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최애를 뽑고 싶어-45화 (45/192)

#45

커다란 태오의 덩치에 가려져 지호와 득용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솔은 볼 수 없었다. 솔이 문을 쾅, 닫아 버린 뒤에도 한참을 ‘악, 악’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는 점점 멀어지더니 이내 득용의 장난스러운 웃음소리로 변질하여 사라졌다. 연습실이 고요해지자 솔은 낮에 메모가 빼곡한 악보를 꺼내 들었다.

낮에 보컬 레슨 때 받았던 지적 사항들이었다. 발음을 주의해야 할 부분과 끝 음 처리가 미숙한 부분, 혹시라도 또 기억이 날아갈까 세세하게 메모해 두었다. 대학 강의를 들을 때도 이렇게 필기는 안 했었다. 솔은 자리에서 일어나 악보를 쥐고 눈을 감았다. 그러고는 머릿속에 무대를 그렸다. 아이돌로서 무대를 겪어 본 적이 없다 보니 그가 떠올리는 무대는 화려함과는 거리가 멀었고 폭풍 전야처럼 무척이나 고요했다.

늘 잊을 수 없는, 실수를 했던 그날의 무대가 머릿속에 펼쳐졌다. 스포트라이트, 그리고 어두운 관객석에 관객을 하나씩 채워 본다. 한 명씩 자리할 때마다 솔의 숨이 거칠어지고 어깨가 들썩였다. 눈을 질끈 감은 채로 솔은 입술을 끔뻑거리며 가사를 담아냈다. 그저 관객이, 자신을 지켜보고 있는 사람이 있다는 상상뿐인데도 목소리가 나오지 않고 온몸이 벌벌 떨렸다.

며칠간 이 연습을 하면서 최근 솔은 오히려 멤버들이 있을 때보다 없을 때 이런 상황이 더 버겁다는 걸 알게 되었다. 왜 함께 고생해야 더 돈독해진다는. 그런 것 있지 않은가. 하루하루가 달랐고 특히나 태오나 가람에게 의지가 많이 되었다. 요즘은 통 보이지 않는 은겸도.

긴장 탓에 호흡이 짧아지며 나오는 거친 숨소리가 듣기 싫었다. 제대로 나오지도 않는 소리를 억지로 쥐어짜 노래의 중반 정도를 불렀을까, 도저히 참지 못하고 솔은 눈을 번쩍 떴다.

순간 몰입이 깨지며 물에서 건져 올려진 사람마냥 헐떡이며 숨을 내쉬었다. 잠깐 사이에 온몸이 식은땀투성이었다. 고작 몇 분이 되지 않는 시간이었는데 기진맥진해졌다. 그렇게 한참 호흡을 고르던 솔은 숨이 제 궤도에 오르자 다시금 눈을 감았다. 한 곡을 다 완창하지도 못하면서 이런 이미지 트레이닝을 반복하는 이유는 두 가지였다.

첫째는 이번 주 평가의 무사통과를 위해서였다. 또다시 쓰러지는 것은 사양이었다. 두 번째로는 연습하며 알게 된 사실인데, 편안한 상태일 때보다 트라우마 상태일 때 숙련도가 조금 더 빨리 오른다는 점이었다.

*스타라잇 - 드리머 안무 숙련도 91%

보컬 숙련도 60%

그 잠깐 사이에 완곡도 하지 못했는데 보컬 숙련도가 7%나 올랐다. 레슨을 받을 때나 다른 멤버들과 비교적 편안한 상태로 연습할 때보다 더 빠른 속도였다. 그래도 다행인 점은 이 짓거리가 힘들기는 했지만, 점점 하면 할수록 버텨 내는 시간도 길어진다는 점이었다.

이번 평가 곡이 솔은 은근히 마음에 들었다. 폴짝폴짝 뛰는 안무와 함께 꽤나 희망찬 노래. 평소 그였다면 절대로 듣지 않았을 발랄한 노래였다. 지호의 말처럼 아직 상큼하고 발랄하게, 그런 표정 연기까지는 무리였지만 듣고 있으면 기분이 꽤 좋아지는 밝은 노래였다.

‘징징대지 마. 특별한 기적을 바라지만은 말아. 너에게 닿아 있는 수많은 길들 중 가장 빛나는 길을 따라 지금 달려가는 거야. Jump Jump 뛰어올라. Jump Jump 높이 올라 처음 그날처럼.’

가사 때문일까? 솔뿐만 아니라 득용이나 다른 멤버들도 정말 즐겁고 힘차게 노래하며 춤을 추고 있어, 동선을 따라 움직이다 언뜻 보이는 멤버들의 얼굴이 보기 좋았다. 아주 짧게, 창밖으로 보는 풍경처럼 스쳐 지나가는 얼굴이지만 즐기고 있는 것이 눈에 보였다. 잠시 숨을 고르고 앉아 있는데, 연습실 문이 벌컥 열렸다. 양손에 짐을 가득 든 영호였다.

“솔아, 여기 일단 핸드폰. 잠깐만 기다려 봐. 나 금방 다시 올게.”

“네. 천천히 하세요.”

어쩐지 정신없고 바빠 보이는 영호의 모습에 솔은 고개를 끄덕여 보이고 다시 연습에 집중했다.

“흠흠.”

입안이 건조하고 목이 따가워 솔은 헛기침했다. 악보를 하도 들여다보고 있었던 탓인지 눈도 가물거려 시계를 확인하니 어느새 시간이 훌쩍 지나 있었다. 영호가 돌아올 때까지 조금만 더 연습한다는 게 한참이 지나 있었다. 뒤늦게 영호가 건네주고 갔던 제 핸드폰을 확인하니 연락 한 통이 와 있었다. 급한 일이 있으니 가람이나 다른 멤버들에게 연락해 함께 돌아가라며 사과의 메시지였다. 문자를 확인한 솔은 알겠다는 답신을 보냈다.

시간을 보아 하니 지금쯤이면 득용도 가람도 운동을 다 끝내고 잘 준비가 한창일 시간이었다. 이제 막 쉬려 앉았을 멤버들을 괜히 불러내기 싫었다. 솔은 잠시 핸드폰 전화번호부를 보고 망설이다 제 가방을 들쳐 멨다.

회사부터 숙소까지 금방이었고 길을 모르는 것도 아니었다. 회사 정문에서 나오니 회사 담벼락 앞에 바짝 붙어 서 있는 두 여성을 보고 깜짝 놀랐다. 누가 있을 거라 생각하지 못하기도 했고 어두컴컴한 곳에 으슥하게 서 있어서 더 놀랐다.

한결같이 건물 위층을 쳐다보고 있어 솔도 따라 시선을 올리니 회사 중간층에 불이 환히 켜져 있고 언뜻언뜻, 누군가, 사람들의 인영이 스쳐 지나갔다. 어둠과 역광 탓에 누구인지 파악이 되지 않았지만, 담벼락에 붙어 있는 두 사람 모두 이 시간까지 바쁜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는 듯했다.

‘누구지? 은겸 형인가…?’

솔이 회사에서 가 본 곳이라곤 연습실과 식당뿐이었다. 어깨를 으쓱인 솔은 하루 종일 묶고 있어 엉망으로 자국이 남은 머리칼을 털었다. 시야를 적당히 덮는 앞머리가 따끔따끔하게 뺨 언저리를 찔렀다. 물에 젖은 개처럼 머리를 턴 솔은 터덜터덜, 골목길로 걸어 들어갔다.

오랜만에 혼자 길을 걷는 시간에 솔은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온종일 영호가 관리하기도 하지만 솔은 제 핸드폰이 낯설었다. 전화번호부는 더 말할 것도 없고 그 안에 들어 있는 낯선 가족사진도 마찬가지였다.

그 사진이 꺼림칙하기 그지없지만, 또 그렇다고 제 손으로 삭제하지는 못했다. 그래서인지 핸드폰을 돌려받아도 제때 확인하거나 쥐고 있는 일이 드물었다. 모처럼 핸드폰을 확인한 솔은 그간 이것저것 적어 두었던 메모장을 켰다. 써 둔 내용들이 꼭 유치원생 알림장 같았다.

‘도지호’

‘노래랑 요리를 잘함, 조금 무서움, 여우 웃음’

‘강가람. 가람이. 동갑. 뚱뚱한 고양이 같음.’

솔은 제가 적어 둔 메모에 ‘풋’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생김새가 닮았다는 그런 의미가 아니라 동네에 한 마리쯤 있는 잘 얻어먹어 배짱이 좋은 그런 고양이 같은 느낌이 있었다. 느른하게 식빵을 굽고 앉아 눈만 껌뻑이며 ‘뭐.’ 하는 느낌의 고양이 말이었다. 솔은 메모의 하단에 가람에 대해 한 줄을 더 적어 내렸다.

‘발목이 약함.’

가람은 발목을 자주 접질린다. 급하게 움직일 때나 턴을 할 때면 어김없다. 무용을 할 때도 유달리 그러는 친구들이 있었다. 가볍게 접질리는 것이지만 계속 그게 누적이 되다 보면 인대가 말썽을 부려 종종 고생하고는 했었다. 분명 기억의 부재가 찾아올 때 도움이 되라고 시작한 메모였는데 점점 사이가 가까워지며 영 쓸데없는 것들만 적게 되었다.

예를 들면 ‘DK, 오이를 싫어함. 반찬에 오이 꼭 빼기. 짜장면, 아이스크림 좋아함.’ 이런 것 말이었다. 정작 방을 같이 쓰고 하루를 거의 함께하는 태오의 아래엔 공백이었다. 무엇 하나 쉽게 적어 나갈 수가 없었다. 말수가 원체 적기도 하지만 딱히 좋고 싫고를 표현을 잘 안 했다.

‘시간 약속!! 꼭!!’

이것 외엔 별달리 적지 못했다. 그의 가정사는 잊으려야 잊을 수가 없는 일이었고. 솔은 살포시 그 아랫줄에 ‘사실은 힘들어함.’이라는 한 줄을 추가했다. 그러고는 제 이름도 추가했다. 요즘 자신에 대해 꽤 많은 것을 알게 되었다. ‘춤추는 걸 좋아함.’

그리고 ‘친구들이 보고 싶다.’

갑자기 코끝이 시큰거리고 눈가에 열이 올랐다. 솔은 고개를 세차게 저으며 핸드폰을 주머니에 찔러 넣고는 캄캄한 밤하늘을 바라보았다. 별 하나 없었고 희끄무레한 달이 간판 불빛에 묻혀 가고 있었다.

익숙한 골목, 가람이 늘 멈춰 서는 그 자리가 눈에 언뜻 보이자 솔은 터덜터덜 지친 발걸음을 내디뎠다. 주환과 의찬이 보고 싶었다. 요즘 은겸 또한 만나지 못해서일까, 더더욱 주환의 생각이 났다.

친구들 생각에 넋이 반쯤 나가서일까, 솔은 골목을 돌아 빠르게 지나쳐 가는 인영을 미처 보지 못하고 그대로 부딪혔다. 일부러 들이받기라도 한 듯, 정면으로 질주해 온 사람과 부딪힌 느낌이었다.

무방비했던 솔은 완전히 중심을 잃고 철퍼덕 아스팔트 바닥에 주저앉았다. 들고 있던 가방도 내팽개쳐져 옷가지와 물병, 안에 든 물건들도 바닥에 와르르 쏟아졌다. 상대가 달려든 것이었지만 솔은 거의 반사적으로 사과했다.

“아야!”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이곳에 오기 전까진 늘 넋을 놓은 상태로 돌아다녔으니 이런 일이 허다했다. 한번은 가로수에 부딪혀 넘어진 적도 있었다. 의찬과 주환이 일주일은 잔소리했었더랬다. 아스팔트 바닥에 널린 돌조각이 손바닥에 박혀 아팠지만, 대충 툭툭 털어 낸 솔은 몸을 일으켜 세웠다. 그제야 부딪힌 상대를 보니 모자를 쓴 여성이었다. 솔과 부딪히며 에코 백 안에 든 물건들이 죄다 바닥에 쏟아졌는지, 솔을 쳐다도 보지 않고 물건을 가방에 담기 바빴다. 솔은 거듭 사과하며 함께 바닥에 쏟아진 물건들을 황급히 주워 담았다.

“죄송합니다. 괜찮으세요? 다친 데는 없으세요?”

“괜찮아요.”

고개를 푹 숙이고 모자를 눌러쓴 상대는 사과 한마디가 없었다. 솔이 주워 준 물티슈를 획, 낚아채다시피 가져가더니 에코 백을 둘러메고 솔을 지나쳐 빠르게 사라졌다. 느닷없이 벌어진 일에 솔은 황당해 잠시 그 자리에 덩그러니 서 있었다. 순식간에 상황이 종료되자 그제야 손바닥이 따끔하게 아파져 왔다. 손바닥에 돌이 박혔던 흔적이 역력했다.

“성솔!”

“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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