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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애를 뽑고 싶어-27화 (27/192)

#27

춤추는 것이 무서운 건지. 자신을 바라볼 사람의 시선이 무서운 건지. 솔이 말꼬리를 흐리자 태오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덤덤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태오의 표정은 수면처럼 퍽 고요했는데 아주 살짝, 귓가가 붉어져 있었다.

“…잘했어요. 아깐 자고 있길래. 내가 오해했어요.”

태오가 먼저 손을 내밀었다. 덤덤히 칭찬과 사과를 뱉는 그를 솔은 흘깃 곁눈질했다. 붉어진 귓가가 퍽 신경 쓰였다.

“자고 있던 거 맞긴 한데요…. 그… 근데 계속 잔 건 아니고 잠깐 힘들어서…. 누웠다가 깜빡 잠든 거였어요.”

몇 번이고 계속 먼저 손을 내밀어 준 태오였다. 대학 때처럼 다른 사람이었다면 구태여 변명하지 않았겠지만 이번에 솔은 어색한 변명을 덧붙였다. 구차할 수 있겠지만 솔에겐 그게 관계를 완만하게 유지하고 싶다는 의지였다.

더 이상 태오와 다른 멤버들을 피할 수 없었고 살려면 이 넷과 함께 데뷔해야 했다. 적어도 지금까지 보건대 시스템이 원하는 건 그거인 듯했다. 아니면 적어도 퀘스트를 진행하는 데에 네 사람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것. 더할 나위 없이 확고했다.

사실 큰 변명도 아니었다. 엄연히 사실을 말하는데도 구태여 뒷말을 붙인다는 게 어색하고 멋쩍어 솔은 우물쭈물했다. 어색해하는 솔과 태오의 시선이 마주쳤다. 태오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참 별것 아니었다. 이런 해명 한마디가 그간 뭐가 그리 어려워서 안 했는지 우스울 정도로. 태오의 반응도 무척이나 덤덤했다.

어느새 자세를 잡고 선 멤버들이 박수를 두어 번 짝짝 내려쳤다. 집중의 신호였다. 귀에 익은 기타 전주가 시작되자 솔은 이번에는 조금 전보다 더 크게 움직여 보겠다고 마음을 다졌다.

***

다들 말이 없었다. 첫 연습과 첫 레슨에 대한 소감은 참담함이었다. 어설프게 손만 까딱거리고선 해 볼 만하다고 생각했던 게 어리석었다. 솔은 레슨 내내 꿔다 놓은 보릿자루처럼 뻣뻣하게 움직였다. 모자가 도움이 되기는 했으나 처음 보는 낯선 이의 등장은 솔의 공포증만 악화시켰다.

하물며 그는 충실히 제 업무를 수행하는 프로페셔널한 선생이었다. 매 같은 그의 눈동자가 솔에게 따라붙을 때마다 솔은 두 배로 진땀을 빼야 했다. 안 좋은 기억들이 자꾸만 머릿속에 겹쳤다.

트레이너의 시선이 느껴지면 솔은 유난히도 뚝딱거리고 조심스럽게 움직였다. 심각한 얼굴을 한 안무 트레이너가 솔을 쳐다볼 때면 뒤에 서 있던 득용이 끊임없이 ‘웃어요.’라고 속삭였다. 그의 조언을 받아들여 솔이 어색하게 웃어 보이면 안무 트레이너는 쏟아 내려던 말을 잠시 멈추고 숨을 골랐다.

하지만 그게 능사는 아니었다. 그저 과감하게 거리낌 없이 쏟아 낼 냉정한 말을 듣기 전에 조금 숨을 돌릴 시간을 벌어줄 뿐. 평가는 냉혹했다. 멤버들이 처음 솔을 보고 말했듯이, 트레이너도 솔에게 똑같은 걸 물었다. 아이돌이 하고 싶긴 한 거냐고. 할 말이 없었다. ‘해야 하는데요, 그래야 살 수 있는 거 같거든요.’ 하는 말이 턱 밑까지 올라왔다.

솔의 어물쩍거리고 굳어 있는 행동에서 아무런 의지도 보지 못한 것이었다. 조금은 억울했다. 근 몇 년의 시간 중 가장 의욕적이고 용기를 낸 것이었는데. 역시나 하루를 벅차게 살아가는 사람들의 입장에서 보기엔 터무니없었나 보다. 솔은 고개를 숙이고 눈치를 살피는 것밖에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레슨이 시작되기 전까지 여러 가지 조언해 준 태오와 지호에게 조금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함께 쓴소리를 듣는 사람이 있어서 조금 덜 무서웠다면 너무 못된 말일까.

가람은 퍽 둔했다. 같은 동작을 할 때도 시행착오가 여러 번 있었고 그때그때 안무 트레이너가 새롭게 알려 주는 동작을 습득하는 데에 시간이 걸렸다. 한번 보면 대충은 따라 할 수 있는 솔과 뭐든 눈 깜짝할 사이에 제 것으로 만들어 버리는 태오와 달랐다.

아무래도 그 모자란 부분을 연습으로 다 채워 넣는 듯했다. 가람은 정말 쉬지 않고 춤 연습했다. 솔이 민망해질 정도였다. 득용은 자신감 하나만으로도 칭찬할 만했다.

지호는 막귀인 솔이 얼핏 듣기에도 뛰어난 노래 실력을 갖추고 있었다. 제대로 각을 잡고 부르는 노래가 아니라 쉬는 틈도 없이 계속해서 노래를 흥얼거렸다. 꼭 술 취한 아저씨처럼, 거의 모든 말을 노래처럼 흥얼거리면서 했다.

웃길 법도 한데 그 흥얼거림조차 단순한 흥얼거림이 아니라서 솔은 이상한 표정을 지으며 그를 볼 수밖에 없었다. 마이크 없이도 스피커를 이길 성량이었으며 소리가 단단하고 카랑카랑했다. 곧게 질주하는 것 같은 목소리였다. 뒤에서부터 자신을 치고 지나가는 목소리에 솔은 몇 번이고 참지 못하고 뒤를 돌아보았다.

지켜보면 볼수록 이 팀의 가장 큰 문제는 자신밖에 없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그리 생각하니 더 부담되고 미안한 마음이 들어 한참을 더 물에 빠진 사람처럼 허우적거렸다.

레슨이 끝나고 안무 트레이너는 깊은 한숨을 내뱉으며 솔에게 다시 한번 진지하게 생각해 보란 말을 남기고 사라졌다.

“수고하셨습니다.”

“고생했어. 다들.”

“으아. 숨 막히는 줄 알았네.”

“눕지 말고 빨리 정리해.”

득용이 털썩, 바닥에 널브러지자 가람이 발끝으로 그를 툭툭 차며 재촉했다. 느른한 얼굴에 모처럼 짜증이 덕지덕지 붙었다. 가람은 레슨 중반부터 제 움직임이 성에 차지 않는지 짜증이 나 보였다.

“강가람, 그냥 놔두고 들어가.”

“또?”

“응. 다들 먼저 들어가.”

가람이 바닥에 떨어진 휴지 조각과 빈 물병을 줍자 태오가 만류했다. 또 태오 혼자 연습실에 남을 생각인 듯했다. 미안함 반, 눈치 보기 반으로 아무 말 안 하고 서 있던 태오의 말에 조용히 제 짐을 챙겼다. 태오 혼자 남겨 두고 영호의 배웅을 받으며 세 사람은 숙소로 향했다.

숙소로 가는 길 내내, 득용은 라면 타령하며 갈지자로 휘청이며 걸었다. 지호가 우렁찬 목소리로 ‘저기요. 김득용 씨 취하셨나요?’ 하며 핀잔을 주자 막내는 더욱더 큰형에게 치대었다.

“저기. 태오. 그 사람은 매일 남아서 연습하는 거예요?”

“…뭐 그런 편이죠.”

가람의 표정이 어쩐지 더 말을 하기 싫은 것 같아 솔은 조용히 그를 따라 걸었다. 슬슬 긴장이 풀리며 몸이 천근만근 되어 솔의 걸음이 점점 뒤처졌다. 오늘은 가람도 여유가 없는지 솔을 기다려 주지 않았다. 사실 기다려야 할 의무도 없었고.

코너를 돌아 슬슬 숙소의 모습이 보일 즘, 맞은편에서 누군가가 불쑥 튀어나왔다. 녹초가 되어 흐느적거리던 솔은 튀어나온 행인을 보고도 즉각 반응하지 못했다. 부딪히기 일보 직전. 가람이 휙 솔의 옷가지를 잡아챘다. 아슬아슬하게 부딪히는 신세를 면했다.

골목에 튀어나온 사람은 후드를 푹 눌러쓰고 있었는데 삐져나온 머리칼이 길고 체구가 작은 것이 여성인 듯했다. 부딪힌 건 아니지만 피차 놀라기는 마찬가지인 것 같아 솔이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하려 하자 가람이 그를 끌어당겼다.

“어어? 죄송합니다.”

“빨리 가요.”

“아니. 사과는 해야죠. 부딪칠 뻔했는데.”

“저쪽이 먼저 튀어나와서 그런 거잖아요. 그쪽이 사과할 필요는 없죠.”

가람의 손에 질질 끌려간 솔은 걸음을 바로 했다. 바삐 그를 따라 걸으며 슬쩍 뒤를 돌아보니 자신과 부딪힐 뻔했던 여자가 그 자리에 덩그러니 서서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다. 후드에 가려져 얼굴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지만, 대충 제 또래의 여자인 듯했다. 솔은 살짝 고개를 숙여 사과의 인사를 건네고 가람과 걸음을 맞추었다.

숙소로 돌아와선 저마다 말없이 거실 바닥에 쭉 다리를 뻗고 들어앉았다. 가람만이 먼저 씻는다며 욕실로 사라졌고 투덜거리는 득용과 완전히 지쳐 버린 솔만 한참을 더 바닥에 누워 뭉그적거렸다. 맨 마지막으로 샤워를 끝마치고 방에 누운 솔은 제 핸드폰을 켜 오늘 있었던 일을 되짚어 보았다.

핸드폰이야 내일이면 다시 또 제출해야 하지만 그래도 이런 식으로 기록을 해 두는 게 어떻게든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었다. 오늘 하루 태오와 지호, 가람이 자잘하게 가르쳐 준 팁들을 되새김하며 입력해 나갔다.

오늘 하루 있었던 일에 대해 일기 쓰듯, 메모장에 기록을 끝낸 솔은 핸드폰을 잠시 덮었다. 잠을 청하려 자리를 들썩이던 솔은 태오가 아침에 했던 말이 떠올라 포털 사이트에 ‘남자 아이돌’이나 ‘K-POP 차트’ 같은 걸 검색해 보았다.

빽빽하게 떠오른 게시글 중에 익숙한 이름이 보여 솔은 화면을 터치했다. 스포트라이트 같은 강한 조명 아래 흰 셔츠를 입고 당당한 미소를 짓고 있는 은겸의 사진이었다.

검은 건 글자요 알록달록한 건 사진이었으니, 피곤한 하루를 보내 집중력이 바닥난 솔은 대충 화면을 넘겨 보았다. 제대로 읽지도 않고 사진만 확인하던 솔의 눈에 굵은 글씨가 들어왔다.

‘해야 해.’, ‘해야만 한다.’라는 말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분명 사랑해서 시작한 일이었는데도 ‘해야만 한다.’라고 말하고 나면 마음이 힘들어진다. 꼭 하기 싫은 일을 누군가 시켜서 억지로 하는 것 같은 말이다. 그래서 되도록 ‘해야 해.’보단 ‘할 거야.’라고 말하려고 노력한다. 그런 사소한 혼잣말에서부터 나의 태도가 만들어지는 것 같다.

오늘 하루 솔은 ‘해야 해’, ‘해야만 해’란 말을 달고 다녔다. 물론 속으로 되뇐 것뿐이지만 최면에 걸리고 노이로제가 와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끊임없이 반복했었다.

그 문구 하나에 갑자기 흥미가 돋아 솔은 눈살을 찌푸리고 은겸의 인터뷰 내용을 읽어 내렸다. 1시가 넘어가자 소란스러웠던 숙소가 쥐 죽은 듯, 고요해졌다. 더 이상 지호나 가람, 득용 누구의 목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시끄러웠던 하루가 마침내 끝난 듯했다. 고요함을 베개로 삼아 슬슬 솔도 눈이 감기기 시작했다. 잠이 들 듯, 말 듯 아슬아슬한 경계에 발을 담근 채 솔은 조용히 눈을 끔뻑였다. 눈꺼풀이 점점 무거워지자 솔은 긴 속눈썹으로 눈동자를 살포시 덮었다.

‘아, 참! 숙련도!’

정신이 없어 수시로 떠오르는 알림 창을 제대로 확인하지 못한 게 떠올랐다. 처음엔 꼼꼼히 읽어 내려가다가 연습이 반복될수록 오히려 눈에 거슬려 떠오르는 족족 고개를 저어 꺼 버린 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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