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
“이해한다고 다 괜찮을 순 없죠.”
“진짜 괜찮아요. 그리고 아직 이번 주말 평가 결과가 어떻게 될지도 모르잖아요.”
한사코 손사래를 치던 솔은 말꼬리를 흐렸다. 정말 어찌 될지 모르는 일이었다.
“에이. 형 잘하고 있어요. 저도 가람 형도 처음에 진짜 엉망이었거든요. 형 정도면 진짜 잘하는 거예요.”
“맞아요. 고작 며칠인데 금방 따라왔잖아요.”
솔이 말끝을 흐리고 시선을 불안하게 옮겼다. 도란도란 가볍게 대화를 나누었던 분위기가 급격하게 가라앉았다. 본래도 자신감 따윈 없지만 급격하게 어두워진 솔의 얼굴에 득용과 가람이 한마디씩 말을 보탰다.
“네…. 열심히 하는 데까지 해 볼게요.”
“이 형 이러다가 계속 말 못 놓을 거 같은데. 가람 형이 먼저 시작해요.”
득용이 가람의 옆구리를 툭툭 치자 그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말 편하게 해.”
“어…. 응. 그럴게, 가람아?”
“응. 솔. 솔이라고 부를게.”
“네. 아니… 응. 나도 가람이라고 부를게.”
어색함에 솔은 가람과 득용을 제대로 쳐다보지 못하고 어둑해진 골목을 두리번거렸다.
“솔이 형, 저는 그냥 DK라고 해 주면 안 돼요? 득용이 말고.”
“편한 대로 부르는 거지.”
“그럴게.”
“가람 형, 진짜 그렇게 계속 득용이라고 하다가 방송에서도 그렇게 부른다니까?”
득용의 부탁에 솔은 고개를 끄덕였다. 뭐 그리 어려운 일이라고. 가람은 졸린 듯 느른한 표정으로 걸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 모습에 또다시 발끈한 득용이 어깨로 서로를 밀치며 가로등만 덩그러니 켜진 골목을 걸었다.
불이 켜져 있는 숙소가 눈에 들어올 만큼 가까워졌다. 코너를 돌아 골목 어귀에서 어쩐지 눈에 조금 익은 인형이 세 사람을 스치듯 지나갔다. 마주 보고 걸어오던 인영은 구태여 한적한 골목에서 세 사람의 옆을 닿을 듯 아슬아슬하게 지나쳤다. 순간 가람이 움찔하며 걸음을 피했다. 놀라기는 솔도 마찬가지였다. 지나치게 가까워지는 낯선 이 때문에 걸음을 멈춰 선 두 사람을 득용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뭐야…?”
“어서 들어가자.”
득용의 얼굴이 확 바뀌자 가람은 그의 등을 쭉 밀어냈다.
“다녀왔습니다.”
숙소에 들어서자마자 득용은 정말 딱 집에 돌아온 고등학생처럼 허공에 인사했다. 때마침 샤워를 끝내고 나온 지호가 세 사람을 반겼다. 솔은 현관문에 널브러진 신발 중 태오의 신발이 아직 없는 것을 확인했다.
‘아직이구나.’
솔은 정돈감 없이 어질러져 있는 신발들을 보며 ‘시간이 꽤 늦었는데….’ 하는 생각을 했다. 현관에서 신발 벗을 생각은 안 하고 멍하니 널브러진 신발만 쳐다보는 솔의 어깨를 가람이 손가락으로 살짝 두들겼다.
“솔, 먼저 샤워할래?”
“그래도 돼?”
“피곤하잖아. 먼저 씻고 쉬어.”
솔이 고개를 들어 가람을 쳐다보자 가람은 덤덤한 어조로 말했다.
“그럼 솔이 형 다음엔 나!”
득용이 손을 번쩍 들고 끼어들었지만 지호는 그를 무시하고 가람과 솔만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뭐야…? 가람이랑 솔이 이제 말 놓는 거야?”
“그러기로 했어요.”
“언제 그렇게 친해졌어? 소외감 느껴지네.”
가람의 대답에 지호는 웃는 낯으로 세 사람을 빤히 쳐다보았다. 분명 생글생글 웃고 있는데 어쩐지 두 눈을 똑바로 보기 불편해 솔은 시선을 흘렸다.
“뭐야. 서운하게. 나랑 몇 년째인데 아직도 존댓말 하면서 솔이랑은 이렇게 며칠 만에 말 놓는 거야?”
“지호 형은 형이니까 그런 거죠.”
“형이 먼저 놓으라고 말해 줬으면 말 놓았을 거예요.”
가람과 득용의 말에 지호가 더욱 활짝 웃었다. 웃으면서도 슬쩍, 솔을 바라보는 그 눈길에 솔은 아예 고개를 옆으로 돌려 버렸다. 지호의 웃음이 왠지 모르게 불편했다. 분명 활짝, 사람 좋게 웃고 있지만, 어딘가 한편이 불편한 웃음이었다. 가람과 득용은 그런 것이 느껴지지 않는지 스스럼없이 말하며 지호의 옆을 스쳐 지나갔다.
“그래? 그럼, 말 놔. 나한테만 존댓말 하면 이상하잖아.”
“진짜!…요?”
득용이 훅 뱉어 놓고 끝을 늘려 ‘요’ 자를 붙이며 지호의 팔을 툭 쳤다.
“놓으라고 해도 못 놓네.”
“말 놓을게. 지호 형.”
“가람이랑 나랑 같이 지낸 지 몇 년인데 이제야 말을 놓네.”
“딱히 다른 이유는 아니었고 형이라 그랬어요. 솔처럼 동갑이었으면 진작 놓았을 거예요.”
“맞아. 형이 제일 큰형이잖아.”
“지금 나 늙었다 이거지?”
“휴. 늙은 형이랑 놀기 힘들다.”
“야! 김득용!”
가람은 특유의 조용하고 늘어지는 말투로 차근차근 지호에게 제 이유를 설명했다. 득용이가 지호를 골리며 거실 소파에 뛰어 누웠다. 지호는 그제야 멀뚱히 서 있는 가람과 솔의 어깨를 차례대로 슬쩍 두들기며 ‘장난이야. 근데 진짜 말은 편하게 해.’라고 나지막이 말했다. 가람이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이고 옷방으로 들어가 버리자 여태 시선을 돌리고 있던 솔과 지호만 마주 서게 되었다.
가람이나 득용, 속사정을 알게 된 태오와 달리 솔은 지호가 매번 껄끄러웠다. 딱히 그가 솔에게 무어라 해코지를 하는 것도 아닌데 말이었다. 솔이 슬쩍 그를 피해 방으로 들어가려던 찰나, 지호가 그의 팔을 붙잡았다.
“내가 애들을 불편하게 했었나? 솔아, 네가 보기엔 어때? 그랬던 거 같아?”
“아뇨…. 저는 잘.”
솔은 꼭 혼나는 학생처럼 고개를 숙이고 지호의 물음에 대답했다.
“…그래도 다행이다. 애들이랑 좀 친해진 거 같아서.”
“네. 다들 잘해 줘서요.”
“그래?”
“네…. 형도, 잘해 주시잖아요.”
“근데 솔아. 너도 말 편하게 해.”
솔은 고개를 들어 지호를 바라보았다. 가람과 득용이야 그와 오래 알고 지냈으니 그러려니 싶지만, 며칠 알게 된 솔이 선뜻 말을 놓자니 저어되었다. 묘한 기류가 지호의 눈가에 어려 있었다.
“그래도 될까요?”
“그럼, 다들 말 편하게 하는데 너만 그러면 내가 이상해지잖아.”
“그럼 그럴게요.”
“반말.”
“그럴게….”
“그리고?”
“지호 형?”
“그렇지. 피곤하지? 어서 씻고 자는 게 좋겠다. 내일도 제시간에 일어나야 하잖아.”
동생들을 살뜰히 챙기는 맏형처럼 다정한 어조로 당부의 말까지 마친 지호는 그제야 솔의 팔을 놓아 주었다. 솔은 목을 길게 쭉 빼며 고갯짓을 한 뒤에야 제 방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솔이 샤워를 마치고 방으로 돌아왔을 땐 피곤한 안색의 태오가 돌아와 있었다.
그의 사정을 알게 되니 혼자 부쩍 친해진 기분이 들었지만 정작 태오의 앞에서 솔은 한마디도 하지 못했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도 모르겠거니와 이런 일로 홀로 친밀감을 가지는 것이 불편하고 미안했다. 태오는 퍽 지쳐 보이는 얼굴로 옷가지를 챙겨 욕실로 들어갔고 다시금 혼자가 된 솔은 침대에 누워 멍하니 천장만 바라보았다. 피곤에 절어 노곤한 몸과 서서히 무거워지는 눈꺼풀에 솔은 태오를 기다리지 못하고 그대로 잠이 들었다.
기어이 올 날이 오고 말았다. 솔은 짐짓 비장한 표정으로 시스템 창에 적힌 내용을 다시 한번 확인했다.
<첫 주말 평가를 통과하자!>
연습생이 된 첫 주. 첫 주말 평가에서 B 등급 이상을 받으세요!
*데이블락 - 핫 트릭 안무 숙련도 100%
[현재 피로도 53/100]
성공 시 안정의 포션 X2
실패 시 시스템 종료 (혹은 그에 상응하는 고통)
주말 평가 당일 아침에서야 딱 맞게 숙련도 100%를 채웠다. 노래는 여전히 엉망이나 마찬가지였지만 그래도 하나를 해결하니 안도의 숨이 절로 나왔다. 늘 연습하던 2번 연습실에서 좀 더 큰 1번 연습실로 자리를 옮긴 솔은 거울 벽을 따라 놓인 검은 의자를 둘러보았다.
의자가 놓인 모습을 보니 조금 있다 여러 사람 앞에서 평가받아야 한다는 사실이 그제야 실감이 났다. 벌써부터 심장이 쿵쾅거리고 숨이 거칠게 올라왔다. 시스템 창엔 안무 숙련도만 표시되어 있으니 제 노래가 어떤지 파악이 되지 않았다. 눈에 수치가 보이는 안무와 달리 객관적인 점수를 확인할 수 없는 보컬이 불안해 그저께부터 계속 홀로 남아 연습에 연습을 거듭했다.
태오와 지호가 간간이 봐주고 어제저녁쯤 보컬 트레이너에게 이만하면 욕은 안 먹겠다는 확인까지 받았다. 준비한 기간에 비하면 과한 칭찬을 들어도 모자랐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안감을 쉬이 떨칠 수가 없었다.
솔은 어색하게 연습실 가운데에 서서 손바닥을 연신 쥐락 펴락 했다. 손바닥이 식은땀에 축축하게 젖어 들었다. 솔은 손바닥을 티셔츠 자락에 벅벅 문질렀다.
“…괜찮아요?”
“네….”
솔의 행동을 유심 깊게 지켜보던 태오가 말을 걸었다. 솔이 고개를 주억이며 대답하자 그는 딱히 더 따져 묻지는 않았다.
“안 괜찮은 거 같은데. 솔.”
“형, 더워? 땀을 왜 이렇게 흘려.”
“이 날씨에?”
태오의 물음을 시작으로 삼삼오오 솔의 주변에 몰려들었다. 마치 다들 누구든 솔에게 말 걸기를 기다렸다는 듯이 눈치를 살피며 한마디씩 거들었다.
“하하, 연습을 너무 했나. 조금 더운 거 같아.”
“솔아, 지금 밖에 영하야.”
“히터 꺼 줄까?”
“아니야. 괜찮아. 막 움직여서 그런가 봐. 좀 쉬면 괜찮아지겠지. 다들 추울 텐데.”
지호의 말대로 밖은 영하였다. 실내라고는 하지만 쌀쌀한 기운이 있었고 몸을 움직이는 데에 찬 공기는 별로 도움이 되지 않았다. 무엇보다 더운 것도 아니었다. 솔은 이마에 맺힌 땀을 닦아 냈다. 아주 조금 옅어진 이마의 멍 자국을 건드리니 조금 통증이 느껴졌다.
“얘들아. 트레이너 선생님들 오신다.”
연습실 문이 열리더니 영호가 고개를 빼꼼 들이밀었다. 사실 매니저의 얼굴 보기가 생각보다 어려운 것 같아 가람에게 물으니 연거푸 데뷔가 무산되니 이렇다 할 만한 일정도 없는 무늬만 데뷔조를 어떻게든 일으켜 보려 동분서주하는 중인 듯하다고 알려 주었다.
“오늘, 대표님도 오시는 거 잊지 않았지? 너희들이 오늘 준비된 모습을 보여 주면 대표님이 밀어주실 거야. 그…. 너희들 일정 딜레이 되고 있는 것도 알지?”
“걱정 마요. 영호 형. 여기 다 연습 벌레잖아요.”
“그래그래. 알지 너네야 늘 열심히 하는 거. 그래도 더 잘하자는 말이야. 솔이는 오늘 멍이 좀 가라앉은 거 같네.”
“네, 계속 약 발랐어요.”
더불어 성실의 아이콘이나 마찬가지인 태오가 있는 덕에 영호뿐만 아니라 다른 매니저들도 몇 차례 엎어진 적이 있는 데뷔조에 걱정스러울 정도로 크게 신경 쓰지 않는다고도 했다. 솔은 태오를 떠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말이 리더지 거의 모든 것을 그가 관리해 주고 있었다. 영호의 당부가 끝나기 무섭게 이제는 낯익은 얼굴의 트레이너들이 연습실로 들어와 하나둘, 자리에 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