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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애를 뽑고 싶어-24화 (24/192)

#24

“아무것도 아니야.”

태오는 자신을 바라보고 선 두 사람의 등을 떠밀었다. 큰 키답게 길쭉하고 커다란 손이 판판하게 등을 받쳐 밀어내자 의문이 남은 두 사람도 군말 없이 순순히 걸음을 옮겼다.

태오를 비롯한 멤버들의 목소리가 복도에서 점점 멀어지자 솔은 그 자리에 쪼그려 앉았다. 상황이 좋지 않다는 걸 알면서도 몸이 축축 늘어졌다. 여기서 더 실망스러운 모습을 보여 준다면 정말 저 넷과의 관계가 파탄이 날지도 몰랐다. 그래도 그나마 다행인 건 연습실 한복판에서 잠자는 꼬락서니를 태오만 봤다는 점이었다. 물론 태오가 모두에게 일러바친다면 할 말이 없었지만 조금 전 내용으로 추론하건대 그러지는 않을 듯싶었다.

솔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래도 그 잠깐 잠들었다고 트라우마를 억누르고 연습하느라 피로했던 몸이 조금 회복된 것을 느꼈다. 실제로 눈앞에 떠오른 알림 창에도 35였던 피로도가 28로 줄어들어 있었다.

[데이블락 - 핫 트릭 안무 숙련도 21%]

[현재 피로도 28/100]

[피로도 관리에 유의하세요! 피로도가 70 이상일 경우 페널티가 발생합니다.]

안무 숙련도 21%, 지금 단계에서 주말 평가를 치른다면 몇 등급이 나올까. 이쪽 세계에 문외한인 솔은 제 실력이 가늠되질 않았다. 함께 연습하는 은겸이 틈틈이 보내 준 칭찬으로 보건대 페널티가 있음에도 나쁘지 않은 실력임이 확실했다.

“역시 훨씬 더 열심히, 치열하게 해야 하겠지. 이렇게 대충 설렁설렁 해서 통과될 정도라면 퀘스트라고 주어지지도 않았을 거야.”

솔은 허공을 올려다보며 혼잣말을 했다. 물론 그의 시야엔 퀘스트 알림 창이 펼쳐져 있었지만 제삼자가 허공을 멍하게 바라보는 넋이 나간 모습, 딱 그랬다. 게임을 즐겨 하진 않은 솔이었지만 아무런 노력도 없이 쉽게 성공할 수 있는 일이라면 퀘스트가 아닐 것이란 당연한 생각이 들었다.

정당한 노력을 했을 때 돌아오는 보상.

본디 게임이란 그 법칙을 따르는 것이니 솔에게 내려진 퀘스트들도 필시 그러할 것이었다. 어제 네 사람이 연습하는 모습을 보지 않았던가. 조금 전 자신이 했던 것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구슬땀을 흘렸었다. 그저 옆에서 보고만 있었을 뿐인데도 피부 위로 필사적임이 느껴질 정도였다. 그에 비하면 자신이 한 것은 휘적거림에 불과했다.

고작 그거 했다고 곤죽이 되어 잠이나 자질 않나, 또 그 모습을 들키기까지 했다. 가슴이 갑갑했다. 조금 전까지 은겸에게 받았던 칭찬들이 물거품이 되어 바닷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제대로 음식을 먹은 게 언제였더라. 주환의 결혼식장에서도 먹는 둥 마는 둥 했고, 의찬과의 술자리에서도 의찬이 고기 몇 점 억지로 먹인 게 다였다. 배가 고파서일까 더욱이 힘이 없었다.

목숨이 달려 있다 보니 모처럼 무언갈 헤쳐 나가려 조금이나마 노력했는데 아무짝에 소용이 없는 느낌이었다. 남들에겐 쉬웠을 그 행동 하나가 솔에겐 턱없이 문턱이 높았다. 간신히 문턱 하나를 넘었는데, 다 큰 성인에게 문턱 하나 넘었다고 칭찬하고 박수 쳐 줄 이는 없었다. 그럼에도 누구를 원망할 수도 없었다.

원망해야 할 상대가 있다면 이렇게 망가진 자신, 이렇게 될 거란 걸 알면서 그간 방치했던 자신뿐이라고 솔은 생각했다.

가슴 언저리가 갑갑해 솔은 크게 심호흡을 두어 번 했다. 점심시간이 지나면 다시 태오의 얼굴을 봐야 하는데 그 막막함에 한숨이 절로 나왔다. 스트레스가 갑자기 치솟아 머리가 지끈거렸다. 한숨만 푹푹 내쉬며 뭉개고 있는데, 누군가가 연습실 문을 두들겼다.

솔은 긴장한 고양이처럼 몸을 잔뜩 움츠리고 문을 노려보았다. 흐리멍덩한 시선과 퉁퉁 부은 얼굴이 말이 아니었다. 솔의 긴장을 비웃듯, 슬쩍 열린 문으로 매니저 김영호의 얼굴이 빼꼼 빠져나왔다.

“솔아, 연습하고 있다며.”

“안녕하세요.”

“자. 이거. 태오가 너 밥도 안 먹고 연습한다고 그래서.”

“어어. 감사합니다.”

굵직한 시계를 찬 팔이 열린 문틈으로 쭉 뻗어 나왔다. 손목에는 대롱대롱 검은 비닐봉지가 매달려 있었다. 얼떨결에 두 손으로 봉투를 받아 든 솔은 안에 든 내용물을 확인하고 영호에게 인사를 했다. 봉투 안에는 삼각김밥 두 개와 가볍게 마실 만한 이온 음료가 들어 있었다. 냉정하게 식어 버린 태오의 표정엔 경멸이 깔려 있었는데 그래도 이렇게 따로 매니저에게 말해 둔 거 보니 관계가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최악은 아닌가 싶었다.

“그래, 그래. 어디 아프거나, 더 필요한 거 있으면 말하고.”

“네.”

“늦게 들어와서 마음 급한 건 이해하는데 그래도 먹고살려고 하는 건데 먹으면서 해야지.”

“챙겨 먹을게요. 감사합니다.”

“너희 챙기는 게 내 일인데 뭘, 참 대표님 주말쯤에 귀국하신다더라.”

시큰둥한 표정으로 비닐 안을 들여다보던 솔의 얼굴이 대번 밝아졌다. 백의찬. YC 엔터의 대표. 영호가 전한 그의 귀환 소식에 솔은 약간의 기대를 품었다. 언제나 자신의 편인 친구. 친구와 이곳의 대표가 같은 사람일 거라는 확신 따윈 어디에도 없었지만, 그 이름을 듣는 것만으로도 안도감이 들었다.

혹시나 하는 일말의 희망.

애초에 자신이 게임 속에 들어온 말도 안 되는 일이 벌어졌는데 백의찬이라고 안 그러란 법은 없지 않은가. 물론 백의찬이 이 말을 들었다면 저주하는 거냐고 뭐라 한마디 얹었을 것이다.

“이번 주말 평가는 직접 보러 오신대. 그럼 연습 힘내고. 이따가 보자.”

“네. 네!”

달리 자리를 만들어 내지 않아도 주말이 되면 대표 백의찬의 정체를 알 수 있다는 영호의 말에 솔은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진짜 백의찬이길 바라기보다는 은겸처럼 친구의 모습을 닮기만 해도 서러운 마음에 나름 힘이 될 것 같았다. 솔은 영호가 쥐여 준 봉투와 바닥을 굴러다니는 태오의 모자를 주워 연습실을 이동했다. 바닥을 나뒹굴었던 버킷 햇에 허옇게 먼지가 묻어 솔은 손으로 툭툭 털어내고 곱게 모양을 다잡았다.

자신이 박혀 있던 골방과 달리 보컬 연습 공간까지 딸린 2번 방은 쾌적하고 넓었다. 새삼 양극인 두 연습실을 오가니 그 대비가 명확했다.

아침에 태오가 메고 왔던 가방 위에 모자를 올려 둔 솔은 어제 졸았던 그 같은 자리에 앉아 영호가 사 온 삼각김밥을 꺼내 들었다. 입 안이 바짝 말라 냉기를 품은 밥알이 영 까끌까끌하게 느껴졌다. 그래도 먹어야 조금이나마 기력이 돌아 오후를 버틸 거 같아 솔은 꾸역꾸역 음식을 삼켰다. 간신히 하나를 다 삼키고 나니 또 하나가 남아 있었다.

신경 써서 사다 준 걸 버릴 수도 없고 익숙하지 않은 낯선 공간에서 처리할 방도도 막막했다. 결국 솔은 남은 하나의 포장재도 벗겨 꾸역꾸역 입 안에 처넣었다. 삼각김밥 두 개, 성인 남성에게 많은 양은 아니었지만 계속되는 긴장 상황에 노출되어 있다 보니 배는 고팠지만, 음식이 받질 않았다.

억지로 삼킨 마지막 한 덩어리가 영 씹히지 않아 솔은 금방이라도 뱉어 낼 사람처럼 오만상을 썼다. 양 볼이 빵빵하게 부풀었는데 차가운 밥알은 삼킬 만큼 고와지지 않았다. 그대로 굳어 버린 것처럼 몸을 축 늘어뜨리고 앉아 있는데, 연습실 문이 벌컥 열리며 가람이 들어왔다. 때 이른 등장에 놀란 솔은 입을 틀어막고 캑캑거렸다. 미처 다 삼키지 못한 음식물이 명치 언저리를 콱 틀어막아 솔이 연신 가슴을 두들겼다.

그런 솔을 발견한 가람은 거침없이 성큼 그에게로 다가왔다. 담벼락 위에 올라서서 행인을 지켜보는 고양이처럼 나른해 보이는 그는 웬일인지 오늘 퍽 지쳐 보였다. 굳이 비교하자면 어제는 딱 그러한 고양이었다면 오늘은 비를 쫄딱 맞은 고양이 같았다.

가람은 솔의 옆에 놓인 이온 음료 뚜껑을 따 그에게 건넸다. 연신 콜록거리며 음료를 받아 든 솔은 고개를 꾸벅이고 황급히 음료를 삼켰다. 차가운 음료와 함께 목을 틀어막고 있던 음식물이 사라지자 솔은 숨을 내뱉을 수 있었다. 퀘스트 실패가 아니라 삼각김밥 먹다 목숨을 잃을 뻔했다.

“고맙습니다.”

“…….”

솔은 인사를 하며 가람을 슬쩍 올려다보았다. 쌍꺼풀 없는 차분한 눈매가 더욱 깊게 가라앉아 어둡지만 그윽해 보이는 분위기가 있었다. 저런 차분한 얼굴로 어제 제법 매서운 말을 했던 가람이 떠올라 솔은 그의 눈치를 살폈다.

가타부타 대답은 없지만, 언뜻 돌아서는 그의 귀가 조금 붉어 보였다. 그나마 어제 솔에게 여러 말을 전해 준 가람이었기에 솔은 앞으로 함께할 팀의 정보를 더 얻어 볼까 하여 무거운 입술을 뗐다. 하지만 그의 이름을 미처 부르기도 전에 소란스러운 인물이 등장해 버렸다.

“뭐야? 뭐가 고마워요? 가람 형?”

“네 눈치 보느라 밥도 숨어서 먹네.”

문을 열고 들어온 디케이, 득용의 물음에 가람이 허리 숙여 신발 끈을 묶으며 대답했다. 가람의 대답에 솔은 간신히 삼킨 김밥이 다시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다시금 캑캑 기침을 토하며 가슴을 두들기자 득용의 얼빠진 목소리가 머리 위에 울려 퍼졌다. 목소리가 큰 편인 득용과 달리 가람의 목소리는 나긋나긋해 득용의 목소리가 유난히도 크게 들렸다.

“엑? 그게 무슨 소리예요. 내가 뭘 어쨌다고.”

“아니!! 그런 거 아니에요!”

“무슨 일이야.”

“뭐야, 싸워? 무슨 일 있니? 얘들아?”

득용의 뒤로 식사를 끝낸 태오와 지호가 연이어 연습실로 들어왔다. 득용의 목소리가 워낙에 큰 탓인지 두 사람 모두 심각한 표정으로 솔과 득용을 번갈아 가며 쳐다보았다. 사레에 들린 솔이 무어라 말을 더 잇지 못하고 두 손만 절레절레 흔들었다. 어제도 그랬지만 강가람, 은근 얌전히 폭탄을 던지는 스타일이었다.

“가람 형은 맨날 나한테만 뭐라 해."

“뭐야, 솔이가 아니라 가람이 때문이야?”

열을 내며 씩씩거리는 득용의 머리를 지호가 쓱쓱 쓰다듬었다. 득용은 또 구태여 머리를 숙여 지호의 쓰다듬을 받았다. 주인과 반려견 같은 느낌이었다. 득용이 무어라 계속 구시렁거렸지만, 가람은 신경도 쓰지 않았다. 오히려 득용의 편을 들어 주는 지호를 보며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솔은 계속 튀어나오는 기침을 참으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순간 지호와 눈이 마주치자 그가 빙긋 미소를 지었다. 묘하게 그 미소가 너랑 싸운 게 아니라 아쉽다는 듯 느껴졌다면 괜한 자격지심, 피해망상일까, 영 찜찜했다.

행동이 굼뜬 솔과 다르게 득용과 가람은 잠시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물론 가람은 연습실 구석에서 자잘한 동작을 연습하며 수시로 제 모습을 거울에 비추어 확인하느라였고 득용은 지호와 투덕거리느라 바쁘다는 차이점이 있긴 했다.

솔은 그가 건넸던 이온 음료병을 손에 쥐고 가람의 모습을 지켜보았다. 무엇이 그리도 마음에 들지 않는지, 가람은 같은 동작을 반복하고 또 반복했다. 홀로 박자를 세며 반복 연습을 계속하는 그에게 이따금 태오가 무어라 조언하며 조금 더 수월하게 움직이는 방법을 알려 주곤 했다.

가람이 연습하고 있는 춤은 은겸과 함께 연습했던 그 주말 평가 곡이었다. 그의 모습을 멍하니 바라만 보고 있던 솔은 제 퀘스트 창을 떠올렸다. 생각하기 무섭게 그가 원하던 알림 창이 시야에 펼쳐졌다.

[데이블락 - 핫 트릭 안무 숙련도 21%]

아직 반절도 채우지 못한 숙련도. 솔은 손에 쥐고 있던 음료수를 내려놓고 슬그머니 가람의 옆에 가 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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