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최애를 뽑고 싶어-28화 (28/192)

#28

[데이블락 - 핫 트릭 안무 숙련도 37%]

[현재 피로도 69/100]

[피로도 관리에 유의하세요! 피로도가 70 이상일 경우 페널티가 발생합니다.]

피로도가 아슬아슬했다. 70이 넘으면 페널티가 발생한다고 쓰여 있지만, 정확히 그 페널티가 무엇인지 모르게 솔은 조심스러웠다. 시스템 종료가 곧 죽음이니 모르긴 몰라도 페널티 역시 어마어마한 것이 준비되어 있을 게 분명했다. 솔은 앞으로 피로도에 신경을 써야겠다고 생각했다.

걱정은 잠시, 그래도 나름 꽤 오른 숙련도에 솔은 조금 뿌듯함이 들었다. 시스템을 그렇게 욕해 놓고 우스운 일이었지만 뭔가 내가 한 일들이 정확한 수치로 보인다는 점이 묘한 만족감을 줬다.

일이 이렇게 되기 전에, 그러니까 사고가 난 뒤 얼마 안 되었을 때. 그때는 솔도 나름의 의지를 가지고 여러 가지 노력을 시도는 해 보았었다. 하지만 알다시피 현실엔 이런 시스템 창 따위 존재하지 않았다.

힘겹게 상황을 이겨 내려 노력하고 있지만 내 노력이 어딘가에 쌓이고 있는지, 나아가고 있는지 전혀 알 수 없었고 그 하염없이 느린 속도에 지쳐 결국은 포기하고 말았다. 가망이 없다고 생각했었다. 아무리 애를 써 봐도 달라지는 건 없다고, 그런데 이렇게 보고 있자니 단순히 숫자라지만 그 증가가 명확하게 보였다. 색다른 느낌이었다.

어렴풋이 드는 충족감에 솔은 시스템 창을 지워 버리고 다시금 눈을 감았다. 캄캄한 세계가 눈꺼풀 아래에 펼쳐졌는데, 그 위로 붉은빛이 번졌다. 어두운 방 안으로 거실의 불빛이 새어 들어왔다. 눈을 감고 있어도 느껴지는 빛에 솔은 슬쩍 고개를 들어 문가를 쳐다보았다. 열린 문 사이에는 새어 들어오는 빛을 등지고 키가 큰 누군가가 서 있었다.

“누구세요?”

“아직 안 자요? 내가 깨운 건가.”

눈을 가늘게 뜨고 노려보니 깊게 드리운 역광 아래로 머리가 흠뻑 젖어 있는 태오의 모습이 포개어졌다. 침대에 누울 때부터 득용의 목소리가 유난히도 크게 들려 잠시 소란스럽다고 했었더니, 태오가 돌아와서였나 보다. 샤워까지 마치고 말끔한 모습을 한 태오는 베개를 들고 본래의 자신의 것이었던 방문 앞에 서서 솔을 바라보고 서 있었다.

익숙하지 않은 그림자가 드리워지자 조금 놀랐던 솔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를 바라보았다. 지호가 다시 한번 단단히 머리를 묶어 준 덕에 얼굴이 환히 드러나 시시각각 변하는 솔의 표정이 숨김없이 드러났다.

“무슨 일 있어요?”

“내일 제시간에 일어날 수 있어요?”

“어…. 네.”

“어려울 것 같으면 같이 자요. 아침에 시간 맞춰 깨울 테니까.”

솔은 잠시 고민했다. 아무래도 방을 혼자 쓰는 게 편하긴 했지만 그랬다간 오늘과 같은 일을 반복할 거고 그런 상황은 태오나 다른 멤버들에게 절대 긍정적인 반응을 가져올 수 없을 것이었다. 모처럼 오늘 한 걸음 나아갔나 했는데 다시 제자리로 돌아가긴 싫었다. 짧은 고민을 끝낸 솔은 태오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기다렸다는 듯이 베개와 이불을 챙겨 솔이 홀로 누워있던 방을 채웠다.

“내일 9시에 깨울게요.”

그 말을 끝으로 태오는 더 이상 아무런 말이 없었다. 둘이 있는데 혼자 있을 때와 다른 거라곤 간간이 숨소리가 겹쳐 들린다는 것뿐이었다.

“이마는 좀 괜찮아요?”

“네? 네.”

조금 어색한 침묵을 뚫고 태오의 낮은 목소리가 방 안에 나지막이 울려 퍼졌다. 침대에 누워 있던 솔은 불현듯 들리는 태오의 목소리에 놀라 얼빠진 대답을 했다. 그런 자신의 반응이 싫어 솔은 어둠 속에서 살짝 얼굴을 구겼다.

“약, 사 왔는데. 자고 있을 줄 알고…. 식탁 위에 놔뒀어요. 내일 아침에 바르고 나가요.”

“고맙습니다.”

“아니다. 가져다줄까요? 지금 바르는 게 좋을 거 같은데.”

“아니, 제가…. 제가 알아서 할게요.”

“…그래요.”

아무래도 솔의 이마를 계속 신경 쓰고 있었던 듯했다. 솔은 멋쩍고 어쩐지 부끄러워져 제 이마를 매만졌다. 보기에 퍽 흉하기는 했다. 태오가 침대에서 일어나는 소리가 들리자 솔은 황급히 그를 만류했다. 이제 막 들어온 사람을 그런 일로 번거롭게 하기도 싫었고 본인 스스로도 이 어색한 분위기 가운데에 괜히 태오와 얼굴을 마주하고 싶지 않았다. 지금처럼 어둠 속에 숨어 서로 다른 방향을 보고 말을 나누는 편이 한결 마음이 편했다.

“그런데 제가 못되게 굴었는데도 계속 챙겨 주시네요.”

살갑게는 아니지만 계속해서 자신을 챙겨 주는 태오가 고맙지 않다면 새빨간 거짓말이었다. 아무리 날을 세우고 거리를 두어도 사람 마음이란 잘해 주는 사람에게 기울기 마련이었다. 솔은 태오가 누워 있을 침대를 올려다보며 혼잣말을 하듯 말했다.

“저번에도 말했잖아요. 그쪽 얼굴은 꽤 큰 장점이고 나는 되도록 이번에 데뷔하고 싶어요.”

“앞으로는 조심, 할게요.”

“그쪽이 계속 이렇게만 해 준다면 별문제 없을 거예요. 아침에는 일찍 일어나고요.”

“…네.”

하지만 돌아오는 말은 조금 담백했다. 태오의 대답에 솔은 반사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

태오는 착실했다. 솔은 자신이 살면서 착실이란 단어를 대표할 사람을 뽑으라고 한다면 태오를 뽑을 것이었다. 지난 3일을 함께 지내며 태오는 알람이 울리지 않아도 제시간에 일어나 정확히 9시에 솔을 깨웠다. 당연하게도 그가 깨운다고 솔은 바로 일어나지 않았다.

나름의 긴장을 하고 ‘여긴 집이 아니야.’, ‘태오는 의찬이가 아니야.’라고 생각을 해 봐도 단 하루도 제시간에 일어난 적이 없었다.

솔직히 화라도 한번 낼 법한데 태오는 솔에게 그런 개선의 가능성이 없다고 판단한 건지, 화를 내지도 않았다. 9시에 깨우기 시작해도 20분은 지나야 뭉그적뭉그적 일어나는 솔 때문에 태오는 모든 준비를 끝마치고 그걸로도 모자라 솔의 가방이나 아침 식사까지 9시 전에 준비를 끝내고 솔을 깨웠다.

이따금 득용과 지호가 그런 태오를 보며 고개를 저었고, 태오의 그런 노력에도 좀처럼 일어나지 못하는 솔을 보면서도 고개를 저었다. 득용도 솔과 크게 다를 바는 없어 구태여 말을 덧붙이지는 못했다. 당연하게도 태오가 사 온 연고를 바를 틈도 없었다.

고작 며칠 같이 다녔다고 그래도 이제는 제법 연습실에 나가는 것에 익숙해졌다. 적어도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마냥 질질 끌려가지는 않고 제 발로 걸어가는 정도는 되었다.

하나 더 위안으로 삼자면, 솔이 본격적으로 연습하는 모습을 보여 주자 솔을 대하는 멤버들에게도 변화가 생겼다. 그렇다고 막 극적인 친밀감과 그런 것을 느끼는 것은 아니었지만, 적어도 이전 사람들처럼 성격이나 실력으로나 완전 밑바닥은 아니라 안도한 듯했다.

간간이 가람이나 득용이 흘리는 정보들을 줍다 보면 솔 이전에 있었던 사람들은 욕을 하거나 대놓고 무시하거나 하기도 했던 듯했다. 내심 솔은 고개를 끄덕였다. 만약 그 사람들도 자신과 같은 상황에 부닥쳐 있었다면, 태오를 비롯한 멤버들이 단순히 게임 속 캐릭터, 허구의 인물이라 생각했을 것이다.

솔도 그렇게 극단적이진 않았지만, 어느 정도 그런 생각을 했었기에 입 안이 썼다. 솔은 고개를 들어 연습을 마무리하는 네 사람을 둘러보았다. 단순히 허구의 인물들이라고 하기엔 땀을 흘리는 모습이 지나칠 정도로 선명했다. 한집에 부대끼고 온종일 붙어 있다 보니 그런 마음을 가지는 게 죄를 짓는 것 같았다.

가람은 사실 춤에 별 재능이 없었다. 동작 하나를 배우는 데도 많은 시간이 걸리고 잘 풀리지 않아 같은 동작을 수십 번씩 반복 연습을 한다. 그러고도 진행이 되지 않으면 이따금 짜증을 내고는 했다.

지호는 강아지 같은 생김과 달리 여우 같은 구석이 있었는데, 그러면서도 동생들을 살뜰히 챙겼다. 얼핏 듣기로는 위아래로 형제가 아주 많다 했다. 그래서 그런지 유독 득용을 아끼는 티가 났다. 구박하고 타박하면서도 정말 친동생 다루듯 챙겼다. 그리고 무엇보다 솔은 입도 벙긋 못 할 정도로 노래를 잘했다.

태오가 보컬 연습 중 영 갈피를 못 잡는 것 같을 땐 지호에게 말하라 했지만 사실 지호와 너무도 수준이 차이가 나서 묻기도 민망할 지경이었다.

득용이는 지나치게 솔직한 점이 없잖아 있지만 껄렁해 보이는 외모와 달리 그 이름처럼 순박했다. 어려서 그런지 뭐든 곧잘 따라 했다. 그리고 그에 따른 자신감도 있는 친구였다. 무척 활달해서 보다 보면 의욕 없는 솔까지 무언가 방방 뛰어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되곤 했다.

태오는…. 솔은 잠시 생각을 멈췄다. 태오와 함께하는 시간이 제일 많은데 이렇게 그 사람에 대해 정리해 보자니 무언가 말문이 턱 막혔다. 고작 사흘, 아니 나흘이긴 하지만 태오는 늘 가장 늦게 숙소에 돌아오는 인물이었다. 매일같이 홀로 연습실에 남았고 멤버들은 그에 익숙한지 오늘도 남느냐고 묻지도 않았다.

솔이 잠시 그간 파악한 것들을 정리하는 사이, 마무리되었는지 지호가 수고했다며 손뼉을 쳤다. 순간 눈앞에 이제는 익숙해진 시스템 창이 떠올랐다.

[데이블락 - 핫 트릭 안무 숙련도 81%]

[현재 피로도 58/100]

오늘은 그래도 짬짬이 쉬어 둔 덕에 피로도에 여유가 있었다. 지금까지 70이 넘은 적은 없었다. 아슬아슬했던 적은 있지만. 숙련도 수치도 제법 올라가 있었다.

별로 티는 나지 않지만 나름 솔에게는 많은 발전이 있었다. 적어도 밑바닥을 몇 번 보인 네 사람 앞에선 어느 정도 춤을 수월하게 추게 되었다는 점. 별거 아닌 듯했지만 큰 변화였다.

당연하게도 점점 변화하는 솔을 멤버들이 제일 먼저 눈치챘다.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연습 중간중간 툭 내뱉는 말에 이전과 같이 날카롭고 찜찜한 감정들이 사라졌다.

“수고하셨습니다.”

다른 건 아직 잘 안 맞아도 끝맺는 인사만큼은 칼같이 딱 맞아떨어졌다. 제각각의 개성 있는 목소리가 합창하듯, 동시에 울려 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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