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먼저 말을 꺼낸 건 태오였다. 태오의 말이 딱 마침 솔이 원하던 답이었는지 모처럼 솔은 고맙다는 인사를 했다. 태오는 턱짓으로 복도 맨 끝에 있는 6번 방을 가리켰다. 맨 끝, 혼자 연습하기에도 동선이 잘 나오지 않는 자투리 연습실이었다. 댄스 플로어가 망가진 데다가 스피커도 고장 나 음악이 드문드문 끊겨 아무도 찾지 않는 연습실이었다.
일반 연습생들이 사용하기에도 충분한 동선이 나오지 않아 어지간하면 늘 비어 있는 곳이었다. 연습하게 썩 좋은 환경은 아니었지만 다른 곳이 다 차 있어 지금은 솔 혼자 복도나 계단에서 연습하는 것보단 나을 듯싶었다. 태오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배려였다.
솔이 아이돌에 진심이 아니더라도 태오는 적어도 그가 하려 하는 의지만 보여 준다면 최대한 편의를 봐줄 생각이었다. 솔이 공기계 핸드폰을 손에 꼭 쥐고 6번 연습실로 향하는 걸 확인하고 나서야 태오는 연습에 한창인 멤버들과 만날 수 있었다.
“왜 혼자 와요. 형? 그 형 도망갔어요?”
“혼자 조금 연습하고 싶대.”
“어디서요.”
“6번 연습실 쓰라고 했어.”
연습실에 들어가자마자 땀을 뻘뻘 흘린 채로 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득용과 가람이 말을 걸어 왔다. 약간 모가 난 어조로 대뜸 솔이 도망갔냐 묻는 득용의 모습에 태오는 쓴웃음을 지었다. 불만이 있어도 별 티를 내지 않는 가람과 달리 막내인 득용은 사실 솔 외에도 그간 데뷔조를 거쳐 간 모든 사람과 사이가 썩 좋지 않았다.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었지만 아무래도 나이가 나이다 보니 다른 멤버들보다도 더 상처를 받았고 감정을 숨기지를 못했다.
“어, 거기 점심에 누가 쓰는 거 같던데.”
“누구?”
“성광 형이었나…. 그랬던 거 같은데.”
“아닐걸.”
“누구였지?”
“아무튼, 누가 썼어.”
“점심 이후에라고?”
“응.”
득용의 말에 가람도 본 적이 있다는 듯 고개를 끄덕거렸다. 썩 반갑지 않은 이름의 등장에 태오는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일반 연습생인 성광은 벌써 연습생 생활만 10년 차였다. 나이도 아슬아슬했고 어느 쪽으로든 갑자기 데뷔조가 된 솔과 마주쳐서 좋을 것이 없었다. 괜히 또 이상한 해코지당해서 그만두겠다고 해 버리면 태오만 곤란했다.
솔 다음에 또 어떤 사람이 올지 미지수였기 때문이다. 그간 데뷔조의 충원은 무조건 외부에서였다. 태오가 몇 번을 건의하고 상담을 해 보았지만 소용이 없었다. 솔이 떠나고 또다시 아무것도 할 줄 모르는 안하무인이 오는 거보단 그래도 솔이 나을 듯싶었다.
적어도 다른 놈들처럼 멤버들과 부딪히는 일은 없을 거 같았다. 냉정하게 말하자면 만만했다. 태오는 ‘성광이 형한테 물어볼까?’ 하며 묻는 가람에게 손사래를 쳤다. 점심 식사 챙길 때 함께 말해 두면 될 거란 판단에서였다.
“태오 왔어? 솔이는?”
“지호 형.”
“네 표정 보니까 알 만하다. 이번에도 쉽지 않은 거지?”
“아니에요.”
“괜찮아. 난 기대도 안 했어.”
연습실에 딸린 보컬 트레이닝 룸의 문이 열리고 지호가 빼꼼 고개를 내밀었다. 방음재로 사방이 도배된 독방이나 다름없는 좁은 방에 지호는 살다시피 했다. 성량이 워낙에 좋아 트레이닝 룸의 문을 아무리 걸어 잠가도 늘 밖까지 그의 노랫소리가 들려오곤 했다. 지호의 말에 태오는 머쓱해져 얼굴을 문질렀다. 그렇게 티가 났나 싶었다. 요즘 들어 표정 관리가 잘 안 되는 듯했다. 손사래를 치며 악보를 들고 걸어 나오는 지호의 모습에 태오는 입이 썼다. 다들 그간의 일들로 넌더리가 난 듯했다.
“진짜 아니에요. 평가 곡 들어 본 적 없다고 해서 일단 숙지부터 하라고 제가 권했어요.”
“그래, 우리 리더가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2시간 전까지만 오라 했으니까 일단 우리는 안무 다 따고 어느 정도 맞춰 두는 거로 해요.”
“그럼 일단 제일 뒤에 세우는 거로 해서 대열 맞춰?”
“응. 그러고 포인트가 될 만한 건 미리 체크해 두고 속성으로 알려 주자.”
태오는 가방을 내려놓고 겉옷을 벗었다. 신발 끈을 다시 단단히 묶고 어깨와 발목을 풀며 연습실 중앙으로 걸어갔다. 연습실 한구석에 놓인 줄넘기가 눈에 들어와 태오는 나중에 솔에게 알려 줄 것 목록에 줄넘기를 추가했다. 오늘은 지각이라 생략했지만 본래 10시에 연습실에 오면 다 같이 줄넘기를 하며 노래를 부른다. 숨이 차는 안무를 소화하면서 동시에 노래도 소화하기 위한 훈련이었다.
단순 무식하지만, 효과는 좋았다. 스텝을 가볍게 만들어 주었고 힘을 실어 점프하면서도 안정적인 음을 유지하는 데 도움이 되어 구태여 아침이 아니더라도 멤버 전원이 짬짬이 시간이 날 때마다 하고 있었다.
“일단 한번 맞춰 보고 배치 조정하자.”
“네엡.”
“솔이는 여기? 아니다 가람이 옆으로?”
“아니, 차라리 제가 뒤로 가는 게 낫겠어요. 생각해 보니까 맨 뒤면 도입부에 움직임이 너무 커서 버거울 거 같아요.”
태오는 어젯밤에 미리 숙지해 두었던 <핫 트릭>의 안무를 떠올리며 임시 위치를 조정했다. 대열의 맨 뒤에 선 멤버가 도입부에서 거의 무대 반절을 이동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무대의 반을 빠르게 돌아 이동하고 바로 과격한 움직임이 시작되는데 그 일련의 동작들이 너무 급해 노래의 주인인 데이블락도 종종 미끄러지거나 넘어지는 사고가 났었다.
태오가 멤버들을 끌어모으자 바닥에 철퍼덕 주저앉아 있던 득용이 대답을 길게 늘이며 엉금엉금 기어 왔다. 지호가 얼른 일어나라며 득용의 엉덩이 찰싹 때리자 그제야 제대로 거울을 보고 섰다. 잘 짜인 팀처럼 금세 대형이 맞춰지고 기다렸다는 듯이 가람이 음악을 틀었다. 쿵쿵 연습실 전체를 울리는 음악 소리 아래로 신발 고무 밑창이 바닥에 찍찍 끌리는 소리가 계속 이어졌다.
복도 맨 끝 방, 6번 연습실의 문을 연 솔은 왜 태오가 아무도 쓰지 않는 방이라 알려 줬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연습실에 첫발을 딱 내디딘 순간부터 부서질 듯 끼긱거리는 소리를 내는 댄스 플로어가 영 불안했다.
뒤틀린 마루가 이곳저곳 턱처럼 튀어나와 조금만 방심하면 발이 걸려 나뒹굴기에 십상인 모양새였다. 애초에 애매하게 남은 자투리 공간을 활용한 것인지 폭이 너무 좁아 동선도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구태여 전면이 거울일 필요도 없을 만큼 좁았다.
분명 자리하고 있지만 아무도 찾지 않는 공간. 그 좁고 망가진 공간에 들어서자 오히려 솔은 더없이 편안함을 느꼈다. 그래도 한때는 많은 연습생이 거쳐 갔는지, 나무 표면에는 여러 잔흠집들이 남아있었다. 가야 할 길이 구만리라는 걸, 해야 할 일이 많다는 걸 알고 있지만, 몸이 무거웠다.
솔은 연습실 한가운데에 쪼그려 앉아 거울에 비친 자신을 바라보았다. 머리카락 아래로 언뜻언뜻 비치는 창백한 얼굴이 꼴 보기 싫었다. 사고 이후로 수술을 받고 제대로 된 재활을 하지 않았다. 집에만 처박혀 있었었고 제대로 먹지도 않았다. 아직 어린 나이라 완벽히 영글지는 않았지만 조밀한 근육으로 짜였던 아름다운 몸은 진즉 사라졌다. 대신 그 자리에는 피죽도 못 얻어먹은 것 같은 빼빼 마른 몸이 남아 솔의 눈살을 더욱 찌푸리게 했다.
조금 전까지는 괜찮았는데. 혼자가 되자 사무치는 외로움이 몰려왔다. 집에 가고 싶었다. 서주환에게 전화해 집에 먹을 것이 없다고 징징거리고 싶었고 백의찬에게 하소연하고 싶었다.
꾹꾹 눌러 담았던 태오에게 머리를 얻어맞은 것에 대한 서러움도 몰려왔다. 고의가 아니라고 사과도 받았지만 그래도 서러운 건 서러운 거였다. 삭막하기 짝이 없고 벼랑에 몰린 마음엔 산들바람조차 시렸다. 뚝뚝. 스쳐 간 노력의 흔적으로 어지러운 마루 위에 물방울이 떨어졌다. 갑자기 마른하늘에 소나기가 쏟아지듯 눈물이 마구 쏟아져 내렸다. 손등으로 꾸역꾸역 틀어막아 보아도 막을 수가 없었다.
왜 자신에게 이런 일이 벌어졌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누군가의 눈엔 엉망인 삶이었겠지만 솔은 저 자신이 나름 잘 버티고 있다고 생각했다. 간신히 잘 버티며 살고 있는데 왜 그런 자신을 제멋대로 끌고 와 이렇게 괴롭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솔은 모자의 챙을 두 손으로 잡아 바닥에 패대기를 쳤다. 검은 모자가 연습실 바닥에 나동그라졌다. 격한 움직임에 흐트러진 머리카락에 얼굴이 반쯤 가려지자 결국 솔은 그대로 눈물을 펑펑 쏟아 냈다.
벌받은 게 분명하다. 백의찬을 너무 귀찮게 해서, 감히 서주환에게 그런 마음을 품어서. 행복한 결혼식을 올리던 주환을 보며 속으로 저주를 퍼부어서. 마음에 들지 않는 캐릭터라고 자꾸 리셋해 버려서. 어쩌면 열여덟 살 그날 괜히 여행 같은 걸 가서. 하필이면 그날이 생일이라서.
그렇게 솔은 머리가 띵해질 때까지 모든 걸 내려놓고 울었다. 어찌나 울었는지 얼굴이 쓰라리고 눈가에 열이 올랐다. 더이상 흘릴 눈물도 없을 만큼 쥐어짜고 나서야 간신히 진정한 솔은 연신 훌쩍이며 핸드폰 공기계를 손에 꼭 쥐었다. 회사까지 걸어오며 태오가 중요한 이야기나 꼭 해야 할 것들을 이야기해 열심히 받아 적었는데, 정작 메모가 적힌 핸드폰이 압수당했으니 무용지물이었다.
쓸데없는 눈물 바람을 하느라 애꿎은 시간만 잡아먹었다. 솔은 눈가를 훔치고 핸드폰을 열어 데이블락의 <핫 트릭>을 찾아보았다.
“다 운 거예요?”
갑자기 들려온 목소리 솔의 눈과 입이 활짝 열렸다. 그저 놀라고 당황한 정도를 넘어선 경악과 충격이란 묘사가 더 잘 어울리는 표정이었다. 눈물에 짓물러 새빨개진 눈으로 목소리를 쫓았다. 연습실 앞에 누군가가 태연하게 앉아 있었다. 창백하게 질려 상대를 바라본 솔은 다시 한번 재차 놀라야 했다. 조금 전까지 보고 싶다고 목 놓아 울었던 서주환이 그곳에 있었다.
기억이 아니라 추억으로 남아 있는 밤색 머리카락에 부드러운 인상. 서글서글하게 누구에게나 잘 웃어 주던 제 친구이자 짝사랑 상대가 자신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그 따스한 눈동자와 눈이 마주치는 순간. 솔은 겨우 그쳤던 울음을 다시 터뜨릴 수밖에 없었다. 조금 전까지도 그가 사무치도록 보고 싶었으니까. 다 울었냐고 묻는 그 익숙한 목소리에 솔은 또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설마 지금 내가 울린 건가?”
문을 등지고 일어난 남자는 솔을 보며 제 눈썹 뼈를 꾹 눌렀다. 어색함과 멋쩍음에서 기인한 행동이었지만 난처한 기색을 표현하기도 하는 행동이었다. 솔은 서럽게도 눈물을 펑펑 흘렸다. 차라리 아이처럼 목을 놓아 대성통곡을 터뜨리면 덜 서러워 보일 텐데, 아무 말도 없이 눈물만 뚝뚝 흘리는 게 곱절은 처연했다.
“방해했으면 미안해요. 제가 여기서 준비하던 게 있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