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최애를 뽑고 싶어-17화 (17/192)

#17

솔이 제 머리에 얹어진 모자 끝자락을 잡았다. 뭔가 싶어 태오를 바라보니, 그는 골목 어귀 먼 곳을 바라보고 서 있었다. 익숙한 그 모습을 어디서 봤다 싶었더니 강가람이 겹쳐 보였다.

어젯밤, 가람도 정확히 이 자리에서 저 골목을 바라보고 있었다. 솔이 모자를 벗으려 하자 태오가 그의 손을 저지하려 팔을 뻗었다. 서로의 손이 닿기도 전에 태오는 제 손을 거둬들였다. 욕실 앞에서 있었던 일 때문에 선뜻 손을 대기가 저어되기도 했고 솔이 했던 말이 신경이 쓰였다. 그의 말대로 신경 쓰지 않고 싶었지만, 그간 멤버들을 챙기는 게 너무 습관이 되어 버린 탓일까. 버릇처럼 또 솔을 챙겨 버렸다. 그런데 그 행동에 돌아온 말은 영 퉁명스러웠다.

“걱정 마요. 그쪽이 때렸다곤 안 할 테니까.”

“멍 때문이 아니라…! 됐어요. 내일부터는 시간 확실하게 지키세요.”

“말없이 도망치진 않을 테니까 다음부턴 기다리지 말고 그냥 먼저 가세요.”

태오의 말에 솔은 그가 준 모자를 푹 당겨쓰며 속에도 없는 말을 내뱉었다. 태오가 자신을 기다리지 않았다면? 연습실을 찾아가고 말고 할 것도 없이 아마도 계속 누워 있었을 것이었다. 그리고 지금보다 더 상황이 엉망이 되어 화난 사람들을 마주하게 될 게 훤했다. 보통 이런 결과가 솔이 그간 늘 겪어 왔던 패턴이었다. 그나마 솔을 신경 써 주는 백의찬과 서주환이 있었지만, 그들도 솔의 일거수일투족을 관리해 줄 수는 없었다.

“…그것 때문에 기다린 거 아녜요. 일단 임시긴 하지만 제가 리더이고. 어제도 말했지만 어디든 꼭 둘씩 같이 다니라고 했어요.”

“아…. 그랬었지. 참.”

기억은 잘 나지 않았지만, 솔은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서 또 생각나지 않는다고 되물었다간 태오의 성질만 박박 긁어 한바탕 할 것 같아서였다. 눈치껏 말을 흘렸는데 태오는 솔의 그 미묘한 행동에서 무언가를 눈치챘는지, 말을 덧붙였다. 골목길을 한참 쳐다보던 태오는 모자를 눌러쓴 솔을 흘깃 보고 다시 걸음을 옮겼다.

“연습실이 없어서 비상계단 같은 데서 연습하는 애들도 있어요. 그쪽이야 크게 상관없는 일일 수 있겠지만, 다른 사람들은 여기에 인생이 달렸을 수도 있다고요.

“네? 네…. 네.”

“그쪽이 딱히 이 일에 목표와 열의가 있진 않다는 거 잘 알았어요. 그런데 어쨌든 하기로 계약서에 사인한 거잖아요. 성인이면 제대로 책임을 져요. 당신 지금 자리가 누군가한테는 절박할 수도 있다는 말이에요.”

앞서 걸으면서 태오가 덧붙이는 말에 솔은 고개를 끄덕였다. 어떤 느낌인지 알 것 같았다. 솔도 무용할 적에 안무를 받지 못해 거울 앞에 다닥다닥 쪼그려 앉아 무대를 준비하는 자신을 쳐다보는 애들을 본 적 있었다. 태오가 지금 어떤 모습을 바라고 솔에게 이런 이야기를 꺼내는지 머리로는 이해가 됐다. 자신보다 더 열심히 하며 간절하기까지 한 사람들을 농락하지 말라고.

어떤 이유에서든 그 자리에 앉았으니 적어도 열심히 하는 시늉이라도 하라고 경고하고 있는 것이었다. 잘 알고 있다. 솔에게도 한때 욕심이 있었던 때가 있으니까. 누군가는 이런 솔을 보면 한심하다고 혀를 찰 것이었다. 물론 그 누군가에 태오도 포함될 것이다. 도지호도, 디케이도, 강가람도. 점점 또 혼자만의 생각에 잠겨 현실과 멀어지는 솔을 태오의 목소리가 다시 현실로 끌어왔다.

“이번 주 평가 곡 말인데요. 데이블락 선배님들의 <핫 트릭>이에요. 지금 가면 애들은 먼저 안무 숙지하고 있을 텐데….”

솔에게 당부의 말을 건네던 태오는 텅 빈 백지 같은 표정의 솔을 보며 말꼬리를 흐렸다. 단순히 생각이 없는 게 아니라 솔의 맹한 얼굴에선 이 분야에 문외한인 티가 났다.

YC 엔터에서 배출한 아이돌 중 가장 좋은 성적을 거두고 있는 선배 그룹인 ‘데이블락’. 사실상 YC 엔터를 벌어먹이고 있는 명실상부한 성공한 아이돌 그룹이었다. 대한민국 사람이라면 거리를 오며 가며 한 번쯤은 들어 봤을 만큼 인지도가 있었으며 그중 <핫 트릭>은 데뷔곡이자 하드코어 한 난이도의 군무로 정평이 나 있었다.

“……들어 본 적 없어요?”

“어…. 네.”

어떻게 모를 수가 있지? 태오는 의문스러웠지만, 솔의 대답은 아주 당당했다.

“어지간하면 아이돌 그룹의 노래들은 숙지하고 있는 게 좋아요. 특히나 회사 선배 그룹이라면 더더욱.”

“찾아서 들어 볼게요.”

“…그래요. 본격적으로 데뷔 일정 잡히기 전까진 주마다 곡 지정해서 연습하고 평가받을 거예요.”

“네.”

“보컬, 댄스 나눠서 평가하는데 그쪽은 아무래도 두 곡은 힘들죠?”

태오가 묻자 솔은 거의 반사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간의 경험을 토대로 예상하건대 솔은 안무 하나 따라가기도 체력이 벅찰 거였다. 같은 아이돌 그룹에 대한 숙지는 여러모로 중요했다. 특히 그것이 회사의 선배 그룹일 때는 더 말할 것도 없었다. 단순히 연습을 용이하게 하기 위해서뿐만 아니라 앞으로의 활동에서도 필요한 일이었다.

걸으면서 핸드폰에 ‘데이블락’을 쳐 보는 솔을 보며 태오는 속으로 시간을 가늠해 보았다. 레슨 시간을 뺀 연습 시간에 틈틈이 솔을 봐줘야 할 것이었다.

본인 실력과 멤버의 실력,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아야 하는 태오는 시작도 전에 지친 기분이었다. 최근에 머리가 복잡해질 일이 너무 많았다. 촉새처럼 나불댄 매니저 영호의 일도 있었고 골이 아팠다. 태오도 가람이 못지않게 묵묵히 제 일만 하는 성격이었는데,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고 얼떨결에 떠맡은 리더 자리가 그의 입을 쉴 새 없이 열리게 했다. 어깨가 무거웠다.

“첫 주이기도 하니까, 곡을 하나로 통일하는 게 그나마 나을 거예요.”

태오는 그 외에도 자잘하게 솔에게 조심해야 할 것이나 신경 써서 챙겨야 할 것들을 말해 주었다. 태오가 하나씩 알려 줄 때마다 솔은 핸드폰 메모장에 태오의 말을 받아 적었다. 그 모습에 태오는 미간을 찌푸렸다. 어차피 회사에 도착하면 압수당할 핸드폰이었다. 저기에 메모한다고 무슨 소용이 있나, 말 한마디 얹으려다 괜한 잔소리꾼이 되는 것 같아 잠시 고민했다.

“그 핸드폰 영호 형에게 제출해야 하는 거 알죠?”

“그랬었나요…?”

결국 내뱉은 태오의 말에 솔은 메모가 빼곡한 핸드폰을 쥐고 ‘끙’하는 앓는 소리를 내었다. 노란 메모장 앱에 까만 글씨가 빼곡하게 채워졌지만, 솔의 메모는 무용지물이 되었다. 아니나 다를까, 연습실에 도착하자마자 입구에서 매니저인 영호가 다짜고짜 손을 내밀었다. 익숙하다는 듯 태오는 핸드폰을 내밀었지만, 솔은 그 앞에서 제 핸드폰을 쥐고 한참을 들여다보았다. 조금 전 작성했던 메모를 다시 한번 숙지하기 위해서였다. 솔은 제 아둔한 머리통을 원망했다.

“태오야, 솔아.”

“영호 형. 공기계 하나 받을 수 있을까요?”

“하나 더?”

“네. 성솔…. 안무 숙지도 그렇고 여러모로 필요할 거 같아서요.”

“그래, 갖다 줄게.”

매니저 영호는 두 사람에게 하고 싶은 잔소리가 있는 듯했지만, 태오가 말을 끊고 다른 부탁을 하자 구태여 지각을 지적하거나 탓하지 않았다.

영호는 특히나 요즘처럼 중심을 잡고 있는 태오가 힘들 때 뭐든 괜히 더 긁어 부스럼 하기 전에 1절만 하고 끝내는 게 좋다고 판단한 듯했다. 더불어 태오의 요청에도 별말 없이 수긍했다. 잠시 뒤, 멤버들의 핸드폰을 들고 갔던 매니저가 공기계를 하나 들고 돌아왔다. 태오는 솔에게 와이파이만 연결되어 있는 핸드폰을 내밀었다. 어쩐지 솔은 대충 태오라는 인물에 대해 알 것 같았다.

자신이 싫고 마음에 들지 않아도 개인적인 감정은 접어 두고 공동체를 위해 책임을 다하는 인물. 태오는 그 나이 또래에 비해 어른스럽고 비교적 현실적인 인물이었다. 적어도 허황한 망상을 하거나 솔처럼 회피하기보다는 어떻게든 상황을 수습하고 해결하려 드는 타입이었다.

그가 개인적인 감정을 앞세워 말이 통하지 않는 사람은 아니라는 것이 파악되자 솔은 숙소에서 연습실까지 걸어오며 고민했던 것을 입 밖으로 내뱉어 보았다. 태오라면 화를 내거나 무시하기보다는 일단은 도와주리라 판단되었다. 물론, 이후에 그 행동이 초래한 결과가 좋지 않을 때는 더 엄격한 잣대를 기울일 것이 분명했다.

“그, 있잖아요. 저기, 태오…. 라고 불러도 돼요?”

“왜요?”

“혹시. 혼자 따로 연습해도 될까요?”

“혼자서요?”

솔은 조심스레 운을 뗐다. 사실 말하는 솔도 확신이 없었다. 혼자 연습한다 해서 해결책이 생길지 의문스럽기는 솔, 자신도 마찬가지였다. 그 결여된 자신감 때문일까 태오의 짙은 눈썹이 움찔거리자 솔은 바닥으로 쪼그라질 듯이 움츠러들었다. 하지만 어제 겪었던 일을 두 번 겪고 싶지는 않았다. 다 같이 모여 있다 불현듯 또 이상한 퀘스트가 떠 버리면 어쩐단 말인가.

“솔로 가수 데뷔하는 거 아니에요.”

그간 체계적인 연습을 거쳤을 멤버들 사이에서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 같은 특성을 가진 채 함께할 수는 없었다. 어제야 목숨이 걸려 있어 얼떨결에 넘겼지만, 그때를 떠올리면 지금도 손바닥에 식은땀이 났다.

어제와 똑같은 상황이 닥쳐 온다면 이번에는 그 결과를 장담할 수 없었다. 어쩌면 솔은 모두의 앞에서 쪼그려 엉엉 울다가 그렇게 시스템 종료를 맞이하게 될지도 몰랐다. 어제의 고통과 떨림, 두려움이 자꾸만 되새김질되었다. 솔은 어떻게서든 그 감각을 떨쳐 내고 다시 춤을 출 수 있도록 홀로 해결 방안을 찾아내야 했다.

“그건 아는데요. 안무 숙지할 동안만. 다른 멤버하고 진도 차이가 날 거 아녜요.”

“…알겠어요. 대신 오후 레슨 2시간 전까지는 합류해 줘요.”

“알았어요.”

바짝 얼은 솔의 표정과 달리 태오는 생각보다 쉬이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디테일을 누군가 봐주는 편이 더 좋겠지만 솔이 춤에 기본기가 없는 것도 아니고 본인이 원치 않는다는데 처음부터 부딪힐 필요는 없을 것 같다는 판단에서 태오는 수긍했다.

솔이 합류하고 첫 레슨이니 뭘 해도 좋은 평이 나오기는 힘든 것이 분명했고 하루아침에 해결될 문제도 아니라 판단되었다. 태오가 고개를 끄덕여 보였지만, 솔은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서서 그를 바라보았다. 더 할 말이 있어 보이지만 입을 열지 않는 솔의 모습에 태오는 잠시 뜸을 들였다.

“저기 아무도 안 쓰는 곳이니까 써도 될 거예요.”

“고마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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