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
솔은 자신이 내뱉은 말에 살포시 웃음 지었다. 자신이 누군가에게 이런 거창한 말을 하게 되는 날이 올 거라곤 상상도 못 했었다. 솔은 이마에 흐르는 물방울을 팔뚝으로 훔쳐 내며 말을 이어 나갔다.
“생각보다 괜찮을 수도 있어요. 저는 그랬거든요.”
“본인들 일로도 버거운 사람들이에요. 가끔은 모르는 게 속 편할 때도 있고요.”
“그래도요. 거짓말이라면서요. 그러면 그쪽도 어쨌든 힘든 거잖아요? 나도…. 나도 비슷한 일을 겪었었어요.”
“…….”
계속되는 대화에 태오는 아예 몸을 솔에게로 돌렸다. 이번에는 솔도 더는 피하지 않고 그와 마주하고 섰다. 제법 큰 키인 솔이 턱을 살짝 들어야 할 정도로 태오는 커다랬다.
“그쪽이 오던 날, 영호 형과 다퉜어요. 무척 감정적이었고 애처럼 그걸 그쪽한테 풀었었죠.”
“그날은 나도 마찬가지였으니 피차일반이니까….”
“아뇨. 전날에 오기로 했던 새 멤버가 나타나지 않고, 나는 이번에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했어요. 요원한 일에 매달리지 말고 현실을 봐야겠다.”
솔은 그가 또 누차 그 일에 대해 사과할까 싶어 고개를 저으며 말을 끊었다. 그러자 그런 솔을 보며 태오 또한 함께 고개를 저었다.
“어머니와 동생이 누워 있는 병실로 돌아가야겠다고 더 이상 버티는 건 어려울 것 같다고, 이번에도 안 된다면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힘들다. 그런 말을 했었어요.”
“영호 형한테요?”
“매니저잖아요. 적어도 저보다는 어른이고.”
“하긴, 매니저죠….”
“다시 마음을 다잡는데 1분도 안 걸렸어요. 입 밖으로 그 말을 내뱉고 나서 바로 후회했고 뱉은 말을 주워 담으려고 했죠.”
이어지는 태오의 말에 새삼 솔은 마냥 커다래 보이는 그가 이제 고작 스무 살이라는 점을 깨달았다. 비록 표면상으로 솔도 스무 살이긴 했지만, 그 속내는 그래도 스물다섯 아니었던가. 첫 만남을 제외하고는 크게 감정을 드러내지 않고 과묵히, 성실했던 탓에 윤태오가 이제 막 성인이 된 지 며칠 안 됐다는 걸 인지했다. 스무 살의 자신은 저러지 못했다. 물론 스물다섯의 성솔도 마찬가지였고. 서른이 넘었다면 좀 나아졌을까. 살아 보지 않았으니 모를 일이었다.
“다음 날 아침에 영호 형이 애들을 모아 놓고 말하고 있더라고요. 태오가 그만둘 거다.”
“아….”
태오의 말에 솔은 눈을 질끈 감고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태오가 영호에게 늘어놓았을 말들은 그런 결과를 바라고 늘어놓은 것이 아니었다. 어떤 해결을 바란 것도 아니었고 지호의 말대로 그는 로봇이 아니기에, 감정의 환기가 필요했던 것이다. 순간 솔의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가는 목소리가 있었다. 첫날, 방에 쪼그려 앉아 벽 너머로 들리던 풀이 죽어 있던 목소리.
‘형. 아침에 그 이야기요…. 진짜 그만둘 거 아니죠…?’
지금의 솔은 태오가 얼추 어떤 사람임을 알기에, 첫 대면에서 태오가 무척이나 날카로웠다는 사실에 고개를 끄덕였다. 날카로울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득용이가, 태오가 그런 말을 했었구나. 솔이 태오의 상황에 부닥쳐 있었다면, 당장 핸드폰을 꺼 놓고 잠적해 버렸을 것이다.
“내가 말하지 않아도. 다들 내 사정 훤해요. 내가 내색하지 않아도 다들 복잡하고, 무슨 이야기를 꺼내든 무거울 거라는 걸 알고 있죠.”
솔은 고개를 작게 계속 끄덕였다. 모두 자신도 익히 느껴 보고 겪어 본 것들이었다. 태오에게 그저 조금이나마 은겸이 자신에게 해 주었던 것처럼 환기를 시켜 주고 싶었던 것인데. 그래도 정신적으로는 다섯 살 연상 아니었던가, 하지만 정작 태오의 이야기를 듣다 보니 솔이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게 되었다.
“거기에 말을 더 얹어 봤자 불안감만 키울 뿐이에요. 다 어려운 상황에서 말해 봤자 다 같이 침몰할 뿐이라고요.”
“…….”
“그리고, 임시든 뭐든 리더예요. 내가 멤버들에게 믿고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이었으면 해요.”
“…너무 힘들지 않아요?”
솔은 재차 물을 수밖에 없었다.
“힘들어요. 말했잖아요.”
“도망치고 싶지 않아요? 나는 그랬거든요. 그래서 도망쳤어요.”
“어디까지 도망칠 수 있는데요?”
“…….”
돌아온 질문에 이번에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어디까지.’ 끝도 없을 것이다. 도망치려 마음먹는다면 정말 매사에 도망칠 것이다. 그러다간 결국 숨 쉬는 일에서도 도망치겠지. 아니다, 죽는 것은 무서우니 죽는 것에서도 도망치겠지. 이도 저도 아닌 채로 그렇게 살 것이 분명했다.
“여기서 도망쳐서 다른 곳에 가면, 거기서는 도망치지 않을 수 있나요?”
“아뇨.”
태오는 별일 아닌 듯, 시니컬한 얼굴로 물었지만, 그의 물음은 솔에게 꽤나 크게 다가왔다. 솔은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난…. 계획에서 일이 틀어지거나 내가 컨트롤하지 못하는 상황이 싫어요. 어차피 싸워야 한다면 내가 잘 아는 곳에서 싸우는 게 안정적이죠.”
솔은 눈을 깜빡였다. 솔은 반대였다. 나에게 익숙한 공간, 영역이 망가지는 것이 너무도 싫었다. 애초에 싸우지도 않겠지만, 부딪혀야 한다면 내가 아끼는 것이 망가지는 상황은 피하고 싶었다. 비슷한 일을 겪었지만 전혀 다른 방식으로 견뎌 내고 있는 데엔 이 차이가 큰 듯했다.
“무대 공포증이나 공황 장애나, 뭐든 비슷한 문제를 겪고 있죠?”
“네. 알고 있었어요?”
“모를 수가 있어요?”
대뜸 솔에게 향한 태오의 질문에 솔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를 바라보았다. 지나치게 긴장하고 굳어 버리는 몸과 눈에 띄게 파리해지는 안색, 식은땀과 거친 호흡. 예민한 반응. 눈썰미가 있는 사람이라면 모르고 지나칠 수 없는 모습들이었다. 당연한 걸 묻느냐는 태오의 반응에 솔은 민망함을 애써 감췄다. 그래도 그간 티 내지 않는다고 이를 악물고 참았는데. 아무짝에도 소용이 없었다.
하긴, 돌이켜 보면 솔이 힘들거나 긴장하는 상황 때마다 태오가 나서서 상황을 정리하고는 했다. 단지 그가 리더이기에, 자신이 상황을 통제하는 것을 선호해서 그랬다고 하기엔 지나치게 알맞았다. 정확히 솔이 불편해하는 타이밍에 보란 듯이 중재했으니 말이었다. 당장 보컬 레슨 때만 해도 그랬다.
“그래서 무용을 그만뒀어요?”
“네. 춤을 출 수 없었어요.”
“도망친 곳이 여기예요?”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네요.”
훅 들어온 질문에 솔은 잠시 태오를 바라보다 선뜻 대답했다. 눈꺼풀을 천천히 깜빡이며 모처럼 단호한 대답이 태오와 아주 조금 비슷해 보였다. 이번에는 솔이 원해서 이곳으로 도망친 건 아니지만 스물다섯 살의 성솔은 어쨌든 도망치던 중이었다. 모든 것에서. 주환의 결혼에 무너져 버리긴 했지만.
“잘했어요.”
“네?”
솔은 순간 자신이 잘못 들은 건 아닌지, 제 귀를 의심했다. 뜬금없는 칭찬에 어리둥절해 눈을 동그랗게 뜨고 태오를 쳐다보니 태오가 맞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바로 당신에게 하는 말이라는 듯. 어리둥절하다 못해 멍해져 버린 솔을 표정을 보며 태오는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엔 도망치지 않았잖아요.”
순간 태오의 말에 솔은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터질 듯이 붉어지고 입꼬리가 씰룩거려 솔은 다급히 손등으로 얼굴을 가렸다. 자신이 태오에게 위안을 주려 시작한 대화였는데 반대로 위로받아 버렸다. 부끄러움에 얼굴을 가리니 이젠 귀가 도드라졌다.
“아직… 며칠 안 됐잖아요. 하다가 또 힘들어지면 도망칠지 어떻게 알아요.”
솔은 한껏 붉어진 얼굴을 애써 가리며 더듬더듬 말꼬리를 잡았다. 얼굴이 붉어진 걸로도 모자라 확 열이 올랐다. 이런 것에 칭찬받은 적은 처음이었다. 애초에 시도까지 이어지지 못해서긴 했지만. 괜히 일어나지도 않은 일을 언급하며 솔은 민망함을 씻어 내렸다. 시스템 때문에 마음대로 그만둘 수도 없었지만. 태오의 칭찬이 쑥스러워 괜히 속내 밑바닥에 가라앉은 말을 억지로 끄집어냈다.
“그러면… 아마, 강가람이랑 득용이가 꽤 힘들어할 거예요. 그 둘이 늘 마음을 쉽게 주거든요.”
득용은 정말 울지도 몰랐다. 성격 있어 보이고 강한 자존심에 소란스럽고 자신감 넘치지만 그 이면엔 여리고 시냇물처럼 순진한 모습이 있었다. 제법 심각한 이야기를 하고 있었는데, 풀 죽어 속상해할 득용을 생각하니 안쓰러우면서도 웃음이 나왔다. 달리 막내가 아닌가 보다 싶었다. 정이 든 건 솔도 마찬가지였다. 고작 그 며칠 함께 부대끼면서 말 좀 놓았다고 태오의 말대로 떠난다 생각하니 가슴이 쓰렸다.
솔은 어느새 심각한 분위기는 사라지고 웃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태오를 위로해 주려다가 도리어 위로받고 언제 그랬냐는 듯이 기분이 좋아진 자신이 우스웠다. 도와주려 말을 꺼내 놓고 또 도움받아 버렸다. 태오의 말에 솔은 그만 더 할 말을 잃고 천진난만하게 웃어 버렸다. 정작 이 대화로 도움을 받고 마음이 홀가분해진 건 이번에도 솔이었다.
“그거 알아요? 아무 사이 아니기에 할 수 있는 말이 있지만, 그 말을 하고 난 뒤에는 더는 아무 사이도 아닐 수가 없어요.”
“…그렇네요.”
듣고 보니 그랬다. 지나가는 사람에게 제 속내를 터놓고 나면 그 사람이 그저 스쳐 지나가는 인연으로 남을 수 있을까? 그 순간부터 어떤 특별한 사람이 될 것이다. 거창한 감정을 나눈 게 아니어도 적어도 내 비밀을 알거나 내 사정을 이해하는 사람이 되어 버린다. 새롭게 관계가 쓰였다.
“가람이한테 하듯, 말 편하게 해요. 그쪽, 이쪽, 저쪽, 태오 씨. 무슨 사이여서가 아니라 팀 분위기상으로도 좋지 않으니까요.”
“어…. 응. 그럴게. 태오야.”
지호나 가람한테 했던 것과 달리 반말이 쉬이 나왔다. 아직도 반말을 툭 내뱉는 것이 어색해 이따금 지호와 가람에게 존댓말이 튀어나왔는데. 태오에겐 술술 잘도 나왔다. 그 느낌이 싫지 않아 솔은 가지런한 치아를 환히 드러내며 한껏 활짝 웃었다. 태오의 마음이 무겁건 어떠하건 적어도 지금 솔의 마음은 한결 가벼웠다.
“하고 싶은 말 다 했으면 이제 연습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