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최애를 뽑고 싶어-23화 (23/192)

#23

“다른 회사 가세요?”

“아니. 진짜 그만두는 거야. 취업할 거다.”

“…….”

“너도, 강가람도 어지간히 해라. 공개 연습생으로 지금 벌써 몇 년째냐.”

자신이 무너졌으니 너도 아파 보라고 내뱉은 말임을 안다. 알고 있음에도 제법 날카로운 말이 깊게 들어왔다. 공개 오디션을 봤던 태오와 가람은 연습생 신분이 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은겸과 함께 공개 연습생이 되었다. 둘 다 실력도 나쁘지 않았고 외모도 출중했기에 초반에는 광고나 선배들의 뮤직비디오의 단역, 댄서 같은 활동들을 제법 했었다.

그간 YC 엔터의 공개 연습생들은 그 결과의 성패를 떠나 대다수가 1년 이내에 빠르게 데뷔했기에 다들 태오와 가람이 금세 데뷔하리라 믿었었다. 하지만 모두의 예상을 깨고 같이 숙소 생활했던 은겸이 <데이블락>으로 데뷔할 때도 태오는 이곳 지하 연습실에 있어야 했다.

공개 초반에야 이목을 사로잡는 비주얼로 커뮤니티에 여러 글이 올라오곤 했었지만, 시간이 많이 흐른 지금은 어쩌다 한 번쯤, ‘걔는 대체 언제 데뷔하냐?’ 이런 주제로 가끔 글이 올라오는 수준이었다. 평소라면 무시했을 성광의 말이었지만 오늘은 그게 영 쉽지 않았다.

“데뷔조예요. 곧 화면에서 인사드릴게요.”

“그러면 참 좋을 텐데, 잘 생각해. 한 살이라도 어릴 때 빨리빨리 단념하고 살길 찾아가라. 나처럼 되진 말아야지. 태오야.”

무심한 척 당당히 대답하는 태오의 모습에 코웃음을 친 성광은 조언이랍시고 제초제를 뿌렸다. 같은 처지의 동생을 위하는 척, 웃으며 말을 뱉지만, ‘너도 내 꼴이 나 봐라’ 하는 독사 같은 마음이 그 안에 가득 깔려 있었다.

“형, 충고대로 열심히 할게요. 들어가세요.”

더 상대하고 싶지 않아 태오는 아무렇지 않은 듯, 무표정한 얼굴로 꾸벅 고개를 숙이며 성광에게 인사했다. 그런 태오의 모습에 성광은 인상을 팍 구겼다. 제 뒤통수에 꽂히는 기분 나쁜 시선을 무시하며 태오는 복도 맨 끝 6번 연습실의 문을 노크했다.

음악 소리가 들리지 않아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한 노크였으나 역시나 대답은 없었다. 살짝 문을 열어 안을 들여다보자 정말 연습은커녕, 바닥에 웅크려 잠을 자고 있는 솔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복도에 여전히 서서 자신을 노려보는 성광 때문에 태오는 조용히 연습실 안으로 들어와 문을 닫았다.

남들 죽어라 연습할 시간에 태평하게 잠이나 자는 놈이랑 같은 데뷔조라는 걸 성광에게 들키고 싶지 않았다. 조용히 문을 닫고 잠이 든 솔을 내려다보며 태오는 주먹을 움켜쥐었다. 아침에 신경 써 씌워 주었던 모자도, 솔도 바닥을 나뒹굴어 있었다. 절박한 자신을 놀리는 듯해 화가 치밀었다.

데뷔조에 들어오며 연습에만 몰두하겠다고 알바를 그만두었던 지호가 최근 들어 다시 아르바이트 자리를 알아보고 있었다. 득용이도 내색하지 않지만, 이따금 부모님과 통화할 때면 집에 가고 싶다고 말하고 제가 뱉은 말에 창피해했다. 가람은 틈이 날 때마다 노트북을 끼고 앉아 미디 파일을 찍어 내기 바빴다. 언젠가 우리 노래를 제가 만들어 주겠다며 컴퓨터 폴더마다 어디에도 공개하지 못한 파일로 가득 채워 두었다.

남들보다 늦은 합류. 연습생 하나가 데뷔하기까지 다양한 것들이 필요했지만 거기에는 운도 있었다. 어느 날 우연히 길을 가다가 제안받아서. 그렇게 운이 좋게 연습생이 되어 데뷔하는 사람. 생각보다 많이 널려 있었다. 훗날 정말 그룹이 잘되면 그땐 웃으며 본인은 ‘이렇게 갑자기 하게 되었어요.’ 하고 말하는 날이 올 수도 있었다.

제 갑갑한 상황을 솔에게 비춰 보지 않으려고 태오도 나름의 노력을 하고 있었다. 챙기려 하고 있었고 부족한 부분이 있다면 도와 함께 만들어 가려고 신경 쓰고 있었다. 그래서 오늘 그가 홀로 연습하고 싶다 말할 때도 믿어 보자는 마음으로 고개를 끄덕였었다. 그런데 돌아온 결과가 눈앞의 모습이었다. 단순히 성실함의 유무를 떠나서 솔이 자신을 비웃는 것처럼 느껴졌다. ‘네가 그토록 절실해하는 이 일, 나한테는 아무것도 아니야.’ 이렇게 말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고의였던 아니었던, 아침에 본의 아니게 손찌검을 했던 것도 있고 여러모로 신경 쓰여 미안함이 마음 한쪽에 있었는데, 그마저도 깨끗이 사라졌다.

지금이라면 고의로 반반한 저 얼굴을 때릴 수 있을 것 같았다. 연습생 생활을 하며 지나쳐 가는 수많은 사람. 개중에 안 맞는 사람이 한둘이 아니었지만, 태오는 최대한 사람을 미워하지 않으려 노력했다.

피할 수 없이 얼굴을 부대껴야 하는 사이의 사람을 미워해 봤자 내 감정만 소모되는 것이었고 결국 나만 피곤해지는 길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조금 전 마주쳤던 성광도 미워하지 않으려 했었다. 그런 태오에게 만난 지 단 이틀 만에 이토록 사람이 싫어질 수 있다는 걸 성솔이 친절히 알려 주고 있었다.

“이봐요.”

밖에 아직 성광이 있을지 모르니 큰소리를 내고 싶지 않았다. 태오는 솔의 발치까지 다가가 잠든 그를 빤히 내려다보았다. 아침에도 실컷 자 놓고 연습실까지 와서 또 잠이다. 한번 눈 밖에 나고 나니 인정할 수밖에 없는 얼굴 외엔 모든 것이 곱지 않게 보였다.

“이봐요, 일어나요.”

오늘 이 말만 몇 번을 반복하는지 몰랐다. 아침의 일이 머릿속에 겹쳤다.

“성솔.”

태오의 짙은 눈썹이 한껏 모여, 잘생긴 미간에 주름을 잡았다. 툭, 툭. 솔의 신발 밑창을 태오가 발끝으로 건드렸다. 가지런히 포개어진 발이 움찔거렸지만, 솔은 눈을 뜨지 않았다. 태오 또한 그가 호락호락하게 일어나리라 기대하지도 않았다.

이미 아침에 그가 어지간해선 눈을 뜨지 않는다는 사실을 몸소 체험했기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이렇게 성의 없이 건성으로 발로 건드는 이유는 손을 대기도 싫어서다. 들끓어 오르는 감정을 억누르며 태오는 차분하고 낮은 목소리로 솔의 이름을 불렀다. 아침의 일이 데자뷔 되어 몇 번 부르지도 않았는데 대답 대신 인상을 찌푸리는 솔의 모습에 맥이 탁 빠졌다.

“성솔.”

“……으응.”

“점심시간이에요. 일어나요.”

태오가 집요하게 발로 그의 발을 건드리자 결국 솔이 미간을 잔뜩 찌푸리며 웅크린 몸을 쭉 펼쳤다. 그래도 아침보다는 빠른 반응이었다.

일어났나 싶었던 것도 착각. 슬쩍 인상을 찌푸린 솔은 제 발치 아래에 팔짱을 끼고 서 있는 태오를 보고 다시 눈을 질끈 감았다. 상상치 못한 얼굴의 등장에 솔의 얼굴이 팍 일그러졌다. 애써 다시 잠든 척하려 얼굴에 도는 긴장을 지워 보려 했지만 당황한 나머지 표정 관리가 되지 않았다. 입술을 비집고 나오는 목소리는 누가 들어도 방금 막 자다 깨어 잠긴 목소리였다.

몸이 너무 힘들어서 잠시 쉬고자 누웠을 뿐인데 잠이 들 줄은 꿈에도 몰랐다. 아니, 사실 눈이 가물가물했지만, 까짓것 뭐 어떠냐는 안일한 마음으로 계속 버티고 누워 있었다. 그래도 그렇지 진짜 연습실 바닥에서 푹 잠이 들 줄은 솔 자신도 몰랐다.

사고 이후로 사소한 것에도 예민하다고 느꼈었는데 사실은 세상 둔한 놈이 바로 자신이었나 보다. 솔은 혀를 깨물고 싶었다. 잠결에 흘깃 본 태오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당연했다. 혼자 연습하고 싶다 해서 한껏 배려해 주었더니 잠이나 처자고 있었으니. 멱살잡이 안 하는 게 보살일 지경이었다.

“아, 안 먹어. 안 먹을래요.”

솔은 돼먹지 못한 연기로 잠꼬대를 하는 척, 웅얼거렸다. 배야 고팠지만, 실컷 자 놓고 이대로 벌떡 일어나 태오와 함께 점심을 먹으러 가는 건 너무 뻔뻔하지 않은가. 아무리 배가 고파도 체할 자리에 제 발로 기어들어 가고 싶지는 않았다.

태오는 여전히 팔짱을 낀 채 솔을 내려 보고 한숨을 내쉬었다. 잠든 척, 두 눈을 꼭 감고 있지만 그 연기가 어설펐다. 너무 어설퍼 속아 줄 생각조차 들지 않았지만, 태오는 두 번 묻지 않았다. 그의 인내심은 이미 오전부터 바닥나 있었다.

“오후에 여기 사용하는 사람 있다니까, 정리해서 2번 연습실로 와요.”

성광이 그만두었으니 그럴 필요는 없었지만, 태오는 치기 어린 심술을 부렸다. 나름의 배려였는데 태평하게 잠이나 자는 꼬락서니를 보니 그 배려마저 필요치 않은 듯해서였다. 여전히 눈을 감고 바닥에 누워 있는 솔을 한차례 지긋이 내려다본 태오는 획 하니 몸을 돌려 연습실을 빠져나갔다.

태오가 나가고 나자 솔은 그제야 꾸물꾸물 몸을 일으켜 세웠다. 데뷔도 전에 불화로 갈려 버릴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치 태오처럼, 솔도 긴 한숨을 내뱉었다.

태오의 얼굴은 무표정했지만, 솔은 그에게서 곧 터질 것 같은 화산 같은 기운을 느꼈다. 묘하게 익숙한 느낌이었는데, 꼭 마치 대학 생활 조별 과제 조장 같은 느낌이었다. 화가 나겠지, 정말 한 대 패고 싶을 거였다. 솔도 그 사실을 머리론 이해하고 있었지만 행동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였다.

이미 너무 오랜 시간 자신의 문제를 방치했다. 더군다나 마음먹는다고 하루아침에 해결될 형태의 문제가 아니었다. 이건 병이었다. 마음의 병. 태오가 나가고 복도에서 말소리가 들렸다.

“솔이는?”

“안 먹는대요.”

“그 형 어제 저녁도 안 먹었는데.”

“…안 먹는대? 그래도 밥은 먹어야지….”

“됐어요.”

“그냥 안 먹는대…?”

“형들 신경 쓰지 마요. 잘 됐어요. 불편했는데 뭐.”

“득용아 네가 못 먹는다고 분풀이하지 말렴.”

득용의 퉁명스러운 말투에 지호가 그의 머리를 마구 쓰다듬어 헤집었다. 저보다 머리 하나는 큰 득용을 억지로 까치발 뛰어 쓰다듬는 모습이 우스웠다. 득용 또한 구태여 고개를 숙여 지호에게 당해 주었다. 다들 애써 처지는 기분을 끌어 올리려 노력하는데 여기에 굳이 솔이 잔다고 초를 칠 필요가 없었다.

“우리 진짜 짜장면 먹으면 안 돼요?”

“안 돼.”

잔소리하는 엄마처럼, 지호가 단호하게 딱 잘랐다. 장난스레 말하지만, 매번 식사 시간 때마다 힘들어하는 득용이 지호도 안쓰럽긴 매한가지였다.

쉽게 찌고 잘 빠지지도 않는 득용은 어린 나이임에도 식이 조절을 강하게 해야 했다. 가끔은 한참 자랄 애한테 음식가지고 이리 야박하게 굴고 싶지 않았지만, 실제로 득용보다 더 어린 친구들도 과도한 다이어트를 하고 있었다. 득용도 그 사실을 잘 알기에 매번 말만 저렇게 투정을 부리지 실제로 몰래 빠져나가 짜장면을 먹거나 치킨을 먹거나 하는 문제는 일으키지 않았다.

한창 점심시간이라 조용해진 연습실 복도를 빠져나가며 태오는 맨 끝 방, 6번 방의 굳게 닫힌 문을 쳐다보다 인상을 찌푸렸다. 영 거슬렸다. 찰나의 변화였지만 맏형인 지호는 태오의 변화를 놓치지 않았다.

“왜? 뭐라 했어?”

“아니에요.”

“왜요. 왜요!”

무언가 눈치챈 지호가 태오와 눈짓을 주고받자 득용이 번뜩이며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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