하에 얼굴을 검은 천으로 가리고 촬영에 임하고 있었다. 영상으로 보면 본인이 아닌 이상, 누가 누군지 조금도 알아볼 수 없을 것이다. 딱히 불만은 없었다. 엄연히 은겸의 뮤직비디오니 당연했다.

“역할이 뭐라고 했었지?”

“치명적이고 카리스마 있는 빌런? 내가 보스다?”

지호의 물음에 솔이 영 자신 없는 얼굴로 앞서 들었던 말들을 되풀이했다. 그러자 지호는 살짝 미간을 찌푸리고 눈을 치켜떠 보았다. 늘 생글생글 웃던 지호의 얼굴에 비릿한 미소가 스쳤다.

“보스라…, 살짝 이런 식으로 노려보는 건 어때?”

딱히 독창적이거나 멋진 표정과 포즈는 아니었지만, 지난번 프로필 촬영 때 솔이 얼굴을 찌푸려 문제가 되었던 걸 떠올린 조언이었다. 카메라 앞에서 얼굴을 펴는 것이 오히려 어려웠으니, 반대로 찌푸리는 것은 쉽지 않을까 해서 지호 나름 머리를 굴려 본 것이었다.

“이렇게?”

하지만 의도하고 했던 표정이 아니었던 터라 막상 해 보라 멍석을 깔아 주니 영 어설펐다.

“아니, 좀 더. 팍! 처음 만났을 때 우리가 재수 없게 굴어서 기분 나빴잖아. 그때처럼.”

“그렇게 나쁘진 않았는데… 다들 화날 만했고.”

“흠, 밉거나 싫은 사람 없어?”

“싫은 사람?”

“나 말고.”

“지호 형. 나 형 안 싫어해.”

농담으로 던진 말이었는데, 지호의 농담을 진지하게 받아들인 솔이 얼굴을 굳혔다. 태오마냥 진지해져선 자신을 싫어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솔의 모습에 잠시 지호는 할 말을 잃고 멍해진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다 한발 늦게 웃음을 터뜨렸다.

“알아. 농담이야. 우리 솔이 사실 형 좋아하잖아.”

지호가 소리를 내어 웃자 솔은 그제야 조금 전 그의 말이 농담이라는 것을 뒤늦게 깨닫고 뺨을 붉혔다. 늘 항상 주변에 선을 긋다 보니 ‘싫어한다’라는 오해받기 쉬웠던 솔은 지호의 말이 농담처럼 들리지 않았다. 민망해진 솔은 거울에 비친 자신을 바라보며 애써 말을 돌렸다.

“잘할 수 있을까?”

“적당히 하면 된다니까.”

“다른 사람들이 하는 게 나을 거 같은데.”

“솔아, 자낮 그만. 너한테 주어진 기회야. 누가 너를 대신하겠어.”

지호는 솔의 어깨에 두 손을 얹으며 거울을 바라보았다. 서로 다른 표정의 두 사람의 얼굴이 거울에 또렷하게 비쳤다.

정반대의 분위기를 가진 두 얼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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