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
“성솔, 추워?”
“나? 괜찮은데…?”
태오의 물음에 솔이 반사적으로 대답했다. 자동 응답기에 녹음된 메시지처럼 괜찮다는 말부터 튀어나왔다.
“솔이 형은 맨날 괜찮대.”
“리허설도 아직인데 그 전까지 겉옷 걸치고 있는 게 좋을 거 같다. 제가 다녀올게요.”
“그래. 그게 좋겠다. 다녀와.”
태오는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멤버들이 짐을 풀어 두었던 대기실을 향해 뛰어갔다. 얼떨결에 지호의 품에 안긴 채 난로 앞에 선 솔은 난로의 뜨거운 열기를 느끼고 나서야 제 손이 얼음장처럼 차갑다는 사실을 인지했다. 총체적 난국이었다. 가뜩이나 암담하고 어렵기 짝이 없는 상황인데 이렇게 넋을 놓아선 안 됐다. 솔이 고개를 휘저으며 정신을 일깨우려던 찰나, 목덜미 안으로 차가운 것이 닿았다.
“으!”
득용의 장난질이었다. 제 언 손을 솔의 목 언저리에 대고는 솔이 화들짝 놀라자 배를 잡고 웃었다.
“김득…, 아니 디케이.”
가람이 태오를 흉내 내듯 엄격한 표정을 짓고 득용을 바라보았다. 말하지 않아도 장난을 치지 말란 의미가 전달되자 득용은 입을 삐죽거렸다.
그 모습에 솔은 그제야 살짝 미소를 지었다. 가람은 득용을 제지했지만, 정작 솔은 그런 득용의 장난 덕에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어찌나 손이 차가운지 아주 정신이 바짝 들었다. 더불어 스태프들과 카메라에서 멀어져 구석진 자리로 오니 한결 마음이 편안했다.
정신을 차린 솔은 일단 뭐든 해야만 할 것 같은 기분에 가람과 득용, 지호에게 선뜻 먼저 제안했다. 안무 숙련도는 100%를 채워 두었지만, 마음이 불안했다.
“안무 맞춰 보자. 가만히 있으니까 더 추운 것 같아.”
“그럴까?”
“동작만 살짝 맞춰 보자.”
“좋아. 사실 나도 좀 불안했어.”
솔의 제안에 가람이 반색했다. 늘 그렇듯, 안무 숙지에 가장 어려움을 겪었던 건 가람이었다. 내색하지 않았지만, 연습 내내 은겸에게 무척 지적받았던 그도 내심 불안했는지 반색했다.
“맞아. 가람 형 자꾸 도입부 틀리잖아요.”
“도입부부터 다시 해 보자. 움직이면 덜 추울 거야.”
제안은 솔이 했지만, 지호의 통솔하에 네 사람은 슬슬 몸을 풀기 시작했다. 창고 안이 너무 추웠기에 처음부터 크게 움직이면 다칠 수 있었다.
팔랑거리듯 작게 시작했던 몸짓이 점점 커지기 시작했다. 구석진 좁은 공간에서도 서로 부딪히지 않게 몸에 익어 버린 안무를 되짚었다. 천천히 동작 하나하나를 짚어 가며 서로 틀린 부분이 있는지 봐주는 사이, 패딩을 잔뜩 든 태오가 달려왔다.
“태오 뛴다.”
“저 태오 형 뛰는 거 처음 봐요.”
“나도.”
“나도…. 안 뛰어도 되는데.”
“누구 씨 추울까 봐 뛰어온다.”
지호의 농담에 모두가 웃음을 터뜨렸다. 사실 태오는 늘 누구보다 일찍, 미리 준비를 끝내기에 좀처럼 뛰는 일을 볼 수 없었다. 멤버들의 패딩을 한 아름 들고 성큼성큼 달려오는 그를 보니 잘 훈련된 군견 같기도 해, 저 큰 덩치가 귀여워 보였다.
춥긴 추웠는지, 입김을 내뿜던 멤버들이 태오가 오자 저마다 제 옷을 주섬주섬 주워 입었다.
“리허설도 아직인데 언제 하지?”
“살짝 보고 왔는데, 앞선 촬영에서 조금 문제가 있나 보더라고요.”
지호의 물음에 태오가 제가 온 방향을 다시 돌아보며 대답했다. 늘 그렇듯 예정대로 흘러가는 것이 제일 어려운 일이었다. 더군다나 본인들의 촬영장도 아니었고 끼어 있는 처지였다. 뭐라도 영호가 물어 와 알려 주지 않으면 선뜻 돌아다니는 것도 눈치가 보여 솔은 슬쩍 태오를 보며 물었다.
“오래 걸릴까?”
“아마 그렇지 않을까. 우리도 적당히 쉬면서 연습하고 있죠. 뭐.”
태오의 말에 지호가 뿌듯한 표정으로 어깨를 들썩여 보였다.
“응. 그렇지 않아도 솔이가 말해서 동작 맞춰 보던 중이었어.”
“잘하고 있었네.”
지호의 말을 들은 태오는 솔에게 패딩을 건네주며 입가에 작은 미소를 그렸다. 알아서 연습하고 있었다니 꽤나 만족스러운 미소였다. 난로 앞에서 몸을 데우며 연습을 이어 가던 찰나, 영호가 다급하게 뛰어와 다짜고짜 솔을 불렀다.
“솔아, 잠깐 같이 좀 가야겠다.”
“저요?”
“응, 빨리.”
어리둥절한 솔이 집게손가락으로 자신을 가리켰다. 멤버들 모두 예상했다는 듯이 대수롭지 않은 반응이었지만 솔만 당황한 채로 영호에게 끌려갔다. 영호의 걸음이 어찌나 빠른지 따라가는 솔은 발이 꼬여 넘어질 것만 같았다. 덩그러니 남겨진 멤버들을 뒤돌아보며 걷는 솔을 영호가 불러 세웠다.
“솔아, 무조건 할 수 있다, 감사하다고 하는 거야.”
“뭘요? 뭐 하는 건데요?”
솔은 지난번의 사건 이후로 이제는 한 몸마냥 익숙해진 검은색 마스크를 귀에 걸며 영호에게 되물었다. 근래에 들어선 사람이 많은 공간에서 마스크를 쓰지 않는 게 더 어색할 지경이었다. 그리고 또 마스크가 태오가 조언해 주었던 모자처럼, 여러 사람 앞에 설 때 나름 도움이 되었다.
“막 그렇게 큰 역할은 아닌데 확실하게 얼굴은 보여 줄 수 있거든? 솔아, 너무 긴장하지 말고… 저번 촬영처럼 무표정으로 얼굴만 잘 나오면 돼.”
“네….”
영호의 말에 솔은 영 자신 없게 고개를 끄덕였다. 미적지근한 솔의 반응이 영호도 영 불안했는지. 가던 걸음도 멈춰 서서 그의 어깨를 꽉 붙잡고는 신신당부했다. 지나치게 가까워진 영호가 부담스러워 솔은 몸을 뒤로 물렀다. 걱정이 가득한 영호의 표정이 쉽사리 펴지지 않았지만 사실 걱정스러운 건 솔도 마찬가지였다.
“이거 한 신만 잘 찍으면 넌 쉬어도 돼.”
“어어…. 그럼 백업 댄서는요?”
“응? 그건 일단 이거 통과되면 다시 얘기하자.”
속으로 당장 안정의 포션을 사용해야 하나 고민하던 솔은 영호의 쉬어도 된다는 말에 불안한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정말 이것 외에 촬영이 없다면 지금 안정의 포션을 사용하는 게 맞았다.
촬영 이후에 백업 댄서를 안 해도 된다면 안정의 포션을 더 사용하지 않아도 되니 다행이었지만 한편으로 아쉬움이 들었다. 멤버들과 많이 연습했는데 이왕이면 춤을 추는 모습으로 기록되었으면 했다. 안정의 포션을 두고 솔이 고민에 답을 내지 못해 우물쭈물하는 사이 영호는 다른 세트장으로 솔을 이끌었다.
“이 친구가 솔이예요.”
도착한 장소엔 은겸을 비롯한 많은 사람이 모여 있었다. 평소와 전혀 다른 스타일링에 순간 솔은 은겸을 보고도 알아보지 못한 채 지나쳤다.
“솔아, 왔어?”
“엇, 안녕하세요.”
옆에서 친근하게 말을 걸어 오는 상대가 은겸이라는 걸 뒤늦게 깨달은 솔은 뒤늦게 다급히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YC의 소년 가장이었던 은겸의 솔로 앨범은 기존과는 정반대 방향의 콘셉트였다. 기존의 부드럽고 강아지 같았던 이미지를 탈피하고 싶어서였다. 늘 고집하던 갈색의 부드러운 머리는 짧게 잘라 가르마를 탔다. 가죽으로 된 검은 정장에 가죽 장갑까지 끼우고 화려한 장신구로 몸을 휘감은 그는 방금 막 무대에서 내려온 사람처럼 반짝거렸다.
솔의 외적 변화도 컸지만 은겸은 아예 다른 사람이 된 것처럼 분위기가 180도 뒤바뀌어 있었다. 솔은 자신도 모르게 은겸을 흘끔흘끔 곁눈질했다. 은겸은 솔과 눈이 마주칠 때마다 눈가를 곱게 접으며 눈웃음을 흘렸다. 웃을 때만큼은 이전의 부드러운 은겸의 얼굴이 살아나 솔을 묘하게 안심시켰다.
“마스크 좀 내려 봐요. 어디 얼마나 좋길래 태은겸이 이렇게 난리인지. 일단 봅시다.”
머리를 높게 묶고 의자에 앉아 있던 여성이 지시하듯 말했지만, 모두의 시선이 자신에게 집중되자 솔은 잠시 얼어 버렸다. 옆에서 은겸과 영호가 동시에 솔을 건들며 마스크를 벗어 보라 다시 한번 말해 주지 않았다면 몇 시간이고 그 자리에 넋을 놓고 서 있었을 것이었다.
모든 일이 순식간에 진행되었다. 얼떨결에 은겸이 쓰는 대기실까지 끌려온 솔은 의상까지 새로 갈아입고 메이크업도 다시 받고 있었다. 영호를 비롯한 모여 있던 사람들이 열심히 모니터와 종이를 보여 주며 설명했지만 하나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옆에 영호가 찰떡같이 붙어 있었다는 점이었다.
“그러니까, ‘내가 여기 보스다.’ 이렇게 생각하면서 카메라를 쳐다보면 되는 거야.”
“보스….”
“카리스마 있고 치명적이게.”
“카리스마랑 치명이요….”
혼이 나간 솔은 옆에서 영호가 내뱉는 말을 앵무새처럼 따라 했다. 솔이 영 정신을 못 차리자 영호는 잠깐 기다리라는 말과 함께 사라졌다 지호와 함께 돌아왔다. 낯선 사람투성이인 공간에서 익숙한 얼굴이 보이자 안도감과 정신이 번쩍 들었다.
“지호 형!”
“왜 울상이야. 단독 출연인데.”
메이크업을 받다 말고 솔은 울상을 지으며 지호를 바라보았다. 이렇게 반가울 수가 있을까. 생각보다 격한 솔의 반응에 놀라기는 지호도 마찬가지였다. 늘 미적지근하게 웃는 게 고작인 솔이 이토록 크게 반응하니 괜히 뿌듯하기도 하고 기분이 좋았다.
지호가 솔의 옆에 앉아 메이크업 받는 그를 바라보자 솔은 기다렸다는 듯이 영호가 저에게 했던 말을 고스란히 전달했다.
“그러니까 치명적이고 카리스마 있는 빌런이다. 이거지?”
대충 솔이 해야 할 일을 파악한 지호가 고개를 끄덕이며 턱을 괴었다. 그간 지호가 봐 온 솔이 소화하기엔 다소 난해한 요구 사항들이었다. 솔에게 치명? 카리스마? 아직 웃는 것도 어색한 성솔이었다.
“그런데 다른 사람들은요?”
“나 빼고 다 일감을 받아 떠났지.”
“형만요?”
솔의 물음에 지호가 피식 웃으며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익히 예상했던 바였다. 사실 어느 소속사를 가도 메인 보컬은 다른 포지션에 비해 경쟁력이 있었다. 그래서 사실 보컬 포지션인 다른 사람들은 데뷔에서 멀어지면 회사를 바꾸기도 했다. 지호의 이전도 딱 그런 예였다.
처음 오디션 프로그램을 거쳐 대형 소속사에 들어갔을 때만 해도 무척 자신만만했다. 노래 하나는 어디 가서 꿇리지 않는다고 생각했고 예고에 실용 음악과에 넉넉하지 않은 형편임에도 남들 하는 것은 거의 다 해 보았다.
대형 기획사의 연습생이 되고 초반에는 당연하게도 소속사 내에 지호에 대한 평가는 꽤나 높았다. 하지만 무너지는 건 순식간이었다. 서로에 대한 견제가 너무 심했고 트레이너들도 오히려 그런 분위기를 부추겼다. 등급을 매기고 핸드폰을 빼앗고 감정을 분출할 곳 없는 아이들의 탈선이 반복되었다. 그곳 어디에도 지금과 같은 ‘우리 팀’, ‘친구’ 같은 느낌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