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최애를 뽑고 싶어 (69)화 (69/192)

#69

조금 전 그런 대화를 나눴는데, 다시금 카메라를 들어 올리며 하는 민주의 말에 태오가 까만 눈으로 그녀를 잠시 쳐다보았다. 무표정했지만 그리 좋아 보이는 시선은 아니었다. 저보다 한참 위에 있는 그 시선에 민주가 급히 제 의도를 설명했다.

“보니까 솔이 친구, 카메라 앞이라 긴장하는 거 같던데 이렇게라도 익숙해지는 연습을 해야죠.”

“아…… 네. 그게 좋을 것 같아요.”

민주가 사족을 덧붙이자 태오는 그제야 티가 날 듯 말 듯 아주 작고 짧게 미소를 그렸다 지웠다. 그가 고개를 끄덕이자, 까만 머리카락이 살짝 흔들렸다. 민주의 말에 담긴 의도가 단순히 화젯거리로 그저 이용하려는 그런 속내가 아님이 느껴졌다.

사람들의 시선과 화제와 애정이 있어야 존재할 수 있는 아이돌의 길을 택한 건 자신이었다. 어쩔 수 없는, 이 사회가 돌아가는 방식이기에 머리로는 이해하지만 그런 식으로 이용당하는 게 마냥 기분이 좋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억울한 기분이 들었었다. 내가 그렇게 되고 싶어 그런 것도 아닌데.

직접 겪어 본 태오로선 절대 기분 좋은 일이 아니었기에 자신이 겪었던 일들을 친구들이 겪게 하고 싶지 않았다. 민주가 정말 진실로 솔에게 도움을 주고 싶어 꺼낸 말이란 걸 이해한 태오는 긴장을 풀고 솔이 서 있는 쪽을 바라보았다. 가람과 무언가 두런두런 이야기하고 있었다.

‘친구.’

태오는 조금 전 제 생각을 되짚어 보았다. 대체 언제부터 성솔을 포함해 ‘친구’라고 묶게 된 거지? 병실에서 대화를 나눈 이후로? 아니 그보다 훨씬 전이었다. 지호와 대화를 끝내고 화장실에서 마주쳤을 때, 어쩐지 그날따라 제법 의젓하게 아무 사이 아닌 사람에게만 할 수 있는 말이 있다고 했을 때부터였다.

역시 그런 대화를 하고 나면 더 이상 아무 사이일 수 있을 리가 없었다.

태오가 민주와 이야기하는 사이, 가람은 솔의 등을 토닥였다. 굳은 표정은 한결 나아졌지만, 솔이 어깨를 들썩이며 숨을 뱉어 그것이 신경이 쓰였다. 크게 들썩이던 어깨는 시간이 조금 지나자 점점 정상의 궤도로 돌아왔다.

등을 두드리는 가람의 손길에 괜찮다고 말하며 손을 내저었다. 휘휘 휘둘러진 솔의 손이 가람의 손바닥에 부딪혔다. 살짝 마주친 솔의 손가락이 얼음장처럼 차가워 가람은 반사적으로 하얗고 긴 손가락을 움켜쥐었다.

“손이 왜 이렇게 차? 추워?”

옷이 얇기는 했지만, 스튜디오 안은 그리 춥지 않았다. 히터가 돌아가고 있었고 조명도 강해 얇은 옷차림에도 충분히 활동하는 데 무리가 없을 온도였다. 가람의 말에 솔은 그제야 제 손바닥을 쳐다보았다.

소매가 가려져 있던 손을 쭉 뻗으니 원래도 하얀 손이 유난히 창백했다. 메이크업 덕에 얼굴에서 창백한 기운이 지워졌지만, 손바닥이나 손목 같은 곳은 가릴 수가 없었다.

‘진짜 잘하고 싶었는데….’

태오와 가람의 사정을 정확하게 알게 된 뒤로, 그 둘과 나름 진솔한 대화를 한 뒤로 그전에도 그렇지만 솔은 정말 진심으로 잘해 보고 싶었다. 데뷔하고 싶다던 태오의 말과 자기가 만든 노래를 멤버들이 불러 줬으면 좋겠다는 가람의 말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비록 꿈을 이룰 수 있게 큰일을 해내겠다는 거창한 바람은 아니었지만 적어도 더 이상 짐은 되기 싫었다.

그래서 거지 같은 특성에 경고 창이 반짝반짝 떠올라도 열심히 참고 임했는데. 그 마음과 달리 몸이 따라 주지 않았다. 솔은 잔뜩 쌓여 있던 피로도 경고 창을 확인하고 지워 버렸다. 촬영 당시엔 너무 긴장한 나머지 경고 창이 뜨는 것도 인지하지 못했다. 마지막 민트색 경고 창까지 확인한 솔은 잠시 고민하다 속으로 시스템 창 아이템 목록을 떠올렸다.

순간 기다렸다는 듯이 그의 눈앞에 민트색 창이 떠올랐다. 솔의 눈에 [안정의 포션 X5]라는 진한 글씨가 제일 먼저 눈에 들어왔다.

지난번에 사용해 보았을 때 1시간 동안 최고의 컨디션이 되었었다. 언제 어떤 상황이 닥칠지 몰라 그간 아껴 두었던 안정의 포션이었다. 사실 이번 퀘스트를 처음 받았을 때 솔은 그리 걱정하지 않았다. 기껏해야 사진 촬영이었고 못 나와도 어떻게든 한 장만 건지면 그만이란 생각에 ‘실패’할 수 없는 퀘스트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돌아가는 분위기를 보아 하니, 오늘 안에 사진을 못 찍을 수도 있는 것 같았다. 조금 전 가람과 득용이 하는 말을 듣고 있자니 사진작가의 마음에 정 들지 않거나 여러모로 문제가 있을 경우 다른 날에 별도로 재작업을 하는 일도 있는 듯했다. 그 말을 듣자마자 솔은 가슴이 철렁했다. 그런 변수가 시스템에 어떻게 받아들여질지 도박을 할 수는 없었다.

솔은 아이템 리스트에서 가람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잠시 다른 데에 신경 쓴 사이, 가람이 솔의 손을 두 손으로 조물조물하고 있었다. 가람은 자기 손을 일부러 비벼 온도를 올리고 솔의 손가락 끝을 잡아 꾹꾹 눌렀다. 너무 긴장해 손이 차가워진 듯하여서 해 준 마사지였다.

잠시 멍하던 솔이 정신을 차리고 제 손과 가람을 번갈아 쳐다보니 가람은 느른하게 웃으며 변명 아닌 변명을 내뱉었다. 얼마 전까지 이런 신체 접촉이 불편했었는데 기분이 묘했다.

“손이 너무 차가워서.”

언제부터 이렇게 스스럼없이 가까이 할 수 있었던 걸까, 정확히 기억나지 않았지만 예민하게 날을 세운 것보다는 나았다. 솔은 자신이 조금 무뎌지고 있는 듯싶어 이런 변화를 긍정적으로 생각하기로 했다.

“가람아, 우리 이거 촬영하는 거 얼마나 걸려?”

“대중없죠.”

솔은 어물쩍 웃는 가람에게 어깨를 살짝 들썩여 보이며 질문을 던졌다. 하지만 정작 대답은 득용에게서 돌아왔다.

“앞에 형들이 빨리 OK 받으면 빨리 끝나는 거고… 잘 안 되면 계속 늘어지는 거죠. 우리 이거 개별 컷 찍고 나면 단체 샷도 찍어야 할걸요?”

득용의 말에 솔은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이고 골몰히 생각했다. 포션의 제한 시간은 1시간이다. 얼마나 오래 걸릴지, 언제 자신의 순서가 될지 확신이 없는 상태에서 낭비할 수는 없었다. 좀 더 상황을 지켜보다 제 순서가 돌아오면 오늘은 이것의 도움을 받아야겠다. 솔은 고개를 끄덕였다.

되도록 티 나지 않게 스스로의 힘으로 해내고 싶었지만, 오히려 그런 고집이 오늘은 여러 사람을 피곤하게 만들 수도 있단 생각이 들었다. 태오의 말대로 이곳에서 시간과 돈을 쓰고 있는 스태프나 관계자들, 사진작가와 회사 말이었다.

‘태오가 뭐라고 했더라.’

솔은 태오가 했던 지적을 되짚어 보았다. 인상, 인상을 쓰고 있다고 했다. 다음 차례가 된다면 무조건 얼굴 펴야지. 솔은 일단 지금은 그것만 생각하기로 했다. 솔이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사이, 채민주와 태오가 세 사람에게로 다가왔다.

혼자만의 생각에 빠져 있던 솔은 소파에 가서 앉자는 민주의 말에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소파를 찾아 두리번거리는 솔에게 손바닥에 딱 들어오는 작은 사이즈의 검은 카메라가 들이밀어졌다.

카메라 렌즈와 순간 눈이 딱 마주친 솔은 조금 전 그러했듯이 또 딱딱하게 그 자리에 굳어 버렸다. 태오는 제 짙은 눈썹 위를 손끝으로 살짝 짚으며 그런 솔을 바라보았다. 평소 연습하며 카메라를 사용해 녹화할 때는 괜찮았던 솔이었다. 그때와 지금이 다른 점이 무엇일까.

“큰일이네.”

“잠깐만 카메라 좀 치워 주세요. 일단 쉬게 하는 게 먼저인 거 같아요.”

“진짜 그래야겠어요.”

태오가 채민주와 솔의 사이를 가로막고 섰다. 그의 말에 민주가 카메라를 내리자마자 솔은 크게 숨을 내뱉었다. 완전히 굳어 버렸다 싶었더니 숨도 참은 모양이었다.

“저쪽에 앉자. 좀 쉬어.”

“어, 응. 고마워.”

솔이 비틀거리자, 태오와 가람이 동시에 그를 붙잡았다. 짧게 눈짓을 주고받은 두 사람은 양옆에서 솔의 팔을 붙잡았다. 거의 반쯤 솔을 들다시피 한 두 남자는 솔을 소파 앞에 옮겨 놓고 난 뒤에야 붙잡은 팔을 놓아주었다. 태오와 가람이 손을 놓기 무섭게 솔은 털썩, 소파 위에 주저앉았다.

솔이 어깨를 들썩이며 숨을 빠르게 몰아쉬었다. 둥글게 그를 중심으로 모여 앉은 채민주, 득용, 가람과 태오 모두 말없이 그가 숨을 고르는 것을 기다려 주었다. 한참 그렇게 묵묵히 안정을 찾기를 기다린 끝에 솔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 하지만 돌아온 말은 주눅이 잔뜩 든 사과였다.

“미안해.”

“사과 그만해. 촬영 이제 시작이야. 벌써 사과하기 시작하면 오늘 온종일 사과만 해야 할 거야.”

“맞아. 솔.”

“맞아요. 형. 그리고 아직 제대로 해 보지도 않았잖아요. 이따 잘하면 다 OK예요.”

한눈에 보기에도 기가 잔뜩 죽은 솔의 사과에 태오가 단호한 눈으로 그와 시선을 맞추며 말했다. 옆에서 태오의 말을 듣고 있던 득용도 손가락을 동그랗게 말아 솔을 향해 쭉 뻗으며 제 딴에는 응원의 말을 더했다. 활기찬 그 모습이 솔과 대비되었다.

솔이 어느 정도 진정되어 보이자 채민주는 다시 카메라를 손에 쥐었다.

“순서 기다리는 동안 우리 짧게 이야기하는 모습 좀 담아요. 너무 부담 가지지 말고 그냥 편하게 수다 떤다고 생각해요.”

“네.”

“…네. 네!”

최대한 친절하고 부드러운 어조로 말을 꺼낸 민주의 노력이 무색하게 솔은 카메라에 시선을 고정한 채 한 박자 늦게 더듬더듬 대답을 했다. 시작도 전에 다시 얼어 버린 그 모습에 민주는 하마터면 대놓고 한숨을 내쉴 뻔했다.

솔은 카메라와 눈싸움이라도 할 기세였다. 눈 한번 깜빡이지 않고 완전히 꼿꼿하게 소파에 앉은 채로 굳어 버렸다. 그 모습을 바로 옆에서 차분히 지켜보던 태오는 채민주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혹시, 삼각대도 가져오셨나요?”

“삼각대는 왜요?”

“뭐가 문제인지 알 거 같아서요.”

태오의 말에 민주가 의문을 표했다.

“번거로우시겠지만 삼각대 사용해서 촬영해 주실 수 있을까요?”

태오의 정중한 부탁에 민주는 의미를 모르겠지만 등에 메고 있던 가방에서 주섬주섬 삼각대를 꺼내 펼쳤다. 카메라를 고정하고 소파에 옹기종기 모여앉은 네 남자가 한 화면에 잘 담기게 각도를 조절했다. 그녀가 삼각대 설치를 마치자 태오가 자리에서 일어나 득용의 옆, 솔에게서 대각선 위치인 자리로 가라는 듯 두 손을 뻗었다. 채민주는 그가 안내한 대로 득용의 옆에 앉아 솔을 바라보았다.

“일단, 간단하게 지금 기분이 어때요?”

“…긴장돼요. 어색하고… 또.”

“어라.”

민주가 묻자 한 박자 느릿하기는 했지만, 이번에는 솔이 얼지 않고 똑똑히 대답했다. 잠깐 사이 눈에 띄게 달라진 태도의 변화에 민주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태오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태오는 차분히 대답하는 솔에게 시선이 고정된 채였다.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