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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애를 뽑고 싶어-61화 (61/192)

#61

병실보다 밝아진 복도, 카트의 바퀴가 굴러가는 소리. 분주하게 하루를 맞이하는 간호사의 걸음걸이. 익숙하지 않은 소음에 솔은 조금 뒤척였다.

이른 새벽이라 쌀쌀한 것도 같아 몸을 웅크리고 돌아누웠던 솔은 조금 딱딱한 느낌의 침대에 비로소 자신이 숙소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살짝 눈을 떠 보았다. 잠에 취한 눈이 정말 찰나같이 떠졌다가 이내 감겼다. 다시 잠을 청하며 솔은 얼핏 본 풍경이 이상해 눈을 감은 채로 미간을 찌푸렸다.

‘으응.’ 하는 꿍얼거리는 소리를 내며 다시 잠들려 하는데, 계속 머릿속에 얼핏 스쳐 본 것들이 떠올랐다. 흘끔, 솔은 제가 본 것이 제대로 본 게 맞는지 한쪽 눈만 떠 보았다. 두 눈을 다 반짝 뜨기는 너무나도 싫었다.

한 눈만 트인 시야에 어김없이 보상받으라는 시스템 창이 보였고 그 너머로 태오가 보였다. 바닥에서 한 뼘 정도의 높이로 올라온 게 고작인 보호자 침대에 걸터앉아, 등은 벽에 기댄 채 눈을 지그시 감고 있었다. 긴 다리가 터무니없이 낮은 침대 높이에 제대로 자리 잡지 못하고 엉성하게 뻗어 있었다. 그 모양새가 억지로 다리를 구부리고 앉은 커다란 동물 같았다. 이를테면 윤이 나는 검은 갈기를 가진 말이나 그런 동물 말이다.

솔은 조용히 눈을 바꿔 떴다. 한쪽만 뜨고 있자니 뻑뻑한 느낌이었다. 조용히, 병실 한 귀퉁이 자그마하게 난 창으로 들어오는 일출의 빛이 그의 발끝에 닿았다. 마지막으로 그를 보았던 때와 달라진 점이라곤 조금도 없었다. 같은 의상, 조금의 흐트러짐도 없는 머리칼. 미동도 없는 눈썹.

영호가 분명 그의 가족이 위급한 상황이라 병원에 갔다 했는데, 그런 일이 있었던 사람으로 보이지 않을 만큼 새벽의 병실에 앉아 있는 태오는 고요했다. 사정을 모르는 이가 보았다면 그저 조금 피곤해 보인다 여길 정도였다. 마치 솔이 그 사고가 나기 전에 보러 가려 했던 한겨울의 바다처럼. 그는 잔잔하고 무거웠으며 시리고 고요했다.

그래서일까, 정작 태오는 솔을 손이 많이 가고 답답해 탐탁지 않게 여길지도 몰랐지만, 솔은 태오를 보고 있자면 마음이 차분해졌다. 솔이 무슨 실수를 하든지 간에 그는 눈썹 한 번만 꿈틀거리고 겨울 바다처럼 묵묵히 철썩철썩 파도만 실어 나를 것 같았다.

겨울 바다를 닮았다.

시리고 거센 북풍이 불고 한적하고 을씨년스럽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테지만 솔은 여름보단 겨울의 바다가 좋았다. 모두가 바다를 찾는 시기가 지나, 너무 추워 인적이 드문 시기가 되면 오히려 바다는 더욱 파랗고 맑아지곤 했다. 귀가 떨어질 것처럼 시린 바람이 불어도 그 차가운 바닷바람을 맞고 나면 답답한 모든 것들이 쓸려 내려가 시원해지는 것 같았다.

태오는 겨울 바다를 닮았다. 솔은 그렇게 생각하며 입꼬리를 살짝 끌어 올렸다. 기분이 약간 몽롱했다. 눈뜨자마자 마주한 풍경이 한껏 구겨진 태오였지만 그 배경은 익숙했다.

어젯밤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중요한 부분은 까맣게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러니까, 지호와 득용과 즐겁게 놀고 숙소에 돌아와서 건물 복도에서부터의 기억이 없었다.

아니, 정확하게는 누군가를 마주쳤다는 기억까지는 있었지만 한데 뭉뚱그려져 세세하게 떠오르지 않았다. 그저 무슨 일인가 벌어졌고 그 후로 영호가 온 시점부터가 기억이 났다. 또 늦은 밤 가람과 나누었던 이야기와 꽤 편안하고 즐거웠던 느낌이 그 탁한 기억 속에도 강렬하게 남았다. 그래서 머릿속이 영 희뿌옇고 탁한데도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이런 적은 처음이라 실실 혼자 바보처럼 웃음을 흘리고 있는데 태오가 눈을 떴다. 끔뻑, 말없이 짙은 눈동자를 깜빡인 그는 솔과 눈이 마주치자 대번 검지를 제 입술에 가져다 대었다. ‘쉿.’ 그가 내는 바람 소리에 솔은 누운 채로 고개를 끄덕였다.

태오는 벽에 기댔던 몸을 일으켜 세웠다. 막상 그의 움직임이 퍽 무거웠다. 그는 몸을 끌어당겨 솔이 누운 침대에 바짝 기울였다. 그러고는 속삭이듯 아주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가람이 좀 더 자게 하자. 잠든 지 얼마 안 됐어.”

솔은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속삭이듯, 숨을 많이 머금고 내뱉어진 태오의 목소리는 그 형태가 명확하지 않음에도 무척 낮고 차분했다.

“넌 언제 왔어?”

“좀 됐어.”

“숙소로 가지 않고…?”

“응. 신경 쓰여서.”

일상 대화 하듯 태오가 대답하자 솔은 두 눈을 비볐다. 태오와의 거리가 지나칠 정도로 가까웠는데, 머리가 몽롱해서인지 가까이서 본 태오가 너무 초연해서인지 약간 꿈같았다.

그 묘한 분위기와 기분에 취해 솔은 피식 웃음 지으며 어깨를 움츠렸다. 이불이 흘러내려 가며 느껴진 찬 기운에 솔은 오싹함을 느끼며 두 손을 모아 베고 몸을 더욱 웅크렸다. 그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무척이나 태오의 이야기를 경청하는 듯한 자세가 되어 버렸다. 하지만 정작 먼저 말을 꺼낸 건 태오가 아니라 솔이었다.

“괜찮아?”

“너는 괜찮아?”

솔이 조곤조곤히 묻자 태오는 대답 대신 같은 질문을 솔에게 돌려주었다.

“나? 뭐가?”

“…밀어서 넘어졌다며.”

“어…. 괜찮은 거 같아.”

정확히 어떤 사건이 있었는지, 그 당시의 기억이 온전하지 않은 솔은 아무 생각 없이 반응했다가 황급히 고개를 끄덕였다.

‘밀어서 넘어졌다.’ 그렇구나, 그렇게 된 일이구나. 기억도 없지만, 솔은 그러려니 고개를 끄덕였다. 가끔은 이런 상황에 익숙해져 가고 이럴 때만 빠릿빠릿하게 돌아가는 눈치가 우스웠다. 갑자기 오한이 드는 기분이라 솔은 흠칫, 어깨를 털었다. 그 모습에 태오는 잠시 빤히, 그를 내려보다 흘러내린 이불을 끌어 올려 잘 덮어 주었다. 마치 솔이 추워한다는 것을 알고 하는 행동 같았다. 지금도, 늘 연습실에서도.

이불이 목 언저리까지 끌어당겨지자 솔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입가에 그리며 웅크렸던 어깨를 조금 풀었다.

“미안하다. 내가 좀 더 일찍 알아차렸어야 했어. 그랬으면 이렇게까진 안 됐을 거야.”

솔의 잘못을 꾸짖거나 왜 진작 말하지 않았느냐는 말 대신 자책이 돌아왔다. 태오의 표정은 무거웠지만, 솔은 어쩐지 멍청한 웃음이 나왔다. 가람도 제 자신을 탓하고 솔도 제 자신을 탓했다. 그런데 이젠 태오도 제 앞에서 스스로를 탓하고 있었다. 잘 기억이 안 나지만 흐릿하게 남아 있는 기억 속의 득용도 무언가가 자기 탓이라며 미안하다 사과를 했던 것 같다.

어쩐지 다들 자기 탓만 하고 있었다. 순진해 빠져서 누구 하나 남 탓을 해도 될 텐데. 다들 하나같이 너무 착했다. 그렇게 착하기만 했다간 어느 날 모난 돌처럼 툭 튀어나온 자신에게 찔리면 많이 아플 텐데. 생각이 또 이상한 방향으로 제멋대로 흘러가기 시작했다.

“…요즘 너희에게 집중하지 못했어.”

태오의 목소리에 솔은 흩어지던 집중력을 다시 다잡았다. 집중하지 못한 건 태오가 아니라 지금 이야기를 듣고 있는 자신이었다. 분명 상태 창에 [특성 ‘머릿속의 지우개’가 활성화되었습니다.] 라는 문구가 파랗게 반짝이고 있을 것이다. 태오의 목소리에 혼자만의 생각에서 벗어난 솔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당연하지. 힘들었잖아.”

“…….”

“그리고 ‘나’라는 골칫덩어리가 들어왔고. 여러모로 신경 쓸 게 많았어. 놓치는 게 당연해…. 가람이도 그래서 너한테 먼저 얘기 못 했을 거야.”

당연했다. 그는 더 중요하고 더 크고 무거운 문제를 가지고 있었다. 며칠쯤 자리를 비우고 한참 만에 나타나 ‘미안. 사정이 있었어.’라고 해도 모두를 입 다물게 할 수 있는 더 큰 가족이란 문제였다. 오히려 지금 여기에 없어도 이상할 것이 없는 인물이 바로 태오였다.

솔은 유난히 검은 태오의 눈동자를 빤히 바라보았다. 한결같이 올곧고 순수해 무언가 좋은 말을 해 주고 싶었다. 문제는 자신이 그리 말을 수려하게 잘하지 못한다는 점이었다. 그런 의미로 내뱉은 말이 아니었는데 무표정하던 태오의 얼굴에 살짝 우울한 기색이 곁들었다.

“…그게 날 더 고민하게 해.”

태오가 웃었다. 썩 기분 좋은 웃음은 아니었다. 어딘지 안타까운 마음이 드는 그런 아주 작은 미소였다. 솔은 낯선 그의 미소에 잠시 할 말을 잃고 빤히 바라보다 한참 만에야 입을 열었다.

“어떤 점에서?”

“내 이런 사정을 가람이나 멤버들이나 회사가 신경을 쓰고 배려할 때마다. 내가 피해를 주고 있다고 느껴. 그만두고 내가 있어야 할 곳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느껴지기도 하고.”

“네가 있어야 할 곳은 여기잖아. 데뷔조 리더 태오.”

이곳에 와서 태오를 만나 늘 리더답게 열심인 그의 모습만 접해서일까, 아니면 그를 처음 본 것이 의찬의 핸드폰 화면 속 그 게임 일러스트여서일까? 다른 태오는 상상이 가질 않았다. 솔은 아주 당연한 사실이라는 듯 말했다.

“너 없으면 매일 아침에 나 누가 깨워? 지호 형이 혼자 다 하려면 너무 힘들 거야.”

솔은 태오가 반박할 틈을 주지 않고 계속 조잘거렸다. 속삭이듯 아주 작은 목소리였지만 태오가 그를 봐 온 이래로 조금의 쉼도 없이 아주 빠르게 말을 이어 나갔다. 솔의 일방적인 말이 이어져 대화라고 보기도 뭐했다.

“다들 연습도 설렁설렁 하지 않을까? 무엇보다 내가… 제일 위험하지.”

“오늘, 아니 지금 너 뭔가 달라 보여.”

그간 연습 벌레라고 회사 내부에서 인정받던 태오보다 더한 연습을 하면서 자신이 제일 위험하다고 말하는 솔이 귀엽고 우스워 태오는 허탈한 웃음을 터뜨렸다. 귓속말하듯 작게 속삭이면서도 생각한 대로 다 입 밖으로 쏟아 내는 모습이 재미있었다.

태오가 슬쩍 웃음을 터뜨리자 솔은 더 얼빠진 얼굴이 되었다. 지금 태오의 웃음은 고요했던 겨울 바다에 하얗게 파도가 부서지는 듯했다. 차갑고도 거세었지만 시원한 느낌이 드는 웃음이었다.

“나? 졸려서…? 잠이 덜 깼나 봐.”

솔은 얼떨떨한 얼굴로 태오를 맹하게 바라보며 더듬더듬 대답했다. 분명 아주 시원한 웃음이었는데, 어쩐지 솔의 뺨에 열기가 올랐다. 이불을 턱 바로 아래까지 끌어 덮어서일까? 추웠다가 더웠다가 온도가 아주 제멋대로였다.

“그보단…. 좀 느슨하고 편해 보여.”

“편해. 누워 있잖아.”

정작 느슨하고 편해 보이는 건 태오였다. 느닷없는 더위에 얼굴이 붉어진 솔은 오히려 이불을 더욱 끌어당기며 딴소리를 내뱉었다. 그가 말하는 ‘편함’이 그런 것이 아님을 알면서도 눈치 없고 모르는 척 일부러 딴소리했다. 그런 솔의 대답에 태오는 말없이, 소리 없이 조용히 웃기만 했다.

주변에서 벌어진 여러 일에 한풀이 꺾인 태오는 오늘 평소와 달리 묘했다. 솔은 어쩐지 태오를 더는 똑바로 바라볼 수가 없어 괜히 눈길을 흘렸다. 잠시 두 사람 사이에 침묵이 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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