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최애를 뽑고 싶어-39화 (39/192)

#39

태오의 말에 순간 모두가 얼어붙었다. 다들 숨도 쉬지 않는 것처럼, 모든 소리가 사라진 것처럼 입을 다물었다. 짜증스럽게 대답하려던 솔도 그 변화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네 사람을 바라보았다. 모두의 시선이 가람을 향해 있었다. 오직 가람만이 솔을 바라볼 뿐.

무언가 말을 잘못 꺼낸 티가 팍팍 났다. 급격하게 분위기가 얼어붙었지만 솔은 차라리 잘됐다 싶었다. 적어도 더 이상 귀찮게는 안 할 테니까. 그리고 솔의 그 예상은 적중했다. 조금은 소란스러운 보컬 트레이너가 레슨을 시작하기 전까지 네 명 모두 별달리 말을 하지 않았다. 물론 거기엔 솔도 포함이었다.

본래 목소리가 큰 편이라 인사말만 건네도 떠들썩해지는 득용이도 연신 형들의 눈치를 보기 바빴다. 자신이 만들어 낸 것이나 마찬가지인 무거운 분위기에 짓눌리는 막내를 보고 있자니 맘이 썩 편한 것은 아니었지만 오늘은 정말 아무것도 신경 쓰기가 싫었다. 솔은 고개를 푹 늘어뜨리고 초점 없는 눈으로 악보와 바닥 그 중간쯤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짝!

귓가에 손뼉을 세차게 내려치는 소리에 솔은 화들짝 놀라며 물에 젖은 개처럼 머리를 털었다.

“성솔! 솔아!”

“네? 네.”

“집중 안 해? 아직 상태 안 좋네, 얘. 한 번은 제대로 부르고 쉬든가 해. 나도 평가서는 올려야 하니까.”

“죄송합니다.”

고개를 꾸벅 숙여 사과했지만 그저 형식적인 것이었다. 이럴 때면 솔은 늘 그 무엇도 제대로 해내지 못했다. 모두가 자신은 기억하지 못하는 일에 떠들고 그 가운데서 기억나는 척, 아는 척을 하는 일은 꽤 피로한 일이었다. 초연한 척하지만 사실은 그 기억의 부재가 신경 쓰이기 때문이다. ‘내가 모르는 시간의 나’는 퍽 불안을 불러일으키는 것이었다. 물론 무거운 머리도 정신을 흐리게 하는 데에 꽤 큰 몫을 한다.

반복적으로 기억을 떠올리려 신경 쓰고 어제의 상황을 되뇌고 나니 저녁에 지호와 짧게 대화를 나누었던 것과 시스템 창의 기능 이것저것을 건드린 것까지는 떠올랐으나 주말 평가 부분은 정말 새까만 공백이었다. 막 혼이 났는데도 솔은 악보를 설렁설렁 보며 입을 벙긋거렸다. 다행히 조금 전과 달리 박자는 맞춰 노래를 시작할 수 있었다.

“뭐야, 이렇게 할 수 있는 애가 그간 왜 그랬대?”

솔은 고개를 들어 자신을 칭찬하는 보컬 트레이너를 바라보았다. 정신을 다른 곳에 팔고 설렁설렁 불렀는데 보컬 능력치의 상승 때문에 혼나기는커녕 도리어 칭찬받았다. 칭찬받았으면 기분이 좋아야 하는데 어쩐지 날로 먹은 기분이라 솔은 어색하게 웃음 지으며 자신을 바라보는 멤버들을 둘러보았다. 다들 놀란 눈치였지만 맨 끝자리에 앉은 지호만이 떨떠름한 표정으로 솔을 바라보고 있었다.

“뭐지? 저 형…. 쓰러지더니 갑자기 잘하네?”

“야. 김득용. 말을 해도 꼭….”

“죄송합니다. 그런데 진짜 뭐지? 지금 되게 매끄럽고 음정도 고르고. 갑자기 확 잘하지 않았어요? 형, 어떻게 한 거예요?”

“그러게. 분명 주말 평가 들어가기 전까지도 불안했는데….”

솔은 자신에게로 시선이 쏠리자 ‘하하’ 소리를 내며 어색한 웃음을 흘렸다. 무어라 변명할 방도가 없었다.

“그건 계속 열심히 했고, 이제 좀 긴장이 풀려서 본 실력 나오는 게 아닐까요.”

“아, 그런 건가?”

“하긴…. 그동안 솔이 너무 긴장하긴 했어.”

“맞아요. 그런 거 같아요. 오늘은 좀 마음이 편해요.”

“그렇다면 다행이네.”

“뭐야, 이 형. 이제 다 까발려졌다 이거죠?”

마땅한 변명을 찾지 못해 우왕좌왕하고 있을 때, 타이밍 좋게 태오가 끼어들었다. 태오의 말에 다들 하나씩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을 표했다. 다들 솔을 바라보고 내심 다행이란 얼굴로 웃는 데에 비해 오직 지호만이 악보에 계속 시선을 고정한 채로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솔은 지호를 흘깃 쳐다보았다. 아무래도 그간 계속 쭉 자신의 노래를 봐준 지호에겐 무언가 정상적인 상황이 아니라는 것이 느껴진 걸까. 죄를 지은 것도 아닌데 괜스레 눈치가 보였다. 수상쩍어도 어쩔 것인가. 시스템 같은 걸 가히 상상이나 할 수 있고 말해 준다 한들 믿을 수나 있을까.

“다음은 지호.”

불편함은 오래가지 않았다. 보컬 트레이너가 다음으로 지호를 지목하며 그가 불려 나가자 상황이 일단락되었다. 전부터 계속 자신을 감싸는 것 같은 가람과 조금은 눈치가 없는 득용이 솔이 자리에 앉자 호들갑을 떨어 댔다.

“형, 마음이 편하다는 말. 이제 우리랑 좀 친해졌다는 거죠?”

“고생했어. 네 목소리 차분해서 듣기 좋아.”

“으응. 고마워.”

“계속 이렇게 쭉 좋았으면 좋겠어요.”

득용이 커다란 어깨를 모아 으쓱이며 말했다. 퍽 순진한 발언에 솔은 마냥 속 좋게 웃을 수가 없었다. 지호의 그 찜찜하단 표정이 눈앞에 자꾸만 어른거렸다. 어제는 안정의 포션이니 뭐니 그저 이 상황을 쉽게 풀어 갈 발견에 좋기만 했는데, 심경이 복잡했다.

본래 타고난 재능도 있겠지만, 몇 년간 이곳에서 이렇게 매일같이 연습하며 시간을 보낸 네 명이었다. 그 넷 사이에서 시스템 덕에 순탄하게 날로 먹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름대로 노력을 안 한 것은 아니지만, 그들은 며칠이고 갈고 닦아 이뤄 냈을 실력을 어젯밤 아이템 사용한 거로 얼추 따라간다는 게 마음에 걸렸다.

사고 이후로나 모든 것에서 도망치듯 대충하며 살았지, 사실 솔은 태오 못지않은 노력가였다. 타고난 재능의 크기도 있었지만, 한시도 게을리한 적 없었다. 황무지 같았던 그 몇 년의 방황이 사람의 근본을 바꾸지는 못했다. 그래서 지금 솔의 기분이 더 가라앉는 것이었다.

새삼 솔은 예전의 자신이 어떤 평가를 받던 사람인지 깨달았다. 연습 벌레, 종일 학원에서 사는 놈. 그렇게 열심히 살았던 게 자신이었단 사실이 갑자기 떠올랐다.

남아 있는 능력치 상승권 하나의 사용을 솔은 잠시 보류하기로 했다. 할 수 있는 데까지 최선을 다해 보고 정 돌파구가 없을 때에, 그때 사용해야겠다고 다짐했다.

보컬 레슨과 연이어 안무 레슨까지 끝이 났지만 다섯 모두 먼저 숙소로 돌아가겠다 하는 이가 없었다. 오해이긴 하나, 솔이 쓰러질 정도로 연습했다는 사실이 나머지 멤버들에게도 의욕을 불러일으킨 모양이었다.

“형한테 따라잡힐까 봐. 우리는 무서워서 연습 더 할 거니까, 형은 들어가서 쉬라고요.”

“그렇게 말하는데, 내가 마음 편하게 들어갈 수 있겠어?”

“내가 데려다줄게. 들어가자, 솔.”

“저러고 가람 형 다시 연습실로 돌아오려고.”

“쉬엄쉬엄할게. 적당히.”

가람과 득용의 말에 솔은 슬쩍 웃음 지었다. 무거웠던 머리는 안무 연습을 시작하면서 가라앉았다. 아니, 정확히는 트라우마가 발동하자 사라진 기억 같은 것에 신경을 쏟을 여유가 사라졌다고 말하는 게 맞았다. 솔은 연습실 구석에 앉아 숨을 고르며 아슬아슬하게 차올랐던 피로도가 내려가는 모습을 찬찬히 지켜보았다.

그래도 멤버들과 제법 일들을 겪었다고 전처럼 아무것도 못 하도록 얼어붙거나 극심한 통증을 느끼지는 않았다. 여전히 땀이 비 오듯 쏟아지고 이따금 눈앞이 아득해지거나 호흡이 불안해질 때가 있긴 했지만 전보다는 훨씬 나아졌다는 점이 중요했다. 좋은 의미의 변화가 있다는 것이니까.

솔은 다음 퀘스트가 언제 떠오를까, 잠잠한 시스템 창을 괜히 껐다 켰다 하며 이마에 흘러내리는 땀을 손등으로 훔쳤다. 온몸이 땀에 푹 젖어 이마를 닦아 낸 의미가 없었다.

솔은 제 손등과 팔뚝을 살폈다. 약한 난방이 돌아가기는 하나 한겨울임에도 솔은 반소매 차림이었다. 아침에 출근 도장을 찍을 때만 해도 후드 티 차림이었는데, 식은땀을 너무 흘리다 보니 옷이 푹 젖어 벗어던진 지 오래였다. 땀에 젖은 두꺼운 옷은 오히려 솔을 더 힘들게 만드는 주범이었다. 허옇고 여전히 앙상한 팔뚝이 땀으로 번들거렸다.

“나, 화장실 좀 다녀올게.”

“예압.”

막상 눈으로 보고 나니 온몸이 땀으로 범벅인 것이 신경 쓰이고 찝찝했다. 불편함을 느낀 솔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혹시라도 자리를 비운 태오와 지호가 자신을 찾을까 해서였다. 자리를 비운 두 사람이 안 보인 지 한참이었다. 연습에 한창인 가람과 득용을 두고 연습실을 빠져나와 솔은 화장실을 향해 걸음을 내디뎠다. 이마를 타고 흐르는 땀이 눈에 들어가 따끔따끔했다.

“허탈하잖아.”

복도 초입에 위치한 탕비실에서 지호의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손등으로 눈가를 문지르며 걸음을 내딛던 솔은 복도로 흘러나오는 목소리에 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평소라면 음악 소리나 다른 연습생의 목소리에 묻혀 들리지 않을 소리였지만 모두가 떠난 늦은 밤에 유난히도 카랑카랑한 지호의 목소리는 지나치게 또렷했다.

“솔로 무산되고 여기 오기까지 내가 몇 년이냐? 내가 몇 달, 몇 해를 연습해서 만들어 낸 걸 걔는 며칠 사이에 해내더라.”

문 너머로 들리는 지호의 목소리가 솔에게로 날아왔다. 하지만 그 말이 비수로 꽂히지는 않았다. 지호의 말이 날카로운 칼이 되어 솔에게 날아오기보다는 지호 자신에게 꽂혔다.

“성솔, 그만큼 열심히 했어요. 형도 어제 봤잖아요.”

“알아. 알아서 대놓고 뭐라 하지도 못하겠어. 걔가 밉다는 게 아니야.”

“…….”

의외로 태오가 솔의 역성을 들었다. 화장실로 통하는 코너에서 솔은 더 발걸음을 옮기지 못하고 잠시 머물렀다. 두 사람의 대화를 더 듣지 않는 게 좋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발이 쉽사리 떨어지지 않았다.

“그냥, 내 한계가 거기까지인가 보다 싶은 거야. 사람마다 타고나는 재능이란 게 있잖아. 그 크기가 걔랑 나랑 다른 거지.”

“…저는 그런 생각 안 해 봤어요. 어차피 끝은 다 같아요. 도착하는 속도가 다를 뿐이라고 생각해요.”

“속도?”

“네. 가람이랑 저는 좀 느리고, 성솔이랑 득용이는 빠른 편이죠. 중간에 포기만 안 한다면 도착지는 다 같다고 생각해요. 결국엔 같게 되겠죠.”

“성실의 아이콘, 윤태오답다.”

태오의 대답에 지호의 허탈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형, 진짜 곧이에요.”

“그래. 곧이지…. 곧이겠지?”

문이 닫혀 있음에도 지금 태오가 어떤 표정일지 상상이 갔다. 아마도 늘 그렇듯 진지한 얼굴일 거다. 짙은 눈썹은 평온할 것이고 입술은 고집 있게 굳게 다물려 있을 것이다. 오래 봐 온 것은 아니지만 태오의 표정은 사실 큰 변화가 없어 예상하기 쉬웠다. 그런 점이 오히려 믿음직스럽게 보였는데, 지호는 한숨을 몰아쉬고 태오에게 되물었다. 확신이 없는 불안감을 담은 목소리였다.

“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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