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최애를 뽑고 싶어-33화 (33/192)

#33

“이야, 비주얼 좋다.”

“그러게, 중구난방으로 연습할 땐 몰랐는데, 이렇게 올 블랙으로 맞춰 입으니까. 제법 그룹 같네요.”

안무 트레이너가 연습실에 들어오자마자 내뱉은 첫마디였다. 태오가 모든 것을 관리해 준다는 말은 이를테면 이런 것들이었다.

아침, 숙소에서 태오가 의상의 톤을 전체적으로 맞추자 제안을 했다. 왜 그래야 하냐고 물으니 의상 분위기와 색이 맞으면 통일감이 있어 보이고 제법 구성이 짜인 것처럼 보인다고 대답했다. 아니나 다를까 모여 있는 다섯 명의 모습을 본 트레이너들이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하나둘, 펜과 종이를 들고 자리에 앉는 사람들을 보며 솔은 허리를 숙여 제 종아리를 쓸었다. 기분 나쁜 통증이 벌써 느껴졌다.

‘내 다리는 멀쩡해. 상처 하나 없어. 아무 이상도 없어…. 성솔.’

불편한 감각을 떨쳐 보려고 솔은 발목을 휘휘 여러 번 돌리고 발을 콩콩 굴러도 보았다. 네 사람에게 실망을 안기지 않기 위해 잘하고 싶다는 마음도 있었지만, 퀘스트의 성패에 목숨이 달려 있었다. 하지만 오히려 그런 마음이 솔을 더욱 초조하게 만들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죽음 앞에 누가 초연할 수 있을까.

솔은 조금 불안한 걸음으로 연습실을 서성거렸다. 큰 움직임은 아니었지만, 눈에 들어올 만큼 몸을 계속 움직이고 있었다. 탁, 태오가 그의 손목을 잡자 솔은 일순 움직임을 멈추고 그를 바라보았다.

“연습한 것처럼만 하면 돼요. 연습이라고 생각해요.”

“…….”

“정 버거우면 차라리 시선 처리는 포기하고 땅만 봐요.”

태오의 말에 솔은 나름 비장하게 마음을 먹고 고개를 끄덕였다.

“실수해도 되고 무리해서 잘하려고 하지 않아도 돼요. 첫 평가잖아요.”

딱딱하게 굳은 솔의 얼굴이 더 못 미더웠는지, 태오는 계속해서 사족을 붙였다.

“다들 어느 정도 감안하고 보실 거예요.”

“잘…. 할게요. 잘하고 싶어요. 그렇게 잘할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봐줄 만은 하고 싶어요.”

“…….”

솔은 점점 굳어 가는 얼굴을 애써 펴 미소 지어 보였다. 솔의 말과 웃음에 오히려 태오가 할 말을 잃었다.

“…잘, 할 거예요.”

입을 꾹 다물었던 태오가 아주 작은 목소리로 읊조렸다. 태오답지 않게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는 평소보다 더 딱딱하게 들렸다. 아주 미묘하게 신경을 건드리는 정강이의 통증에 제 발치를 내려다보던 솔은 머리 위에서 울리는 작은 소리에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까만 머리카락 사이로 솟아난 태오의 두 귀가 새빨갛게 붉어져 있었다.

“다들 준비 잘했니?”

“어서 오세요. 최 실장님.”

솔은 태오에게서 시선을 돌려, 최 실장이라 불린 남자를 바라보았다. 제 새 핸드폰에 등록된 유일한 두 사람이 그 자리에 있었다. 최 실장과 YC 엔터의 대표 백의찬이 솔을 병원에서 만나 캐스팅했다고 했었다. 현실에서 이 시기쯤에 정신과와 정형외과를 아주 잠깐 다니기는 했었다.

안경을 쓴 최 실장은 생각보다 더 젊은 모습이었다. 그러니까 외모가 어리다는 것이 아니라 그 나이대의 스타일이 아니라는 의미였다. 어느새 모여 앉은 사람들을 보며 솔은 빈 의자를 응시했다. YC 엔터테인먼트 대표 ‘백의찬’. 오늘은 목숨이 달린 주말 평가 미션 날이기도 했지만, 그 백의찬의 존재를 확인하는 날이기도 했다.

기대감 반, 걱정 반이 솔을 휘감아 올렸다. 평가는 시작도 되지 않았는데 바짝 군기가 든 군인처럼, 멤버들 모두 두 손을 공손하게 모은 채 펜과 다이어리를 든 관계자들을 바라보았다.

“대표님.”

“잘 다녀오셨어요?”

“잘 다녀왔죠. 오랜만이에요. 시간 없는데 빨리 시작하죠.”

솔은 재킷 단추를 여미며 빈자리에 앉는 백의찬 대표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아주 미묘하게 실망스러웠다. 은겸처럼 주환으로 오해할 만만큼 닮은 건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의찬과 영 다르다고 하기엔 모호한. 연령대가 달라서일까, 눈앞에 나타난 백의찬 대표는 진짜 의찬보다는 의찬의 아버지 같은 느낌이었다. 아마 뵈었다면 딱 저런 모습일 것 같았다.

긴장감과 들뜸 사이에 있던 마음이 순간 서늘하게 가라앉았다. 그나마 막 중년에 접어들었을 것 같은 그의 얼굴에서 의찬의 모습을 조금이나마 찾을 수 있으니 다행이라 해야 할까. 속으로는 기대하지 않는다고 했지만, 막상 일이 이렇게 되니 실망감을 감추기가 어려웠다.

“연습 많이 했니, 얘들아.”

“…열심히 했습니다.”

“그래 어디 좀 보자. 잘해야 해, 너희.”

“네!”

“춤부터 할래?”

“네.”

백 대표가 너스레를 떨었다. 편한 어조였지만 멤버 중 그 누구도 편하게 듣지 않았다. 득용이가 힘차게 큰 소리로 대답하자 백 대표를 비롯한 최 실장과 모두가 슬쩍 웃음 지었다.

“형, 화이팅!”

옹기종기 모여 있던 멤버들이 일정한 간격을 벌리며 대열을 만들었다. 솔의 등 뒤를 지나쳐 가던 득용이가 유난히 굳은 솔의 얼굴을 확인하곤, 어깨를 살짝 주물렀다. 그의 응원의 메시지에 솔은 어물쩍 어색하게 고개만 끄덕였다. 어쩐지 온몸에 힘이 쭉 빠져 버렸다. 집중해야 하는데 자꾸만 정신이 다른 곳으로 흘렀다.

백 대표를 비롯한 평가단 뒤로 늘어선 거울이 일렁거리는 것만 같았다. 순간적으로 솔은 어지러움을 느꼈다. 그의 상태가 어떠하든, 귓가에 익숙한 중저음이 내려꽂혔다. 둥둥둥, 도망치듯 거리를 내달리는 것 같은 반주가 솔을 쫓아오는 것만 같았다.

고작 며칠이지만 그 며칠 솔은 이 생활에 융화되었고 익숙해져 갔다. 그런데 백의찬 대표를 보는 순간 이 모든 것이 현실감 없게 느껴졌다. 근원을 알 수 없는 충격과 절망감이 몰려들었다. 숨이 막히고 세상이 일그러지는데도 몸은 멈추지 않고 반주에 따라 움직였다. 안무 숙련도 100%의 힘일까, 몸에 완전히 익어 버린 동작은 솔의 정신이 어디로 흘러가든 아무 상관이 없었다.

[특성 ‘비운의 천재 무용수’가 활성화되었습니다.]

[현재 피로도 69/100]

[피로도 관리에 유의하세요! 피로도가 70 이상일 경우 페널티가 발생합니다.]

눈앞에 경고 창에 가까운 알림 창이 수없이 떠올랐다.

[현재 피로도 70/100]

[경고! 피로도 페널티가 발생합니다. 상태 이상에 유의하세요.]

[상태 이상 : 근육통]

[현재 피로도 75/100]

[현재 피로도 78/100]

[상태 이상 : 현기증]

시야를 민트색 창이 가득 메웠지만, 솔은 시스템 창을 지워 버리지 않았다. 반투명한 창이 수시로 피로도와 페널티를 알리며 겹치고 또다시 겹쳐 자신을 쳐다보는 사람들의 얼굴이 흐릿하게 가려졌다.

[현재 피로도 82/100]

[상태 이상 : 고열]

[경고! 피로도 페널티가 발생합니다. 상태 이상에 유의하세요.]

[경고! 당신은 현재 트라우마 상태입니다. 피로도 회복의 포션, 안정의 포션 사용을 권장합니다.]

그 어떤 글자도 솔의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귓가에 쿵쿵 울려 퍼지던 노랫소리가 늘어진 카세트테이프의 소리처럼 들려왔다. 간신히 ‘고열’이라는 글자가 눈에 들어오자 정말 거짓말처럼 온몸이 불에 타는 듯 뜨거워짐을 느꼈다. 눈알이 쏟아질 것처럼 피로감이 몰려왔고 연신 제멋대로 움직이고 있는 팔과 다리가 제 것이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현재 피로도 89/100]

[상태 이상 : 호흡 곤란]

[경고! 피로도 페널티가 발생합니다. 상태 이상에 유의하세요.]

정신이 몽롱했다. 귓가에 들리는 자신의 숨소리가 늘어진 음악 소리보다 더욱 크게, 거친 천둥소리처럼 들렸다. 살짝 숙인 허리가 길게 늘어나 머리가 땅으로 처박힐 것 같았다.

‘나, 지금 제대로 하고 있나? 제대로 해야 하는데….안 그러면….’

죽는다. 그날처럼.

갑자기 머리 위로 내리쬐는 강한 스포트라이트 불빛에 현기증이 이는 기분이었다. 눈앞이 캄캄해 관객의 얼굴이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문득 어둠 속에서 누군가가 짝! 하며 손뼉을 한번 내리쳤다.

어느새 음악 소리가 사라지고 손뼉을 친 인물이 웃으며 무어라 솔에게 말을 했다. 그의 목소리가 일그러져 제대로 인지되지 않았다. 마침내 움직임이 멈춘 자신의 몸을 솔은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팔다리가 무한정으로 길어지는 기분이었다. 너무 무거워서 끝도 없이 추락하듯.

[경고! 당신은 현재 트라우마 상태입니다. 피로도 회복의 포션, 안정의 포션을 사용하세요.]

[현재 피로도 100/100]

[피로도 수치가 한계에 달했습니다.]

[상태 이상 : 실신]

캄캄한 시야에 빛을 발하는 알림 창이 떠올랐다. 그리고 고개를 숙이고 오롯이 서 있던 솔의 몸이 바닥으로 추락했다.

“성솔!”

“형!”

“영호 씨, 빨리 구급차!”

“솔아!”

엔딩과 함께, 솔의 바로 뒤에 있었던 태오가 앞으로 고꾸라지는 솔을 붙잡았다. 쓰러지는 허수아비를 붙잡은 것 같은 모양이 된 태오는 황급히 솔을 바닥에 바로 눕혔다. 연습 때마다 늘 긴장하고 경직되는 그였지만 오늘은 얼굴이 너무하리만치 창백했고 행동거지가 신경 쓰여 눈여겨보던 참이었다.

그간에도 비슷한 상태로 꿋꿋이 해내는 모습을 보여 줬기에 오늘도 어김없이, 막상 시작되고 나면 곧잘 따라오리라 여겼다. 중반부부터 유난히 어깨를 들썩거리는가 싶더니 동작이 점점 힘을 잃고 늘어지는 것이 태오를 비롯한 멤버들에게 느껴졌다. 그간 그가 계속 어떤 식으로 몸을 움직였는지 봐 왔기에 그 차이가 명확히 보였다.

솔에게 인사를 건넸던 대표도 문 앞에서 뒷짐을 지고 있던 매니저 영호도 모두가 놀라 쓰러진 솔에게로 모여들었다. 비슷한 상황의 경험이 있었던 태오는 재빨리 솔을 바로 눕히고 그의 호흡부터 확인했다. 얼굴을 뺨에 가까이 가져다만 대도 열기가 느껴졌다.

“솔아, 정신 차려 봐! 얘 왜 이렇게 뜨거워?”

“아니, 몸이 이렇게 안 좋았으면 참을 게 아니라 이야기했어야지.”

“지금 그게 문제예요?”

트레이너 선생들이 저마다 한마디씩을 거들었다. 태오가 날카로운 목소리로 영호의 말을 쳐 내고 솔의 후드 티의 목을 잡아당겨 늘렸다. 안으로 겹쳐 입은 티셔츠가 땀에 푹 젖어 있는 것이 보였다.

“업고 그냥 병원으로 가요.”

“그럴까? 그래, 그러자.”

영호가 119에 급히 전화하는 것이 보였지만 요 앞, 사거리의 병원까지 안고 뛰어가는 것이 좀 더 빠를 듯싶었다. 태오는 말과 동시에 솔을 들쳐 업고 연습실을 뛰어나갔다. 그의 뒤로 가람과 매니저 영호가 따라 나왔다. 파랗게 얼어붙은 득용의 어깨를 지호가 붙잡는 모습이 언뜻 보였다.

방금 막 안무를 끝냈는데, 태오는 숨 고를 틈도 없이 솔을 안고 뛰었다. 긴 다리로 성큼성큼 건물을 뛰어나가니 하필이면 입구 쪽에 누군가의 팬으로 추정되는 무리가 모여 있었다. 순간 가람의 걸음이 멈춰 섰다. 넘을 수 없는 선이 있기라도 한 것마냥 그 자리에 멈춰 선 가람을 두고 태오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인파를 가르며 지나갔다.

“솔이?”

내달리는 태오의 뒤로 은겸의 목소리가 들렸지만 그런 것 따위 신경 쓸 여력이 없었다. 제대로 호흡을 하고 있기는 했지만, 품에 안은 솔의 몸이 불덩이처럼 뜨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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