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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애를 뽑고 싶어-19화 (19/192)

#19

자신을 빤히 보며 눈물만 하염없이 흘리는 솔에게 남자는 바닥에 두었던 노트북을 주워 흔들어 보였다. 언제부터 저 자리에 있었는지, 미처 발견하지 못했던 노트북이 그 자리에 있었다.

그의 행동에 솔은 손등으로 거칠게 눈물을 닦아 냈다. 눈물에 짓무른 눈가와 뺨이 거친 손짓에 쓰라렸지만 늦게나마 눈물을 감춰 보려고 더욱더 거칠게 문질렀다. 그와 눈이 마주친 순간에는 주환이 너무 그리운 나머지 환각이라도 보이는 것인가 싶었는데 다시 찬찬히 뜯어보니 다른 점이 이모저모 있었다. 솔은 그제야 눈앞의 그가 서주환이 아니라 자신이 그토록 뽑고자 번복했던 ‘은겸’이라는 걸 깨달았다.

은겸은 주환과 아주 미묘하게 달랐다. 주환의 목소리가 더 낮은 편이었고 어조는 훨씬 거칠었다. 발레를 오래 한 주환은 다리를 늘 팔자로 움직였다. 걸 때도 늘 팔자였으며 하물며 가만히 서 있을 때도 솔처럼 발뒤꿈치를 서로 붙이고 벌리는 1번 자세를 무의식적으로 취하고는 했었다.

주환의 눈매가 눈앞의 은겸보다 조금 더 처졌고 자세히 보면 아랫눈썹 사이에 작은 점이 있었다. 무엇보다 분위기가 달랐다. 서주환은 조금 사람이 가벼워 보이고 특유의 우유부단한 느낌이 있었다. 눈앞의 남자는 주환을 퍽 많이 닮았지만, 그보단 훨씬 더 밝고 반짝거리는 느낌이었다.

“밖에서 다 끝날 때까지 기다릴까 했는데….”

그가 주환이 아님이 확실시되자 솔은 뒤늦게 등을 돌려 얼굴을 더욱 벅벅 문질렀다. 터질 듯 열이 오른 눈꺼풀을 손가락으로 꾹 누르며 자꾸만 쏟아지려 하는 눈물을 참아 보려고 안간힘을 썼다. 뒤늦게 감정을 추스르고 부끄러워하는 솔을 보며 은겸은 뒷머리를 긁적거렸다.

사실 연습실 문 앞에서 누군가 울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챈 은겸이었지만, 복도에서 마주친 멤버들이 왜 안 들어가냐고 묻기에 하는 수 없이 들어왔다. 그가 머뭇거리면 필시 다들 왜 그러냐며 문을 벌컥벌컥 열어 볼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은겸 딴에는 여럿에게 우는 모습을 들키는 것보단 나을 것 같아 한 행동이었는데 막상 일이 이렇게 되자 후회가 되었다. 차라리 변명으로 둘러대고 나중에 다시 올걸. 때늦은 후회는 무색했다. 터져 버린 둑을 두 손으로 막을 수가 없었다. 애써 감정을 갈무리해 보려 하지만 추슬러지지 않았다. 자신에게서 등을 돌린 솔의 어깨가 계속해서 크게 들썩이자 은겸은 구석진 자리, 모서리에 앉아 노트북을 켰다.

“새로 왔어요? 못 보던 얼굴이라서.”

“…네.”

“그렇구나. 연습생 생활 많이 힘들죠?”

은겸은 솔에게 관심을 두지 않은 듯, 노트북 화면을 보며 말을 이어 나갔다. 연습생들 얼굴을 어느 정도 꿰고 있는 은겸이었지만, 그의 기억 속에 솔의 얼굴은 어디에도 없었다. 그렇다고 솔의 얼굴이 쉽게 잊을 만한 얼굴이냐 하면 절대 아니었다. 한번 보면 절대 잊을 수 없는 외모였기에 은겸은 그가 갓 연습생이 된 새내기라고 추론했다. 데뷔 5년 차가 된 은겸, 연습생으로서 5년은 천년 같았지만, 데뷔 후의 5년은 찰나 같았다.

은겸은 데뷔 초부터 CF 스타로 화제성을 몰고 다닌 멤버로 이전에는 이름조차 들어 본 적 없었던 소규모 기획사였던 YC 엔터를 적어도 이름 정도는 들어 본 중형 기획사로, 뿐만 아니라 소속 팀인 <데이블락>을 견인한 소년 가장이었다. 사실상 YC 엔터의 모든 아이돌 연습생들은 제2의 은겸을 꿈꾸고 이곳에 찾아온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어린 나이에 데뷔했음에도 성숙하고 뛰어났던 외모, 가창력과 무엇보다 빛이 나는 인성까지 연습생들의 롤 모델인 은겸은 딴에 선배라고 홀로 울고 있는 솔에게 그럴싸한 말을 해 주고 싶었다.

“나도 연습생 때 많이 울었어요. 지금도 너무 힘들면 눈물 나더라고요.”

“…….”

“잘하고 싶은데 몸은 안 따라 주고 다른 연습생들은 다 너무 잘하고. 맨날 속상해서 혼자 울었어요. 그냥 이 일 자체가 사람을 눈물이 많아지게 만드는 것 같아요.”

단순히 아무도 찾지 않는, 버려진 공간이나 마찬가지인 이곳에서 혼자 애처롭게 울고 있는 솔이 안타까워 뱉은 동정의 말은 아니었다. 실제로 모든 이들이 그러하듯 퍽 힘든 시간을 보냈었다. 사람들 앞에 서야 하는 꿈을 가진 사람이 자존감이 바닥 쳐 사람들을 피해 몰래 숨어서 연습을 했었다.

갓 연습생이 된 솔이 한때 자신과 같은 고민으로 힘들어한다고 오해한 은겸은 진심을 다해 말했다. 그저 무시하고 지나쳐도 될 관계인데 솔을 보고 있자니 퍽 슬퍼 그럴 수가 없었다. 사실 오늘 은겸도 딱 그때와 같은 기분으로 오늘 6번 연습실을 찾았다. 남들보다 이른 솔로 활동을 준비하는 은겸은 불안감을 쉬이 떨칠 수가 없어 오늘은 여기서 시간을 보내려 했다. 그래서일까, 자신의 모습과 겹쳐 보이는 솔이 더더욱 안타까웠다.

“나 신경 쓰지 말고 편하게 써요. 나도 여기에 숨으러 온 거거든요. 여기 오면 은근 마음이 편해서….”

애써 어색함을 참고 말을 꺼냈는데도 솔이 침묵하자 은겸은 다시 노트북에 코를 박았다. 역시 괜한 참견이었나 홀로 민망함을 삼키고 노트북 메모장에 까맣게 채워진 글자에 시선을 고정시켰다. 자신의, 혼자만의 이야기를 담고 싶어 시작한 작사인데 마음처럼 순탄히 풀리지 않아 몇 주째 골머리였다. 솔의 훌쩍이는 소리를 애써 무시하며 집중을 하려던 은겸에게 울음을 가득 머금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춤을 추는 게 무서울 땐 어떻게 해야 할까요?”

“어떤 점이 무서운 건데요?”

“잘 모르겠어요. 무대에 서는 거? 무대에서 실수하는 거, 동작에 실패하는 거, 넘어지거나 다치는 거.”

“주제넘을 수 있겠지만 그런 상태라면 멈추고 잠시 쉬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쉴 수가 없다면요?”

“음, 어렵네요. 슬프지만 현실적인 대답을 원한다면…. 참고 해야겠죠.”

울음을 가득 머금어 떨리는 솔의 목소리에 은겸은 얼굴을 살짝 찌푸렸다. 어렵다는 말이 거짓은 아닌지 밤 갈색의 눈썹이 아래로 축 처졌다. 솔의 물음에 은겸이 제일 먼저 떠올린 건 무대 공포증이었다. 무대 공포증은 병이다.

물론 혼자 힘으로 극복하는 이들도 있었지만, 은겸은 개인적으로 단순하게 부딪히며 극복하는 방법보다는 치료를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입장이었다. 그의 머리가, 마음이 해 줄 수 있는 진심 어린 조언은 ‘만약 그런 감정들을 겪고 있다면 지금 당장, 이곳을 나가서 정신과에 진료 예약을 하세요.’이었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지금 당장은 여기서 쉬면 실패하는 것 같겠지만, 멀리 봤을 때 절대 그렇지 않거든요. 그렇게 억지로 하다가는 마음이 크게 다칠 거예요.”

“그럴 때는요?”

“네?”

“마음이 크게 다쳤을 때요. 그때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저는 친구들에게 말해요. ‘나 이렇게 힘들어서 죽을 거 같으니까 너희가 도와줘.’ 이렇게.”

“…….”

이어지는 은겸의 대답에 솔은 침묵했다. 왜 그에게 이런 질문을 하고 있는지 솔 자신도 알 수가 없었다. 솔은 고개를 돌려 은겸을 바라보았다. 주환과 닮았지만, 주환이 아니기 때문에 그래서 할 수 있는 걸까. 정작 상황이 이렇게 되기 전까지 솔은 의찬에게도 주환에게도 춤이 무섭다는 말은 한 번도 한 적이 없었다. 그 말을 내뱉는 순간 자신을 구성하는 모든 것이 무너져 아무것도 아닌 초라한 인간이 될 것 같았다.

솔이 무대 위에서 얼마나 빛이 났는지, 얼마나 촉망받는지를 알고 있던 모든 사람이 그에게 무대로 돌아오라 말할 때도 솔은 그저 입을 다물었다. 왜 포기하냐는 물음에 애꿎은 변명만 했다. ‘부모님도 안 계시는데 돈이 많이 들잖아요.’, ‘저 다리 다쳐서 이제 못 해요.’.

솔도 제 다리가 멀쩡하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스스로가 나약한 인간이란 걸 숨기고 싶어 아무에게도 진실을 말하지 못했다. 춤을 출 때마다 더 이상 세상에 온전한 내 편이 없다는 걸 알게 되어 무섭다고. 그날, 사고 현장에서 느꼈던 고통이 되새김질되어 두렵다고 말하지 못했다. 나약한 자신에게 실망할까 봐.

“친구에게 그렇게 말하면 싫어하지 않을까요. 자기 일로도 힘든데.”

“이름이 뭐예요?

“솔이요. 성 솔.”

“나는 태은겸이에요. 솔 씨는 정말 그렇게 생각해서, 친구들에게 말 못 하는 건가요?”

자신을 바라보는 솔의 얼굴에서 무언가를 느낀 건지 은겸이 걱정을 가득 담은 강아지 같은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서글서글하게 빛나는 눈동자가 정말 그렇게 생각하냐고 순수함으로 솔을 추궁하는 거 같아 솔은 고개를 저었다.

“…아뇨. ‘나’라는 사람한테 질리고 실망할까 봐, 싫어할까 봐서요.”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친구도 아닌 타인이었지만, 상황이 이렇게 된 이상 어쩌면 긴 시간을 함께하게 될 태오나 다른 멤버들에겐 감히 이런 말을 할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제 치부를 모조리 드러내는 기분. 이해를 바라지도 않았다. 아니 오히려 이해하고 자신을 가여워했다면, 그게 더 끔찍했을 것이다.

“근데 친구라면 싫어하지 않을 거예요. 오히려 힘든 이야기를 솔직하게 말해 줘서 좋아할지도 몰라요. 나를 이렇게 의지해 주는구나…. 하고.”

“정말 그럴까요.”

“우리 일, 겉으로 보면 화려하고 즐거워 보일 거예요. 꿈을 이뤘으니 행복할 거라고 생각하지만, 사실 그보다 힘듦이 더 크게 느껴질 거예요. 지금도 힘들다고 느끼겠지만, 앞으로가 더 힘들 거예요. 너무 화려해서 스스로 말하지 않으면 아무도 모를 거예요.”

“…….”

은겸은 솔을 보며 슬쩍 웃어 보였다. 커다란 강아지처럼 자신을 보며 웃는 은겸의 모습에서 솔은 주환이 겹쳐 보였다. 자신의 이런 행동이 괜한 자존심이라는 걸 솔도 알고 있다. 부드럽지만 힘이 있는 어조의 은겸의 목소리에는 힘이 담겨 있었다. 그의 따스한 말에 솔은 주환에게도 진작 이렇게 말했었다면 좋았을 텐데 하는 생각을 했다. 그랬다면 뭐든지 지금보다 더 낫지 않았을까 싶었다. 입 안이 썼다.

“매번 홀로 모든 걸 이겨 낼 수는 없어요. 사실 그래서 매니저도 있는 거고 회사도 있는 거죠. 함께하는 멤버들도 생길 거고. 저는 그랬어요. 멤버들이 좋은 친구가 되어 주었죠.”

“여기엔…. 내 친구가 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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