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최애를 뽑고 싶어-40화 (40/192)

#40

문 너머로 들리는 태오의 대답이 단호했다. 솔은 자신도 모르게 슬쩍 웃음을 지었다. 윤태오란 사람은 꼭 원목 같았다. 아주 짙은 색에 무겁고 단단한.

“미안하다. 그래도 내가 형인데 맨날 너한테 이런 소리나 하고….”

“인제 그만 들어가서 연습해요. 빠른 애들하고 속도 맞추려면 두 배로 해야죠.”

“빡세다. 빡세.”

지호가 나이 지긋한 어르신처럼 말했다. 복도로 흘러나오는 두 사람의 이야기에 집중하고 있던 솔은 문고리가 돌아가는 소리에 우왕좌왕했다. 피할 곳이 없었다. 뒤늦게 화장실로 걸음을 바삐 움직여 보았지만, 모습을 감추기 전에 지호가 탕비실에서 나올 것이었다. 황급히 도망치는 와중에도 지호의 목소리가 또렷하게 솔의 귀에 들어왔다.

“태오야. 너는 안 힘드냐? 네 상황도 있는데…. 이런 이야기나 들어 주고 있고.”

지호의 물음에 솔은 자신도 모르게 발걸음을 멈췄다. 자신이 태오에게 가장 궁금한 것이었다. 안 힘들까? 솔은 많이도 힘들었다. 지금도 그날의 기억만 떠올리면 삶이 버거웠다.

“네.”

돌아온 태오의 대답은 이번에도 무척이나 단호했지만 조금 전보다 목소리가 한층 더 무겁게 내려앉아 있었다. 등 뒤로 지호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솔은 지호가 빠져나오기 전에 화장실 안으로 몸을 숨겼다.

“생각은 하고 대답할래? 질리려고 그런다. 윤태오.”

“형이 조금 전에 이런 게 저답다면서요.”

“그건 그런데…. 네가 무슨 감정 없는 로봇도 아니고.”

솔이 복도를 도둑고양이처럼 살금살금 지나고 나서도 지호는 선뜻 탕비실을 나서지 않고 태오의 말꼬리를 잡았다. 반쯤 열린 문을 붙잡고 버티는 지호를 보며 태오는 살짝, 그 짙은 눈썹을 찌푸렸다. 태오의 표정에 지호는 그제야 평소처럼 여우처럼 입술 끝을 동글게 말아 웃었다.

“알았어. 인마. 얼굴 풀어! 연습하러 들어갈게! 리더 등쌀에 못 이겨서 데뷔는 해 보고 죽어야지.”

“죽지는 말고요.”

“네. 리더님! 솔이 보기 좀 그렇네…. 솔이 말이야, 열심히 하긴 하는 거 같은데, 어딘가 좀….”

“형.”

연습실로 돌아가나 했더니 또다시 말을 늘이는 지호를 보며 태오는 팔짱을 틀어 끼우고는 비딱하게 고개를 숙였다.

“네, 네. 알겠습니다.”

그제야 지호는 문고리를 놓고 질렸다는 듯, 손사래를 치며 탕비실을 빠져나왔다. 지호가 연습실로 돌아간 걸 확인한 태오는 복도 끄트머리 화장실 쪽을 바라보았다. 지호는 보지 못했지만, 그의 어깨 너머. 살짝 열린 문틈으로 황급히 자리를 피하는 솔의 모습이 태오의 눈에 잡혔다.

태오는 연습실로 돌아가는 대신, 솔이 숨어든 화장실로 향했다. 세면대에 물줄기가 세차게 쏟아졌다. 그 앞에 세면대를 짚고 선 솔은 땀인지 물인지, 어찌 되었든 흠뻑 젖어 있었다. 솔은 화장실에 들어온 태오와 눈이 마주치자 어색하게 얼굴을 돌렸다.

“지호 형 말, 마음에 담아 두지 말아요.”

“…어. 네.”

몰래 잘 빠져나왔다고 생각했던 솔은 태오가 먼저 말을 꺼내자 민망함에 고개를 푹 숙이며 대답했다. 일부러 엿들으려 한 것은 아니지만, 모양새가 그렇게 되어 버렸다. 하지만 태오는 딱히 탓하지 않았다.

“일부러 들은 건 아니고요. 화장실 가려다가….”

“알아요. 조심 안 한 우리 잘못이죠.”

“그리고 지호 형이 한 말도 충분히 이해해요.”

솔이 쭈뼛거리며 변명하자 태오가 어깨를 으쓱거렸다.

“지호 형이 여유가 없어서 그래요.”

“이해해요. 그리고 편들어 줘서 고마워요.”

“사실이잖아요.”

덤덤한 태오의 목소리에 솔은 그를 바라보았다. 태오는 무심한 표정으로 거울에 비친 자기 모습을 응시하다 어깨를 뚝 떨어뜨리며 숨을 길게 내쉬었다. 오늘 태오는 꽤 피곤해 보였다. 거울에 비친 태오의 눈동자가 자신에게로 향하자 솔은 괜히 세면대에 손을 가져다 대었다. 수전에서 물줄기가 쏟아져 내렸다.

깨끗해진 손을 씻고 또 씻고, 연신 흐르는 물에 씻어 대던 솔은 지난 일간 태오에게 묻고 싶었던 것을 묻기로 결심했다. 지호와 나눈 대화가 머릿속에서 쉬이 떠나지 않기도 했지만, 의도했건, 안 했건 본인이 스스로 말하지 않은 개인사를 알고도 모른 척하고 있다는 게 찜찜해서기도 했다.

“그…. 있잖아요. 어쩌다 보니 다른 사람들한테 그쪽 사정을 듣게 되었거든요.”

“아. 은겸 형이죠?”

말을 꺼낸 솔은 어려웠지만, 돌아온 태오의 대답은 익숙하다는 듯 퍽 쉬웠다. 왜 거기서 당연하게 은겸의 이름이 나오는지. 자신이 오전에 그와 친한 모습을 보여서? 의문스러웠지만 솔은 질문보다 먼저 은겸의 이름에 솔은 고개를 저었다. 은겸이 괜한 오해를 받는 것은 싫었다.

“아뇨. 그 선배님 쪽 멤버긴 해요. 기분 나쁘죠?”

“회사 사람들 다 아는 이야기인데요. 오히려 모두가 아는 이야기 혼자만 모르는 쪽이 기분 나빠야겠죠.”

“모두가 안다고 아무에게나 말해도 되는 건 아니잖아요.”

솔은 고개를 들어 거울을 응시했다. 거울에 반사된 상을 통해 태오와 눈이 마주쳤다. 그의 표정은 진심이라는 듯 조금의 미동도 없었다. 태오와 눈이 마주친 솔은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자신은 저렇게 초연하지 못했다. 뒤에서 따라붙는 시선들, 불쌍히 여기며 수군대는 소리들. 태연하고 초연한 척했지만 그런 것들에 상처받고 아팠다. 찜찜함과 호기심을 덜려고 시작했던 대화에 점점 속마음이 실려 진솔해졌다. 적어도 솔은 그랬다.

“…아니죠. 근데 아무나 다 말하고 다니네요.”

“미안해요.”

“그쪽한테 하는 말이 아니에요.”

“아무튼 또 어쩌다 보니 아까 지호 형과 대화도 듣게 되었는데요.”

쭉 무표정하던 태오의 얼굴에 맥 빠지는 웃음이 어렸다 사라졌다. 아주 짧은 순간 스쳐 지나간 웃음이었지만, 거울을 통해 태오를 바라보고 있던 솔에 눈에는 그 찰나가 꽤 길게 느껴졌다. 기분 좋은 미소는 아니었지만 잘생긴 얼굴에 어찌 되었든 웃음이 머무니 보기 좋았다.

득용은 솔을 보며 아무것도 안 해도 될 얼굴이라 칭찬하지만, 솔이 보기엔 그런 얼굴을 가진 사람은 윤태오였다. 그냥 가만히 앉아 사진만 찍혀도 충분히 벌어 먹고살 수 있을 것 같았다. 너무 빤히 들여다본 탓일까. 태오가 고개를 돌려 거울을 통해서가 아닌 직접 솔을 내려다보았다. 그의 시선이 제 얼굴에 머물자 솔은 고개를 급히 숙이고 내내 묻고 싶었던 것을 끝내 물었다.

“정말 힘들지 않아요?”

태오의 사정을 알게 된 후로 내내 묻고 싶었다. 자신은 모든 것에서 도망치고 싶었다. 기억에서까지 도망치고 있을 정도로 힘들었는데 단편적인 모습들이지만 태오에게선 조금의 회피도 보이지 않아 묻고 싶었다. 힘들지 않은지, 도망치고 싶지 않은지. 솔의 물음에 태오는 한참 동안 말없이 그를 빤히 내려다보았다.

이마 위로 닿는 태오의 시선에 솔의 얼굴이 점점 붉게 타올랐다. 괜한 짓을 했다는 생각이 불현듯 들자 심장이 터질 듯이 쿵쾅거렸다. 반대로 자신이 태오의 상황에서 이런 물음을 들었다면 어찌했을까? 상대가 누구냐에 따라 반응이 다르겠지만, 별로 친하지도 않은 이도 저도 아닌 아무나가 물었다면 뭐라 대답했을까. 무시하거나 대충 가식적으로 웃으며 괜찮은 척 넘겼을 것이다.

“거짓말이죠.”

솔은 제 머리 위에서 들리는 묵직한 저음의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눈을 동그랗게 뜨고 올려다보니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자신을 내려다보는 태오가 그곳에 있었다. 무시해도 그만이라 생각했는데 의외로 너무도 솔직한 대답이 돌아왔다. 정작 친한 지호에겐 당당히 괜찮다고 말했던 그가 솔에게는 거짓이라 답했다. 솔은 얼떨떨한 표정으로 태오를 빤히 쳐다보았다.

“매일 생각해요. 내가 지금 이 일을 계속하는 게 맞나? 제정신이 박혔으면 당장 닥치는 대로 아무 일이나 해서 돈을 벌고 하다못해 병실을 지키고 있어야 하는 거 아닌가?”

“…….”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집안이 풍비박산이 나고, 가족이 곧 죽을지도 모른다는데 여기서 이러고 있는 거 정상인의 사고는 아니죠.”

“그런… 생각한 적 없어요.”

쏟아져 나온 태오의 말에 솔은 갑자기 목구멍이 탁 막힌 듯 갑갑해졌다. 간신히 쥐어짜듯 내뱉은 목소리가 숨이 막힌 듯 이상했다. 정말 목이 막혀 답답한 것 같아 솔은 쇄골 언저리를 노크하듯 툭툭 두어 번 두들겼다. 태오는 그런 솔을 말없이 기다렸다.

내뱉는 말의 내용과 달리 너무도 덤덤한 태오의 목소리에 솔은 그를 올려다보았다. 표정에는 한 치의 흔들림도 없었다. 너무도 고요해서 그가 방금 뱉은 말이 진담인지 아니면 자신을 놀리려 그냥 해 본 말인지 구분이 되지 않았다. 현실감 없는 표정이었다.

“지호 형한테는 괜찮다고 했잖아요. 그런데…. 왜 저한테는 이런 말… 하는 거예요?”

“너무 가까우면 할 수 없는 말도 있죠.”

태오의 말이 솔은 어딘지 익숙하게 들렸다. 그날 연습실에서, 처음 만난 은겸에게 제 속마음을 털어놓았던 자신이 속으로 삼켰던 생각들이었다. '나’라는 사람한테 질리고 실망할까 봐, 싫어할까 봐. 정작 가까운 사람에겐 내비칠 수 없는 속마음들.

태오가 지금 자신에게 이런 말들을 할 수 있는 건, 그날 솔이 은겸에게 그러했듯이 아무 사이도 아니기에, 아무런 기대도 없는 그저 그런 관계이기에 할 수 있는 것이었다. 솔은 깨달았다.

“맞아요. 때로는 아무 사이도 아닌 사람에게만 할 수 있는 말이 있죠. 아무 사이도 아니면 실망하지도, 기대하지도 않을 테니까요.”

솔은 자신이 태오와 같은 행동을 했던 날, 은겸이 자신에게 했던 말을 되놰 보았다. 그리고 말도 안 되게 펑펑 울고 어느 정도 속에 든 이야기를 털어놓고 한결 가벼워졌음을 기억했다. 은겸이 자신에게 그러했듯, 태오에게 그렇게 해 주고 싶었다. 그날, 자신에게 조언하던 은겸이 이런 기분이었을까? 제 코가 석 자고 정작 자신도 아직 그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했지만 아주 잠시라도 기분이 나아지게 해 주고 싶었다.

“그런데, 주제넘을 수도 있는데. 아무튼 제가 지호 형이었다면…. 솔직하게 말해 주었으면 했을 거예요. 애초에 그 말을 듣고 싶어서 물어봤을 거고요. 지금처럼요.”

“정말 그럴까요? 다들 여유 없고 자기 일에 힘든 사람들이에요. 나까지 징징거릴 필욘 없어요.”

“태오 씨 말대로 팀이잖아요. 그리고 저는 아니지만 두 사람은 친구고요. 친구라면 오히려 나를 의지해 주는구나 하고 기쁠 거예요. 말하지 않으면 모르는 거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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