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
늘 짓궂게 놀리거나 의뭉스럽게 굴 때가 있어 미처 느끼지 못했는데, 오늘 이렇게 아침 식사를 준비하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불현듯 그의 수고가 인지되었다. 모두가 공평하게 나눠서 해야 하는 일이었지만 늘 숙소의 상태를 전반적으로 책임지는 것도 지호와 태오였다.
지금이야 방학이지만, 멤버들이 학교에 갈 땐 지호가 거의 엄마 노릇을 했다고 들었다. 제때 일어난 적이 없고 늘, 시간에 쫓겼던 솔로서는 이렇게 아침의 지호를 찬찬히, 제대로 보는 것이 처음이었다. 득용이 ‘엄마’라고 할 때 별로 대수롭지 않게 넘겼는데 이렇게 앞치마를 두른 모습을 보고 있자니 영락이 없었다.
그런 모습을 보고 있자니 그간 알게 모르게 꽤 도움을 받았구나 싶었다. 아침엔 비몽사몽에 정신없어하는 솔에게 뭐라도 입에 꼭 물려 주었던 지호였다. 솔이 본래 먹는 것을 썩 즐기는 편도 아니었고, 사고 이후로는 거의 굶는 일이 대다수였으니 사실 끼니를 꼭 챙기고 잔소리를 늘어놓는 지호 덕에 그 연습을 버틸 힘이 났는지도 몰랐다.
“어디 늦잠 대장이 잠꾸러기들을 깨워 보거라.”
“뭘 또 대장까지야….”
솔이 불퉁하게 반응하자 지호가 낮게 웃으며 주방으로 다시 사라졌다. 솔은 득용과 지호, 가람 세 사람이 함께 쓰는 방문을 열었다. 솔의 방도 햇볕이 강하게 들어오는 편이었는데, 이쪽 방은 빛이 한층 더 강했다.
날이 추운데 창문은 활짝 열려 있었다. 찬 바람이 쌩 들어오자 바닥에 널브러져 잠든 득용이 추운지 이불을 몸에 둘둘 감고 애벌레처럼 한껏 웅크렸다. 눈이 부실 정도로 창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빛과 찬 바람에 솔은 인상을 찌푸렸다. 그리고 그 빛의 정가운데, 창문 바로 앞에는 가람이 문을 등지고 서 있었다.
깨어 있을 거로 생각지 못한 인물의 모습에 솔은 ‘어?’ 하는 소리를 냈다. 인기척을 내었는데도 가람은 무얼 하는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여전히 고개를 푹 숙인 채였다.
“벌써 일어났어? 오늘 다들 일찍 일어나는 날인가.”
“…….”
“가람아.”
솔의 말에 가람은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서서 졸기라도 하는 것인지, 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득용을 건너뛰어 솔은 가람에게로 다가갔다. 바로 뒤에서 재차 이름을 부르는데도 가람은 여전히 고개를 들지 않았다. 반응 없는 가람이 왜인지 조금 겁이 나 손을 뻗었다. 어깨너머로 슬쩍 보니 손에 핸드폰을 쥐고 있는 듯했다.
“가람아?”
탁-!
“아!”
솔이 그의 이름을 부르며 팔을 붙잡자 가람은 거의 경기를 일으키듯 놀라며 팔을 휘둘렀다. 크게 휘둘러진 가람의 손에 얼굴을 얻어맞은 솔은 손으로 반사적으로 짧은 비명을 내질렀다.
휘둘러진 가람의 손끝에 눈가를 얻어맞은 솔은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몸을 웅크렸다. 고개를 숙이자 통증과 함께 생리적으로 눈물이 흘러나왔다. 그제야 정신을 차린 가람은 사색이 되어 솔의 어깨를 감싸 쥐었다. 조금 전까지 집중해 들여다보았던 가람의 핸드폰이 방바닥을 마구 굴렀다.
“솔!”
“으….”
“괜찮아!? 미안. 놀라서 나도 모르게.”
솔이 눈가를 부여잡고 허리를 들지 못하자 당황한 가람 또한 마찬가지로 허리를 숙여 시선을 맞췄다. 크게 다친 것은 아니었지만, 눈을 찔리니 자동 반사로 눈물이 마구 흘러나왔다. 따끔거리고 뻑뻑한 통증에 솔은 손을 떼어 내고 오만상을 찌푸린 채, 몇 번 눈을 깜빡거렸다. 불편함에 다시 눈을 질끈 감자 애가 닳은 가람이 눈가를 가리는 솔의 손을 치워 내고 얼굴을 두 손으로 부여잡았다.
“어디 봐 봐.”
가람은 솔의 얼굴에 제 얼굴을 바짝 가져다 대고, 새빨갛게 충혈된 눈을 들여다보았다. 흘러나온 눈물에 긴 속눈썹이 젖어 검게 도드라져있었다. 눈을 떠 보려 하는 데 영 불편한지 솔은 눈꺼풀을 계속 깜빡였다. 푸른 실핏줄이 보이는 얇은 눈꺼풀이 붉어지며 파르르 떨렸다.
솔은 가까이 붙은 가람을 살짝 기분 나쁘지 않게 밀어냈다. 여전히 솔의 얼굴을 부여잡은 가람은 대역죄라도 진 것 같은 표정으로 솔을 내려 보았다.
“괜찮은 거 같아. 근데 뭘 그렇게 보느라 사람 오는 것도 몰라?”
“아니,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부르지 그랬어.”
“몇 번이나 불렀어.”
“미안, 잠깐 그냥 연락 온 거 확인하다가.”
가람에게 다가가면서 계속해서 그의 이름을 불렀던 솔이다, 그리 넓은 방도 아니고 지척에서 부르는데 못 듣기도 어려웠다. 솔은 계속해서 눈에 느껴지는 이물감에 손등으로 눈가를 문질렀다. 눈물이 계속 흘러나왔다. 그런 솔의 모습에 가람은 기어이 얼굴이 잿빛이 되었다.
“괜찮은 거야? 세게 맞지 않았어?”
“아니야. 스쳤어.”
통증은 가셨지만, 솔이 계속해서 눈물을 흘리자 가람이 안절부절못했다. 그렇게 얼굴을 붙잡고 한참을 대치하고 있는데, 방문이 벌컥 열리고 앞치마를 벗어던진 지호가 들이닥쳤다. 솔이 내지른 소리를 듣고 온 듯했다.
“무슨 일이야?”
“지호 형.”
솔과 가람, 두 사람이 동시에 지호를 바라보았다.
“어…. 내가 잘못된 타이밍에 찾아온 거 같네.”
방 안을 가득 채운 햇볕 탓에 지호의 밝은 머리칼이 노랗게 색이 바래 보였다. 얼굴을 붙잡고 밀착되어 서 있는 가람과 솔을 본 지호는 이상한 웃음을 흘리며 다시 온 길을 돌아 나가려 했다.
지호의 장난 섞인 반응에 솔은 그제야 자신과 가람이 지나치게 가까이, 서로를 부둥켜안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오해를 불러일으키는 모양새였다. 햇빛이 가득 쏟아지는 창가 앞에서 얼굴을 부둥켜 잡은 남성 둘이라니. 뒤늦게 가람과 멀찍이 떨어진 솔은 볼멘소리를 내뱉었다.
“지호 형, 이상한 소리 좀 그만해.”
“난 또, 큰소리 나서 둘이 싸우나 했네.”
“우리가 왜 싸워.”
“근데 진짜 둘 다 웬일로 이렇게 금방 일어나 있지? 해가 서쪽에서 뜨려나 보다.”
지호의 말에 솔은 여전히 한쪽 눈을 감을 채로, 한 눈으로 가람을 바라보았다. 이 소란인 와중에도 득용은 바닥에 대자로 누워 곤히 코까지 골며 자고 있었다.
“득용이 깨워서 얼른얼른 준비해.”
“응.”
“어우, 추워.”
지호는 갑자기 쌩, 불어 들어온 바람에 진저리를 치며 몸을 움츠리고는 바닥에 누운 득용을 발끝으로 툭툭, 치고 방을 나갔다.
“추운데 창문도 활짝 열고, 감기 걸리겠어.”
“환기 좀 시켜야 할 것 같아서.”
솔이 한 눈을 꾹 감고 활짝 열린 창문을 닫으려 창가에 다가서자, 가람이 그 앞을 가로막았다. 솔이 창가에 다가가지 못하게 앞을 가로막은 가람은 그제야 급히 창문을 걸어 잠갔다.
***
“솔이 형, 윙크~.”
“아이, 잘한다.”
“…….”
“그만 놀려.”
회사로 향하는 길, 여전히 눈동자에 거칠거칠한 이물감이 느껴져 솔은 한쪽 눈을 질끈 감은 채였다. 그런 솔을 득용이 조금 전부터 연신 놀려 대더니 곧이어 지호까지 그 대열에 합세했다. 솔이 둘을 무시하고 지나치자 태오가 결국 한마디를 얹었다.
누가 깨우지 않아도 정확히 늦지 않을 시간에 일어난 태오는 얻어맞은 솔보다도 눈이 더 새빨갰다. 어째 잠들기 전보다 잠깐이라도 자고 일어난 지금이 더욱 피로해 보였다. 가람은 숙소에서 빠져나온 내내 아무런 말이 없었다. 평소 늘 한 차례 멈춰 주변을 둘러보곤 하는 그 골목에서도 가람은 핸드폰만 쳐다본 채 걸었다.
가람아~
가람이 맞지?
야야야야야 가람아
가람아~ 이거 새 번호 맞지?
전화 받아
전화 받아 전화 전화 전화 전화
전화
통화해요~
자는 고야? 알았어ㅠㅠ 잘 자♡ 내일 만나자
“…….”
핸드폰을 잡은 가람의 손이 파르르 떨렸다. 한눈에 보기에도 이상한 전화번호, 그 전화 한 통에 새벽에 잠에서 깼다. 잠에 취해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그대로 끊어 버렸지만, 곧바로 이어서 여러 차례 진동이 울렸다.
순간 가람은 머리카락이 쭈뼛 서며 온몸에 피가 빠져나가는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요즘 세상에 사실상 기능을 상실해 버린 문자 메시지. 스팸이라 생각하고 확인도 하지 않았던 메시지 알림을 누르자마자 가람은 현기증을 느꼈다.
순간 눈앞이 아득해지며 어찌할 바를 몰랐다. 덜컥 겁이 나며 옴짝달싹도 할 수가 없어 가람은 자고 있는 득용과 지호를 바라보았지만 깊게 잠든 두 사람에게 핸드폰 진동음은 너무도 작은 소리였는 듯했다. 가람에게는 맑은 하늘의 우렛소리처럼 들렸다. 자신을 데리러 오는 저승사자의 발걸음 소리같이 들렸고 모든 것을 망가뜨릴 재난과도 같은 소리였다.
핸드폰을 아예 꺼 버리고 모르는 척, 가람은 억지로 눈을 감고 잠을 청했다. 분명 핸드폰의 전원을 껐는데도 어디선가 진동음이 들리는 것 같았고 숙소에 자신들 외에 다른 누군가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오늘따라 방 한쪽에 놓인 옷장이 너무도 신경 쓰였다. 구석구석, 조금이라도 어둠이 내린 곳들을 보면 불안했다. 꿈이길, 잠결에 잘못 본 것이길 바랐지만 다음 날 아침. 핸드폰을 다시 켠 가람이 마주한 게 저 기분 나쁜 문자들이었다.
하나같이 답장을 보낼 수도, 보내고 싶지도 않은 이상한 번호. 가람은 코끝에 악취가 느껴지는 것 같았다. 아니, 엄격히 말하면 악취라고 부를 수 없는 아주 진한 향수 냄새가 제 코끝에 머무는 것만 같았다. 소름이 끼쳤다. 문자를 확인한 가람은 창문을 열어 창밖을 확인했다. 혹 숙소 앞에 누군가 있진 않은가, 샅샅이 훑어보았지만 이른 아침 골목은 고요하기만 했다.
잠깐 안도한 그 순간, 가람의 핸드폰이 다시금 울렸다.
잘 잤어? 아침부터 얼굴 보니까 좋당 번호 왜 바꿨어ㅠㅠㅠㅠ 통화할까? 전화할게 목소리 한 번만 들려주라~
우우웅- 우우웅-.
문자를 확인하기 무섭게 핸드폰이 진동했다. 끝이 다 보이지도 않는 숫자의 나열인 전화번호. 가람은 달달 떨리는 손으로 그 전화를 받았다.
“누구세요?”
- 나 안 보고 싶었어? 나는 너무 보고 싶었는데
조금 이상한 목소리였다. 기억에 남아 있는 목소리와는 조금 달랐다. 꼭 입에 천을 물고 말하는 것처럼 발음이 부정확했고 웅웅 울리는 소리 같기도 했다. 소리가 달라도 가람은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지난 시간 자신의 미쳐 버리게 만들려 했던 여자의 목소리라는 것을.
“하지 마세요. 그만하세요.”
- 왜 그래? 응? 가람아.
“연락하지 마세요. 제 번호는 어떻게 알았어요? 이거 범죄예요.”
- 너 이럴 거야? 쓸데없는 말 하지 말고 누나랑 오랜만에 통화하는데 사랑한다고 안 해 줄 거야?
“…….”
몸서리를 치며 가람은 그대로 통화를 끊어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