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최애를 뽑고 싶어-13화 (13/192)

#13

“그 표정 뭔지 다 알거든요. 대표님이 예명 ‘랩 스타’ 하라고 했다고요. 랩 스타보단 DK가 낫잖아요.”

“그건 그래. 가람아, 솔아. 밥부터 먹자.”

“저는 별생각이 없어서…. 안 먹어도 괜찮을 거 같아요. 대신 샤워나 좀 해도 될까요?”

“…그래. 너 편할 대로 해.”

솔은 지금 밥이 넘어갈 것 같지 않았다. 진이 빠져 버린 몸은 다리가 풀려 버리기 일보 직전이었고 어색하기 짝이 없는 분위기에 밥을 먹어 봤자 제대로 먹힐 리도 없었다. 자신을 빤히 쳐다보는 지호의 시선에 솔은 어색하게 웃어 보이며 가람이 알려 준 드레스 룸의 문을 열었다.

남의 집에 들어온 기분이라 행동거지 하나하나가 어색하고 조심스러웠다. 오와 열을 맞춰 딱딱 구분되어 빼곡하게 들어선 옷가지들은 무척 깔끔하게 잘 정돈되어 있었다. 정돈한 사람의 성격이 티가 났다. 방에 들어가자마자 문 옆에 가지런히 세워 둔 박스에는 ‘성솔’이라는 이름이 매직으로 반듯하게 적혀 있었다. 솔은 제 짐으로 보이는 상자를 열어 보았다.

짐이라고 말하기도 무색하게 겨울옷이라도 부르기 난감한 얇은 옷 몇 벌이 고작이었다. 솔은 스무 살의 자신은 참으로 궁상맞게도 살았었구나 싶었다. 뭐 딱히 스물다섯에도 그리 크게 달라지지는 않았지만. 갈아입을 옷가지와 세면도구를 챙겨 비척비척 거실을 가로지르니 전투적으로 닭가슴살을 뜯고 있는 디케이, 득용이 보였다.

욕실에 들어갈 때와 달리 샤워를 끝낸 솔은 도둑고양이처럼 살금살금 드레스 룸으로 기어들어 갔다. 뜨거운 물에 몸이 노곤하게 녹아 흐느적거렸다. 갈아입은 옷을 상자에 다시 넣어 놓은 솔은 핸드폰을 꺼내 메모장을 켰다. 벽에 등을 기대고 박스 옆에 쪼그려 앉은 그는 메모장에 오늘 있었던 일들을 차곡차곡 적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기록해 보라던 상담사 선생님의 말씀에 코웃음을 쳤었는데, 정말 필요한 상황에 부닥치니 알아서 적고 있었다. 상담 선생님이 보면 퍽 좋아할 모습이었다.

튜토리얼 퀘스트가 끝났다. 분명 일전에 튜토리얼 퀘스트 진행 하는 동안에는 ‘머릿속의 지우개’ 특성이 활성화가 되지 않는다는 메시지가 나왔었다. 그리고 솔은 연습실에서 튜토리얼 퀘스트를 끝냈다. 그 말은 즉 앞으로는 그의 정신머리 없는 기억력이 본래로 돌아간다는 뜻이었다.

솔은 혹시나 하는 마음에 메모장에 멤버들의 이름부터 오늘 알게 된 정보들을 차곡차곡 정리했다. 나이, 포지션을 비롯한 사소한 것 하나하나, 가람이 알려 준 토막 정보들도 대충 이해할 수 있을 정도로 작성해 두었다. 기억이 날아가면 아무짝에 쓸모가 없겠지만 그래도 아무것도 안 할 수는 없었다. 적어도 아침에 일어나서 매니저 영호에게 핸드폰을 내기 전, 한 번쯤은 메모장을 확인할 가능성이 있지 않나 싶었다.

상자에 기대어 한참 핸드폰을 두드리는데 두런두런 말소리가 들려왔다. 태오가 숙소로 돌아온 듯했다. 딱히 엿들으려는 것은 아니었지만, 벽에 기대고 있다 보니 네 사람의 목소리가 어렴풋이 들려왔다.

“왔어?”

“성솔은요?”

“씻고 있을걸.”

“여기 파스요. 이따가 형이 한번 봐 줘요.”

“태오 형, 잘 다녀왔어요?”

비닐봉지가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쪼그려 앉아 벽에 귀를 대고 있던 솔은 네 사람의 대화를 듣지 않으려 했지만 절로 귀가 기울여졌다. 어쩐지 풀이 죽은 듯한 득용의 목소리는 솔의 호기심을 더욱 자극했다.

“형. 아침에 그 이야기요…. 진짜 그만둘 거 아니죠…?”

벽 너머로 들려온 득용의 목소리에 솔의 눈이 동그래졌다. 고작 오늘 처음 만난 사람이지만 자신이 본 태오는 이 일에 그 누구보다 진심처럼 보였다. 연습하던 모습만 봐도 그러했고 자신에게 했던 발언들도 마찬가지였다. 의외의 전개에 솔은 벽에 바짝 귀를 붙였다.

“김득용!”

지호의 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소리만 듣고 있자니 네 사람의 표정과 분위기를 알 수 없어 조금 답답했다. 하지만 목소리만으로도 장난처럼 가벼이 말을 내뱉는 상황이 아님은 확실히 느껴졌다.

“괜찮아요. 형…. 미안하다. 내가 괜히 걱정하게 했네. 가람이 너도, 지호 형도요. 미안해요.”

“네 사정 뻔히 아는데 뭐. 득용이도 안타까워서 저래. 솔직히 네가 누구보다 열심히 했잖아.”

“미안해. 근데 걱정하지 마. 영호 형이 괜한 얘기를 해서. 괜히 분위기 이상하게 만들어서 미안해요.”

“혀엉….”

“괜찮아. 나 이번이 진짜 마지막이라고 생각하고 더 열심히 해 보려고.”

“…태오야.”

저음인 가람의 목소리가 더 낮게 물먹은 솜마냥 축 늘어졌다. 벽 너머에서 벌어지는 일인데 초상집처럼 어두워진 분위기가 솔에게까지 느껴졌다.

숙소까지 오며 가람이 했던 말도 있고 태오가 예민하게 날이 섰다고 느껴졌던 것이 마냥 솔의 탓만은 아닌듯했다. 솔은 다리를 한껏 끌어모아 상자 옆에 몸을 웅크렸다. 추리 영화 속 숨어 있는 도망자 같은 모양새였다. 거실에서 한창 진지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으니 함부로 방을 나설 수도 없었다. 상황이 일단락될 때까지 드레스 룸에 가만히 앉아 있는 것이 상책이었다.

“미안하다. 지장 없도록 신경 쓸게. 그건 그거고 다들….”

“응?”

“네, 형!”

“다들 마음은 이해하는데 그래도 이렇게 됐으니까 성솔하고 잘해 봐요. 우리.”

“그렇지만, 저 사람도 좀 이상해요. 형….”

“성솔이 어떻든, 우린 그냥 연습생이고 선택권은 없어. 득용아. 그냥 해야 하는 거야. 여태까지 그래 왔잖아.”

“그래서 계속 이 상태잖아요. 벌써 몇 번째예요.”

“그래, 지친 거 이해해. 영호 형이랑 내 얘기도 있고, 낮에 내가 태도를 잘못해서 다들 휩쓸렸던 거 같아. 미안.”

벽 너머로 들리는 윤태오의 목소리가 생각보다 부드러웠다. 날이 섰었던 첫 만남과 달리 그는 멤버들에게 수더분하게 사과했다. 볼멘소리 하는 득용을 굵직하고 성숙한 목소리가 다정하면서도 조금은 엄하게 타일렀다. 생각지 못한 태오의 발언에 솔은 머리를 긁적였다. 태오의 프로필에 쓰여 있었던 ‘리더’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단편적인 모습이었지만 맏형인 도지호를 두고 태오가 리더가 된 이유를 알 것도 같았다.

“태오 형 오늘 사과만 몇 번째예요. 사과 좀 그만해요.”

“그래, 윤태오. 사과 좀 그만해. 너만 그랬어? 나도 피차 마찬가지였어. 걔 표정 보니 별로 하고 싶어 하는 것 같지도 않고.”

이어지는 지호의 목소리에 솔은 손가락으로 제 양 뺨을 꾹꾹 눌렀다. 생각 없이 실실 쪼개고 있기도 했지만 별로 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는 것도 사실이었다. 제 입으로 그렇게 말하지 않았던가. 스스로를 돌이켜 보며 솔은 쓴웃음을 지었다. 사고 이후로 솔을 늘 따라다니는 꼬리표 같은 지적들이었다. 약속에 늦어도 사과하지 않고 별로 신경 쓰는 것 같지도 않은 태도. 속사정을 모르는 이라면 충분히 기분 나쁠 일이었고 솔의 이미지를 실추시킬 만한 것이었다. 그렇게 한둘 멀어지다 보니 속사정을 알고 이해해 주는 주환과 의찬만 곁에 남게 되었었다.

‘그렇다고 처음 보는 사람 붙잡고 내 사정을 줄줄 읊을 수는 없잖아…. 아니, 태오를 비롯한 멤버들이 사람이긴 한 걸까?’

솔은 불현듯 그런 생각이 들었다. 분명 그들은 게임 캐릭터였다. 이렇게 벽 너머에서 숨 쉬고 대화하고 나름의 고민을 하고 있었지만, 솔이 아는 한 게임 캐릭터였다. 저들을 게임 캐릭터로 대해야 할지 사람으로 대해야 할지 혼란스러웠다. 솔이 느닷없이 심각한 고민을 하는 사이, 태오는 잠시 침묵 끝에 제 생각을 정리했다.

“……열심이면 좋겠지만, 안 그래도 상관없어요. 따라와만 준다면 그걸로 충분해요. 그래도 춤은 금방 맞춰 갈 수 있을 거 같아요.”

“몸도 가볍고 춤 선도 좋더라. 표정은 영 아니었지만.”

지호의 평에 솔은 조물조물 주무르던 제 얼굴을 양옆으로 쭉쭉 늘려 보았다. 겁에 질려 얼어붙은 표정이었을까, 아니면 하기 싫어 똥 씹은 표정이었을까. 오랜만에 연습실 거울 앞에 섰을 때, 극도의 긴장감에 제 모습을 살필 여유가 없었다. 우스운 표정만 아니었길 바랄 뿐이었다.

“불만 있는 거 알아. 이번 한 번만 더 힘내서 잘해 보자. 다들 조금씩만 도와줘. 나도 더 신경 쓸게.”

“형이 뭘 더 신경 써요. 형 문제로도 힘들 텐데.”

“트레이너 선생님들이 봐주시는 시간 고작 한두 시간이잖아. 우리끼리 챙기자.”

“……그랬는데 또 안 한다고 나가 버리면요? 저번에 그 형도 그랬잖아요.”

“……안 그러길 바라야지.”

“아, 짜증 나요.”

불만이 가득한 득용의 목소리 뒤로 피식, 바람 빠지는 웃음소리가 들렸다. 막내의 투정을 귀여워하는 맏형의 웃음이었다.

“강가람, 평소에 네가 좀 챙겨 줘.”

“알겠어.”

“지호 형. 춤 쪽은 제가 최대한 볼 테니까 형은 보컬 쪽 좀 도와주세요. 부탁해요.”

“그래. 네 사정 빤히 아는데. 나라도 도와야지.”

“미안해요, 형. 미안하다 얘들아.”

“태오 형 그만 사과하라고요!”

“알겠어. 벌써 12시다. 피곤할 텐데 씻고 자.”

“형이야말로요.”

나이 터울이 많은 것도 아닌데, 역시 막내는 막내라서일까. 투덜투덜 태오의 말을 받아치는 득용의 목소리엔 투정과 애교가 깔려 있었다. 솔은 핸드폰에 적어 둔 메모를 수정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제 생각보다 태오는 자신이 처한 상황을 수습해 이끌어 가려는 의지가 강한 인물이었다.

“근데, 진짜 형 그만두면 안 돼요.”

“그래.”

밖의 상황에 끼어들기 멋쩍어진 솔마저 득용의 목소리에 웃음이 나왔다. 막내는 막내였다. 두런두런 이어지던 네 사람의 목소리가 세 사람이 되었다.

“득용이가 알게 하는 게 아니었는데.”

“그게 네 탓이냐. 영호 형이 실수한 거지.”

“괜찮겠죠?”

“네 걱정이나 해. 윤태오.”

연습실에서 매니저 영호와 싸우는 듯 언성을 높이던 게 저 때문이라 생각했었는데 그마저도 아니었었나 보다. 솔은 또다시 메모장에 수정할 사항들을 업데이트했다. 태오의 이야기를 가만히 듣고만 있던 가람이 마저 한마디를 거들었다.

서로를 챙기며 이해하려는 모습들이 목소리에도 녹아 있었다. 갑자기 사실상 유일한 친구인 의찬의 모습이 떠오른 솔은 몸을 한껏 더 웅크렸다. 이 숙소에 분명 다섯 명의 사람이 있는데 홀로 있을 때보다 더 큰 외로움이 느껴졌다. 백의찬의 잔소리가 그리워질 날이 올 줄은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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