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최애를 뽑고 싶어 (62)화 (62/192)

#62

“전에 말이야.”

“응?”

태오를 똑바로 바라보지도 더는 말을 붙이지도 못하게 되어 버린 솔이 이불 속에서 손과 발을 한참 꿈질거렸다. 귓속말하듯, 정말 가깝게 다가온 태오에게 놀란 솔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를 올려다보았다. 놀란 솔이 큰 소리를 내뱉자 태오는 검지를 입가에 대고 다시금 ‘쉬’ 하며 바람이 새는 소리를 내었다. 다행히 가람은 아직 세상모르고 잠들어 있었다.

“나랑 비슷한 일 겪었다 했잖아. 너는 어땠어?”

“나? 나는 별로 모범적인 답을 주지 못하는데.”

태오의 물음에 솔은 멀뚱히 그를 쳐다보고 눈만 깜빡거렸다. 이런 질문을 받을 줄은 몰랐다. 딱히 타의 모범이 되는 타입도 아니었고 조언해 주기보다는 늘 조언과 잔소리를 받는 편에 속했던 솔이었기에 자신이 어떻게 대처했는지에 대해 질문을 들은 건 처음이었다.

막상 입 밖으로 자신이 한 일들을 말하려 하니 부끄러움이 밀려와 솔은 슬쩍 잠이 오는 척 눈을 감았다. 눈을 감자 숨결이 닿을 만큼 가까워진 태오의 작은 움직임까지 눈을 떴을 때보다 더 또렷하게 느껴졌다.

“너랑 다르게 도망쳤지. 다 포기하고 불편하고 날 슬프게 만들고 힘들게 만드는 모든 것에서.”

말하고 나니 더욱이 부끄러워 귀가 새빨갛게 익었다.

“기억하기 싫어서 다 잊어버리고 자책하고. 좋지 않고 하지 말라는 건 다 했어.”

“여기로 도망쳐 온 건가?”

“…원래 하던 걸 못 하게 되었거든…. 아니지 내가 못 하게 만든 건데….”

태오의 이어진 질문에 솔의 감긴 눈이 번쩍 뜨였다. 이 세계로 오려 한 것이 자의는 아니었지만, 어찌 보면 결과적으로 그래 보였다. 솔은 처음 태오와 만났을 때와 달리 선뜻 ‘그렇다’라고 말하지 못했다. 가람이 아직도 아이돌 할 생각 없냐고 물었던 그때처럼.

지금 자신이 느끼는 이 복잡하고도 이상한 감정과 어쩌다 이곳에서 너희와 함께 있게 되었는지 설명할 수 없음에 솔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솔은 도망치기 선수였다. 어쩌면 처음부터 무용이 아니라 달리기 같은 걸 해야 했었을지도 몰랐다. 태오의 질문에 솔은 어쩌면 불가항력이 아니라 예견된 순서였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주환의 결혼, 졸업하지 못하는 대학, 곧 떠날 의찬, 더 이상은 할 수 없게 된 무용.

단순히 상황을 모면하려고 힘들 때마다 도망쳤던 일들이 한데 합쳐져 더 큰 상실로 솔을 찾아왔다. 솔이 더 이상 도망치길 원하지 않아도 눈덩이처럼 불어나 계속 쫓기게 되었다. 스스로 그만두었으니 다시는 무용을 한다고 말할 수도 없었고 대학 생활도 스스로 망친 것이나 다름없었다.

주환과 의찬이 떠나고 나면 이렇다 할 친구, 지인도 남지 않는 것도 본인이 뿌린 씨였다. 그래서 그날, 주환과 닮은 게임 속 캐릭터를 보며 도망치고 싶다고 생각했을지도 몰랐다. 아무것도 남지 않게 되어 버린 현실이 아니라 적어도 화려하게 웃고 있는 주환을 닮은 은겸이 있는 곳으로 말이었다.

말도 안 되는 이야기지만 불현듯 그런 생각이 들었다. 말로 표현할 도리가 없었고 어떻게 포장하여 말해도 태오는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어쨌든 눈앞의 그에게 넌 게임 캐릭터야, 라고 말하는 꼴이지 않은가. 정신 병원에 가기 딱이지.

“나도 잘 설명을 못 하겠네. 아무튼 거기엔 사실 내 자리도 없었나 봐.”

솔은 고개를 들어 태오를 빤히 쳐다보다 손을 살짝 뻗어 보았다. 너른 어깨에 손가락 끝이 닿자 그 약간의 닿음에도 단단함과 따뜻한 온기가 느껴졌다. 단순히 게임 캐릭터라고 현실이 아니라고 말할 수 없었다. 이젠 오히려 이 삶이, 옆 침대에서 곤히 자는 가람이, 자신의 손끝에 느껴지는 태오는 누구보다 생생하고 열정적으로 살아 있었다. 솔은 더할 말을 찾지 못하고 옆머리를 긁적였다.

“어쨌든, 그래서 여기에 이렇게 있으니 그것도 도망친 거라고 해야 하나?”

어색하게 웃음을 흘린 솔은 슬쩍 태오의 눈치를 살폈다.

“나는……. 여기가 네 자리인 거 같아.”

“…….”

“이제 자리를 찾은 것처럼 편해 보여.”

잠시간의 침묵 끝에 느닷없이 돌아온 태오의 말에 솔은 입술을 꾹 다물었다. 붉은 기가 선명하게 도는 얇은 입술이 한껏 짓눌리고 뒤틀려 더욱 붉어졌다. 태오의 그 말에 솔은 순간 울컥했다. 눈물이 핑 돌았다.

속으로는 ‘아니야. 내 머릿속에 문제가 있어서 지금 그냥 아무 생각도 없는 거야.’라고 읊조렸지만 정작 입 밖으로 말을 내뱉지는 못했다. 콧잔등이 시큰거리고 눈앞이 뿌옇게 변해 솔은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태오가 망가진 얼굴을 보지 못하게 솔은 이불을 한층 더 끌어 올려 이불 밖으로 눈만 빼꼼 내밀었다.

“…고마워.”

“뭐가?”

“내 자리인 것 같다고 해 줘서.”

더 이상 숨길 수가 없게 목소리가 떨렸다. 거의 울음에 가까운 목소리로 솔은 애써 눈물을 참으며 말을 이어 나갔다. 태오에게 그런 말을 들으니 정말 여기가 오히려 자신의 자리인 기분이었다.

방황을 끝내고 다시 시작할 새로운 자리를 찾은 기분에 갑자기 가슴이 벅차오르고 눈물이 샘솟았다. 솔은 이불의 끝을 두 손으로 꼭 잡은 채 말을 이어 나갔다. 필시 이불을 내리면 표정이 굉장히 못났을 게 분명했다.

“갑자기 하루아침에 내 자리가 사라진 기분이었거든. 어느 날 말도 안 통하고 내가 알던 곳이 아닌 다른 세계에 떨어진 기분이라고 해야 하나.”

“…성솔?”

“니한테…. 나한테 그 일이 벌어지고 나서. 나는 그냥 주변을 빙빙 돌면서 살았거든. 배부르면 안 될 거 같았고 좋아하는 일을 하면 안 될 것 같았어. 멀쩡하게 잘 살면 안 될 거 같아서 혼자 겉돌았는데….”

완전히 울먹이는 솔의 목소리에 태오가 눈을 크게 뜨고 솔을 내려 보았다. 이런 표정의 태오는 또 처음이었다.

“분명, 내가 원해서 그렇게 한 일이었는데….”

분명 자처했다. 불쌍히 여기는 시선이 싫어 피해 다녔고 괜찮은 척했고 못되게 굴었다. 무용 선생님들에게도 매몰차게 이젠 이런 거 못 한다고 단호하게 못을 박았었다. 다 자처해서 한 일이었는데 그로 인해 텅 비어 버린 사람이 되었다.

“내 자리가 없어져 버렸어.”

텅- 비어 버렸다. 붙잡고 싶고 담아 두고 싶은 것이 없으니 더 도망치기 쉬웠다. 그렇게 비어 버린 솔에게 네 자리를 찾은 것처럼 편해 보인다는 태오의 그 말이 가슴을 빠듯하게 채워 주었다.

따뜻하게 차오른 감정들이 무어라 형용할 수 없게 감동스러워 솔은 끔뻑끔뻑 큰 눈을 깜빡이며 눈물을 떨어뜨렸다. 괜한 청승이라 생각하며 솔은 손등으로 눈가를 벅벅 문질렀다. 지금 누구보다 힘든 건 태오인데 정작 자신이 질질 짜고 있는 게 낯 뜨거웠다.

“미안. 지금 힘든 건 넌데. 나는 그래도 이제 괜찮거든. 시간이 많이 흘러서…”

“시간이 흐르면, 결국엔 괜찮아지긴 해?”

“…응. 그런 거 같아.”

태오가 피식 웃으며 묻자 솔은 눈가를 문지르고 숨을 잠시 고른 뒤에 대답했다. 아주 밝고 활기차게 그렇다고 대답해 주고 싶었지만, 그러기엔 조금 양심에 찔렸다. 하지만 정말 최근 들어 솔은 아주 괜찮게, 좋아지고 있었다.

솔이 계속 흐르는 눈물을 거칠게 닦아 내자 태오는 조심스레 제 큰 손을 그의 어깨에 올렸다. 웅크린 어깨를 묵직한 힘이 내리누르자 솔은 눈가가 새빨갛게 붉힐 정도로 거칠게 문지르던 손을 멈추었다. 그러곤 태오가 천천히 토닥, 토닥, 그의 어깨를 두들기기 시작했다.

“선배님들 콘서트에 짧게 무대에 설 수 있는 기회가 있었었어. 3분이 채 될까 말까 하는 시간이었는데. 그걸 보려고 가족들이 오던 중이었어.”

태오의 이야기는 여러 사람을 통해 건너 듣다 보니 솔은 그에게 벌어진 일에 자세한 내막은 몰랐다. 사실 자세한 사정을 아는 이는 그리 많지 않았다. 워낙 말수가 적은 태오기도 했고, 이미 그가 휴식을 끝내고 회사로 돌아왔을 땐 어느 정도 소문이 퍼진 상태였기에 구태여 말할 필요도 없었다. 특히나 남 이야기를 떠들기 좋아하는 촉새가 있다 보니 태오의 입으로 이렇게, 이 일에 대해 직접 이야기하기는 솔이 처음이었다.

태오는 눈물을 훌쩍이는 솔을 빤히 쳐다보았다. 왜일까. 사실 그리 친한 것도 아닌데, 친하기로 따지자면 자는 가람이 더 친했다. 하지만 정작 지금 꺼내는 이야기는 가람에게도 이렇게 자세히 한 적 없는 이야기였다.

“관객석에 앉아서 날 보고 있다고 생각했어. 그래서 더 열심히 해야겠다. 다른 연습생들보다 더 눈에 띌 수 있게. 그러고 내려왔는데 영호 형이 하얗게 질려서 병원에 가야 한다고 하더라.”

그날따라 회사에서 티켓까지 마련해 주었었다. 연습생이 되고 오랫동안 제대로 춤추는 모습 한번 보여 준 적 없으니 이참에 보여 드리는 게 어떠냐고. 감사하다고 넙죽 받아 아이처럼 들뜬 마음으로 연락했었다.

“여동생이 노래 부르는 걸 좋아했어. 보조석에 앉아서 자기가 부르고 싶은 노래를 트는 것도 좋아했어. 어머니는 그래서 늘 뒷좌석에 타셨지.”

어쩌면 자신이 아니라 여동생이 가수가 되어야 했을지도 몰랐다. 그랬다면 앞좌석에 탔던 건 자신이 되지 않았을까. 여동생이라면 더 잘하고 있지 않았을까. 동생은 자신과 달리 밝고 쾌활하고 재미있는 사람이었다. 분명 많은 사람이 좋아했을 것이다.

태오는 상념에 잠긴 채 말을 이어 나가며 솔의 어깨를 토닥였다. 어깨를 타고 전해지던 떨림이 어쩐지 진정되기는커녕 더 심해진 것 같았다.

“음주 운전이라는데 가해자가 이제 겨우 대학생이었어. 가해자 부모님이 오니까 애처럼 울더라.”

“…….”

“그걸 보는데 울고 싶지 않았어. 그래서 그런지 아버지를 보냈는데도 눈물이 안 났어.”

술에 취해서 인사불성이면서도 연락받고 온 부모를 보자 엉엉 울음을 터뜨리며 ‘나 어떡해.’ 하던 그 모습이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이 난다. 바닥에 주저앉아서 펑펑 우는 모습을 보면서 태오는 나는 저렇게 울지 말아야지. 그렇게 다짐했었다. 어차피 이젠 그렇게 울어도 받아 줄 수 있는 사람도 없었다.

아버지는 그가 아끼던 차와 함께 그렇게 떠났고 여동생은 껍데기만 남아 버렸다. 어머니는 다시 이전과 같은 일상으로 돌아가기엔 불편한 몸이 되었다. 울지 말아야지. 운다고 해결해 줄 수 있는 사람이,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이 태오에겐 더 이상 없었다.

“2분 56초. 노래 한 곡이었는데 동생한테 그걸 못 보여 줬다. 다시 깨어났을 땐 좀 더 길게 병원에서도 볼 수 있게 해 주고 싶어.”

태오는 더는 솔의 어깨를 두드려 주지 못했다. 손바닥을 타고 전해지는 마른 어깨가 무거운 감정을 삼키느라 사시나무처럼 덜덜 떨어 토닥이기를 멈추고 대신 꽉, 붙잡아 주었다. 태오는 자신을 올려다보는 솔과 눈을 맞추고 덤덤한 표정으로 말했다.

“깨어나려면 아직 멀었는지 데뷔하기가 쉽지 않다.”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