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솔의 무시에 멋쩍을 법도 한데 가람은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덤덤한 얼굴로 무시당한 제 손을 쳐다보곤 아무렇지 않게 손을 내렸다. 자칫 어색해질 수 있는 상황에 솔은 가람에게 고개를 살짝 숙여 보였다. 싸우자거나 의도적으로 무시하려는 것은 아니었다. 그저 타인과의 스킨십이 불편해서 피하고 싶었을 뿐. 사실 팔다리가 다 노곤하고 무거워 가람이 내민 손을 잡고 싶은 맘이 굴뚝같았다.
솔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지호의 가방까지 겹쳐 멘 디케이가 앞장서 걸음을 옮겼다. 언제 와 있었는지 매니저 영호가 거둬 갔던 핸드폰을 입구에서 돌려주고 그에게 당부의 말까지 얹고 있었다.
“꼭, 바로 숙소로 들어가는 거다.”
“알겠어요.”
“중국집 앞에 매니저 형들 잠복하는 거 알지?”
“알아요! 좀…!”
“아이스크림도 안 돼.”
“영호 형, 1절만 해요. 제가 득용이 신경 쓸게요.”
“그래, 그래. 지호 너 믿지. 참, 솔이도 신경을 써 주고.”
“네.”
영호의 당부에 지호가 방긋 웃으며 걱정하지 말라 자신 있게 말했다. 그런 말이 무색하게 소속사 건물을 벗어나자마자 디케이가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편의점에서 짜장라면 먹어요.”
“김득용. 영호 형이 당부한지 5분도 안 지났다.”
“……편의점 앞에서 잠복하고 있을걸?”
분명 나란히 걷기 시작했었는데,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며 가는 세 사람과 솔의 거리가 점점 벌어졌다. 지호와 디케이, 가람의 뒤로 한 네 걸음 뒤. 딱 서로에게 느껴지는 거리감만큼 사이가 벌어졌다.
디케이의 말에 어깃장을 놓으며 장난치며 걷는 세 사람을 보며 솔은 멍하니 그 뒤를 따라 걸었다. 쫓아가 보려 발을 바삐 움직여봐도 어쩐지 그 거리가 좁혀지지 않았다. 몇 걸음 더 걷지 않아 쫓아갈 의지도 잃어버린 솔은 아예 걸음을 멈춰 세웠다. 앞서가던 가람이 걸음을 멈춘 솔을 발견하고 그 자리에 멈춰서 뒤를 돌아보았다.
“……숙소는 회사 뒤편이에요.”
“가까워요?”
“네. 걸어가도 돼요.”
차라리 잘되었다. 적어도 숙소에 돌아갈 때는 차를 타지 않아도 되니까. 나지막이 말하는 가람의 시선이 솔의 다리에 닿았다. 그의 시선에 담긴 물음을 충분히 알 수 있어 솔은 괜찮다는 의미로 고개를 크게 끄덕여 보였다. 솔이 걸음을 멈춘 이유가 혹 연습실에서 넘어져 그런 것인가 하는 눈치였다. 두 사람의 걸음이 멈추자 먼저 앞서가던 지호와 디케이도 뒤를 돌아보았다.
“…태오.”
“네?”
“태오가 요즘 안 좋은 일이 많았어요. 원래도 시간에 철저하긴 하지만…. 그리고 우리도 그쪽이 안 올 거로 생각했거든요.”
“……음. 연락해야 했는데 어쨌든 미안해요.”
“미안해할 필요 없어요. 어차피 기대도 안 했으니까. 전에도 계속 이런 식으로 말도 안 되게 데뷔가 미뤄지고 새로운 사람이 왔었어요.”
“전에도요?”
“네. 그리고 매번 연락도 없이 사라졌어요."
어두워진 골목길 너머에 시선을 고정한 채 가람은 덤덤히 말했지만 익숙하다는 듯 덤덤한 가람의 목소리는 가물거리던 솔의 눈을 번쩍 뜨이게 했다. 단순히 데뷔조의 구성원이 바뀌었단 뉘앙스가 아니었다.
“항상 데뷔를 코앞에 두고 대표님이랑 실장님이 컨셉도 다 뒤엎고 새 사람을 데려와요. 그것도 춤도 노래도 못하는 사람으로.”
저와 하등 다를 바가 없어 솔은 어색하게 ‘하하’ 소리를 내며 웃었다. 그저 우연으로 넘길 만한 내용이 아니었다.
“몇 명이나요?”
“한 다섯 명 정도…. 그래서 이번에도 안 올 거로 생각했어요.”
“그럼 그 사람들은 다 어떻게 됐어요?”
“새 멤버가 올 때마다 태오가 고생했어요. 조금 익숙해지면 잘 지내다가도 갑자기 연락 끊기거나 증발한 것처럼 사라지죠. 매번 반복이에요.”
“…….”
더더욱 흘려들을 수 없는 이야기가 가람의 입을 타고 흘러나왔다. 왠지 솔은 자신 이전에 거쳐 간 다섯 명이 혹 자신과 같은 일을 겪었던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처럼 영문 모르게 이 세계로 끌려와 퀘스트를 진행하고 헛된 선택을 해 시스템 종료를 당한 것은 아닐까? 솔이 아무리 이쪽 업계를 모른다고 하지만 상식적으로 데뷔를 앞두고 컨셉까지 뒤엎으며 인원을 충원한다는 게 일반적인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문외한이었지만 솔이 보기에도 네 사람은 구태여 제5의 멤버가 필요한 것 같아 보이지도 않았다. 지금 당장 데뷔해도 아무런 공백을 느끼지 못할 만큼의 준비가 되어 있었다. 가람의 표정을 보아 하니 피차 그도 의문스럽다는 표정이었다. 그런데 그 드문 일을 다섯 번이나 겪었다니 어쩐지 찜찜했다. 만약 자신에게 시스템 재가동이라는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다면? 가람은 또 다른 여섯 번째의 사라진 멤버를 보게 되었을 것이었다.
“다 왔어요.”
“여기예요?”
“네. 일단 8층이고, 현관 비밀번호는 따로 알려 드릴게요. 어차피 함께 움직이니까 딱히 필요는 없을 거예요. 참 항상 어디든 둘 이상이 같이 다녀요.”
“고마워요. 그런데 그쪽도 어쨌든 제가 마음에 안 드는 거 아니었어요?”
“솔직히 아무 생각도 없어요. 딱히 그쪽이 숙소 생활을 오래 할 거라 생각도 안 해요. 어차피 그만둘 거라면 최대한 빠르게 정리해 주세요.”
묻는 말과 묻지도 않은 사정에 의외로 유순하게 술술 대답하기에 방심했다. 솔은 제 웃는 낯에 돌아온 직설적인 가람의 대답에 쓴웃음을 지었다. 어쩐지 익숙한 기시감이 들었다. 대학 생활과 퍽 비슷했다.
저마다 꿈과 목표를 가지고 대학 생활을 즐기던 동기들. 그 사이에서 솔은 늘 겉돌았다. 흐릿한 집중력과 상황에 맞지 않게 혼자 쓸데없는 생각이나 하며 실실 웃음 흘리고 중요한 일도 깜빡거리는 그의 모습이 좋게 받아들여지긴 쉽지 않았다.
학교에서 솔은 늘 진중함과 간절함 따윈 없는 매사에 장난인 그런 사람이었다. 이 자리에 없는 태오도 필시 자신에게 그런 느낌을 받고 있을 것이 뻔했다. 끝까지 적응하지 못한 대학 생활처럼 어쩌면 솔은 이 네 명과 앞으로 더 멀어질지도 몰랐다. 대체 이런 자신이 왜 여기에 끌려온 것일까.
시스템에 물어보면 답을 줄까?
혹시나 하는 생각에 솔은 질문을 여러 번 속으로 되뇌어 보았지만 속을 훤히 읽는 듯 타이밍 맞춰 등장하던 알림 창은 끝까지 나타나지 않았다. 복잡한 머리와 육체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지쳐 버린 솔은 이대로 그냥 따뜻한 물로 샤워하고 침대에 기어들어 가고 싶었다. 퀘스트를 성공하는 데 급급해 잊고 있었지만 숙소 생활도 문제였다.
정신이 한 발짝 빠져나가 있는 솔은 일반적인 시선으로 보기엔 이해하지 못할 행동들을 종종 했다. 정돈되지 않는 방이라든지 중요한 약속 시간이 다가오는 것을 알면서도 방에 누워 꼼짝하지 않는다든지. 혼자 있을 땐 누가 뭐라 할 일도 없었지만, 누군가와 함께할 땐 아니었다. 본격적으로 단체 생활이 시작되면 솔의 사소한 일탈이 절대로 좋은 쪽으로 작용할 리가 없었다. 활짝 열린 현관문이 범의 아가리처럼 느껴졌다.
“근데 태오, 그 사람은 숙소에 안 오나요?”
“태오는…. 보통 연습실 정리 다 하고 연습을 더 하거나, 개인적으로 일이 있어서 조금 늦게 들어올 거예요.”
숙소는 깔끔했다. 남자 네 명이 산다는 생각이 들지 않을 정도로. 조금 낡고 좁았지만 과할 정도로 깔끔함이 묻어 있어 솔은 그 어디에도 선뜻 손을 대지 못했다. 자신이 손대는 순간, 이 질서 정연한 모습이 어지러워질 것이기 때문이었다. 자신의 짐이 먼저 도착했다고 들었는데 이 깔끔하기 짝이 없는 집에 짐은커녕 상자 나부랭이 하나 보이지 않아 솔은 저 싫다는 가람을 붙잡고 조심스레 물어보았다.
“저기 혹시 저는 어느 방을 써야 해요?”
“…….”
가람은 말없이 솔을 빤히 쳐다보더니 이내 손가락으로 굳게 닫힌 방문을 가리켰다.
“저기가 옷방 겸 창고예요. 짐 온 게 옷 몇 개밖에 없어서 태오가 저쪽에 정리해 뒀을 거예요. 그리고 우린….”
뒤이어 이어진 말에 솔은 얼굴을 와락 구겼다.
“저쪽 방에서 다 같이 자요.”
“다 같이요?”
“네.”
“그러니까 네 명이 다 같이.”
“네.”
“왜요?”
솔은 이상함을 느꼈다. 방문은 분명 하나, 둘, 셋, 넷, 다섯 개. 옷방과 화장실을 제외한다 쳐도 방의 개수는 둘 내지 혹은 셋으로 갈라 사용하기 딱인 듯했다. 그런데 커다란 남자 넷이 모여 한데 부대껴 잔다니 솔이 되묻자 가람은 잠시 뜸을 들이더니 그 이유에 대해 말해 주었다.
“저랑 득용이가 알람을 잘 못 들어서 자주 지각해요.”
“시간 못 지키는 거 싫어한다더니 정말 싫어하나 보네.”
“…학교도 늦을 때가 많아서요.”
앞뒤 맥락이 다 잘린 대답이었지만 태오가 재차 거듭했던 말이 솔의 머릿속에 떠올랐다. 솔은 어색하게 하하 소리를 내며 웃었다. 아무래도 저와 태오는 그 첫인상처럼 퍽 안 맞을 듯싶었다. 여차하면 모든 일을 홀라당 까먹기 일쑤인 솔에게 시간 약속이란 참 어려운 일이었다. 참 그러고 보니 자신도 아직 고등학교를 졸업하기 전이니, 학교에 나가야 하나? 또 생각이 다른 곳으로 흐르던 그때, 지호의 목소리가 그의 생각을 가로막았다.
“굳이 같이 잘 필요는 없어. 원래 태오도 따로 방 썼었고. 지금은 빈방이니까 혼자 쓰고 싶으면 써.”
“…네. 고맙습니다.”
“얘들아, 저녁은 뭐 먹을래.”
“지호 형, 저 진짜 라면 너무 먹고 싶은데. 아니면 짜장면.”
“응. 안돼.”
“그럴 거면서 왜 물어봤어요.”
“너한테 물어본 거 아니야. 김득용. 너는 닭가슴살 먹어.”
디케이에게 딱 잘라 단호하게 말한 지호는 솔과 가람을 바라보았다. 그의 옆에선 디케이는 제 덩치와 맞지 않게 입이 댓 발 나와 도지호를 게 눈으로 쳐다보고 서 있었다.
“그런데 아까부터 왜 득용이라고 불러요?”
“그건….”
“아, 형 말하지 말아요.”
“얘 이름이 김득용이라.”
“디케이는 예명?”
“득용 킴(Deukyong Kim)해서 DK.”
“아씨. 말하지 말라고요. 형!”
솔은 난감한 웃음을 지었다. 가명을 써야 할 이유는 명확했지만 그렇다고 디케이도 딱히 그럴싸해 보이지는 않았다. 솔의 어색한 표정에 디케이의 눈초리가 매서워졌다. 가뜩이나 사납게 생긴 인상에 눈꼬리까지 치켜 올라가자 솔은 저도 모르게 슬금슬금 눈을 피했다.
“저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