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최애를 뽑고 싶어 (75)화 (75/192)

#75

“솔이 괜찮나?”

“멀미약 먹어도 하나도 소용없잖아요. 솔이 형, 오늘도 오늘이지만 앞으로 지방 갈 일 있을 때나 그럴 땐 어쩌죠.”

“그러게, 자면 괜찮다는데…. 오늘 보니까 잘 수 있을 것 같더라.”

지호가 멀리 빛나는 비상구 방향을 바라보며 말하자, 득용이 턱에 손을 괸 채 바닥에 쪼그려 앉았다. 오는 내내 헛구역질하고 식은땀을 흘리던 솔이 준비 중에 결국 참지 못하고 화장실로 뛰어갔다. 그 뒤를 영호가 따라간 지 벌써 20분 정도가 지난 참이었다.

“화장실, 가 봐야 하는 거 아니야?”

“영호 형이 갔으니까 기다려 보자.”

가람이 심각한 표정으로 그가 뛰어갔던 비상구 쪽을 바라보자 태오가 어깨를 도닥이며 모두를 진정시켰다. 지금 솔에게 문제가 있다 한들 그 문제에서 솔을 빼내 주거나 시간을 벌 수 있는 사람은 자신들이 아니라 매니저인 영호였다.

“걱정이에요.”

“걱정된다. 솔 괜찮겠지?”

“괜찮을 거야. 저번에도 그랬잖아…. 좀 쉬고 나니 괜찮아졌고.”

어두워지는 모두의 표정에 이번엔 담백한 태오 대신 지호가 두 사람을 달래 주었다. 투박한 태오의 말보단 훨 따뜻하고 부드러운 말투였다.

“그것도 그거지만, 저것도 걱정이에요. 우리랑은 스케일이 다른데요.”

“솔, 또 너무 긴장하면 어쩌지?”

“…….”

득용의 말에 태오를 비롯한 멤버들이 주변을 둘러보았다. 확실히 자신들의 프로필 촬영과는 비교도 안 되는 규모였다. 시 외곽에 있는 커다란 창고. 어찌나 넓은지 창고 안에 세트장이 구역으로 나누어져 있을 정도였다. 관련 스태프 수도 비교가 되지 않게 많았고 그에 따른 카메라도 마찬가지였다.

“내가 전담 마크 할게. 잘 보살필 테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

“형도 정신없을 텐데요.”

태오의 말에 지호가 피식 웃으며 반문했다.

“나? 나한테 자리나 내주겠어? 태오, 너도 그렇고…. 그래도 너는 눈치 보이니 백업 댄서에라도 넣어 주겠지. 나는 어림도 없을 거다.”

“형….”

“그나마 득용이가 가능성 있지 않을까, 솔이랑.”

지호의 씁쓸한 말에 모두가 입을 다물었다. 그의 말대로 상황이 흘러갈 거라는 걸 지난 며칠간의 연습으로 충분히 알 수 있었다. 프로필 촬영 이후, 멤버들은 아직 공개되지 않은 노래의 안무를 먼저 배우게 되었다. 바로 은겸의 솔로 곡이었다.

연습생들의 무대 경험을 살려 주기 위해 백업 댄서로 활동하는 일은 모든 소속사가 오래전부터 활용해 오던 방법이었다. 큰 비용 없이, 아니 오히려 비용을 절감하면서 연습생을 카메라 앞에 세울 기회이니 회사로선 나쁠 것이 없었다. 그건 태오나 다른 멤버들도 마찬가지였다. 무대에 설 수 있고 어쩌다 한 번이라도 카메라에 얼굴이 비칠 기회인데 어쩐지 영 찜찜하기만 했다.

그도 그럴 것이 은겸과 함께 연습하는 내내 노골적인 차별을 겪었기 때문이었다. 단순한 차별이면 크게 상관없었다. 문제는 은겸이 너무도 지나치게 솔에게 상냥하다는 점이었다. 은겸을 익히 겪어 보고 알고 있는 모두에겐 그 모습이 무척 꺼림직했다.

이런 거 저런 거 뭐든 다 상관없고 좋았다. 그 성격이 어떻게 꼬여 있건 간에 은겸은 그만큼 노력했고 긴 시간을 달려왔기에 그의 솔로 활동은 당연하였다. 그런 것에 기인한 감정이 아니었다. 좀 더 예전, 한 숙소에서 동물원 우리에 있듯 몰려 살던 때부터 쌓여 온 감정들이었다.

태오와 가람, 지호는 은겸이 어떤 성격이고 어떤 식으로 사람들을 이용하는지 익히 알고 있었다. 특히나 태오. 그래서 그가 솔의 주변을 맴도는 게 마음이 편치 않았다.

안무를 함께 연습하는 내내, 은겸은 다른 멤버들과 솔을 분리하며 싸고돌았다. 물론 솔의 외모가 지나치게 뛰어나고 안무도 곧잘 따라오니 이뻐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은겸은 외모며 안무 소화 능력도 그 못지않은, 오히려 뛰어난 태오에겐 시종일관 냉랭한 반응이었다.

그리고 연습생 시절부터 익히 겪어 온 일. 포지션이 겹치는 지호를 향한 노골적 무시였다. 낮춰 본다는 게 아니었다. 말 그대로 일방적인 차단. 그래도 태오나 가람에겐 애써 사람 좋은 척이라도 하지, 그간 은겸은 지호를 무시로 일관했다. 그런 지호를 은겸이 뮤직비디오 촬영에서 나름 카메라를 받을 만한 푸시를 해 줄 거란 생각은 조금도 들지 않았다.

“솔이한테는 기분 나쁠 정도로 친절하게 굴더라. 찜찜해.”

“그래도 은겸 선배님 덕분에 생긴 기회니까. 우리 감사한 마음으로 열심히 해야죠.”

“우리 성실맨. 태오, 너랑 달리 나는 심사가 꼬여서 그런가. 괜히 꿍꿍이가 있는 거 같아서 기분 나쁘다.”

“…나도 조금 그래.”

지호의 말에 가람이 동의를 표했다. 솔은 엄연히 자신들의 멤버인데, 은겸은 연습 내내 솔과 팀이 별개인 것처럼 행동했다. 따로 데리고 나가거나 제 옆에 세워 두거나. 팀에서 분리해 놓는 느낌이 들 때마다 가람은 어쩐지 가슴이 철렁하고 불안했다.

“에이. 그냥 선배님이니까…. 그리고 우리 솔이 형이 워낙 비주얼로는 화젯감이잖아요. 이뻐할 수밖에 없죠.”

“단순히 그런 거면 다행인데. 아무튼 득용이 너 항상 말조심해.”

“네!”

다들 득용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기는 했지만, 막내의 생각처럼 마냥 순진하게 받아들일 수는 없었다. 솔에게도 은겸의 앞에서 말과 행동을 조심하란 말을 하고 싶었지만, 솔이 은겸을 너무도 잘 따르고 친밀해 보여 괜히 잘 지내는 사이에 괜히 초를 치는가 싶어 아무 말도 꺼내지 못했다.

“아무튼 난 한가할 테니까. 오늘 솔이는 내가 잘 챙길게.”

“나? 나를 왜?”

어느새 화장실에서 돌아온 솔이 지호의 뒤에 서 있었다. 등 뒤에서 들리는 솔의 목소리에 지호가 화들짝, 뒤를 돌아보곤 아무것도 아니라며 특유의 여우 같은 웃음을 씩 지어 보였다.

분위기가 묘했지만 솔에겐 멤버들 사이에 도는 그 묘한 기류에 신경 쏟을 만큼 여유가 없었다. 방금 막 화장실에서 포션을 사용하고 온 참이었다.

차마 오늘 촬영이 어찌 될지 몰라 안정의 포션은 마시지 못했다. 대신 지난번 프로필 촬영 임무였던 <첫인상 사로잡기!>를 클리어하고 얻은 ‘하급 체력 회복의 포션’을 대신 사용했다. 차를 타고 장시간 이동하며 체력이 62까지 떨어졌기 때문이었다.

네 바퀴 불신자 페널티야 차에서 내리면 바로 없어지는 페널티였고 안정의 포션은 본격적인 촬영에 들어갈 때, 아껴 사용해야겠다는 판단이었다.

새로운 포션의 등장에 이걸 어디에 쓰나, 획득한 날 밤에 고민했었는데 이렇게 효과를 확인하게 될 줄은 몰랐다. ‘하급 체력 회복의 포션’은 말 그대로 깎여 나간 체력을 30만큼 회복시켜 주는 포션이었다. 덕분에 60대였던 체력이 92로 하루의 시작을 비교적 쾌적하게 할 수 있었다.

“솔! 왔어?”

“괜찮아?”

“괜찮니. 솔아?”

“형! 속은 좀 괜찮아요?”

“어어…. 괜찮아졌어. 걱정했어? 미안. 이제야 약 효가 도나 봐.”

심장이 옥죄이는 긴장감은 해결되지 않았지만 그래도 체력이 회복되자 아파 보이는 기색은 사라졌는지. 솔이 어물쩍 대답하자 모두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솔은 어색하게 웃으며 멤버들을 바라보았다. 모두를 이렇게 걱정하게 만드는 것이 미안했다.

지난번처럼 안정의 포션을 사용하면 모두 이렇게 걱정하지 않아도 될 텐데. 잠시 고민했지만, 솔은 그 고민을 단호하게 접어 넣었다. 안정의 포션 개수가 그다지 많지 않았다. 비록 프로필 촬영 날, ‘아주 작은 행복’ 상태로 안정의 포션을 아낄 수 있었지만 안타깝게도 지금은 아니었다.

솔은 좀처럼 쉬이 펴질지 모르는 멤버들의 얼굴을 보며 애써 긴장감에 굳어 돌아가지 않는 머리를 굴려 보았다. 어떻게 해야 모두와 자신이 이 상황을 덜 힘겹게 헤쳐 나갈 수 있을지 머리가 아팠다.

‘‘아주 작은 행복’ 상태였으면 좋았을 텐데.’

순간 그런 생각이 솔의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아주 작은 행복 상태라면 안정의 포션 효과도 두 배가 되니 조금 더 여유가 생길 듯싶었다.

‘어떻게 해야 아주 작은 행복 상태가 될 수 있지…?’

솔은 멤버들을 바라보았다. 두 번의 ‘아주 작은 행복’ 모두 멤버들과 함께 무언가를 할 때 발생했다. 안무 연습을 할 때, 촬영할 때.

생각을 이어 나가던 솔은 문득 흠칫, 제 생각에 놀라 몸을 떨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이템 효과를 위해, 눈앞에 닥친 상황을 모면하려고 ‘행복’해지려 하는 자신이 너무도 이상했다. 행복이라는 감정이 자연스레 생겨나는 것이지 어떤 효과를 보고자, 필요에 의해서 행복해지길 원한다는 것이 기괴했다.

“솔아, 왜 그래? 뭐에 놀란 사람처럼.”

“어어, 지호 형. 아무것도 아니야…. 그냥. 좀….”

“사람 너무 많지? 카메라도…. 너무 걱정 마. 저번처럼 잘할 수 있을 거야.”

“으응….”

지호가 성큼, 솔에 어깨에 팔을 둘렀다. 생각에서 헤어 나오지 못한 솔이 지호의 어깨동무에 휘청거리자 그가 팔을 굽혀 솔을 꽉 끌어안았다. 평소보다도 지나치게 가까운 스킨십이었지만 필요로 행복해지려고 하는 자신의 변화에 놀란 솔은 상황을 제대로 인지하지 못했다.

솔이 넋을 놓고 지호의 품에 안겨 있는 사이, 스태프들 사이에 있던 영호가 황급히 멤버들을 향해 뛰어왔다. 그의 얼굴에는 난감한 기색이 역력했다.

“애들아, 여기 춥지? 그런데 어쩌냐 촬영이 딜레이 돼서…. 좀 더 기다려야 할 거 같아. 저쪽, 난로 있는 쪽에서 몸도 덥힐 겸 연습 좀 하고 있어.”

“네.”

“솔이는 약 한 번 더 먹을래?”

“아, 아뇨. 괜찮아요. 감사합니다. 형.”

“그래, 도저히 안 되겠으면 얘기해.”

“네. 그럴게요.”

영호의 말대로 도심에서 한참 떨어진 외곽. 허허벌판에 있는 커다란 창고는 난방이랄 것이 없어 실외와 똑같이 추웠다. 아니 오히려 햇빛이 없다 보니 창고 안이 더 차가웠다. 영호의 말에 착실히 대답한 멤버들은 호호 입김을 불어 보이며 전기난로가 놓여 있는 방향 쪽으로 이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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