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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애를 뽑고 싶어-47화 (47/192)
  • #47

    “…난.”

    정확히 무엇에 미안한지도 모르겠지만 솔은 일단 사과했다. 자신을 바라보는 가람의 표정이, 그가 바라던 답이 있는 것 같아서였다. 그 답을 줄 수 없음에 미안했다.

    가람은 솔의 사과에 웃었다. 그가 바라던 대답은 아니었지만, 전처럼 퉁명스러운 대답이 돌아오지 않은 것만 해도 어디인가. 처음에야 며칠 안 가 사라질 사람이라 생각했었지만 지금은 달랐다. 더 이상 어중이떠중이, 이상한 놈들이 들어오는 것도 싫었고 무엇보다 가람은 솔과 함께하고 싶어졌다.

    “난, 어릴 때부터 가수가 되고 싶었거든? 내가 노래도 만들고 직접 부르고.”

    “싱어송라이터, 그런 거 말이지?”

    “응. 늘 쭉 가수가 하고 싶었어. 그런데 회사에서 춤을 춰야 한다는 거야. 사실 춤은 별로 추고 싶지 않았었어. 잘 못하기도 하고….”

    “응.”

    솔은 가람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가람은 누구 못지않게 춤에 투자하는 시간이 많았다. 동작 하나에 수없이 반복 연습을 하곤 했다. 그러는 모습을 보고 있자면 대회를 앞두고 발끝, 손끝과 심지어는 숨 쉬는 것까지 지적당하던 솔마저 질릴 정도였다.

    가람은 다른 멤버들에 비해 동작을 외우는 속도도 느렸고 몸을 움직이는 법을 잘 몰랐다. 그렇다고 가람이 춤을 못 춘다고는 말하긴 뭐했지만 그렇다고 연습량에 비해 잘 춘다고 말하기도 모호했다.

    “혼나기도 많이 혼났고, 하기도 싫었고…. 그러다가 태오를 만났는데. 하기 싫은 거였는데 그래도 같이 하니까 할 만했어. 재미도 생기더라. 막상 할 땐 그렇게 하기 싫은데, 끝나고 나면 뿌듯하고 좋은 기억도 남고 그런 거 있잖아.”

    솔은 고개를 끄덕였다. 성취감은 참 묘한 구석이 있었다. 아무리 하기 싫고 힘들었던 일이라도 마침내 끝내고 나면 그런 기분이 들게 했고, 시간이 흐르고 나면 그때의 고생도 미화되어 기억되기 마련이었다.

    “전에는 내가 만든 노래니까 내가 불러야 한다고 생각했었어.”

    “지호 형도 솔로 준비했다던데, 너도 그랬구나.”

    “맞아. 지호 형도 아예 발라드나 알앤비 쪽이었거든.”

    “다른 회사에 있었다고 그러던데….”

    “응, 지호 형이 원래 어릴 때 오디션 프로그램 나가서 뽑힌 거였거든. 우리 회사보다 더 크고 유명한 곳에 있었어.”

    “그렇구나…. 하긴 지호 형 노래 진짜 잘하지. 내가 아는 사람 중에 제일 잘해.”

    사실 아는 사람도 많지 않았지만, 모르긴 몰라도 지호만큼 노래하는 사람을 찾으려면 꽤 드물 것이 분명했다. 막귀인 제가 들어도 왜 여태 데뷔를 못 했나 의문스러울 정도였다.

    “솔, 나는 나중에 네가 내 노래를 불러 줬으면 좋겠어.”

    가람이 만들었다는 노래들을 아직 솔은 들어 보지 못했다. 숙소에서도 짬짬이 노트북을 들고 다니면서 연신 무언가를 하는데, 그쪽 방면으로 문외한인 솔은 봐도 잘 감이 오지 않았다. 지호가 아는 척을 하면 부끄러운지 화면을 꺼 버리기 일쑤였고 아주 드물게 태오에게 무언가를 물어보는 게 고작이었다.

    다른 멤버들이 칭찬하니 그저 주워듣고 ’잘하는구나.’ 할 뿐이었다. 대화를 마무리하고 마저 걸음을 옮기려던 솔은 가람이 던진 말에 다시 걸음을 멈추어 설 수밖에 없었다. 제 귀를 의심하듯, 방금 들은 말이 제대로 들은 것이 맞는지, 솔은 몸을 획 돌려 가람을 보았다. 그러곤 손가락으로 얼빠진 제 얼굴을 가리키며 재차 되물었다.

    “어? 나? 지호 형이 아니라 내가?”

    “응, 네가.”

    “내가 그래도 돼…? 아니 그럴 수 있을까? 나보단 지호 형이….”

    “나는 네 목소리가 좋아.”

    숨김없이 올곧은 가람의 말에 솔은 얼굴을 붉혔다. 난생처음 듣는 칭찬에 고백이라도 받은 풋풋한 소년처럼 한없이 쑥스러워 숨고 싶어졌다. 민망해진 솔은 괜히 가람의 어깨를 툭, 밀쳤다. 힘을 들이지도 않았는데 가람은 밀리듯 어깨를 뒤로 넘겼다가 바로 자세를 바로 했다. 가람 또한 제가 말하고 멋쩍었는지 크게 웃음 지었다.

    “물론 노래는 지호 형이 더 잘하지만.”

    “뭐야.”

    “그러니까, 같이 데뷔했으면 좋겠다고.”

    “갑자기 왜 이래.”

    가람의 말이 민망해 솔이 몸서리를 치며 고개를 젓자 그 모습이 퍽 재미있는지, 가람이 더 크게 웃었다. 솔이 지난 며칠간 안정을 찾았듯, 가람을 비롯한 다른 멤버들도 그런 느낌을 받고 있었다. 계속해서 스쳐 지나가거나 분위기를 흐리던 사람들로 인해 그룹에 합류하며 흔들렸던 것들이 솔로 하여금 제자리를 찾아갔다.

    처음에야 삐걱거렸지만, 솔은 태오 못지않게 성실히 노력했고 몸을 사라지 않았다. 준비 기간이 전무하다시피 짧았지만 금세 멤버들을 따라올 정도의 재능도 갖췄고 뭐 하나 빠짐이 없었다. 솔이 제대로 말하지 않아도 어렴풋이 그가 어떤 문제를 안고 있다는 것쯤은 멤버들 모두 다 익히 눈치채고 있었다.

    그러면 어떤가, 누구든 사연 없고 문제없는 사람은 없었다. 단순히 목소리뿐 아니라 가람은 ‘솔’이라는 사람이 점점 마음에 들었다. 얼굴을 새빨갛게 붉히고 선 솔을 더 내버려 두었다간 너무 익은 토마토처럼 터져 버릴까, 가람은 그를 지나쳐 앞장섰다.

    “어서 들어가자. 피곤하지?”

    “말 돌리지 말고, 갑자기 낯 뜨겁게 왜 그런 거야.”

    “그냥, 너랑 같이 계속 우리 팀이었으면 좋겠어서….”

    “지금 더 열심히 하라고 돌려서 구박하는 거지?”

    “거기서 더 어떻게 열심히 해? 그건 태오도 못 할걸. 솔, 무리하지 마.”

    가람이 태오를 거들먹거리자 솔이 맥 빠진 웃음소리를 내었다. 본디 솔도 연습 벌레인 편이었지만 태오는 정말 혀가 내둘러졌다. 3분간의 짧은 한 곡도 허투루 하는 법이 없었다.

    “그리고 이렇게 혼자 다니지도 말고.”

    “알았어.”

    다시금 시작된 가람의 걱정과 잔소리에 솔은 고개를 내저으며 계단에 발을 올렸다. 평소보다 늦은 시간임에도 숙소에는 불이 환했다. 가람과 솔을 기다리고 있었던 듯, 지호와 득용 모두 거실에 나와 앉아 있었다. 솔이 들어서자 소파에 널브러져 음식 이름을 줄줄 꿰고 있던 득용과 그의 이마를 손바닥으로 착착 내려치고 있던 지호 모두 벌떡 일어났다.

    “계속 연습한 거야? 이 시간까지?”

    “혼자 걸어오고 있더라고.”

    “뭐? 솔아.”

    “지호 형, 이미 가람이가 잔소리했어.”

    지호의 눈꼬리가 뾰족하게 올라가며 잔소리를 한 바가지 늘어놓으려 팔짱을 끼자 솔은 팔을 쭉 뻗어 지호를 가로막았다. 이미 가람에게 충분히 잔소리를 들었고 문제점도 인지하고 있었다. 무엇보다 지호의 잔소리는 꽤나 긴 편이어서 1절로 끝나지 않았다. 하지만 쉽게 물러날 지호가 아니었기에 기어이 몇 마디를 더 얹었다.

    “솔아 너는 진짜 특히 조심해야 해. 여리고 좀 예민한 느낌이 있어서 괴롭히고 싶은 그런 게 있어.”

    “저 형 뭐라는 거야.”

    지호의 발언에 득용이 입을 떠억 벌리고 그를 바라보았다.

    “아니, 솔이 보다 보면 좀 괴롭히고 싶게? 그런 자극하는 그런 게 있단 말이야.”

    “지호 형…. 변태야?”

    “아니. 이것들이.”

    득용에 이어 가람까지 해괴한 소리를 들었다는 듯한 얼굴로 지호를 바라보자 지호가 얼굴이 새빨개져 급히 변명했다.

    “득용이야 인상 팍 쓰면 끝이지만…. 아니다, 얘는 인상 쓰면 더 문제네.”

    “아. 지호 혀엉!”

    “득용이는 ‘인상 쓰고 싶어요.’, ‘안 돼요.’, ‘하지 마세요.’ 하면 무섭다며 인성 문제니, 뭐니 이런 소리 듣겠지만, 솔이는….”

    “솔이는?”

    지호가 말끝을 흐리며 득용을 흘끗 곁눈질하자 그의 대답을 기다리는 가람이 재촉했다. 흘끔흘끔 득용을 자꾸만 곁눈질하는 게 또 ‘변태’라고 들먹일까 신경 쓰는 눈치였다.

    “솔이가 그러면 더 하고 싶을 거 같은데?”

    “이 형 안 되겠네. 그동안 몰랐는데, 이상한 사람이었어.”

    “아니, 잘 생각해 봐. 상상해 보라니까. 태오는 좀 어려운 느낌이 있잖아.”

    “태오 형, 얼굴 굳으면 거의 뭐 경호원 저리 가라잖아요.”

    “태오가 ‘하지 마세요.’ 하면 ‘네.’ 하고 얌전히 있을 거 같긴 해.”

    “그렇지? 근데 솔이가 ‘하지 마세요.’ 하면 어떨 거 같아?”

    지호가 두 사람에게 물었다. 솔은 방에 들어가 쉬고 싶은 생각이 절실했지만, 저를 화제로 이야기하는데 내버려 두고 갈 수가 없었다. 그리고 막상 듣다 보니 답이 궁금하기도 했다.

    “음… 안 하겠죠? 하지 말라는데 왜 해요.”

    “아, 강가람 얘는 안 돼. 뭘 몰라.”

    지극히 상식적인 가람의 대답에 지호는 손을 내휘둘렀다. 지호는 말이 안 통한다는 듯, 솔로 하여금 조금 기분이 이상해지는 표정을 짓고, 집게손가락을 까닥여 보였다.

    “나는 지호 형 말 무슨 말인지 알겠다.”

    “그렇지?”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다들 어서 들어가서 자.”

    가만히 듣고 있자니 영 대화가 이상해 솔은 세 사람 사이로 끼어들어 사이를 휘적휘적 갈라 놓았다. 여전히 가람이 들고 있는 제 가방을 빼앗아 든 솔은 계속해서 같은 화제로 대화를 이어 가는 셋을 두고 제 방으로 들어갔다. 잠시 뒤, 옷가지를 챙겨 샤워를 하러 나왔는데도 여전히 세 사람이 열띤 토론을 하고 있어 솔은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 들어 봐. 가람아, 네가 득용이보다 뭘 모른다.”

    “모르긴 뭘 몰라요.”

    “아, 가람 형 나보다 응애였네.”

    “뭐라는 거야. 진짜.”

    “그만하고 다들 자.”

    “어, 솔이 잘자.”

    “지호 형!”

    솔이 이내 소리를 높이자 지호가 입을 한껏 벌리고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필시 일부러 저러는 게 분명했다. 따뜻한 물에 샤워를 끝마치고 나오니 토론의 장은 종료가 되었는지, 거실은 조용했다. 솔은 연습실에서 흘린 땀이 배어 있는 수건과 갈아입은 옷가지를 정리했다. 한 번 쏟아졌다 다시 담은 물건들이 가방 안에서 한데 뒤섞여 엉망이었다.

    사용한 것과 사용 안 한 것들이 뒤섞여 구분이 불가능했다. 결국 가방을 뒤엎은 솔은 천 옷가지를 모조리 세탁기 안에 집어넣어야 했다. 가방 정리를 끝낸 솔은 문득 허전함을 느꼈다. 바지 주머니에도 겉옷 주머니에도 핸드폰이 보이지 않았다.

    “어디에다 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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