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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애를 뽑고 싶어-54화 (54/192)

#54

점차 피로도가 회복되자 몸에 조금 힘이 들어가는 듯했다. 더불어 이런 외출이 솔도 꽤 오랜만이라 조금 기대되기도 했다. 솔에게 마지막 외출은 주환의 결혼식이었다. 택시를 타고 갔다가 오고, 의찬의 뒤에 숨듯 걸어 하루를 보낸 게 외출이라 부를 수 있다면 말이었다.

친구들과 쇼핑 같은 건 사고가 나기 전에도 잘 하지 않았었다. 사실상 처음이나 마찬가지였다. 조금 들뜬 솔은 내용물은 스물다섯이나 먹었으면서 이런 것에 즐거워하는 자신이 조금 부끄러워서 얼굴을 살짝 붉혔다.

“나도 다녀올게. 준비하고 있어.”

태오와 가람이 떠나 버리자 지호도 영호를 찾아 연습실을 나섰다. 모처럼의 외출이 설레기는 지호와 득용 모두 마찬가지인지 영호를 찾아 나간 지호의 발걸음도, 청소하는 득용의 발걸음도 무척이나 가볍고 조금 촐싹거렸다.

짐을 정리하고 연습실 청소하는 내내 득용은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흥얼흥얼 익숙한 드리머의 멜로디를 흥얼거리다가도 중간중간 제가 먹고 싶은 것의 이름을 거의 발작하듯 외쳤다.

그가 큰 소리로 ‘콜라!’, ‘핫도그!’ ‘초밥!’ 하면 외칠 때마다 수건을 개던 솔이 화들짝 놀라기를 반복했다. 지호도 만만치 않았지만, 득용의 걸걸한 목소리도 못지않게 컸다. 짐 정리를 끝내고 학교에 가는 학생처럼 가방을 질끈 멘 득용은 제 뒤에서 솔의 작은 웃음소리가 들리자 도끼눈을 하고 뒤를 돌아보았다.

“왜 웃어요, 형.”

“그거 다 먹으려고?”

입으로 조잘거리며 늘어놓은 음식만 잔칫상이었다. 상다리가 부러지다 못해 거의 뷔페 수준이었다. 음식 욕심이 없는 자신에 비해 득용은 먹지 말라 하니 더 먹고 싶은 것인지, 바라는 음식이 퍽 많았다.

닭 가슴살도 맛이 없다고는 하지만 막상 그가 먹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아주 맛있어 보였다. 솔이 웃음기를 머금고 묻자 득용은 눈에 띄게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다.

“……아뇨. 딱 하나만 먹어야죠. 그러고 오늘 밤새 운동해야지.”

오늘, 뷔페를 삼켜 버리겠다는 원대한 목표를 가진 사람처럼 굴더니 돌아온 대답은 무척 현실적이었다. 잠깐의 향락을 즐기기엔 그 뒷감당이 무서웠다.

“형 같은 소식좌는 내 고통을 몰라.”

“내가 소식좌야?”

“형 쥐꼬리만큼 먹고…, 세상 맛없는 얼굴로 먹잖아요.”

“내가?”

오락가락, 냉탕과 온탕을 스스로 오가는 득용의 모습이 귀여워 자꾸만 웃었더니 그 모습이 꽤나 불만이었나 보다. 득용의 화살이 솔에게로 돌아갔다. 솔은 정말 모르겠다는 어리둥절한 얼굴로 자신을 가리켜보았다.

딱히 음식에 욕심을 내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적게 먹거나 맛없게 먹는다고 생각하진 않았다. 물론 그렇다고 맛있게 득용처럼 복스럽게 먹는 것도 아니었지만, 그저 평범한 편이라고 생각했다. 득용에게 지적받은 솔은 어깨를 살짝 으쓱이며 처음 듣는 소리라는 양 의문을 표했다.

“밥 먹을 때 앞에 거울이라도 놓아 줘야겠네.”

득용의 말에 솔은 바람 빠지는 웃음소리를 내었다. 거울을 앞에 두고 밥을 먹는 모습을 상상하니 조금 우습고 괴상했다.

“형, 형. 근데 어떤 옷 살 거예요?”

“그냥, 편하고 너무 튀지 않는 거.”

두 사람은 회사 로비로 걸어 나갔다. 꾸미는 데에 딱히 취미도 없고 옷에 관심도 없는 솔은 득용의 뭘 살 거냐는 물음에 솔은 건성으로 대답하며 상태 창을 띄워 보았다. 그간 아침마다 로그인 보너스로 받은 돈이 제법 되었다. 부모님의 보험금은 어찌 되었는지 알 길이 없었지만, 그 돈을 쓸 것도 아니었고 지금은 이 정도의 소지금으로 충분했다.

적어도 옷가지 몇 벌은 살 금액은 됐다. 솔은 상태 창을 지우고 그 너머로 창밖을 바라보았다. 로비의 통유리 밖으로 꽤 많은 사람이 모여 있는 것이 보였다.

“오늘 회사 밖에 사람이 많네.”

연습하다가도 점심시간쯤, 식사하러 사내 식당으로 향할 때면 이렇게 로비 밖으로 10~20대의 주로 젊은 여성들이 드문드문 서 있는 모습이 자주 보였다. 개중에는 눈에 확 티가 나는 외국인들도 있었고 캐리어 같은 것을 들고 서 있는 사람들도 있었다.

솔이 창밖에 시선을 고정한 채 말하자, 득용이 그의 시야를 가렸다. 솔의 눈앞을 가로막으며 창가 쪽을 막아선 득용은 보지 말라는 듯, 솔을 방해했다.

“아마 은겸 형…. 아니 선배님이 보나 마나 별스타그램에 뭐… ‘지금 회사로 가는 중. 이따가 어디 가요. 오랜만에 팬들 보고 싶다.’ 이런 거 올려서 그럴 거예요. 하여간….”

“아…….”

역시나였다. 지난밤의 그 여자들도 은겸을 기다린 게 확실한 모양이었다. 솔은 탐탁지 않은 표정의 득용을 보며 이상함을 느꼈다. 은겸과 대화하며 들은 바로는 그도 오래 연습 생활을 해, 지금의 멤버들과 꽤 친한 사이이며 세세한 사정들까지 익히 잘 알고 있는 듯 말했었다. 하지만 지금도 그렇고 은겸에 대해 이야기할 때면 어쩐지 조금 비아냥거리거나 불편한 사이인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었다.

“혹시, 은겸 형이랑 사이….”

솔이 득용에게 질문을 던지는 순간, 지호가 볼캡을 눌러쓰며 달려왔다. 눈을 둥글게 휘고 활짝 웃으며 뛰어온 맏형에게 득용이 메고 있던 가방을 툭 던졌다. 두 손으로 제 가방을 가볍게 받아 든 지호는 아주 밝고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외출이 성사되었다는 소식을 알렸다. 더불어 편리한 이동 수단도 함께.

“가자. 얘들아. 영호 형이 태워다 준대.”

“어……, 걸어가지 않고?”

“응. 영호 형도 나가야 한다고 그래서 날름 태워다 달라고 했지.”

“올. 완전 좋아요.”

쇼핑몰이 몰려 있는 번화가까지 그리 먼 거리는 아니라 들어 걸어갈 줄로만 알았다. 느닷없는 자동차의 등장에 솔은 잠시 당황해 눈을 크게 뜨고 지호를 바라보았다. 지호는 솔의 속내도 모르고 얼굴에 마치 ‘형 잘했지?’라고 쓰인 것처럼 아주 뿌듯한 얼굴로 엄지손가락을 치켜올렸다. 득용이 만세를 하며 좋아했지만, 솔은 어색한 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가깝다고 했으니까 괜찮겠지…’

모든 일들이 술술 잘 풀려간다 싶었더니 이렇게 또 새로운 난관이 나타났다. 그간 잠시 잊고 있었던 문제였다.

“밴 앞으로 끌고 나온다 했어.”

“어…, 그럼, 저기로 지나가야 하는 거지…? 지호 형?”

“응. 걱정 마. 처음도 아니니까.”

“……?”

“너 저번에 쓰러졌을 때도 저 앞으로 지나가면서 태오가 병원까지 데려갔어.”

말하기 무섭게 밴이 입구에 도착했다. 솔은 회사에 처음 올 때를 제외하고 처음이었다. 입구에 밴이 서자 기약 없는 기다림을 하며 늘어져 있던 사람들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마치 동물 다큐멘터리에서나 나오는 미어캣처럼, 다들 눈을 크게 뜨고 밴을 쳐다보았다. 그러고는 우르르 그 앞으로 몰려들었다.

이른 시간이라 사람이 그렇게까지 많지 않았지만 밴 앞으로 모여드는 모습이 제법 위험해 보였다. 아니나 다를까, 보안 요원들이 나가 팬들을 통제하기 시작했다. 의식이 없을 때 지나가는 것과 제정신으로 지나가는 것은 천차만별이었다. 특히나 저 사람들이 기다리는 사람이 은겸이라는 걸 알게 되니 더더욱이었다

저 사람들이 기다리는 사람은 은겸일 텐데 잔뜩 기대했다 자신이 나가면 실망할 거 아닌가. 솔은 태오의 버킷 햇을 더욱 푹 눌러썼다. 그걸로도 모자라 그 위에 후드까지 뒤집어썼다. 이번 쇼핑에서 반드시 얼굴을 잘 가릴 모자를 꼭 사야 할 이유를 더 느끼게 되었다.

“뒷문이나 지하 같은 데로 나가야 하는 거 아니야?”

“우리가 뭐라고.”

“그러니까. 우리가 뭐라고… 이렇게 나가는 게 더 이상하잖아.”

“지하론 선배님들 들어오시잖아요. 괜히 더 복잡해질걸요…? 여기 이러면 뒷문도 마찬가지일 거고. 보안 요원 아저씨들이 정리해 주실 거에요.”

“우리 솔이 부담스러워서 그러는구나? 즐겨. 큰일이네. 앞으로 아이돌 할 사람이.”

지호가 웃으며 솔의 어깨를 두들겼다. 보안 요원들이 나서 주변을 정리하자 입구를 둘러싸고 나름 질서 정연하게 은겸의 팬들이 줄을 섰다. 손에는 저마다 은겸의 사진과 온갖 문구들이 붙은 슬로건이나, 핸드폰을 들고 목을 길게 빼고 서 있었다.

“형, 형 내 뒤에 바짝 붙어요.”

“아니, 근데 갑자기 왜 이렇게 많아.”

“몰라요. 오늘은 좀 더 심하네. 스케줄 있나 보죠.”

득용이 솔을 끌어당겨 그의 두 손을 제 어깨에 얹었다 솔은 득용의 어깨를 꽉 붙잡고 고개를 푹 숙였다. 모자챙이 득용의 등에 닿아 구겨졌다. 부담스러운 것보다 저렇게 시선이 몰리는 곳을 걸어가야 한다는 것이 두려운 것이었다.

득용이 걸음을 옮기자 기차놀이 하듯 솔도 발을 움직였다. 그러자 솔의 허리를 지호가 붙잡았다. 난데없는 기차놀이가 YC 엔터 입구에서 열리고 있었다.

당당한 득용이 선두에 나서자 짙은 선팅이 된 검은 밴의 문이 열렸다. 뒤따르는 솔이 넘어질까 봐 득용이 천천히 걷자 줄을 서 있던 팬 중 하나가 셋에게 ‘연습생이에요?’ 하고 물었다. 그 말을 시작으로 주변에서 ‘은겸 오빠는요?’ 하며 은겸을 찾는 목소리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빨리 가.”

맨 뒤에선 지호가 득용의 팔을 툭 치며 속삭이듯 소곤소곤 그만 들릴 목소리로 말했다. 지호의 채근에 득용은 제 어깨에 올라간 솔의 손을 잡고 후다닥 뛰어 밴에 올랐다. 슬라이딩 도어가 굳게 닫히자 솔은 크게 숨을 내려 쉬었다. 밖이나 차 안이나 솔에겐 불안한 공간이긴 매한가지였지만, 그래도 밖보다야 밀폐되고 멤버들뿐인 차 안이 조금 더 나았다.

짧은 거리였지만, 솔은 무대에라도 선 것처럼 심장이 벌렁거리고 숨이 거칠어졌다. 늘 산 넘어 산이었다. 득용과 지호를 둘러보니 두 사람 다 별일 아니라는 듯 덤덤하다 못해 오히려 조금 들뜬 듯 보였다. 타인에겐 아무것도 아닌 일들이 매번 자신은 왜 이리 힘든 것인지.

“은겸이 오후에 스케줄 있는 거 내가 깜빡했다.”

“아직 티저 같은 것도 안 돌지 않았어요? 벌써 난리네.”

“어. 오후에 샵 간다고 들은 거 같은데. 며칠 전부터 스케줄 유출 때문에 정신없었어. 첩보 작전이었다. 첩보.”

지호가 묻자 영호가 액셀을 밟으며 한숨 섞인 대답을 했다. 차가 움직이며 몸이 작게 흔들리자 솔은 반사적으로 움찔, 좌석 시트를 움켜잡았다.

[특성 ‘네 바퀴 불신자’가 활성화되었습니다.]

영락없이 그의 시야에 민트색 시스템 창이 떠올랐다.

[갑작스러운 출발과 흔들림에 놀랐습니다. 체력 -1]

[현재 남은 체력 : 99]

아니나 다를까, 알림 창이 떠오르자마자 솔의 시야가 붉게 깜빡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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