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그런데 성솔은 왜 이렇게 안 나와요? 씻는 거 맞아요?”
“어….? 그러게.”
“아까, 저쪽 화장실 들어갔는데. 노크해 볼까?”
“몸 상태 별로 안 좋아 보이던데.”
“그랬어?”
“네. 손도 차고 많이 떨더라고요.”
“얼마나 봤다고 그런 거까지 신경 쓰냐. 윤태오! 하여간 오지랖.”
문득 이상함을 느낀 태오가 솔을 찾자 지호가 되물었다. 세 사람의 발걸음 소리가 솔을 찾는 듯 부산해졌다. 방문을 두들기는 노크 소리와 멀찍이 득용의 ‘저 있어요!’ 하는 목소리도 들렸다. 그렇게 까칠하게 굴어 놓고 와중에도 솔의 상태를 확인한 태오의 발언에 지호가 혀를 찼다.
드레스 룸에 웅크리고 앉아 세 사람이 저를 찾는 소리를 들은 솔은 지금이라도 방을 나서야 할지 고민에 빠졌다. 어쩐지 일어나 방을 나서기가 민망해 솔은 몸을 더욱 웅크려 상자 뒤에 숨어들었다. 꼼질꼼질 절대 작지 않은 키를 가진 몸을 웅크리는 솔의 머리 위로 서늘함이 와닿았다. 싸늘한 느낌에 조심스레 고개를 들어 보니 방문이 빼꼼 열리고 그 사이로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태오와 눈이 마주쳤다. 태오와 눈이 마주치자 솔은 어색하게 웃었다.
“……뭐 해요? 나와요.”
“어어. 네….”
조금 전까지 벽 너머로 들리던 다정한 형 같은 목소리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날이 선 싸늘한 목소리가 머리 위에서 울려 퍼졌다. 민망함에 얼굴이 새빨갛게 익은 솔은 태오가 턱짓하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솔이 쭈뼛거리며 태오를 따라 드레스 룸에서 나오자 지호가 거기서 뭐 했냐고 물었다. 솔은 붉어진 얼굴을 손등으로 가렸다.
“그냥, 짐 정리 좀….”
“…….”
얼버무리는 솔의 말에 태오는 아무 말도 없었다. 누가 봐도 짐 정리하던 모양새는 아니었지만 별말 않는 그를 보며 솔은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늦게 돌아온 태오는 어쩐지 조금 지쳐 보였다.
“연습실에서도 얘기했다시피 10 to 10, 늦어도 9시 30분에는 숙소에서 나가야 하니까 시간 맞춰서 일어나 주세요. 개인적인 일이 있거나 몸이 안 좋거나 하면 꼭 영호 형이나 정 어려우면 멤버 누구한테든 꼭 말해 줘요.”
“네. 그럴게요.”
“그리고 다시 한번 얘기하는데 어디든 절대 혼자 다니지 말아요. 편의점에 물 한 병을 사러 가더라도 같이 다녀요.”
태오의 말에 옆에 선 지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솔은 아빠 말을 잘 듣는 어린아이처럼 고개를 연신 끄덕였다. 잘 듣고 있는 듯한 태도와 달리 솔은 사실 태오의 말에 영 집중하지 못했다. 늘 그렇듯 되는 대로 흘려들으며 그저 듣는 척 시늉할 뿐이었다. 말소리가 한 귀로 흘러 들어왔다 한 귀로 흘러 나갔다. 혼자서는 움직이지 말라는 태오의 당부에 솔은 ‘도망칠까 봐 그러나.’ 하며 혼자 헛생각을 했다.
“당분간은 계속 주말 평가로 일정이 돌아갈 거예요. 보통 저나 지호 형이 알아서 챙기겠지만, 어려운 거, 모르겠는 거, 도움 필요한 거 있으면 가람이한테 물어봐요.”
윤태오 선생님의 알림 사항 전달이 끝나자 지호와 가람이 제 볼일이 끝났다는 듯, 어지럽혀져 있는 식탁 위를 치우기 시작했다. 달그락거리는 그릇을 치우는 소리와 설거지를 하는 물소리. 이런 일상적인 소음을 듣는 것이 퍽 오랜만이라 묘한 이질감이 느껴졌다. 혼자 있을 적엔 사실 제대로 먹지도 않았고 더러운 이야기지만 씻지도 않았다. 그냥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소음이라곤 창밖에서 들리는 소리나 하루도 꺼지는 날 없이 돌아가는 TV 소리뿐이었었다.
“원래 2인 1실인데 사정이 있어서 저희 넷이 같이 방 쓰고 있어요. 제 방이 제일 깨끗하니까. 그 방 편한 침대 아무거나 쓰시면 돼요.”
“네. 고맙습니다.”
“지호 형. 파스.”
“거기 있다.”
손에 세제 거품이 묻은 지호가 턱짓으로 검은 비닐봉지를 가리켰다. 식탁 위를 정리하던 가람이 봉투를 집어 던지자 태오가 날렵하게 잡아챘다. 사소한 행동 하나인데도 세 사람의 연계가 무척 능숙하고 자연스러웠다.
태오가 건넨 비닐봉지를 받아 든 솔은 생각보다 묵직한 무게에 안을 슬쩍 확인했다. 좋지 않았던 제 상태를 알아차렸다는 게 빈말이 아니었는지 파스 외에도 종합 감기약으로 보이는 포장지가 더 들어 있었다. 생각지 못한 물건에 솔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물론 수북한 앞머리에 가려 제대로 보이지 않았지만.
“당장엔 괜찮아도 근육이 놀라서 내일 통증이 있을 수 있어요. 그리고 아까 보니 몸이 안 좋은 거 같아서 혹시나 해서 샀어요.”
“어…. 고맙습니다. 근데 정말 괜찮아요.”
“시간 관리도 중요하지만 컨디션 관리도 중요해요.”
솔은 고개를 들어 태오를 바라보았다. 봉투 속에 담긴 물건을 직접 샀다는 것이 아이러니하게 느껴질 정도로 태오는 무표정했다. 짙은 눈썹에 강한 눈매의 태오는 입을 굳게 다물면 퍽 냉정하고 무척 단호해 보였다. 그런 외모와 달리 의외로 사람을 세심하게 챙기는 듯했다.
“그…. 연락 없이 안 와서 미안, 미안합니다. 제가 좀 아프고 정신이 없어서 연락을 못 했어요. 오늘도 무례했다면 미안합니다.”
봉투 안을 한참 들여다보던 솔은 태오를 비롯한 멤버들에게 고개를 꾸벅 숙여 보였다. 네 사람이 나누던 말을 듣고 생각해 보니 그들은 솔의 사정을 알 리가 없었고, 새삼 처지를 바꿔 생각해 보니 자신이 퍽 얄미웠을 게 이해가 갔다. 다섯 번이나 반복된 그 일련의 과정들이 그들을 더욱 예민하고 날카롭게 만들었을 것이다. 연습실에서 했던 자신의 발언들. 안 좋았던 기억을 되풀이하기 딱 좋았을 것이다.
사실 그간은 이런 비슷한 오해와 일이 있어도, 뒷말이 나와도, 구태여 거짓말을 하고 싶지도 않았고 설명하기도 싫어 솔은 모르쇠로 일관해 왔었다. 관계를 개선한 의지 자체가 없었었다. 사실상 솔이 스스로를 방치한 것과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래선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낯선 세상에 자신은 혼자였고 이전처럼 방구석에서만 처박혀 살 수도 없었다. 좋든 싫든 얌전히 죽음을 맞이할 게 아니라면 이 네 사람과 부딪혀야 하는데 그간 해 온 대로 포기하고 방치한다면 결국 힘들어지는 건 자신이 될 것이었다. 아니, 결국에는 모두가 힘들어질 것이었다. 솔이 먼저 사과하자 태오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쩐지 조금은 잘 지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근거 없는 희망이 솔의 가슴에 샘솟았다.
태오의 말대로 방은 조금 좁았지만, 무척 깨끗했다. 깨끗한 정도를 떠나 누구도 사용한 적이 없는 듯, 조금의 사용감도 남아 있지 않아 냉기마저 돌 지경이었다. 이층 침대의 시트는 마치 새것처럼 주름 하나 없이 빳빳하게 깔려 있었다. 솔은 태오에게서 받은 비닐봉지를 대충 협탁 위에 올려놓고 침대 속으로 꼬물꼬물 기어들어 갔다. 깨끗하고 보송한 침구가 주는 느낌이 서늘하고 기분이 좋았다.
생활의 흔적조차 없이 깔끔하다 못해 삭막한 방. 혼자만의 공간에 홀로 남자 긴장이 풀어지고 눈꺼풀이 가물거렸다.
전쟁터처럼 스트레스란 이름의 포탄이 날아다니는 하루를 보낸 솔은 눕자마자 금방 잠자리에 들 수 있을 것만 같았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번듯해 보였던 숙소는 방음이 쓰레기였다. 네 사람이야 서로 옹기종기 모여 있으니 느끼지 못하는듯했지만, 솔은 아니었다.
마치 수학여행에라도 온 듯이 어둑한 방 안에서 소리를 낮추고 두런두런 나누는 목소리와 무엇이 그리도 웃긴지 천진난만하게 웃는 소리가 이따금 들려왔다. 중간중간 노랫소리가 들리기도 했다. 작은방에 덩그러니 놓인 이층 침대에 누워 솔은 천장을 바라보았다. 위를 갑갑하게 막고 있는 나무 합판이 시야 한가득이었다.
방 너머로 들리는 웃음소리가 끊기면 그 묘한 정적이 솔이 홀로 누워 있는 방 안을 더욱 공허하게 만들었다. 분명 푹신한 이불에 파묻혀 누워 있는데도 몸이 편치 않아 솔은 엎치락뒤치락했다. 이윽고 벽 너머로 태오의 ‘어서 자.’ 하는 낮은 목소리를 마지막으로 솔에게도 어둑한 수마가 덮쳐들었다.
꿈을 꿨다.
말도 안 되게 게임 속에 빨려 들어가 강제로 목숨을 걸고 아이돌을 해야 한다는 개꿈이었다. 캄캄한 무대 위에 홀로 서자 이상하리만치 관객석이 또렷하게 보였다. 익숙한 얼굴을 찾아 관객석을 두리번거렸지만, 그 어디에서도 낯익은 눈동자는 찾을 수 없었다. 겁에 질려 허우적거리던 솔은 누군가가 제 어깨를 강하게 움켜잡는 것을 느꼈다.
“일어나요.”
어둠 속에서 자신을 쳐다보는 수백 쌍의 눈동자가 솔을 겁에 질리게 했다. 누군가 목을 콱 조르는 것처럼 숨이 제대로 쉬어지지 않았다. 가슴을 크게 부풀려 호흡해 보려 안간힘을 썼지만, 공회전을 하는 바퀴처럼 헛돌았다. 붙잡힌 어깨가 아렸고 어쩐지 멀리서 들리던 목소리가 점점 현실처럼 또렷해졌다.
“성솔, 이봐요. 일어나요!”
“헉!”
솔은 몸을 벌떡 일으켰다. 갑작스러운 움직임으로 눈앞이 점멸하고 세상이 어그러지는 듯한 어지럼증이 일었다. 검게 깜빡거리는 시야에 짙은 눈썹의 잘생긴 얼굴이 들어왔다. 조금 일그러진 미간은 기분이 퍽 좋아 보이지는 않았다. 상황 판단이 쉬이 되지 않아 멍청하게 숨을 고르며 그 얼굴을 멍하니 쳐다보자, 수려한 얼굴 위에 민트색 알림 창이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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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이 아니었구나….”
“…….”
눈앞에 떠오른 보상 창을 치워 버린 솔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다시 침대에 몸을 뉘었다. 퉁퉁 부어 제대로 떠지지 않는 눈을 애써 뜰 생각이 없는 솔은 오히려 눈을 더 꽉 내리눌러 감았다. 썩 좋지 않은 꿈자리에 등이 식은땀으로 축축했다. 불편한 자세를 바로잡고 다시 잠들 준비를 끝낸 솔은 어쩐지 따가운 얼굴에 슬그머니 한쪽 눈을 떠 보았다.
침대맡에 걸터앉은 미남이 싸늘한 얼굴로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다. 솔은 자신을 쳐다보는 남자와 눈싸움했다. 눈싸움은 얼마 가지 않아 솔의 패배로 끝이 났다. 눈꺼풀이 무겁기도 했지만, 눈을 뜨려 하면 할수록 이마가 욱신거리고 머리가 깨질 듯 아파져 와서였다. 막 꿈에서 깬 솔은 잠시 머리가 돌아가지 않아 태오의 얼굴을 보며 눈만 끔뻑거렸다.
“눈 떴으면 이제 그만 일어나요. 10시 반입니다.”
“왜요?”
“……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