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
[교통사고 현장 인근을 지나갑니다. 체력 -3]
[현재 남은 체력 : 89]
연이어 감소되면서 순식간에 체력이 뚝 떨어졌다. 큰 사고도 아니고, 앞차와 뒤차가 추돌해 범퍼에 조금 페인트가 묻은 정도의 사고였다. 갓길에 세워 둔 채 보험사를 기다리는 그 모습을 창문을 통해 흘끔 봤을 뿐이었다.
그날의 사건은 연상도 되지 않는 아주 가벼운 접촉사고였다. 그런데 단지 그 장면을 목격했다고 갑자기 체력이 큰 폭으로 떨어졌다.
느닷없이 80대로 뚝 떨어진 체력에 솔은 어지럼증과 속이 울렁임을 느끼며 좌석 시트에 몸을 기댔다. 멀미를 하는 것처럼 울렁이는 속에 고개를 살짝 들어 올리고 눈을 감자 지호가 빤히 그를 쳐다보았다. 눈을 감고 있음에도 얼굴이 따가울 정도로 시선이 느껴졌다.
“솔아, 너 혹시 멀미해?”
“어…. 응. 조금.”
여기선 그렇다고 해 두는 게 나을 것 같았다. 정확히 따지자면 멀미는 아니었지만 구차하게 설명하고 싶지도 않았고 말을 길게 할 상황도 되지 못했다. 솔은 슬쩍 미간을 찌푸렸다.
하얀 얼굴이 창백해지며 미간을 찌푸린 모습이 퍽 예민해 보였다. 당사자는 모르지만 득용과 지호는 대놓고 빤히, 솔의 얼굴을 구경했다. 일전에 숙소에서 말했던 ‘더 괴롭히고 싶은 솔’이란 것은 바로 이런 걸 두고 하는 말이었다.
고른 일자 눈썹이 한껏 찡그려졌고 얇지만, 모양 좋게 붉은 입술을 하얀 이가 살짝 짓눌렀다. 예민하고 힘겨워 보이는 그 모습이 조금 가학적인 심리를 부추기는 그런 면이 있었다. 솔은 전체적으로 차갑고 우울해 보이는 분위기가 있었는데, 힘들어하는 사람에게 이런 말이 좀 그렇지만 그 분위기와 지금의 표정이 퍽 잘 어울렸다.
솔의 얼굴을 관찰하던 지호는 그의 미간에 주름이 점점 깊게 파이자 입술을 살짝 삐죽였다. 그가 무언가 신경 쓰이는 게 있거나 마음에 차지 않으면 하는 일종의 불만 표현 같은 것이었다. 입꼬리가 둥글게 말려 올라가 있는 지호는 늘 항상 웃는 얼굴이었는데, 입술을 한쪽 방향으로 삐죽이면 그게 꼭 비웃는 것처럼 보이곤 했다.
“차 탄 지 5분도 안 됐는데. 그 정도면 조금이 아니라 심하게 하는 건데?”
“어… 음…. 밴이 익숙하지 않아서 그런가 봐.”
솔이 크게 숨을 들이마시며 대답했다. 입을 여니 어쩐지 정말 구토를 할 것 같아 ‘합’ 소리가 나도록 다시 크게 다물었다.
“맞다. 솔이 저번에도 토했었지. 설마 또?”
“아니… 그 정도는 아니에요.”
“불안하다. 형 어제 세차했어. 봉투 줄까?”
솔과 지호의 대화를 들은 영호가 끼어들었다. 깜빡이를 켰는지 똑딱거리는 일정한 소리가 솔의 신경을 더욱 곤두서게 했다. 솔이 이미 전적이 있었던 터라 불안했는지, 영호는 기어이 앞좌석에서 봉투를 꺼내 뒤로 내밀었다. 득용이 잽싸게 그 봉투를 받아 들어 솔의 손에 쥐여 주었다. 손에 들리는 비닐의 질감에 솔은 더욱 인상을 찌푸렸다.
“큰일이다. 이제 진짜 데뷔하고 그러면 차 엄청나게 타고 다녀야 하는데…. 매번 멀미약 챙겨야겠네.”
“익숙해지면 괜찮아질 거예요.”
괜찮아질 거다. 홀로 춤을 추는 것조차 못하던 자신이 멤버들 앞에서, 그리고 오늘 소수이긴 했으나 사람들 앞에서 춤을 추었듯이 언젠가는 괜찮아질 것이다.
“쉬는 날이라고 너무 늦게까지 놀지 말고. 적당히. 알지, 지호야?”
“네.”
“확인 전화할 거야.”
“들어갈 때 보고할게요.”
“그래, 근처에 있을 거니까 무슨 일 생기면 연락하고.”
솔이 득용에게 부축받아 밴에서 내렸다. 다행히 그 이후로 특별히 더 체력이 깎이는 일은 면했지만, 솔은 거의 토하기 직전에 지상을 두 발로 밟을 수 있었다. 얼굴이 창백하게 질려 비틀거리며 일어나자 한 발 앞서 먼저 내린 득용이 그의 손을 잡아 주었다. 영호의 당부에 맏형 노릇을 하는 지호가 뒷짐을 지고 고개를 연신 끄덕였다. 빨리 영호를 보내 버리고 싶은 기색이 역력했다.
상가가 즐비한 번화가 뒷골목에서 세 사람을 내려 준 영호는 밴을 끌고 빠르게 사라졌다. 한적한 골목 뒤편이었지만 누가 봐도 연예인이 탈 법한 밴에서 기다란 기럭지의 남자 셋이 내리니 지나가던 사람들의 시선이 모였다.
셋은 더 말하지 않고 모자를 눌러쓴 채 빠르게 발걸음을 놀렸다. 골목을 벗어나 자신들을 쫓던 시선이 어느 정도 사라지자 지호가 걸음을 멈춰 세웠다. 그 뒤를 쓰러질 듯 말 듯, 휘적휘적 간신히 따라오던 솔도 그제야 걸음을 멈추고 숨을 돌렸다.
“괜찮아?”
“이제 내렸으니까 괜찮아.”
“그럼 솔이 거부터 해결하자.”
“솔이 형 옷부터요?”
“응. 얘 지금도 봐라. 보는 내가 춥다 추워.”
솔은 제 낡은 겉옷을 한껏 여몄다. 대로변이라 바람이 더욱더 세게 몰아쳐 춥긴 추웠다. 밥을 먹든 모처럼의 외출을 즐기든, 일단 추위를 뚫고 움직일 복장을 갖추는 게 우선일 듯싶었다. 지호의 지적에 모두가 동의를 표했다.
딱히 옷 욕심도, 관심도 없는 솔은 기본적인 단순한 디자인이 여럿 있는 패스트 패션 매장에서 옷가지를 골랐다. 주머니가 그리 넉넉하다고 할 수 없었고 이미 80대로 깎여 버린 체력 탓에 여러 매장을 한가하게 돌아다니고 싶지 않았다.
무엇보다 사람 많은 번화가는 질색이었다. 하도 오랜만에 외출해 자신이 이런 번화가를 즐기지 않는다는 것도 잊어버렸다.
학교에 다닐 적에도 주환과 의찬이 양쪽에서 팔짱을 껴 놀러 나가기 싫다는 그를 억지로 끌고 나가곤 했다. 그렇게 가기 싫어했으면서 막상 두 사람과 돌아다니기 시작하면 결국 그날 하루는 즐겁게 기억되곤 했다. 솔은 입가를 가리고 숨을 골랐다.
밴에서 내리자마자 빠르게 진정되었던 두통과 매스꺼움이 두 사람을 떠올리자 다시 살아나는 듯했다. 솔은 옷가지 사이를 헤쳐 기모 처리된 두꺼운 까만 맨투맨 티셔츠를 골라잡았다.
“아, 형! 다른 색이요.”
“검은색이 무난하잖아. 태오가 검은색 입고 춤추면 적당히 있어 보인다 했어.”
“아, 그건 그런데. 형 지금 가지고 있는 티 다 검정이잖아요. 좀 다른 색으로 사요.”
득용이 솔의 손에 들린 티셔츠를 뺏어 들고는 다른 색상의 티셔츠를 그에게 가져다 대었다. 아주 밝고 연한 분홍색이 도는 후드 티였다. 저런 색의 옷을 제 손으로 사 본 적은 스물다섯 살 인생에 없었다.
무용할 때 입는 유니타드나 타이즈도 늘 검정 아니면 흰색이었다. 솔은 득용에게 고개를 절레절레 저어 보였다. 고집스러운 득용의 눈썹이 사납게 치켜 올라가더니 다른 티셔츠를 솔에게 들이밀었다. 이번엔 아주 화려한 프린팅이 된 맨투맨이었다. 솔은 이번에도 고개를 가로저었다.
솔과 득용이 옷을 고르며 실랑이가 한창인 동안, 지호는 두 사람을 멀찍이서 지켜보며 핸드폰을 확인했다. 인터넷 뱅킹. 통장에 남아 있는 돈 54,300원. 기분 전환도 하고 싶었고 때마침 사용하던 스킨로션이 거의 바닥나서 겸사겸사 나온 참이었다.
저렴한 스킨로션 세트를 사고 나면 남는 돈이라곤 고작 2~3만 원. 아직 월 초중순인데 그 남은 금액으로 지호는 한 달을 버텨야 했다. 득용에게 맛있는 걸 먹자고 했지만, 길거리에서 떡볶이 1인분 사 주기도 벅찼다. 그래도 나름 맏형인데 동생들에게 얻어먹을 수는 없지 않은가.
지호는 왁왁 떠들고 있는 득용을 바라보았다. 지난번 외출에서 이미 득용에게 한 차례 얻어먹었었다. 생각 없이 외출해 놓고 나와 보니 빈 통장이 현실로 다가왔다.
지호는 짤막하게 한숨을 쉬었다. 스물두 살, 대학은 휴학 상태였고 잠깐 시간이 날 때마다 짬짬이 아르바이트해 모아 두었던 돈과 부모님이 조금 보태 주시는 용돈으로 여태껏 버텨 왔다.
이전에 있었던 소속사에선 아주 적지만 용돈 개념으로 품위 유지비가 나오기도 했었다. 처음엔 응원해 주시던 부모님도 점점 기약이 없어지고 밑 빠진 독에 물을 붓는 기분이 들자 지호에게 슬슬 그만두고 대학을 빨리 졸업하든가 군대에 가는 건 어떠냐 말을 꺼내기 시작하셨다.
지호의 집은 그다지 여유롭지 못했다. 그렇다고 각박하고 힘들 정도로 못사는 것은 아니었지만 밑으로 동생들이 잔뜩이었다. 동생들을 생각해서라도 마냥 자신이 부모님의 도움을 받고 있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눈 딱 감고 부모님께 연락해 용돈이 부족하다 조금만 보내 달라 하면 걱정하며 흔쾌히 보내 주시겠지만 그럴 만한 뻔뻔함이 지호에게 없었다.
통장 잔고를 확인하던 지호는 한숨을 쉬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로또라도 당첨된다면 이런 걱정 없이 노래만 할 수 있을까. 주변을 휘휘 둘러보던 지호의 눈에 매장 입구에 붙은 ‘아르바이트생 구함’ 전단이 눈에 들어왔다. 당연하게도 아르바이트하면 연습할 시간이 줄어들었다. 솔이 오기 전, 이번에야말로 정말 데뷔할 거란 생각에 사정을 잘 봐주던 카페 아르바이트도 그만뒀었다.
지호는 솔과 구인 공고를 번갈아 가며 바라보았다. 이번은 틀림없다며 아르바이트를 그만둔 게 벌써 다섯 번째였다.
솔은 다를까?
솔은 지호가 그간 겪어 본 지나간 그 어떤 사람보다 데뷔로 향하는 길을 확실하게 보여 주고 있었다. 함께한 시간이 그렇게 길지 않아 조금 어물쩍 넘어가려 하고 속내를 털어놓지 않는 모습이 조금 켕겼지만 그래도 착하고 성실한 것만은 확실히 느꼈다. 그리고 무엇보다 분할 정도로 재능도 있었다.
잠시 구인 공고와 솔을 사이에 두고 짧은 고민을 했던 지호는 고개를 내젓고 옷을 든 채 실랑이가 한창인 득용과 솔에게로 다가갔다. 태오의 말처럼 이번이 정말 마지막인지도 몰랐다. 그리고 마지막이라면 잠깐 입에 풀칠하고 주머니에 아주 작은 여유가 생기는 것보단 눈앞에 서 있는 솔을 고르는 게 맞았다.
“솔아, 그거 너한테 안 어울려. 내가 골라 줄게.”
“무슨 소리예요. 지호 형. 이 색이 솔이 형한테 딱 맞는다고.”
“패알못은 조용히 해라.”
지호가 웃으며 실랑이에 끼어들었다. 득용이 내내 솔에게 밀어붙이던 샛노란 티셔츠를 휙 뺏고는 차분한 미색의 티셔츠를 골랐다. 득용과 지호가 솔을 두고 서로 고른 옷이 잘 맞는다며 투덕거리자 솔은 질린 표정을 지었다.
“아니. 역시 나는 그냥 검은색이…….”
솔이 말을 내뱉기 무섭게 두 사람이 눈을 치켜뜨고 한 마음, 한 소리로 ‘안 돼!’를 외쳤다. 솔은 진땀이 났다.
***
“강가람. 얘기해.”
“뭘?”
“다시 그런 거야?”
숙소로 향하는 길, 늘 가람이 멈춰서 주변을 확인하는 그 골목에서 태오와 가람이 대치하고 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