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
혹시나 하는 마음에 세탁기에 쏟아 넣었던 옷가지들을 다시 한번 확인했지만, 여전히 핸드폰은 보이지 않았다. 말은 그리하면서도 핸드폰을 찾는 손이 영 굼떴다. 원체 물건을 잘 잃어버리기도 하고 마땅하게 연락할 곳도 없는 솔에게 핸드폰은 무용지물이나 마찬가지였기에 그리 긴박하지도 않았다. 안에 남긴 멤버들에 관한 메모가 신경 쓰이긴 했지만, 그 찜찜함보다는 피곤해 빨리 누워 자고 싶은 생각이 더 절실했다.
옷가지와 방을 뒤적이던 솔은 얼마 가지 않아 한숨을 내쉬곤 그냥 침대 속으로 기어들어 가 버렸다. 평소보다 더 긴 시간을 연습한 탓에 체력이 바닥이었다. 눈앞에 떠오르는 피로도도 아슬아슬했다. 어딘가에서 나오겠지, 진짜 어딘가에 잃어버렸다 해도 큰 상관이 없었다. 오히려 그 안에 든 찜찜한 가족사진을 지우지도 어쩌지도 못하던 차였는데, 이참에 잃어버리는 편이 나은 줄도 몰랐다. 솔은 더 생각하기 싫어 그대로 전등불을 꺼 버렸다.
어둠이 내린 방은 고요했다. 태오가 시끄러운 편인 것도, 말수가 많은 것도 아닌데 혼자 쓰는 방은 마치 폭풍이 오기 전날처럼 유난히도 조용했다.
***
YC 남돌 차기 정보
ㅇㅇ(123.123) | 17:24:08
(공개 연습생으로 활동하던 앳된 태오의 사진.jpg)
(모자를 쓴 채, 카페에 앉아 있는 어려 보이는 가람의 사진.png)
(10대 초반에 지호의 오디션 프로그램 참여 캡쳐 사진.jpg)
타 커뮤에 YC 차기 연생 정보 떴길래 들고 옴
ㅇㅌㅇ / ㄱㄱㄹ / ㄷㅈㅎ/ DK / 성솔
성솔? 얘가 전에 쓰러졌던 애라는데 비공인가봄 아는 인간 없냐?
└ 헐 ㅌㅇ 랑 ㄱㄹ 아직도 YC에 있었어? 얘네 장기네
└ 최근 사진 없어?
└ 어느 커뮤에서 나온 얘기야?
└ 앞에 둘 오랜만이다ㅋㅋㅋㅋ 첨에 YC가 풀었을 때 난리였는데
└ 왜??
└ 와꾸 잘생겼다고
└ 어느 커뮤에서 나온 거야? 사진 출처랑 답 줄 수있는 친구...제발ㅠㅠ 특히 두번째
└ 예전에 YC가 너튜브로 소개 풀었었음 지금은 내려감
└ 두 번째 사생 사진임 짹에서 유명했었음
└ 알못인데 얘네가 무슨 사생이 있어 와꾸도 ㅎㅌㅊ인데
└ ㅎㅌㅊ는 무슨;; 잘생겼는데 저정도면 ㅆㅅㅌㅊ지. 비주얼쇼크 모름?
└ 얼굴 진짜 작은 듯
└ 근데 이거 어디에서 얘기 나온 거야? 타커뮤 어디?
└ YC 장기 연생 다 물갈이했다던데...
└ DK는 뭐임? 중국멤 아니겠지. 제발 넣지좀마
***
“일어날 시간이야.”
“응.”
익숙한 태오의 목소리에 솔이 거의 반사적으로 대답했다. 대답을 했다 뿐이지 일어나지는 않았다. 여전히 눈은 감고 있었으며 잠에서 헤어 나오지 못한 상태였다.
“성솔.”
“나 어제 진짜 늦게 들어왔어. 10분만…. 조금만….”
나지막이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태오의 목소리에 솔은 짜증스럽게 얼굴을 잔뜩 구겼다. 잠에 취해 오만상을 찌푸린 채 웅얼웅얼하는 솔의 얼굴을 태오는 묵묵히 바라보았다. 해가 뜨기 전, 새벽같이 돌아온 태오를 처음으로 반긴 건 지호였다.
아침을 준비하러 나온 지호는 태오를 보자마자 솔이 무척 늦게, 홀로 귀가해 가람이 많이 걱정했다는 이야기부터 전달해 주었다. 태오는 짜증이 가득한 솔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다 꼿꼿하게 펼친 어깨에 힘을 풀었다. 순간 힘이 빠지며 넓은 어깨가 앞으로 기울었다.
“…그래.”
귓가에 들리는 상상도 못 한 대답에 솔은 잠이 싹 사라졌다. 한껏 구겨졌던 미간이 풀어지며 언제 잠에 취했었냐는 듯, 또랑또랑한 눈동자가 반짝 햇빛을 받았다. 솔은 순간 제 귀를 의심했다. 방금 제대로 들은 것이 맞나? 약속된 시간에서 어긋나는 것을 싫어하는 태오에게서 절대로 나올 수 없는 아주 후한 대답을 들은 것 같아 솔은 제 귀를 벅벅 문질렀다.
“…윤태오…?”
번쩍 뜨인 솔의 눈에 민트색 알림 창이 드리웠다. 그 뒤로 침대맡에 우뚝 서 있는 기나긴 두 다리가 보였다. 아직 꿈속인가 보다. 그렇지 않고서야 윤태오에게서 이런 대답이 나올 리가 없었다.
[신규 유저 지원 이벤트! 로그인 보너스]
솔은 보상 내용을 제대로 보지 않고 치워 버렸다. 그간 계속해서 반복된 일상적인 풍경이었다. 로그인 보너스는 처음을 제외하곤 늘 ‘컨셉 랜덤 티켓 X2’과 ‘하급 피로도 회복의 포션 X2’, 그리고 약간의 소지금의 반복이었다. 차곡차곡 쌓여서 이제 제법 그 수가 꽤 되었다.
필시 중요히 필요한 때가 있으리란 생각에 특히 피로도 회복의 포션은 사용하지 않고 잘 모으고 있었다. 시야를 가로막는 시스템 창을 치워 버린 솔은 천천히, 곧은 다리를 따라 시선을 위로 올렸다. 그 시선의 끝에는 새빨갛게 충혈된 눈에 한결 지쳐 보이는 태오가 있었다.
“괜찮아?”
그의 내려간 어깨와 새빨간 눈을 보는 순간 솔은 거의 반사적으로 물었다. 정작 이전의 자신은 누가 이렇게 ‘괜찮아?’ 하고 묻는 것을 제일 싫어했었는데, 썩 좋아 보이지 않는 태오의 모습을 보자 저도 모르게 그 말부터 튀어나왔다.
“괜찮아. 사실 너 못 일어날 거 같아서 10분 일찍 깨웠어.”
“뭐? 아니 내 말은 그게 아니라….”
“아. 괜찮아. 잠을 못 자서 그래.”
“내가 아니라 네가 자야 할 거 같은데…?”
10분 일찍 깨웠다는 말에 솔의 눈썹이 슬쩍 올라갔다가 손을 들어 눈가를 가리는 태오의 모습에 급히 내려갔다. 커다란 손이 얼굴을 다 가린 모습이 퍽 지치고 힘들어 보였다. 솔은 이불을 밀어내고 침대에서 부스스 일어났다. 잠에 취해 막판까지 늘 태오와 실랑이를 하는 솔이 곧바로 일어나자 태오가 그를 의문스럽게 바라보았다.
“더 자도 된다니까.”
“네가 안 하던 말을 해서 내 잠이 달아났어. 오늘은 좀 빨리 준비하지 뭐.”
“…….”
솔이 엉망으로 헤집어진 머리칼을 대충 쓸어 넘기며 침대에서 나오자 태오가 그 침대 끄트머리에 걸터앉았다. 태오는 정말 날밤을 꼬박 새운 사람처럼 하얗게 색이 바래 있었다. 매번 태오나 가람이 자신을 이런 시선으로 봤을까, 오늘은 상황이 반전되어 버렸다.
솔이 욕실로 들어가자 태오는 그의 침대를 대신 정리하다 그 위에 쓰러지듯 누웠다. 이불에서 흔적처럼 솔의 냄새가 났다. 꼭 커피를 내리고 시간이 조금 지나, 아련하게 남은 향기처럼 그렇게 남아 있었다.
병원에서 날밤을 꼬박 지새우고 숙소로 돌아오자 아이러니하게 숨통이 트였다. 지독히도 이기적인 생각일지 모르겠지만 가족과 함께 있는 시간이 더 힘들었고 눈앞에서 보이지 않는 시간이 차라리 속이 편했다. 머리가 지끈거려 태오는 눈을 질끈 감았다. 짙은 눈썹이 모이며 미간에 주름을 깊게 만들었다.
젖은 머리를 털며 방 안으로 돌아온 솔은 눈 앞에 펼쳐진 장면에 우뚝 굳어 버렸다. 간단히 씻고 나오는데 몇 분이 채 걸리지 않았는데, 그사이 태오가 제 침대에 엎어져 잠들어 있었다. 엉망으로 걷어 냈던 이불이 반듯하게 정리된 걸로 보아선 이불을 정리해 주다 그대로 잠이 든 듯했다.
사실 늘 태오보다 일찍 잠들어 태오보다 늦게 일어나는 솔이기에 그간 태오가 잠들어 있는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낯선 그의 모습이 신기하기도 하고 조심스러워 솔은 범죄 현장의 범인처럼 뒤꿈치를 들고 조용조용히 태오에게로 다가갔다. 슬쩍 목을 길게 빼, 잠이 든 그의 얼굴을 확인했다.
자면서도 심각한 얼굴이었다. 이불을 움켜쥔 손은 굳세게 주먹을 쥐고 있었고 짙은 눈썹이 강직하게 굳어 있었다. 이를 악물기라도 했는지, 턱선이 도드라졌다. 솔은 가만히 그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사정이 안쓰럽다든지, 어찌 되었든 간에 일단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은 단순하게도 ‘참 잘도 생겼다.’였다. 자는 모습까지 세상 심각하게 온 짐을 다 이고 있는 것처럼 진지하기 짝이 없어 솔은 피식, 웃음을 흘렸다.
그도 잠시 그런 그의 모습이 곧 자신을 떠올리게 해 마음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무슨 일이 있었냐 묻고 싶었지만, 여전히 조심스러웠다. 솔은 태오를 깨워야 할까 잠시 망설이다 시계를 확인하고는 조금만, 그대로 놔두기로 했다. 오늘은 자신이 일찍 일어나서 시간 낭비를 줄였으니 적어도 1분이라도 쉬게 두는 게 나을 듯싶었다. 혹 자신이 바스락거리는 소리에 태오가 잠에서 깰까, 솔은 옷가지를 챙겨 살금살금, 도둑고양이처럼 거실로 빠져나왔다.
“솔아, 도망가?”
“깜짝이야.”
소리가 나지 않도록 살짝, 조심해서 문을 닫는 솔의 뒤에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내리꽂혔다. 유난히 크게 들리는 지호의 목소리에 솔은 화들짝 놀라 제 입을 틀어막았다. 뒤를 돌아보니 앞치마를 두른 채 득용이 늘 달고 사는 닭 가슴살 포장지를 뜯는 지호가 서 있었다.
“놀랐잖아. 형. 도망을 왜 가.”
“옷 챙겨서 살금살금 나오길래, 나는 도망가는 줄 알았지.”
“쉿, 쉿.”
“왜? 도망가는 거 아니라며.”
유독 성량이 좋은 지호의 목소리에 솔은 연신 검지를 입술 위에 가져다 대었다. 보기 좋은 입술의 모양이 손가락에 닿을 때마다 뭉개졌다. 다급한 솔의 손짓이 퍽 재미있는지, 지호는 눈가를 반달처럼 확 접고 특유의 여우 같은 웃음을 흘렸다. 제 의도를 빤히 알면서 계속해서 묻는 지호의 모습에 솔은 두 팔을 뻗어 그를 방문 근처에서 밀어냈다. 앞치마를 두른 지호는 순순히 솔에게 밀려나 주었다.
“태오. 지금 자고 있어.”
“태오가 잔다고? 이 시간에?”
“병원에서 밤새웠다는데, 저대로 연습 나가도 되는 건가 싶어서 조금 자게 두려고….”
“별일이네. 근데, 너야말로 웬일로 벌써 일어났어?”
솔의 말에 지호도 의외라는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태오가 잠이 든 것과 솔이 그 소란을 안 떨고 일찍 일어난 것 중 어느 것이 더 놀라운지는 그의 표정이 대변해 주었다. 아무래도 후자인 듯했다.
“태오 들어와서 깼어. 형은?”
“아침밥. 이제 애들 깨워야지.”
“내가 할게. 형은…. 지호 형도 좀 쉬어.”
솔은 지호의 모습을 훑어보고는 잠시 머뭇거리다 말을 이었다. 그러고 보니 태오뿐 아니라 지호도 퍽 바쁜 인물이었다. 태오는 리더라는 명목하에, 그리고 그가 부재한 시간에는 지호가 맏형이라는 명목하에 알게 모르게 손이 많이 가는 동생들을 챙기기 바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