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
“…미안해. 정말 미안해. 이렇게 심각한 일이라고 생각 못 했어. 나 때문이야.”
솔의 사과는 거의 울먹임에 가까웠다. 입을 열 때만 해도 그저 미안함과 죄책감이 앞섰는데, 막상 사과를 뱉고 나니 자신이 또 이 관계를 망쳤다는 생각이 들어 결국 울음이 터져 나왔다.
짝사랑했던 주환을 보낸 전날은 비록 조금 비관적이었다 해도 평소와 다를 바 없던 어느 날 아침에 이 세상에 떨어졌다. 억지로 자신을 절벽으로 몰아붙이는 상황과 의지할 데 없는 곳에서 이제 막 마음을 붙이고 의지할 수 있게 된 상대를 또 이렇게 저 스스로 떠나게 만드는구나 싶었다. 순간 미안함과 서러움, 슬픔, 자신에 대한 분노 모든 것이 한데 뒤엉켜 솔의 뺨을 타고 눈물이 흘러내렸다.
고개를 푹 숙인 탓에 솔의 눈물을 가람은 보지 못했다. 눈시울이 화끈거렸고 물기로 가득 찬 시야는 희뿌옜다. 가람의 닳아 때가 탄 운동화가 흐릿하게 보였다. 중력을 거스르지 못하고 솔의 눈에 고였던 물방울이 바닥에 똑, 떨어졌다.
솔의 떨리는 목소리에 가람은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고개를 어찌나 푹 숙이고 있는지, 솔의 길고 하얀 목에 뼈마디가 툭툭 도드라졌다. 부러질 것처럼 위태로워 보이고 곧 꺾일 사슴의 목처럼 연약했다. 가람은 그 하얀 살결을 보며 오히려 미안해해야 하는 건 자신이라 생각했다.
“아니야. 솔아.”
가람은 차 안에서 솔이 자신에게 해 주었듯이, 하얗게 세도록 주먹 쥔 솔의 손을 감싸 잡았다. 마디가 톡톡 도드라진 하얀 손이 지나칠 만큼 차가웠다. 가람은 저도 모르게 솔의 손을 잡은 손에 꽉 힘을 주었다.
“네 탓이 아니야. 그 사람이 잘못된 거지…. 네 탓이 아니야. 오히려… 나 때문에 네가….”
끝까지 말을 다 잇지 못하고 가람은 울컥함에 입을 꾹 다물고 그저 솔을 바라보았다. 혹시나 그 사람이 문을 열까 봐, 그 캄캄한 숙소 안에서 가람은 현관문 문고리를 잡고 서 있었다.
문밖에서 득용과 지호의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못 들은 척했다. 이내 두 사람이 솔의 이름을 다급히 외칠 때, 솔에게 변고가 생겼다는 것을 알아차렸지만 그런데도 문고리를 잡은 손을 놓지 못했다. 걱정되었고 솔에게 큰일이 난 것은 아닌가 두려웠다. 하지만 그보다 이 문을 열면 혹 그 사람과 마주칠까 그것이 더 두려웠다.
겁쟁이. 애초에 자신이 아니었다면 솔과 모두가 이런 일을 겪지 않았을 것이다. 문제의 근원인 주제에 비겁하게 도망쳤다. 그 자리에 솔을 남겨 두고. 솔에게 ‘아직도 아이돌 하고 싶은 생각 없어?’ 그렇게 물었던 날 밤. 그의 가방을 들어 주며, 쓰러졌다면 태오가 아니라 자신이 솔을 안고 병원에 갔을 거라고 말했었다.
진심이었다. 진심으로 애쓰고 최선을 다하고 있는 그를 지켜 주고 싶었다. 그런데 정작 오늘 현실로 닥치니 단단한 철문 뒤에 숨어 버렸다. 눈물이 그렁그렁한 채 놀라 토끼 눈이 된 두 눈동자를 똑바로 마주할 염치가 없어 가람은 시선을 피했다.
“그 안에서 다 듣고 있었어. 너한테 사고가 일어났는데, 네가 위험했는데… 나는.”
“무서웠지.”
“…솔아?”
물기가 가득한 그 한마디가 가람의 입을 다물게 했다. 자신이 겪은 일이라도 된 것마냥 불안하게 떨리며 걱정이 가득 담긴 목소리에 가람은 더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솔의 그 한마디에 가슴이 확 놓였다.
“나는 불이 다 꺼져서 네가 숙소에 없는 줄 알았어. 아니, 우리 모두 태오랑 같이 나갔나 했거든.”
제 시선을 피하는 가람을 똑바로 바라보며 솔은 제 눈가에 그렁그렁한 눈물을 닦아 냈다. 너 때문이라고, 네가 저지른 안일한 행동 때문에 모두가 피해를 보고 번거롭게 되었다고 원망해도 모자랄 판에 도리어 가람은 미안하다고 사과했다. 그 어두운 숙소에 갇혀 지옥 같은 시간을 보낸 데에 자신이 한몫을 거들었는데.
“나였으면 엉엉 울면서 살려 달라고 그랬을 거야.”
“미안해…. 미안해.”
“나야말로 미안해. 핸드폰 잃어버린 거 그날 말했어야 했는데. 아니지, 혼자 그렇게 돌아오는 게 아니었어. 다들 그렇게 당부하고 말렸는데. 내가 너무 나 좋을 대로 생각했어. 미안해.”
돌이켜 보니 모든 것이 후회되었다. 그런다고 돌이킬 수 있는 것도 아니었지만. 밖에서 일어나는 소란을 들으면서 문밖으로 나오지 못한 가람? 수십 번 수백 번 이해할 수 있었다. 자신이었으면 애초에 살려 달라며 도망쳤을 것이다. 할 수 있다면 다른 사람을 팔기라도 했을 것이다.
“…네 말이 맞아. 그 사람이 잘못된 거지. 네가 그 사람과 안 마주쳐서 다행이야.”
“미안해.”
“그만 사과하자. 우리 둘이 하루 종일 사과만 하겠다. 영호 형이 보면 놀라겠어.”
솔은 얼굴에서 완벽하게 울음을 닦아 냈다. 그러고는 지호와 득용이 가르쳐 줬던 것처럼 입꼬리를 씩 끌어 올리고, 덤덤히 본인의 힘든 이야기를 하면서도 당당했던 태오를 떠올리며 말했다.
“그리고 나 이제 생각보다 강해.”
뜬금없는 솔의 말에 가람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약간 얼빵한 그 얼굴과 이런 말을 내뱉는 자신이 너무도 허세 가득해 웃음이 새어 나왔다. 솔이 웃음을 터뜨리자 가람은 아무래도 상관없어졌다. 청춘 드라마를 찍는 것도 아닌데 다 큰 성인 남성 둘이 울다가 웃다가 가관이었다. 둘 다 눈물지으며 후회로 얼룩진 사과를 내뱉는 것보단 뭐든 나았다.
영호가 떠나고 2인실 병실에 누운 솔은 발을 꼼지락거렸다. 영양제 수액 방울이 똑똑 떨어지는 걸 보다 지금쯤 잠들었을 득용의 얼굴이 불현듯 떠올라 느닷없는 웃음을 터뜨렸다.
“왜 웃어?”
옆 침대에 누워 있던 가람도 잠이 안 오기는 매한가지인지, 솔이 웃음을 터뜨리자 아예 몸을 돌려 누웠다.
“득용이가 떡볶이랑 순대 사 왔거든? 그거 너한테 다 먹이고 억지로 운동 끌고 나갈 거라 했어.”
“…누구 마음대로. 하여간.”
“득용이 오늘 엄청나게 먹었는데. 운동 메이트 없어서 큰일 났다.”
가람이 저를 바라보고 눕자 솔도 어둠 속에서 눈을 반짝이며 그를 향해 돌려 누웠다. 분명 그런 일을 당하고 병실 신세가 되었지만 이렇게 얼굴을 마주 보고 누우니 수학여행에 온 학생이라도 된 기분이었다.
“미안해.”
“그만 사과하라니까. 너 사과하면 나도 같이 해야 해. 미안해, 가람아.”
“아니야. 내가 미안해.”
“…끝도 없다.”
가람이 솔을 빤히 쳐다보다 울적한 얼굴로 사과를 내뱉자 솔도 질세라 그에게 사과했다. 솔이 끊지 않는다면 가람은 밤이 새도록 사과할 기세였다. 솔은 혀를 내두르고 이 끝도 없는 사과를 끊어 낼 다른 화제로 말을 돌렸다.
“나 무용할 때, 형이랑 누나들이랑 엄청나게 큰 무대에 섰었거든.”
“응.”
“그런데 중간에 다음 안무를 잊어 먹은 거야. 머리가 백지가 되어서 이상한 위치로 가 버렸어.”
“그래서?”
마주 보고 조용한 병실에서 이야기하고 있자니 묘하게 가슴이 두근거렸다. 솔이 그날의 일을 되새기며 속삭이듯 웃음을 머금고 이야기하자 가람은 언제 그랬냐는 듯 얼굴에서 울적함을 지워 내고 그의 목소리에 집중했다.
“무대가 끝나고 나서 선생님이랑 다들 누가 틀린 거냐고 물어봤는데 나라고 말 못 했어.”
“안 들켰어?”
“응. 다들 구분하기 어려울 정도로 화장이 엄청 진했거든. 무대 화장이라.”
“다행이네.”
“그때는 그렇게 생각했거든? 근데 지금 생각해 보니까 내 앞하고 뒤에 서는 형들은 내가 틀린 걸 알았을 거 아냐.”
가람의 맞장구에 솔은 배시시 웃음 지었다. 전에는 그날의 일을 생각하면 불편하기만 했는데 어쩐지 오늘은 그리 힘들지 않았다. 오히려 조금 편안한 기분이 되어 솔은 눈이 가물거렸다.
오늘 하루 너무 많은 일이 있었다. 두 번째 주말 평가를 끝내 퀘스트를 성공하고 득용과 지호와 함께 외출도 하고. 지금은 또 이렇게 가람과 나란히 병실에 앉아 옛이야기나 하고 있고. 일이 많아도 너무 많았다. 슬슬 수마가 몰려왔지만 그래도 솔은 가람에게 이 이야기를 꼭 해 주고 싶었다.
“돌이켜 보니까 모를 수가 없었어.”
“다들 알면서 말 안 한 거야?”
“응. 그랬었나 봐. 실은 내가 틀린 걸 다 알았었는데 그냥 다들 모른 척한 거였나 봐.”
이제 와 생각해 보니 모를 수가 없었다. 매일 같이 연습한 안무고 각자의 자리가 있었다. 솔의 앞사람은 그 자리가 덩그러니 비어 있으니 필시 솔이 실수했다는 걸 알아차렸을 거다. 그때 자신의 앞과 뒤에 누가 자리했었는지 떠올려 보았지만 이젠 시간이 흘러 얼굴도 기억나지 않았다. 그저 나이 차이가 나는 별로 친하지도 않았던 형들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그런데 그게 왜?”
“그냥, 그때 그 형들이 무슨 생각으로 모른 척했는지 지금 알 거 같아서.”
가람이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 얼굴이 순진해 보여 솔은 씩 웃었다. 갑자기 그에게 자신이 멋진 형이 된 기분이었다. 비록 몸은 스무 살이었지만.
“이 형이 모른 척 눈감아 준다는 얘기야.”
“형?”
“있어, 그런 게. 몰라도 돼.”
“제대로 얘기해 줘, 솔.”
“그냥 형님의 아량이라 생각해.”
“그러니까, 네가 왜 형이야.”
나름 멋지게 선심 써서 이야기했는데 돌아온 가람의 목소리는 어딘지 불만이 가득했다. 가람의 추궁에 솔은 대답 대신 그냥 눈썹만 찡긋거리고 두 눈을 감았다. 아마도 가람은 자신이 왜 형인지 끝까지 모를 것이다. 설명해 줘도 이해하지 못하겠지.
사실은 내가 스물다섯이라고 말해 보았자 농담으로 치부할 것이다. 그래도 상관없었다. 딱 농담처럼 가볍게, 솔은 그렇게 말을 뱉었다. 갑자기 졸음이 밀물처럼 밀려들었다. 귓가에 가람의 느른한 목소리가 계속 들렸지만, 솔은 더 대답하지 못했다. 어느새 완전한 어둠이 찾아오고 솔은 얼굴에 드리운 웃음도 천천히 사그라들었다.
“솔, 자?”
가람의 목소리가 조용한 병실에 울려 퍼졌다. 빤히 마주 보고 있는 하얀 고운 얼굴에 두 눈이 감긴 것을 보고 있으면서도 가람은 재차 그의 이름을 불렀다.
“솔.”
나지막한 부름에 일정한 규칙을 가진 고른 숨소리만이 돌아왔다. 가람은 어둠 속에서 솔을 마주 보며 차마 입 밖으로 내뱉지 못했던 말을 조심스레 꺼내 보았다.
“…다음엔, 내가 꼭 지켜 줄게. 네가 모른 척해 주지 않아도 되게… 비겁하게 굴지 않을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