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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애를 뽑고 싶어-46화 (46/192)
  • #46

    황당해 멍하니 제 손바닥을 보고 있던 솔은 익숙한 목소리가 제 이름을 부르자 고개를 들었다. 치렁치렁한 앞머리 사이로 달려오는 가람의 모습이 보였다. 늘 느른하게 살짝 내려간 눈썹이 지금은 제법 솟아 있었다.

    “영호 형은? 너 혼자 온 거야?”

    “어어. 영호 형 일이 좀 있어서….”

    “혼자 다니지 말랬잖아. 가방은 왜 이래?”

    “어…. 그게. 넘어졌어.”

    솔에게로 한달음에 다가온 가람은 얼굴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 솔 못지않게 피부가 흰 편인 그였지만, 오늘따라 허옇다 못해 백지장처럼 질려 보였다. 솔이 얼빠진 얼굴로 변명을 하며 바닥에 널브러진 가방을 주우러 허리를 숙이자, 가람이 먼저 선수를 쳤다.

    가람은 바닥에 패대기쳐진 솔의 가방을 주워 튀어나온 그의 옷가지와 수건, 파스 따위를 주워 넣었다. 내용물만 보자면 아이돌 연습생이 아니라 무슨 운동선수의 가방이었다.

    “다친 데는 없어? 괜찮아?”

    “응…. 그냥 손바닥만 조금”

    “어디 봐.”

    솔은 손바닥을 불쑥 내밀었다. 자국이 남아 있기는 했지만, 눈에 띄는 상처가 없자 가람은 안심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왜 혼자 왔어. 연락했어야지.”

    “시간이 너무 늦기도 했고. 씻고 누웠을 시간이었잖아. 괜히 나 때문에 나오게 하기 싫어서.”

    한두 번도 아니고 매번 데리러 나오라고 하는 것도 미안했다. 그렇다고 연습을 쉬자니 그것도 여의찮았고. 오늘은 평소보다 더 늦었던 탓에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행동했던 것이었는데, 사뭇 진지한 가람의 표정을 보아 하니 솔은 조금 아차 싶었다.

    “애도 아니고 피곤하잖아. 거리도 가까운데 뭐.”

    평소의 나른한 표정은 어디로 가고 백지장처럼 하얗게 질려 제법 태오처럼 엄격한 표정을 한 가람의 눈치를 살피며 솔은 변명을 더 늘어놓았다. 가람과 눈이 살짝 마주치자 솔은 어설프게 웃어 보였다. 그런 솔의 표정에 가람은 언제 그랬냐는 듯, 눈꼬리를 늘어뜨리고 특유의 느긋한 얼굴로 돌아왔다.

    풀 죽은 솔의 얼굴을 보고 있자니 더 이상 미간을 구길 수가 없어 자연스레 얼굴이 풀어졌다. 하지만 그냥 넘어갈 수는 없었다. 본래 한 번이 두 번 되고 곧 여러 번이 되는 법이었다.

    “다음부터는 그러지 마. 솔, 연습생한테도 사생팬이 붙기도 해. 오히려 더 안 좋아.”

    “연습생한테? 날 어떻게 알고….”

    “YC 엔터에 매일 출퇴근하는 아주 잘생기고 예쁜 남자. 모를 수가 없잖아.”

    “…음.”

    듣고 보니 반박할 말이 없어 솔은 민망함의 웃음을 흘렸다. 여전히 이렇게 대놓고 잘생겼다거나 이쁘다는 외모에 관한 칭찬을 듣는 게 어색했다.

    “아니 그런 의미가 아니라. 보통 누굴 좋아해서 팬이 되려면 뭘 좀 알아야 좋아지는 거 아니야?”

    “이런 말 좀 그렇지만, 일부러 연습생만 따라다니는 사람이 있어.”

    “일부러라니.”

    “뭣도 모르잖아. 누가 날 좋다고 말해 주면 가뜩이나 자존감 바닥칠 때 고맙기도 하고. 물론 진짜 좋은, 감사한 분들도 있지만, 아무튼 그러니까 내 말은 이렇게 혼자 다니지 말라고.”

    “알았어. 신경 쓸게.”

    문득, 솔은 회사를 빠져나오며 마주쳤던 두 인영을 떠올렸다. 아무리 이쪽 판에 관심이 없는 솔이라지만 사생팬, 악성 개인 팬 정도의 말은 들어 봤다. 유명 연예인의 숙소까지 찾아온다거나 스토킹하는 거의 범죄 수준의 일들을 뉴스거리로 접했었다.

    널리 알려진 공인이니 그런 일도 겪는구나 싶었는데, 아직 노출도 되지 않은 연습생에게도 그런 일이 생긴다니 거기까지 생각은 안 해 봤다. 그리고 직접 겪어 보기 전까지는 남의 일이라고 사실은 안일하게 흘려들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찌 되었거나 이런 시각에 혼자 골목길을 돌아다니는 건 퍽 안전한 일이라곤 할 수 없으니 가람의 걱정을 덜어 줄 생각으로 더 이상 말을 얹지 않았다.

    “네 말대로 가깝잖아. 너 데리러 여기까지 나오는 거 뭐가 힘들다고.”

    “근데 어떻게 알고 나왔어?”

    “너무 늦게 안 오고 연락도 없길래. 혹시나 해서 나왔어.”

    “귀찮게 안 하려고 안 부른 건데. 어쨌든 내가 나오게 했네.”

    “조금만 더 일찍 나올걸.”

    가람이 솔과 시선을 맞추며 한쪽 눈을 살짝 찡긋해 보였다. 솔이 연락하든, 안 하든 어쨌든 가람은 솔을 데리러 나왔다. 나름대로 생각해 준다고 한 일이었는데 도리어 귀찮음 위에 걱정까지 얹어주었다.

    솔은 가람이 들고 있는 제 가방을 돌려 달라 손을 내밀었지만, 가람은 가방 대신 아무것도 잡지 않은 반대쪽 손을 내밀었다. 무슨 의미인지 이해하지 못한 솔이 빤히 빈손을 바라보자 가람은 잠시 머뭇거리다 빈손으로 솔의 점퍼를 털어 주었다. 바닥을 구르긴 했지만, 별달리 묻은 것도 없었다. 가람의 손이 툭툭, 솔의 허리춤을 두들겼다.

    “가방 이리 줘.”

    솔은 살짝 몸을 비켜 세우며 가람이 들고 있는 제 가방의 손잡이를 붙잡았다. 순순히 넘겨줄 거란 예상과 달리 가람은 오히려 솔의 손을 잡아끌었다. 의문을 가득 담은 눈으로 가람을 올려다보자 솔과 눈이 마주친 그가 느른하게 웃었다. 은근히 웃음이 능글맞을 때가 있었다.

    “넘어졌다며. 손바닥 아프잖아. 내가 들어 줄게.”

    “이제 흔적도 없어. 진짜 다치기라도 했으면 업기라도 했겠네.”

    솔은 제 손바닥을 탁탁 털어 가람에게 보여 주었다. 정말 이젠 붉은 흔적마저 사라져 멀끔했다. 겨울이라 옷을 두껍게 입은 탓일까 무릎이나 다른 곳도 딱히 문제가 없었다. 가방을 돌려받길 포기한 솔은 천천히 숙소 방향으로 걸음을 옮기며 지나가는 말을 툭 내뱉었다.

    솔이 가는 길을 바로 뒤따라가던 가람이 그의 말에 멈춰 섰다. 움직이지 않는 발걸음 소리에 솔이 슬쩍 뒤를 돌아보았다. 오늘도 여전히 그 자리였다. 늘 가람이 출근길이든 퇴근길이든 한 번쯤 멈춰 서는 골목 그 자리. 솔과 눈이 마주치자 가람은 눈썹을 더욱 축 늘어뜨리고 조금 뜸을 들인 끝에 말했다. 왜 그리 뜸을 들였나 싶을 만큼 별말도 아니었다.

    “…그랬을 거야. 너 쓰러졌을 때도 그랬잖아.”

    “그땐 태오가 들쳐 업고 병원 갔다며.”

    “태오가 아니라 나도 그랬을 거라고. 다들 그랬을 거야.”

    “…뭐야. 감동이네. 처음이랑 너무 딴판이잖아.”

    숙소 방향으로 걸음을 계속 옮기던 솔은 뒤에서 들리는 가람의 목소리에 뒤를 돌아보지도 않고 살짝 웃으며 대답했다. 금방 걸어갈 짧은 거리를 일부러 천천히 가려는 듯, 휘적휘적 걸으며 뜸을 들였다. 멤버들과 사이가 좋아진 건 좋은 일이었다. 좋든 싫든 솔의 의사를 떠나서 솔은 이 일을 계속해야 했고 아마도 매주 목숨을 건 도전을 해야 했다. 살아남기 위해선 고양이 손이라도 빌려야 할 판이었다.

    “그땐… 우리 다 지치고 예민했었던 거 같아. 그래도 그러면 안 됐었는데.”

    “알아, 태오한테 이야기 들었어. 그리고 그땐 나도 좀 재수 없었지.”

    가람의 말에 솔은 얕게 소리 내 웃었다. 그때에는 솔도 사리 분별이 제대로 안 됐었다. 제가 처한 상황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고 다짜고짜 닥친 상황이 거북하기만 했었다. 가람의 말에 그와 첫 만남을 떠올린 솔은 피식,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었다.

    첫 단추를 모두가 잘못 끼웠는데 그래도 근래엔 얼추 다시 제대로 맞춰 끼운 느낌이 들었다. 덕분에 조금 안정감이 들기도 했다. 지난 일이 되어 버린 며칠간을 떠올리며 솔은 걸음을 옮겼다. 조금 멀찍이 보이던 숙소가 이내 코앞까지 가까워졌다. 담벼락을 지나 숙소 입구를 넘어서려던 찰나, 가람이 불현듯 솔을 불러 세웠다.

    “솔.”

    “응?”

    가람의 부름에 솔은 획 뒤를 돌아보았다. 그의 움직임에 입구 앞, 센서 등이 반짝 켜지며 머리 위로 따뜻한 주황빛 불빛이 쏟아져 내렸다. 어두컴컴한 밤길에서 솔만이 빛을 받았다.

    “아직도 아이돌 하고 싶은 생각 없어?”

    솔은 그의 정수리 위에서 쏟아진 불빛 때문에 속눈썹과 머리칼 아래로 긴 그림자가 생겼다. 얼굴에 드리운 그림자에 그의 표정이 순간 어두워진 것처럼 보였지만 그런 모습에도 가람은 솔의 얼굴 위로 반짝이는 금가루가 내리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조명을 받은 솔의 뺨이 빛 아래에 윤이 났다. 가람은 넋을 놓고 솔을 내려다보았다.

    그런 가람과 달리 정작 솔은 생각지 못한 그의 물음에 조금 얼이 빠진 상태였다. 무어라 대답해야 할지 선뜻 입을 열지 못하고 머뭇머뭇 망설였다. 첫 만남에선 태오가 물었었다. 뭐라 물었었더라, 솔은 기억을 더듬어 갔다.

    ‘아이돌 하고 싶긴 해요?’

    ‘…별로 생각 없는데요.’

    날이 서 다소 퉁명스러웠던 태오의 목소리가 머릿속에 떠오르자 그때의 제 대답도 또렷하게 떠올랐다. 당시엔 그저 현실…, 이젠 현실이라고 부르기도 난감했다. 현재를 살고 있는 곳을 현실이라 불러야 맞는 게 아닐까? 그렇다면 이곳이 현실이었다. 힘들기는 하지만 다시 춤을 추고 노래를 하는 일이 제법 즐거웠다. 멤버들과 모여서 연습실에서 살다시피 하는 것도 무용할 적이 떠올라 재미있기도 했다.

    하지만 아이돌이 되는 일은? 퀘스트에 목숨이 걸려 선택권은 없었지만, 단순히 춤추는 일과 아이돌이 되는 일은 달랐다. 아이돌은 사람들의 시선으로 살아가야 하는 직업이었다. 그런데 정작 솔은 그 사람들의 시선이 싫고 무서워 모든 것에서 도망치고 숨고, 포기했던 사람이었다.

    솔은 쉽사리 대답하지 못하고 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당장의 생활이 몸에 익고, 주말 평가 퀘스트에 정신이 팔려 더 큰 것은 놓치고 있었다. 가장 근본적인 문제였다. 자신이 아이돌이 될 수 있는가? 그보단 되고 싶은가?

    짓씹히는 입술이 조금 위태로워 보였지만 가람은 솔을 재촉하지 않고 그의 대답을 기다렸다. 잠시 괜한 걸 물어봤다 생각도 했지만, 가람은 확인하고 싶었다. 본인은 인지하지 못하는 듯했지만, 솔은 빠르게 변화하고 있었다. 그리고 적어도 가람은 그 변화가 솔에게나 자신들에게나 나쁜 방향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미안한데. 아직 잘 모르겠어….”

    “그렇구나.”

    “미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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