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최애를 뽑고 싶어-44화 (44/192)

#44

솔은 익숙한 바닥을 바라보았다. 눈에 익은, 약한 탄성이 있는 댄스 플로어. 멤버들과 사이가 좋아져서 행복한 게 아니었다. 멤버들과 어울려서 연습하고 춤을 추기에 행복한 것이었다. 문득 그 사실을 깨달았다.

갑자기 콧잔등이 시큰하고 눈가로 열이 몰렸다. 여전히 무대는 무섭고 몸은 마음껏 움직여지지 않았다. 늘 간주가 시작될 때쯤엔 심장이 불안하게 요동치고 자신도 모르게 주먹을 꽉 움켜쥐게 된다. 그래도 한 곡이 끝나고 나면 숨이 벅차오르다 못해 폐가 빠듯하게 부풀면 그 적당한 고통이 안도감을 주었다. 고통을 즐기는 변태 같은 그런 것을 말하는 것도 아니었다.

태오의 말처럼, 이를테면 끝까지 버텨 낸 흔적이다. 통증을 느낄 때마다 솔에게 ‘이번에도 도망치지 않았다.’ 하는 인정처럼 느껴졌다. 오도카니 선 솔은 자신이 왜 무용을 그만두었었는지를 되새겼다. 진부한 말이지만 솔의 전부였고 일상이었다. 그런 솔에게는 일상을 잃은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때엔 그저 고통스럽고 힘들다고만 생각했다. 그저 짐처럼 느껴지고 자신을 짓누르는 모든 것에서 피하고만 싶었다. 견뎌 낼 여력도 용기도 없었었다.

지금의 자신은 그때와 무엇이 다른지 솔은 잠시 생각했다. 하루아침에 부모님을 잃었지만 시간 맞춰 배도 고프고 밥도 잘 넘어갔다. 사실은 무용도 잘 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래선 안 될 것만 같았다.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들이 슬퍼하고 불행하라고 말하고 있는 것 같았다. 솔은 고개를 들어 멤버들을 바라보았다.

여기엔 그런 것이 없었다. 꿈이든 현실이든 간에 자신에게 슬퍼하라 강요하는 사람이 없었다. 물론 솔에 대해, 그의 과거에 대해 잘 모르니까 그럴 수 있었다. 하지만 솔이 일종의 공포증을 앓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 당장에도 그들의 반응은 한결같았다. ‘잘하고 있다.’ 변화하려 하는 그의 노력을 칭찬해 주고 격려해 주고 기다려 주고 있었다. 지금 솔은 작게나마 행복했다.

“뭐 해? 센터로 와야지.”

태오가 부르는 소리에 솔은 고개를 들었다.

“솔이 형 또 정줄 놓았다.”

“아니야. 잠깐 다른 생각 했어.”

“그래, 그래. 빨리하고 들어가자. 아까처럼 상큼하고 청순하게~.”

종종 특성 발동 때문에 멍해지는 솔을 멤버들은 그가 체력이 다하면 그런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물론 실제 체력도 좋지 않았지만, 피로도 조절을 위해 자주 쉬고 트라우마가 발동되며 따라오는 여러 가지 부가적인 반응들 때문에 오해하기에 십상이었다.

매일 같이 밤마다 운동을 다녀오는 득용이 그런 솔을 부실하다 늘 놀려 댔다. 지호가 솔을 보며 제 뺨에 두 손을 가져다 대고 눈을 찡긋거렸다. 대충 조금 전처럼 웃으라는 신호인 듯했다. 계속해서 한쪽 눈을 깜빡거리는 지호에게 한눈이 팔려 있자 태오가 솔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힘들어?”

“아니. 괜찮아.”

아무래도 첫 주말 평가 때 쓰러졌던 것이 영 걸리는지, 가람과 태오는 솔이 멍해지거나 행동이 눈에 띄게 도드라지면 바로 칼같이 안부를 물어 왔다. 자신이 그렇게 허약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설명하고 오해를 풀고 싶었지만, 그날의 쓰러짐과 종종 따라오는 페널티, 피로도 같은 것들을 설명할 자신이 없어 솔은 둘이 오해하도록 내버려 두었다.

솔이 고개를 끄덕이자 가람이 정중앙 거울에 붙여 둔 핸드폰에 녹화 버튼을 누르고 재빨리 달려왔다. 잽싸게 솔의 뒤에 자리를 잡고 서자 꼭 별 가루를 뿌리는 것 같은 차임벨 소리가 스피커에서 흘러나왔다. 솔은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차임벨 소리를 듣고 숨을 깊게 들이쉰 뒤, 하나, 둘, 셋. 이번에는 발걸음이 아주 가볍게 움직였다.

***

“또?”

놀라는 지호의 목소리에 모두의 시선이 그에게로 쏠렸다. 지호가 한쪽 눈썹을 치켜올리고 삐딱하게 솔을 쳐다보았다.

“오늘은 그냥 들어가.”

“그러다 또 쓰러져. 연습도 좋지만, 몸 관리도 해야지.”

연습을 끝내고 정리가 한창일 때에 솔이 홀로 남아 연습을 이어 가겠다 했더니 대번 이런 반응이었다. 첫 주말 평가 이후로 솔은 계속해서 자초해 나머지 공부를 했다. 그도 그럴 게, 눈에 이렇듯 숙련도가 보이는데 가만히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지난 평가에서의 실수도 만회해야 했고 사실 숙소로 돌아가도 그런 생각들과 걱정 때문에 쉽게 잠을 이루지도 못했다.

더 남아 숙련도를 조금 올리고 녹초가 되어 들어가면 바로 곯아떨어지니 잡생각 들 일도 없고 퀘스트 클리어에 밑거름이 되니 일거양득이었다. 하지만 지호와 가람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가람과 지호가 한마디씩 거들자 바닥에 굴러다니는 물병과 수건을 줍던 태오도 멈춰 서서 세 사람을 바라보았다.

득용은 익숙한 일이라는 듯, 바닥에 널브러져 일어날 생각을 몰랐다. 솔은 다시 한번 시스템 창을 확인했다.

*스타라잇 - 드리머 안무 숙련도 91%

보컬 숙련도 53%

안무 숙련도의 경우 100%에 근접했지만, 보컬은 이제 반절이었다. 아직 갈 길이 멀었다. 다음 평가가 이틀이 채 안 남은 시점에서 숙련도 53%를 보고 편히 발을 뻗고 잘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무려 목숨이 걸린 일이었다.

“나 진짜 괜찮아! 그리고 들어가도 잠도 안 올 거 같고….”

솔은 태오까지 합류해 과잉보호와 잔소리가 더 길어질까 재빨리 핑계를 늘어놓았다.

“솔, 너무 무리하는 거 아니야?”

“아니야. 아니니까…. 다들 걱정하지 마. 보컬 연습만 조금 더 하고 들어갈게.”

태오가 고개를 약간 숙여, 솔의 얼굴을 관찰하듯 바라보았다. 솔의 상태를 확인하는 것이었다. 태오는 본인이 말수가 적은 편이라서일까, 말보다는 행동이 먼저인 사람이었다. 그 탓인지 이렇듯 솔의 상태를 헤아려 보려는 듯 이따금 조용히 바라보기만 할 때가 있었다. 그러고 나면 어김없이 솔이 불편할 상황에 그가 먼저 나서거나 필요한 것들을 척척 대령하곤 했다.

무뚝뚝한 표정과 달리 섬세하기 짝이 없었다. 솔은 멤버들을 안심시키기 위해 거듭 괜찮다는 말을 되풀이했다. 이번 평가에선 절대로, 무슨 수를 써서라도 쓰러지거나 다치는 일만은 피해야겠다 다시금 다짐하게 되는 순간이었다.

한 번 더 그런 일이 터졌다간 가람이나 지호가 허리춤에 솔을 매달고 다니며 잔소리할지도 몰랐다. 껍데기도 어엿한 성인이었지만 그 안에 든 건 어쨌거나 스물다섯의 성솔이었다. 물가에 내놓은 아이처럼 다들 은근히 신경 쓰는 것이 고맙기도 했지만 솔직히 답답했다.

“오늘은 내가 병원 가 봐야 해서…. 강가람.”

“괜찮다니까. 다들 너무 과보호야. 가람이도 쉬어야지.”

“나도 괜찮아. 내가 같이 연습할게.”

지난 며칠간 태오와 계속 함께 남아 연습을 했기 때문일까 태오가 가람을 부르며 남으라는 듯 턱짓으로 신호를 주었다. 그 신호를 파악한 솔이 재빨리 끼어들었지만, 가람은 순순히 물러나지 않았다.

특성 ‘비운의 천재 무용수’ 의 페널티를 안고 연습하는 것은 쉽지 않았지만 이골이 났다. 이제는 충분히 컨트롤할 수 있다고 느끼기도 했다. 홀로 연습을 고집하지 않아도 되었지만, 아직 남들 앞에서 노래하는 것이 익숙하지 않아 멤버들에게 드러내는 게 부끄러웠다.

“어…. 가람 형, 그럼 나는요. 같이 운동 가 준다 했으면서.”

솔은 속으로 주먹을 불끈 쥐었다. 가끔은 눈치 없는 득용이 이런 식으로 큰 역할을 해 줬다. 득용이 눈썹을 축 늘어뜨리고 죄지은 똥강아지처럼 가람을 쳐다보았다. 덩치에 맞지 않게 혼자 밤 운동 나가는 것이 무섭다며 득용은 운동을 나갈 때마다 꼭 멤버 중 하나를 데려가곤 했다. 물론 솔은 제외였다.

한번은 솔이 함께 나가 준다 했더니 득용이 혀를 차며 솔에게 ‘형은 날 지켜 줄 수 없어요. 내가 형을 지켜야 한다고요!’ 하고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어처구니가 없어 솔도 그 이후론 두 번 묻지 않았다. 득용의 불쌍한 표정에 가람이 솔과 득용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고민하는 그 표정을 솔은 놓치지 않았다.

“다들 들어가. 태오 데려다주고 영호 형 돌아오면, 영호 형이랑 같이 들어갈게. 됐지?”

“그래도 역시 같이 연습하는 게….”

“혼자 집중 좀 할게.”

“그래, 혼자 연습하게 해 주자. 아무래도 그게 편하겠지.”

“다들 들어가서 쉬어! 정리도 내가 할게.”

부끄러운 것은 어쩔 수 없지만 태오나 지호, 다른 멤버들이 여러 도움을 주고 같이 연습하는 게 솔은 더는 그리 불편하지 않았다. 같이 남는다 해서 솔이 손해 볼 것도 없었다. 오히려 얻는 것이 더 많았다. 솔직히 말하자면 새벽의 연습실은 조금 설렁하고 으쓱한 느낌이 있어 이따금 흠칫할 때가 있기도 했다. 하지만 한사코 솔이 거절하는 이유는 미안해서였다.

다들 피곤한데 꼭 자신이 걱정되어, 자신 때문에 일부러 남아 연습하는 것 같아서였다. 혹 자신 때문에 괜한 무리를 하는 것 아닐까, 싶어서. 또 오래 연습생 생활을 해 온 만큼 각자의 생활 루틴이 있었다. 이를테면 득용이가 연습을 끝내고 한밤중에 운동을 나가는 것처럼 말이었다. 그런 개인의 루틴에 관한 지장을 주기도 싫었다.

솔은 망설이는 가람의 등을 억지로 떠밀었다. 알량한 솔의 팔에 밀려 주며 가람은 연신 뒤를 돌아 그를 바라보았다. 가람을 거의 연습실 문 앞까지 밀어내자 마지못해 지호가 두 손을 들어 보였다. 지호와 가람이 해결되자 솔은 여전히 바닥에 널브러진 짐을 치우고 있는 태오 또한 밀어냈다.

득용은 저 스스로 알아서 ‘아, 가기 싫다.’와 먹고 싶은 음식명을 나열하며 축 늘어져 터덜터덜 움직였다. 솔이 억지로 멤버들을 쫓아내고 연습실 문을 반쯤 닫은 순간, 태오가 문을 덥석 손으로 붙잡고 머리를 쓱 들이밀었다. 문짝 하나를 두고 대치하고 선 두 사람의 얼굴이 손바닥 하나 들어갈 만큼 가까워졌다.

“나 오늘은 병원에서 잘 거라 영호 형 금방 데리러 올 거야.”

그간 아무리 늦어도 숙소로 꼬박꼬박 돌아왔던 태오의 말에 솔은 고개를 살짝 까딱이며 물었다.

“그럼 오늘 안 들어와?”

“응.”

“그럼 내일 아침에….”

갑작스러운 말에 혹 무슨 일이 있나 싶었지만, 선뜻 묻기가 그래, 솔은 슬쩍 눈치를 살폈다. 그런 솔의 반응을 오해한 태오가 살짝 옅은 미소를 지으며 그를 내려다보았다. 실은 솔보다 동생인 주제에 꼭 동생을 보는 형 같은 웃음이었다.

“너 일어나기 전엔 들어올 거야.”

“차라리 잘됐다. 솔아, 연습 잘하고 영호 형이랑….”

“알았어. 영호 형이랑 같이 갈게! 아니면 연락할게!”

더 들어 줬다간 시간을 더 잡아먹을 거 같아 솔은 지호의 말을 중간에 잘라먹고 등을 떠밀었다. 커다란 태오는 솔의 알량한 힘에 꿈쩍도 하지 않았지만, 그의 앞에 서 있던 지호와 득용이 도리어 ‘아아!’ 하고 곡소리를 냈다.

“윤태오, 아파!”

“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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