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
이어진 솔의 대답에 은겸의 두 눈이 크게 뜨였다. 가볍게, 동료의 푸념을 듣는 듯, 제 경험을 회상하며 이야기를 이어 나가던 은겸은 떨리는 눈동자로 솔을 바라보았다.
어느새 울음을 멈춘 솔은 생각보다 덤덤한 표정으로 은겸을 보고 있었다. 더 이상 울지 않는 그의 모습에 은겸은 제 눈썹 언저리를 살짝 긁으며 웃음 지었다. 애처롭게 울던 울음은 멈췄는데 어째서인지 덤덤히 쓴웃음을 지으며 대답하는 모습이 더 서글펐다. 은겸과 시선이 마주치자 살짝 눈동자를 내리깐 그 모습에 은겸은 저도 모르게 충동적으로 말을 내뱉었다.
“그럼 내가 친구 해 줄까요?”
“네?”
“우리 초면에 이런 얘기 한 것도 웃기고 이상하잖아요. 그러니까 친구 해요. 제 오지랖이긴 했지만….”
“갑자기요?”
“친구 사이면 오늘 지금, 우리가 이런 대화 하는 것도 이상한 일이 아니잖아요.”
“좀 이상하긴 했죠.”
“네. 저도 모르게 그러긴 했는데….”
그의 말대로 이상했다. 서주환을 닮아서일까 싶었지만, 그도 아니었다. 정작 서주환에겐 이런 말을 꺼내지도 못했던 솔이었다. 그런데도 그 기분이 퍽 나쁘지 않아 자신을 보며 웃는 은겸을 보며 솔도 살짝 웃음을 지었다. 순간 앞으로에 대한 불안감과 몰아치는 감정에 취해 울다가 웃다가, 갑자기 뜬금없이 진지한 상담을 받질 않나 뒤늦게 부끄러움이 몰려왔다. 제정신이 아니었던 게 분명했다.
서로를 마주 보고 웃던 둘은 그 미묘하고 어색한 기류에 고개를 돌렸다. 솔도 얼굴에 열이 오르는 게 느껴져 손바닥으로 제 뺨을 꾹꾹 눌렀다. 눈물에 젖어 뺨이며 눈가며 온통 쓰라렸다. 그런 솔의 행동을 가만히 지켜보던 은겸은 노트북을 접어 구석에 치우고 솔의 옆으로 다가갔다.
“그래서 내가 뭘 도와주면 될까요? 친구가 되었으니까 말해 봐요.”
은겸의 질문에 솔은 손에 쥐고 있는 핸드폰 화면을 슬쩍 쳐다보았다. 너튜브 검색창에 ‘데이’까지 입력되어 있었다. 평소의 솔이라면 절대 말하지 않았겠지만, 어차피 이렇게 된 거, 그리고 어차피 본래의 세상도 아니니 불현듯 충동적인 생각이 들었다.
“어…. 음. 주말에 평가해야 해서 춤이랑 노래를 숙지해야 한대요.”
“주말 평가? 월말 평가 아니고요?”
“네. 데뷔조라. 컨셉이나 뭐 그런 구체적인 게 나올 때까지는 주말 평가를 한대요.”
“데뷔조였어요?”
“…네. 어제부터 시작했거든요.”
“뭘요? 연습생을요?”
“네.”
“전에 다른 곳에서 트레이닝 받았었어요?”
“아뇨. 처음이에요. 아, 근데 무용은 오래 했어요. 현대 무용, 발레, 한국 무용.”
“울 만했네요. 무서울 만했고. 내가 잘 알고 오래 준비해 온 일이어도 무서운데.”
“그런가요.”
“그럼요. 특히 데뷔조 때는 트레이너 선생님들 말을 엄청 무섭게 하시거든요. 다들 눈물 쏙 빼요.”
“그런 것보다는. 다른 애들한테 피해 주고 싶지는 않아요.”
예상치 못한 내용에 은겸은 질문을 쏟아 내었다. 트레이닝이라곤 전혀 거쳐 본 적 없는 사람이 데뷔조에 들어가 주말 평가라니. 오랜 시간 거쳐 평가질에 이골이 난 연습생들도 데뷔조에 들어가고 나면 멘탈이 터져 나갔다. 하나의 인격체가 아니라 상품을 만드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밖에 내놓았을 때 팔려야 하는 물건을 만들어야 하니 그 평가는 사람을 좀먹을 정도로 신랄해진다. 거기다 ‘어제부터’ 시작이라니. 믿고 의지할 멤버들 조차 없다는 뜻이었다. 은겸은 그제야 솔이 왜 친구가 없다고 말하는지 이해가 됐다. 친구? 오히려 적이 생기지 않는 게 다행이었다.
“그래서 평가 곡이 뭐예요?”
“어…. 그 잠시만요.”
솔은 은겸의 질문에 허겁지겁 손에 쥐고 있던 핸드폰 화면을 보여 주었다. 화면을 빤히 들여다본 은겸이 ‘데이?’ 하고 혼잣말하듯 중얼거리자 솔은 핸드폰 화면을 재차 확인하고 아차 탄성을 내뱉었다. 데이… 데이 그다음이 기억이 안 났다. 잠시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 솔은 ‘데이’ 다음에 붙는 말이 무엇이었는지 기억을 한참 더듬어 보았다.
이내 고민 끝에 그룹명이 번뜩 생각나자 ‘아!’ 하고 탄성을 내뱉었다. 얼빠진 제 행동에 솔은 얼굴을 붉히고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데이블락 선배님들? 핫 트릭이란 곡이요.”
솔의 기어들어 가는 대답을 들은 은겸의 얼굴이 요상했다. 눈썹을 두어 번 매만지더니 그 갈색의 결 좋은 눈썹을 찡끗 들어 올렸다. 솔은 그가 당황할 때마다 눈썹 언저리를 만지는 습관이 있다는 걸 찾아냈다. 사소한 행동이었지만 능숙하게 웃음을 짓는 그도 자신과 피차 다르지 않게 이 상황이 어색하다는 걸 알려 주어 조금 마음이 편안해졌다.
“솔 씨, 저 몰라요?”
무언가 할 말이 있는 듯, 한참을 망설인 끝에 은겸이 뱉은 말이었다. 솔은 조금만 더 고민했다간 그의 눈썹이 닳아 없어지진 않을까 헛생각을 했다. 은겸은 손가락으로 제 얼굴을 가리키며 고개를 좌우로 기웃거렸다.
“네?”
“제 입으로 이런 말 하기가 조금 민망하긴 한데. 저 정말 누군지 몰라요?”
“태은겸… 씨?”
“…친구 하기로 했는데 서로 씨, 씨 하는 거 좀 웃기네요.”
“전 스물네 살이에요.”
“저는 스무 살이요.”
“내가 형이네요. 그냥 편하게 형이라고 불러요. 저도 말 편하게 할게요.”
“네…. 형.”
“좋아.”
은겸이 만족스럽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형이라는 호칭이 퍽 어색했지만 의외로 술술 솔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자신을 바라보는 그의 표정이 너무도 온화해서 정말 딱 형답게 느껴졌다. 스물다섯의 솔에게는 없었던 그런 의지가 되는 형 말이었다. 의찬은 좋은 친구였지만 은겸과는 결이 달랐다. 아마도 지금 솔의 모습을 의찬이 보았다면 퍽 서운해 마음이 상할지도 몰랐다.
“그리고 정말 모르는 거 같으니까 다시 소개할게. 데이블락 리더 은겸이야.”
“아!”
“나 그래도 인기 좀 있는데, 본 적 없어?”
“제가 TV를 잘 안 봐서요.”
“그럴 수 있지. 내가 더 열심히 해야겠네.”
은겸은 정말 별일 아니라는 듯, 큰소리로 웃음을 터뜨렸다. 아이돌은커녕 최신 가요에 관심도 없던 솔이었다. 어지간히 떠서 전국에 온종일 그 노랫소리가 울려 퍼질 정도가 아니면 솔의 기억에 남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은겸은 게임 속 캐릭터였다. 현실에서 은겸의 그룹인 데이블락이 존재할 리 없으니 당연지사였다.
“아무튼, 우리 노래네. 다행이다! 그나마 도와줄 수 있는 거여서.”
“…그런데 할 일이 있으셔서 연습실 오신 거 아니었어요?”
“그냥 숨으러 온 거야. 작사 작업하고 있는데 좀 부끄럽기도 하고 잘 안 풀려서.”
“괜히 저 때문에 바쁜데 못하시는 거 아니에요? 역시 제가 비켜 드리는 편이….”
“아니야!! 어차피 안 풀려서 ‘데뷔 전의 나는 어땠었지’ 하고 감상적이 되어 보려고 온 거였거든.”
“안 도와주셔도 괜찮아요. 이미 많이 도와주셨어요.”
“아니, 아니야. 차라리 잘됐어. 내가 하고 싶어서 그래.”
은겸의 제안은 고마웠다. 혼자 막막하던 차에 원곡자가 선생이 되어 준다니 이보다 더 좋은 기회가 또 있을까 싶었지만, 솔은 선뜻 그의 도움을 수락하지 못했다. 단순히 기술이 모자라 춤을 추지 못하는 게 아니었으니 아무리 선생이 좋아도 소용이 없을 것 같아서였다. 어떻게 해야 할지 머릿속이 복잡했다.
솔은 손을 들어 눈가를 벅벅 문질렀다. 눈물은 이미 진작에 말라 이젠 오히려 눈가가 쓰라리고 뻑뻑했다. 죽이 되든 밥이 되든 혼자 감당하는 편이 여러모로 나을 듯싶어 솔은 은겸에게 건넬 거절의 말을 속으로 고르고 또 골랐다. 제 딴에는 제법 정중한 표현을 골라 입을 열려는 순간. 잠잠하던 퀘스트 알림 창이 그의 눈앞에 새롭게 떠올랐다.
<첫 주말 평가를 통과하자!>
연습생이 된 첫 주. 첫 주말 평가에서 B 등급 이상을 받으세요!
*데이블락 - 핫 트릭 안무 숙련도 0%
성공 시 안정의 포션 X2
실패 시 시스템 종료 (혹은 그에 상응하는 고통)
솔의 얼굴이 확 일그러졌다. 순간적으로 잦아들었던 감정이 확 북받쳐 오며 슬픔과 두려움보다는 짜증이 났다. 스스로를 추스를 시간도 없이 자꾸만 몰아붙이는 알림 창에 화가 들끓었다. 의미도 없는 반항으로 솔은 새빨갛게 충혈된 눈으로 알림 창을 노려보았다. 갑자기 대번 심각해진 솔의 표정이 각오를 다진 걸로 오해했는지 은겸이 활짝 웃으며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그러고는 솔에게 열혈 청춘 만화의 한 장면처럼 손을 내밀었다.
사라지지 않는 알림 창을 눈에 힘을 주고 노려보던 솔은 민트색 알림 창을 뚫고 불쑥 들어온 손바닥에 움찔거렸다. 주환을 닮아서일까, 그의 손을 잡는 데에 크게 거부감이 들지 않았다. 손의 주인과 손에 뚫려 버린 알림 창을 번갈아 쳐다본 솔은 이내 단념한 듯 은겸이 내민 손을 덥석 붙잡았다.
이 세계에선 어쨌든 은겸이 선배이니 뭐라도 도움이 되긴 되겠지. 사실 조금 전까지의 대화도 꽤 유익했다. 별 이야기도 아니었지만 실제로 은겸에게 그 속내를 조금 털어놓으니 마음이 한결 가벼웠기 때문이었다.
“일어나. 일단, 안무 숙지에 앞서 기본 동작부터 확인하자.”
솔이 제 손을 붙잡자 은겸은 그를 힘껏 끌어당겼다. 오래 쪼그려 앉아 다리가 아플 만도 한데, 솔은 가뿐하게 일어섰다. 원체 몸이 가볍고 날래, 그 별것 아닌 동작조차 꼭 안무의 하나같이 보였다. 그리고 다정하고 순둥하기만 해 보이던 은겸은 생각보다 엄한 선생이었다.
“이 곡 내가 센터야. 속성으로 알려 줄게. 센터 먹어 버리자.”
“그럴 필요까진 없는데요.”
“무슨 소리야. 선배님한테 직접 배우는 건데. 센터가 아니면 내가 창피해져.”
보통은 이런 말을 들으면 열심히 해야겠다는 의욕이 들 텐데 어쩐지 솔은 무기력함에 몸이 깔아짐을 느꼈다. 순간적으로 울컥해 그의 도움을 덥석 받아들인 게 이제 와 후회되었다. 함께 연습하다 보면 은겸은 필시 자신에게 질려 버릴 게 분명했다. 열심히 알려 주는 사람을 허무하게 만들 집중력을 보여 주고 그렇게 또 그의 인내심을 바닥낼 만한 행동을 반복할 것이었다.
이곳에 와서 처음 사귄 친구인데 결국 그렇게 잃을 거라 생각하니 입이 썼다. 다른 사람들처럼 자신을 답답해하고 한심해하겠지. 당연한 일이라 기분이 나쁘지도 않았다. 결국 내가 자초한 일이고 내 잘못인데 기분 나쁠 것이 뭐가 있을까. 그저 하필이면 은겸의 모습에 주환이 겹쳐 보여 더 씁쓸할 뿐이었다.
“무대에 서는 거, 춤추는 거 무섭다고 했지?”
“…네.”
“어느 정도야? 춤출 생각만 떠올려도 그러는 정도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