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
“아니야.”
쉽사리 입을 열 거라 생각 안 했지만, 좀 우유부단하고 주변의 분위기에 휩쓸리기 쉬운 가람치고 돌아온 대답이 단호했다. 가람의 대답에 태오는 팔짱을 끼고 살짝 비딱하게 비켜섰다. 태오가 무언갈 고심하거나 신경이 쓰이는 것이 있을 때마다 습관적으로 취하는 자세였다.
“그런데 왜 그러는 거야.”
“뭐가.”
“온종일 핸드폰만 보잖아. 잠을 자기는 해?”
“…….”
솔이 숙소에 들어오기 전까지 아침잠에 허덕이는 1순위가 가람이었다. 하지만 요즘 들어 지호가 깨우기도 전에 미리 일어나 있고 나아가 거실 소파에 덩그러니 앉아 있기도 했다. 밤중에 잠깐 일어나 물을 마시러 거실로 나왔던 태오는 소파에 앉아 핸드폰을 들여다보고 있는 가람을 보며 놀랐었다.
어두운 거실에 푸른빛을 발하는 핸드폰 화면만 공허한 눈으로 빤히 쳐다보고 있는 모습이 이상해 몇 마디 했더니 제 방으로 들어가 버렸었다. 얼굴에 내려앉은 다크서클하며, 밤새 잠도 자지 않고 핸드폰을 들여다보는 듯했다. 가람에게 무척이나 힘들었던 시기의 모습이 겹쳐 태오는 조심스럽게 그 이야기를 꺼내 물었다.
“요즘 힘들어서 그러는 거야? 아니면… 다시 시작된 거야?”
스토커와 악플에 시달리던 그 시기, 가람은 손에서 잠시라도 핸드폰을 떼어 놓지 못했다. 핸드폰, 아니면 PC. 본래 성격 자체가 무뚝뚝한 태오로선 최대한 부드럽고 조심스럽게 물었지만, 그 특유의 분위기까지 완화시킬 수는 없었다. 그런 태오의 어조가 다소 추궁하듯 느껴졌을까? 가람의 표정이 날카롭게 바뀌며 버럭 높을 소리를 내었다.
“아니라니까!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넌 네 일이나 신경 써!”
“뭘 알아서 한다는 거야. 제대로 말이나 해.”
날카롭게 돌아온 가람의 대답에 태오의 미간도 대번 찌푸려졌다. 신경질적으로 제 할 말만 쏟아 내고 가람이 획 몸을 돌리자 태오가 손을 뻗어 그를 붙잡았다. 태오의 손이 어깨에 닿자마자 가람은 질색하며 그를 뿌리쳤다. 심상치 않은 반응에 태오의 얼굴이 더욱 딱딱하게 굳었다.
“강가람.”
태오의 낮은 목소리가 더욱 깊게 내려앉았다. 서늘하리만치 엄격한 저음이 그저 나지막이 이름을 부르는 것만으로도 사람을 위축되게 했다. 태오의 부름에 가람은 제 머리카락을 뒤로 넘기며 고개를 치켜들었다. 그 행동에서 무척 짜증스럽고 불안한 뉘앙스가 묻어 나왔다.
태오가 무어라 한마디를 더 얹으려던 찰나, 그의 핸드폰이 진동했다. 핸드폰 화면에 떠오른 연락처는 병원에 여동생과 함께 있을 어머니였다. 태오는 우선 제 앞에 있는 문제부터 해결할 생각으로 울리는 핸드폰을 무시하고 가람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아무 말 없이 침묵한 채 대치한 두 사람의 사이에 ‘우웅’ 하는 진동음이 자리했다. 흘깃, 태오의 핸드폰에 떠오른 글씨를 확인한 가람은 그에게 턱짓했다.
“너부터 전화나 받아. 급한 걸 수도 있잖아.”
태오도 전화가 영 신경 쓰였는지. 가람의 제안에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간 경험을 바탕으로 태오에게 이렇게 연락이 왔을 땐 분명 좋지 못한 일이나 무척 급박한 일이 있는 것이었다. 태오는 이를 꽉 물었다가 놓았다. 선이 굵고 날카로운 턱에 근육이 도드라졌다 사라졌다.
태오는 등을 돌려 전화를 받았다. 핸드폰 너머로 여성의 울먹이는 목소리가 흘러들어 왔지만, 가람은 애써 못 들은 척했다. 태오의 입에서 기어이 ‘지금 갈게요.’라는 말이 나오자 가람은 이 대치 상황이 종료되었음에 혼자 걸음을 내디뎠다. 가람이 훌쩍 홀로 떠나자 태오는 다급히 그의 팔을 붙잡았다. 이번에는 뿌리치지 않았다.
“…다녀와서 다시 얘기해.”
“진짜 괜찮아. 별일 없어. 그냥 핸드폰 좀 했을 뿐이야. 나는 뭐 이제 웹 서핑도 하면 안 돼?”
“그게 아니라…!”
“샘플링 같은 것 좀 찾느라 며칠 좀 그러기는 했어. 근데 하루에 핸드폰 몇 시간 할 건지 허락 같은 것도 받아야 하는 거냐.”
“추궁하는 게 아니라 걱정돼서 물어본 거야. 성솔도…!”
“됐어. 병원에서 전화 온 거잖아. 가기나 해.”
“…….”
비아냥거리는 가람의 말투에 태오는 제 이마를 문질렀다. 갑자기 머리가 아파져 왔다. 가람과 짧은 실랑이를 하는 와중에도 태오의 핸드폰이 요란하게 울려 댔다. 이번에는 매니저인 영호였다. 필시 소식을 전해 들어 연락한 것이겠지.
태오는 눈앞의 친구 가람보다 조금 더 급하고 심각한 문제를 가지고 있었다. 가람의 말처럼 일단 그것부터 해결하는 게 맞았다. 가람에게 고개를 끄덕여 보이자 그는 홀로 걸음을 옮겼다.
“여보세요. 네, 영호 형. 택시 타고 갈게요. 괜찮아요.”
본인 일도 아닌데, 전화를 건 영호의 목소리가 태오보다 더 다급했다. 태오는 무척이나 침착하고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오히려 영호를 진정시켰다. 전화를 끊은 태오는 숙소 방향으로 걸어가는 가람을 불렀다.
“가람아!”
태오가 부르자 가람은 멈춰서 뒤를 돌아보았다.
“다녀와서 얘기하자.”
목소리가 작아 잘 들리지 않았지만 벙긋거리는 입 모양이 ‘그래.’였다. 숙소 입구에 다다른 가람을 보며 태오는 뒤를 돌아 빠르게 뛰어나갔다.
***
태오가 떠나고 홀로 숙소로 돌아온 가람은 짐 가방을 아무렇게나 거실에 던져 놓고 차가운 맨바닥에 드러누웠다. 전등불 하나 안 켜져 있었지만 워낙 햇볕이 잘 드는 숙소기에 적당히 밝고 적당히 어두워 조금 안정감이 들었다.
태오에게 그렇게 함부로 굴 필요는 없었는데, 지나치게 예민하게 반응했다. 인제 와서 후회한들 엎어진 물을 주워 담을 수 있는 건 아니었지만, 오히려 그 반응 때문에 더 의문을 가질 게 분명했다. 태오처럼 좀 더 침착하고 차분하게 대응했어야 했다. 하지만 그게 마음처럼 쉽지 않았다. 그 일만 떠오르면 온갖 분노와 감정들이 폭발해 뒤엉켜 스스로를 컨트롤할 수가 없었다.
“하아….”
가람은 깊게 한숨을 내쉬며 차가운 거실 바닥에서 몸을 웅크렸다. 혼자라서 그런 걸까, 어쩐지 연습실 바닥보다 숙소 거실이 더 싸늘하게 느껴졌다. 태오의 말이 신경이 쓰였다.
‘추궁하는 게 아니라 걱정돼서 물어본 거야. 성솔도…!’
여기서 특히나 ‘솔이’ 부분이 말이었다. 역시 그날 아침에 무언가를 본 것일까.
솔은 몰랐으면 했다. 이따금 연습실에서 불안한 모습을 보이는 그를 보면 자신이 힘들었던 그때가 떠오르고 위태로워 응원해 주고 붙잡아 주고 싶은 기분이었다.
동병상련이라는 걸까. 본의 아니게 손찌검까지 해 버렸다. 솔은 괜찮다 웃으며 말하지만 영 신경 쓰였다. 첫 만남부터 모든 것이 삐걱거려 늘 그에게 안쓰러운 마음이 들었다. 하지만 지난번에 한 말은 진심이었다.
차분하고 맑은 그의 목소리가 좋았고 곡이 완성되면 꼭 그가 홀로 불러 주었으면 했다. 애초에 솔을 보고 만든 노래이니 필시 완성되면 둘이 잘 어울릴 것이었다.
“같이 놀러 갈 걸 그랬나.”
태오와 이렇게 부딪힐 줄 알았다면 차라리 솔과 외출을 하는 편이 나았을 뻔했다. 늦은 후회를 잠깐 한 가람은 이내 고개를 가로저었다. 지금 같은 상황에 괜히 자신과 붙어 있어 봤자 좋을 일이 없었다. 전에도 가람이 주변 지인과 시간을 보내면 영락없이 지인의 사진을 찍어 보내던 사람이었다. 갑자기 그 스토커가 했던 일이 떠오르자 다시금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멤버 중 그 누구도 타깃이 되게 하고 싶지 않았다. 태오도 마찬가지였다. 태오는 가람이 가지고 있는 문제를 말하라 했지만, 누구보다 스스로의 일로 버거울 그에게 걱정을 더 주고 싶지 않았다. 어디서, 어떻게 지켜보고 있을지 모르는 일이니 숙소 밖에선 대화를 나누거나 붙어 있는 것도 피하고 싶었다.
자신만 당하는 거면 괜찮았다. 이미 한 번 망가졌던 거, 두 번 망가진다 한들 뭐가 달라질까. 표적이 되는 것은 저 혼자만으로도 충분했다. 괜히 자신과 붙어 다니다 솔이나 다른 친구들이 눈에 띄기라도 한다면, 더는 생각하기도 싫었다.
자신이 겪었던 그 일을 멤버들이 겪는다 생각하니 상상만으로도 숨이 턱 막히고 화가 치밀어 올랐다.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그냥 이 감정의 덩어리를 분출해 이것의 근원인 스토커를 마구잡이로 휘두르고 싶었다. 앞뒤 분간 없이 소리 지르고 할 수만 있다면 그 사람에게 해를 입히고 싶었다. 그래 봤자 똑같은 최악의 인간이 될 뿐이겠지만 적어도 속이라도 시원해질 것 같았다.
거실 바닥의 냉기 덕일까 머리가 차갑게 가라앉자 급격히 피로가 몰려들었다. 태오의 말대로 이틀간 거의 잠을 자지 않았다. 불안감이 커져 잠을 잘 수가 없었고 커뮤니티에 새롭게 올라온 글이 없는지 확인하느라 눈이 빠질 듯이 아프기도 했다.
조금 쉬어야겠다. 화로 들끓던 마음이 가라앉자 그제야 필시 좋지 않은 일로 연락받고 갔을 제 친구의 안위가 걱정되고 미안함이 들었다. 가람은 태오가 돌아오면 다시 잘 이야기하고 사과해야지, 생각하며 소파 위로 자리를 옮겨 웅크린 채 쪽잠을 청했다. 오랜만에 혼자 남은 숙소가 지나치게 적적했다.
우웅-.
주머니에서 울리는 진동 소리에 가람은 경기를 일으키듯 화들짝 올라 일어났다. 잠이 든 지 꽤 시간이 지났는지, 거실에 더는 햇빛은 남아 있지 않았다. 웅크려 잔 덕에 어깨가 빠질 듯이 아파 왔지만, 가람은 주머니에서 계속 울리는 핸드폰부터 확인했다. ‘우웅, 우웅’ 끊임없이 울리는 진동은 전화가 왔을 때와 달랐다. 메시지가 쉼 없이 계속 도착했을 때의 울림이었다. 가람은 섬뜩함을 느끼며 빨간색 알림이 가득한 메시지 함을 눌렀다.
가람아~
왜 친구들이랑 안 놀아?
사이 안 좋아?
(지호가 떡볶이를 먹고 있는 사진, 유리창에 빛이 반사되어 반쯤 얼굴이 하얗게 나왔다.)
얘 귀엽더라 나 얘 번호도 알아
얘가 솔이지? 친구. 얘 너무 이쁘더라 너 말고 얘 좋아할까? 엄청 착하던데
(연한 분홍색 후드 티를 입고 웃는 솔의 사진)
“…시발.”
마지막으로 욕설을 입 밖으로 뱉어 본 게 언제였더라. 메시지가 가득 쌓여 스크롤이 잔뜩 생긴 화면을 넘기는 가람의 손가락이 바들바들 떨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