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
모두가 득용이 가리킨 방향을 바라보았다. 사실 플라스틱 의자 옆에 가죽 소파도 있었지만, 문제는 신분이었다. 계급 사회도 아닌데, 스튜디오 안에서 피사체인 연습생들은 눈치가 보였고 조심스러웠다.
누가 먼저 선뜻 앉으라고 자리를 내어 주는 게 아니면 앉기는 어려운 그런 분위기가 스튜디오 안에 있었다. 더군다나 촬영이 잘되어 분위기가 좋은 것도 아니었다. 영호와 대화를 나누는 사진작가도 팔짱을 낀 영 삐딱한 자세였다. 늘 생각한 대로 툭툭 말을 내뱉는 득용마저도 눈치를 살펴 태오에게 이런 질문을 할 정도니 쉽지 않은 분위기임이 확실했다.
아무리 눈치 없는 솔이라지만 솔도 그 정도의 상황 파악은 할 수 있었다. 더군다나 자신이 말아먹은 시작이었다. 좀 더 잘했더라면, 혹은 다른 멤버가 먼저 시작을 끊었다면 분위기가 이 정도로 냉랭해지지는 않았을 것이었다.
눈치가 보인 솔이 손사래를 쳤다. 사실 너무 정신이 없어서 힘들다는 생각도 들지 않았다. 그저 그 밝은 조명과 카메라 앞에서, 그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점만으로도 상태가 한결 나아졌다.
“나 괜찮아. 그냥 서 있을게.”
“솔이 형 내가 엎드려 뻗칠게요!! 내 위에 앉아요!”
무거워지는 분위기에 득용이 말도 안 되는 우스갯소리를 했다. 솔은 우스갯소리라고 생각했는데. 득용은 진심이었는지, 전선으로 복잡한 스튜디오 바닥에 득용이 냅다 엎드려 뻗쳤다. 당장에라도 솔을 위에 앉히고 팔 굽혀 펴기라도 할 득용의 기세에 가람이 고개를 내저으며 혀를 찼다.
“디케이. 시작도 전에 아이돌 그룹 내 군기 잡기 이런 거로 소문낼래?”
득용은 머쓱해하며 더러워진 손바닥을 탁탁 털고 자리에서 일어나선 가람을 향해 입을 쭉 내밀었다. 득용의 속내가 뭐였든 간에 솔은 가람의 핀잔에 살짝 웃음 지었다.
“가람이랑 지호 형 하는 거 보고 있어. 나 영호 형한테 다녀올게.”
“그래.”
솔의 표정이 풀어지는 걸 확인한 태오가 가람에게 솔을 맡기고 영호가 있는 쪽을 향해 걸어갔다.
조금 전 솔이 마지막으로 찍었던 사진이 띄워져 있는 모니터에 다가간 태오는 채민주와 영호가 솔에 대해 나누는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카메라 앞에서 저렇게 어는데, 도대체 오디션은 어떻게 통과했죠?”
“대표님이……, 제대로 된 오디션도 아니었어요. 그리고, 그때는 저 정도는 아니었거든요.”
“하긴, 주말 평가 때도 카메라 돌아갔는데…… 저 정도는 아니었죠.”
“하아…… 완전 오만상이네요.”
모니터 화면 가득 떠 있는 솔의 사진 모두, 악취라도 맡은 듯 미간을 찌푸리고 있었다. 차라리 솔이 득용처럼 아예 강한 얼굴이라면 저런 표정도 나쁘지 않았을 수도 있지만 솔은 수려한 미형의, 미인이었다. 건질 사진이 하나 없는 솔의 사진을 보며 민주와 영호는 서로 시선을 교환했다.
“카메라 앞에서 저렇게 굳는 거 빨리 극복해야 해요. 실장님은 아예 좌판 깔고 버스킹도 시켜 보시려는 거 같던데…….”
“아주 굴려 볼 거 다 굴려 보시겠다는 거군요.”
“네. 애들 각오 단단히 해야 할 거예요. 아까 말은 그렇게 했지만…… 아시잖아요.”
“예. 이번에도 무슨 바람이 불어서 어떻게 될지 모르는 거죠.”
민주의 말에 영호가 머리를 부여잡으며 고개를 저었다. 두 사람은 다시금 모니터 화면에 집중했다.
“차라리 아무 표정도 안 지으면 B컷이라도 고르겠는데…… 전부 다 인상을 쓰고 있어요.”
영호를 한 번, 모니터를 한 번 번갈아 본 민주도 자기 머리를 부여잡았다. 사실 따져 보자면 솔의 사진이 그렇게 최악은 아니었다.
인상을 쓰든 뭘 했든 간에 워낙 외모 부분에선 지적할 게 없는 솔이었다. 전에는 관리가 안 되고 떡 진 머리라든가 후줄근한 옷차림 같은 것들이 그의 외모를 잡아먹었지만 멀끔하게 세팅된 그의 모습은 당장 TV에 나와도 여러 사람을 사로잡기에, 충분한 외모였다.
문제는 더 이쁘게, 더 잘 찍을 수 있는 얼굴이라는 점이었다. 그래서 더 아쉽고 안타까웠다. 민주가 허탈하게 웃으며 말을 내뱉었다.
“웃긴 건, 그런데도 이 와중에 이쁘네요.”
“웃긴 게 아니라, 그래서 화가 납니다. 더 잘 찍어 줄 수 있는데 본인이 협조를 안 해 주네요.”
어느새 민주와 영호의 말을 듣고 있던 사진작가가 팔짱을 낀 채, 민주 쪽으로 몸을 돌리고 아주 퉁명스럽게 말을 뱉었다. 태오가 무어라 편을 들기도 전에 모처럼 영호가 매니저답게 그의 말을 가로막았다.
“일부러 그러는 건 아닙니다. 솔이가 오늘 몸이 안 좋기도 하고 이런 촬영이 처음이라 긴장을 많이 한 것 같아요.”
“간단한 프로필 촬영으로도 긴장하면 대체 어떻게 카메라 앞에 서서 밥 벌어먹어요. 그리고 지시했으면 듣는 시늉이라도 해야죠.”
하지만 돌아오는 말은 부드럽지 않았다. 틀린 말도 아니었다. 어려운 촬영도 아니었고 그저 적당한 표정에 적당히 서 있으면 알아서 끝날 일이었다.
돌아온 말이 꽤 모가 났지만 이미 감정 상한 사람에게 더 무어라 말을 해 보았자였고, 사진작가의 기분을 망쳐서 더 좋은 것도 없었기에 영호는 그냥 냅다 머리를 숙여 사과했다. 솔이가 아프다는 말도 영 거짓말은 아니었다. 차멀미를 대체 얼마나 심하게 하는지, 애가 차만 탔다 내리면 정신을 못 차렸다. 비틀거리던 솔의 모습을 보며 영호는 저래서 지방 행사는 어떻게 다닐지 걱정되어 혀를 찼었다.
“죄송합니다. 조금 쉬면 솔이, 잘할 거예요. 일단 다른 친구부터 촬영 부탁드립니다.”
“네. 빨리빨리 진행합시다.”
영호가 머리를 숙이자 그도 더 이상 뭐라 하기 어려웠는지 손을 휘휘 젓고는 영호의 제안에 수긍했다.
그간 영호에게 제대로 된 관리를 받지 못했던 태오는 그를 믿지 못해 제가 어떻게든 상황을 풀어 보려 직접 움직였다. 하지만 뒤에서 상황을 지켜보고 있자니 제법 영호가 매니저다운 말을 하고 있었다. 딱히 더할 말이 없어진 태오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사진작가와 대화를 끝낸 영호에게 한 번 더 부탁을 얹었다.
“영호 형, 성솔 순서를 제일 뒤로 부탁드려요.”
“그래, 그렇지 않아도 그렇게 말해 놨어.”
“감사합니다. 일단 분위기에 적응을 좀 해야 할 것 같아요.”
영호가 그랬듯이, 태오가 살짝 허리를 숙여 보이자 영호가 그의 어깨를 툭툭 두들겼다. 솔이 서 있던 자리에 대신 서 있는 지호에게 스태프 하나가 다가가 구불거리는 갈색 머리를 다시 정돈해 주는 것이 보였다.
“어어. 그래. 지호 들어간다. 태오야, 솔이 좀 잘 달래 봐 봐.”
솔에게 문제가 있었지만, 영호가 솔에게만 온전히 신경을 쓸 수 없는 일이었다. 지호의 촬영이 시작되는 듯하자 영호는 태오의 어깨를 한 번 더 세게 두들기며 적당히 일을 넘겨주었다.
영호가 자리를 옮겨 모니터 쪽으로 더 가까이 다가갔다. 지호의 촬영을 모니터링해 주는 것이었다. 그런 영호를 보며 태오는 솔에게로 다시 돌아가 조금 분위기를 전환시키고 숨이라도 편하게 쉬게 해 줘야겠다고 생각했다. 시간을 번 태오는 작게 한숨을 쉬며 몸을 돌렸다.
하지만 돌아서자마자 마주한 건 채민주와 카메라였다. 작은 그녀의 손에 쏙 들어가는 까만 카메라엔 붉은색 LED가 계속 켜진 상태였다. 그 빨간 작은 불빛이 신경 쓰여 태오는 다시금 영호에게 그러했듯 정중하게 채민주를 향해 말했다.
“이런 거는 편집해 주시는 거죠? 부탁드립니다.”
“그랬으면 해요?”
“네.”
“왜요?”
채민주가 카메라를 들어 올리며 물었다. 태오는 덤덤한 표정으로 눈을 살짝 내리깔았다가 다시 올곧게 고쳐 떴다. 냉정하거나 지나치게 현실적이라 볼 수 있겠지만 회사는 연습생의 편이 아니었다.
솔직히 편이란 말도 웃겼다. 엄연히 계약으로 맺어진 관계다. 그리고 그 계약도 아직 제대로 된 수익을 내기 전의 상품인 그들이기에 언제든 파기될 수 있었다.
수습할 수 없을 만큼 여론이 안 좋아질 사고를 친다거나, 혹은 가망이 없거나. 그리고 한때는 같은 데뷔 후보조였던 은겸 덕에 태오는 그런 유의 경험을 한 차례 한 적이 있었다.
채민주는 ‘왜’라고 물었지만 진짜 궁금해서 물은 것은 아니다. 그저 그녀가 들고 있는 카메라에 담길, 상품 가치가 있는 이미지와 그에 따른 대사를 듣고 싶은 것이었다.
기분이 좋지 않았다. 하지만 그 기분 좋지 않음도 태오의 덤덤한 얼굴에선 조금도 티가 나지 않았다. 태오가 이렇다 할 만한 반응을 보이지 않자, 민주가 먼저 그를 한번 쿡 찔러보았다.
“힘들어하는 조원을 챙기는 다정하고 믿음직한 리더의 이미지를 얻을 수 있잖아요.”
“…… 그런 이미지를 바라고 하는 행동도 아니고 성솔, 힘든 모습을 거름 삼고 싶지 않아서요.”
태오는 이미 그런 이미지를 이용하는 사람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 사람처럼 되고 싶진 않았다. 팀을 위해서든 자신을 위해서든, 그런 걸 이용했다간 화살이 결국 솔에게 돌아갈 것이었다. 무심하게 이야기했지만 태오의 말에 민주는 카메라를 슬쩍 옆으로 치웠다. 그러고는 카메라가 아니라 제 두 눈으로 태오를 빤히 쳐다보았다.
회사에 오래 있었던 장기 연습생이었는데 이렇게 마주 보기는 또 처음인 듯싶었다. 워낙에 선이 굵고 훤칠하게 잘생기고 어른스러워 느끼지 못했었는데 또 이리 보고 있자니 아직 솜털이 안 가신 애였다. 민주는 지금 자신이 애들 데리고 뭐 하는 건가 싶어져 제 단발머리를 쓸어 넘겼다.
대중들은 자극적인 걸 좋아한다. 이쁘고 화려한 것도 좋아하지만 반대로 아프고 괴로워하는 것도 좋아한다. 인정하기 싫지만 사실이었다. 반짝반짝 빛이 나는 아이들도 좋지만, 그 뒤에 감춰진 고통받는 날카로운 모습이 때로는 더 큰 화제와 흥미를 유발하기도 한다.
민주는 태오를 잠시 더 빤히 바라보다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태오는 기다렸다는 듯이, 다시 한번 고개를 숙여 보였다. 조금 전 영호가 한 것보다 훨씬 더 정중한 인사였다.
“감사합니다. 솔이가 좀 쉬어야 할 거 같은데. 저쪽에 앉아도 될까요?”
태오의 말에 민주는 그가 가리킨 소파와 태오를 번갈아 보다 탄성을 내뱉었다. 갑자기 진행된 일에 정신이 없어 아이들에게 미처 신경을 쓰지 못했다. 그러고 보니 솔이나 태오뿐 아니라 다른 멤버들도 멀찍이 떨어져서 모여 서 있는 게 보였다.
“참! 그래요.”
민주가 고개를 끄덕이자 태오는 솔과 가람, 득용이 쭈뼛거리며 서 있는 쪽으로 발길을 옮겼다. 그가 두 걸음을 내딛기도 전에 민주가 다급히 태오를 붙잡았다.
“잠깐만요! 아니, 아니다. 우리 소파에서 쉬면서 잠깐 얘기하는 것 좀 찍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