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최애를 뽑고 싶어-15화 (15/192)
  • #15

    태오의 한쪽 눈썹이 산처럼 치솟았다. 분명 태오는 어제 솔에게 10시부터 연습 시작이니 시간 맞춰 기상해 달라고 전달했었다. 아침 7시에 지호와 함께 운동을 다녀오고 8시 30분쯤부터 알람을 꺼 버리고 다시 잠든 가람과 득용을 깨워 아침밥까지 먹였다. 네 남자가 그 소란을 떠는 와중에도 성솔은 일어날 줄을 몰랐다.

    씻고 나온 가람이 방문을 열고 들어가 솔을 깨울지 말지 고민하기에 그 총대를 태오가 멨다. 가람과 득용을 깨워 챙기는 일에 만성이 되었기에 비교적 수월할 거로 생각했었다. 하지만 오산이었다.

    성솔은 가람이나 득용이 따위는 비교도 되지 않았다. 적어도 그 둘은 알람이 울리면 일어나서 끄는 시늉이라도 했다. 솔은 아예 들리지도 않는다는 듯이 꼼짝도 하지 않았는데 처음에는 타이르듯 깨우던 태오가 그를 붙잡고 마구잡이로 흔들어도 눈을 뜨지 않았다. 그 모습을 본 지호가 살아는 있는 거냐 물어 태오는 그의 코 밑에 손가락까지 대 보았다. 흔들 때마다 펄럭이는 머리카락 아래로 드러난 얼굴이 퍽 창백해 지호의 말이 그럴싸하게 들렸기 때문이었다.

    지난 몇 년간 태오가 가람의 이름을 부른 횟수보다 오늘 아침에 솔의 이름을 부른 횟수가 더 많을 지경이었다. 솔의 잠귀는 지독하게도 어두웠다. 멤버 모두의 시간을 뺏길 수는 없어 셋을 먼저 보내고 태오는 과격하다 싶을 정도로 솔을 흔들어 댔다. 그렇게 간신히 1시간여 만에 깨워 놨더니 눈을 뜨자마자 한다는 말이 ‘왜요?’였다.

    “어제 제가 10시까진 연습실에 가야 한다고 말했잖습니까.”

    “그랬었나….”

    솔은 얼빠진 사람처럼, 별 대수롭지 않은 일이라는 듯 고양이처럼 몸을 늘리며 대답했다. 솔의 태평한 행동에 태오는 제 안에 눈곱만큼 있었던 기대감까지 사라짐을 느꼈다. 늦게 일어났음에 대한 미안함도, 늦게나마 서두르려는 의지도 솔에게는 아무것도 없었다.

    멍한 눈으로 그저 눈만 끔뻑거리며 태오를 바라볼 뿐이었다. 점점 딱딱하게 굳는 태오의 얼굴에 솔은 무언가 괴리감을 느끼며 제 기억을 되짚어 보았다. 어제까지는 그래도 정신이 또렷했던 것 같은데, 오늘은 영 희뿌연 안개 속에 갇힌 듯 모든 것이 모호했다. 태오 말을 듣고 있자니 그가 그런 말을 했던 것도 같고 아닌 것도 같았다. 기억이 가물가물했다.

    “…일어나요.”

    “음….”

    “일어나서 20분 안으로 씻고 나와요.”

    솔은 흘긋 태오를 바라보았다. 태오가 왜 화를 내고 있는지 머리로는 이해하고 있었다. 가물거리는 기억으로 짐작하건대 그가 분명 어제 몇 시까지 일어나야 한다고 언질을 주었을 것이다. 계속 깨우는데도 일어나지 않고 약속 시간도 늦었으며 이렇게 일어나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일어나지 않고 있으니 사실 한 대 갈겨 주고 싶을 게 훤했다. 근데 이 사실을 알고 있음과 실행하는 것은 별개였다.

    머리로는 어떻게 해야 한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그럴 의지가 없었다. 무력감이 온몸을 가득 채워 무게를 더했다. 손가락 하나조차도 무거워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이대로 이불속에 둘러싸여 바다 밑바닥으로 가라앉을 것만 같았다.

    침대 끄트머리에 걸터앉아 있던 태오가 일어났다. 느른하게 누워 있는 손을 향해 팔을 뻗은 태오는 억세게 그의 손목을 잡아채 일으켜 세웠다. 얼떨결에 침대에서 끌려 나온 솔은 어지럼증을 느끼며 휘청거렸다. 솔은 본래도 몸을 갑자기 움직이는 것을 썩 좋아하지 않았다. 무용할 때도 카디건과 토시로 몸을 돌돌 말고 뜨끈해질 때까지 녹이고 나서야 움직이곤 했다. 단순히 움직이기 싫어서란 이유도 있었지만, 부상을 방지하기 위해서이기도 했다.

    태오의 손에 의해 억지로 일으켜 세워진 솔은 잠시 비틀거리다가 중심을 되찾고 바로 섰다. 태오는 그런 그를 내려다보며 사나운 얼굴로 화장실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지금 당장 씻고 나와요.”

    화를 돋게 하는 솔을 보고 있자니 마구잡이로 모진 말들을 퍼붓고 싶었지만, 태오는 이를 꽉 물었다. 맹하게 서 있는 얼굴이 잠이 덜 깬 듯. 무슨 말을 해도 소용없을 것 같아 보였다. 화도 받아쳐 줄 사람한테 내야 하는 거다. 일방적으로 퍼붓기밖에 되지 않으면 사실 화를 내는 의미도 없었다. 그저 홀로 속만 타들어 갈 뿐이지.

    솔은 넋이 나간 사람처럼 서 있다가 태오가 가리킨 화장실로 느릿느릿 발을 옮겼다. 솔이 화장실에 들어가고 물소리가 들리자 태오는 그제야 핸드폰을 확인했다. 허락되지 않은 SNS와 메신저는 모조리 삭제해 버리고 가족과 기획사 관계자들의 연락처만 남아 있는 핸드폰에 모처럼 메시지가 쌓여 있었다.

    김득용 : 형, 아직이에요?

    김득용 : 그냥 두고 와요.

    마지막 메시지가 온 시간은 9시 59분. 문 앞에서 매니저인 영호가 핸드폰을 빨리 내놓으라 닦달했을 시간이었다. 머리가 지끈거렸다. 그간 데뷔조를 거쳐 간 놈들 대부분 다 문제가 있었다. 노래의 ‘노’ 자도 춤의 ‘ㅊ’도 모르는 사람이 대다수였고 개중에는 다짜고짜 욕을 하거나 무시하는 놈들도 있었다. 처음엔 어떻게든 데뷔만을 바라보며 자신이 가운데서 잘하면 될 거로 생각했다. 하지만 아무리 애를 써 봐도 상대가 할 생각이 없으면 무소용이었다.

    어떻게든 수습해 이끌어 가려 마음먹고 솔의 실력을 확인했을 때 태오는 안도했다. 조금 어색한 부분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곧 쓰러질 것처럼 위태로워 보이는 솔의 동작 하나하나엔 어딘가 힘이 숨겨져 있었다. 거센 바람에 꺾일 듯 넘어가다가도 이내 꼿꼿하게 일어서는 그런 힘. 부러지지 않는 나뭇가지 같은 팔과 다리가 만들어 내는 곡선은 유려했다. 태오는 그런 그의 선이 꽤 마음에 들었었다.

    강조해야 할 악센트를 조금 다듬고 군무를 맞추는 연습을 반복하다 보면 솔은 춤을 제 포지션으로 가져갈 수 있을 것이었다. 어쩌면 후에는 메인 댄서의 자리를 내줘야 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었다.

    노래야 가람과 지호가 있으니 두드러지게 못 하는 것만 아니라면 차츰 실력을 키우며 파트도 늘려 가면 됐다. 이전에 합류했던 사람들에 비하자면 월등히 나았다. 그렇게 나름의 마음을 정리하며 눈을 감은 게 고작 몇 시간 전이었다. 태오의 계획과 의욕이 무색해지는 솔의 반응에 일과가 시작되기도 전에 힘이 쭉 빠져 버렸다. 태오는 굳게 닫힌 욕실 문을 보며 매니저 영호에게 늦은 연락을 했다. 사정이 어찌 되었든 지각은 지각이었다.

    태오는 영호의 잔소리를 한 귀로 흘리며 협탁 위에 올려진 까만 비닐봉지를 바라보았다. 자신이 사 왔던 파스와 감기약, 포장지는 손도 대지 않은 듯 그대로였다. 태오는 고개를 돌려 굳게 닫힌 욕실 문을 쳐다보았다.

    물소리는 끊임없이 나고 있는데 20분이 지났음에도 솔은 나올 생각을 않았다. 김득용 같은 놈이었으면 10분이 무엇이냐 양치만 하고 기어 나와 다했다고 할 것이었다. 당장 문을 열라고 소리치고 싶은 조급증을 꾹꾹 누르며 태오는 침착함을 유지하려 애썼다. YC 엔터의 연습생이 된 이후로 단 한 번의 지각도 한 적 없던 태오였다. 본래도 약속 시간에 철저한 편이었지만, 특히나 아이돌이라면 더욱더 시간에 철저해야 한다는 게 태오의 생각이었다. 연습 시간 1분 1초가 금이었다.

    데뷔조에 들기 전 일반 연습생일 때는 가장 사운드가 좋은 스피커가 있는 연습실 한 번 써 보려고 새벽부터 복도에 앉아 있기도 했었다. 연습을 끝낸 선배님들이 나오면 청소하는 10분이라도 제대로 된 음향이 있는 곳에서 춤을 춰 보고 싶어서. 지금은 그때와 달리 연습실이 재정비되어 그런 걱정은 사라졌지만 태오는 늘 그때의 절박함을 가지고 있었다.

    결국 참다못한 태오가 욕실 문 앞에 서서 주먹을 들어 올려 두드리려는 순간, 물소리가 끊기고 문이 열렸다. 갑작스레 열린 문에 태오의 손이 갈 곳을 잃었다.

    세차게 때릴 곳을 잃은 태오의 주먹이 그대로 솔의 머리를 쥐어박았다. 물을 뒤집어쓴 솔의 젖은 머리카락이 정수리를 내려치는 힘에 찰랑거렸다. 검은 머리칼 끝에 매달려 있던 물방울들이 사방으로 튀었다. 느닷없이 머리를 맞은 솔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두 손으로 제 정수리를 감싸며 비명을 질렀다. 솔의 머리를 생각보다 힘껏 때려 버린 태오 또한 당황하기는 매한가지였다.

    눈을 뜨자마자 20분 안에 씻고 나오란 으름장을 듣긴 했으나 솔은 미적거렸다. 인정하는 부분이었다. 화장실에 들어가 멍한 머리로 거울을 보며 한참을 서 있었다. 곳곳에 놓인 남성용 세면용품들이 낯선 생활감을 만들어 내 솔은 그 이질감에 평소보다도 더 덜떨어지게 굴었다.

    어물쩍, 씻는 척 물을 틀어 놓고 물이 수챗구멍으로 쏟아지는 모습을 가만히 바라만 보고 있었다. 머리로는 밖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태오가 지금쯤 짜증이 났을 거란 걸 인지하고 있었지만, 몸은 굼떴다. 익숙하지 않은 욕실에 물을 끈다는 것이 수전을 잘못 돌려 차가운 물세례를 받고 나서야 솔은 번쩍 정신을 차렸다. 그제야 부랴부랴 씻고 다급히 나왔더니 다짜고짜 머리를 얻어맞은 것이었다.

    솔은 제 머리를 부여잡고 당황한 눈동자로 태오를 올려다보았다. 아무리 자신이 미적거리고 잘못했다 한들 폭력은 선을 넘은 행동이었다.

    서러운 것도 서러운 것이었지만 무엇보다 너무 아팠다. 시스템 종료로 인해 화장실을 냅다 구르며 머리를 부딪혔던 솔은 이마가 퍼렇다 못해 새카맣게 멍이 들어 있었다.

    퉁퉁 부어 혹이 나 있었고 눈썹을 찡그리기만 해도 아릿한 통증이 올라올 정도였는데, 그 위로 태오의 주먹이 닿자 비명이 절로 나왔다. ‘악!’ 하는 단말마의 비명에 태오 또한 자신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쳤다.

    “미안…!”

    당황한 나머지 말을 미처 마무리 짓지도 못해 본의 아니게 반말을 찍 날려 버렸다. 무표정이 깨지고 태오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얼굴이 되었다.

    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