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태오는 그런 솔을 보며 기초도 기초였지만 체력이 더 큰 문제라고 생각하며 얼굴을 더욱 무뚝뚝하게 굳혔다. 두 다리가 사시나무처럼 후들거려 네 사람에게 들키지 않으려 솔은 다리에 꼿꼿하게 힘을 주고 걸었다. 솔은 태오가 가리킨 연습실 구석으로 가 털썩 주저앉고도 한참 어깨를 들썩거렸다. 숨이 제대로 쉬어지지 않아 뻐근하고 답답한 가슴을 두어 번 주먹으로 퍽퍽 내리쳤다.
갑자기 억울했다. 퀘스트 앞에 명색이 <튜토리얼>이 붙어 있지 않은가, 게임의 문외한인 솔이지만 적어도 튜토리얼이 초심자가 적응할 수 있도록 비교적 기초적이고 쉬운 퀘스트라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그런데 튜토리얼부터 솔에겐 난도가 너무 높았다. 딱딱한 벽에 등을 기댄 솔의 몸이 점점 미끄러져 내렸다. 깊은 물에 서서히 잠기는 것처럼 은근한 무게감이 자신을 짓누르고 있는 것만 같았다.
“하던 거 마저 계속하자.”
“네엡.”
태오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디케이를 비롯한 가람, 지호가 대열을 갖추고 연습실 중앙에 섰다. 솔이 연습실 문을 열고 들어왔을 때 마주했던 그 대형이었다. 리모컨으로 가람이 음악을 틀자마자 네 사람은 거울에 비친 장상처럼 일정하고 똑같이 움직였다. 흔히들 말하는 칼군무였다. 오랜 시간을 맞춰 온 티가 역력했고 대열의 위치도 단 한 걸음도 틀어지지 않았다.
빠른 비트에 맞춰 조금의 오차도 없는 군무를 추는 네 사람을 솔은 가물거리는 눈으로 빤히 바라보았다. 보는 솔의 관절이 다 아파져 올 정도로 온 힘을 다해 부서져라 힘껏 추는 춤이었다. 대단한 무대에 서는 것도 아니었고 지금 딱히 거창한 시험을 치르는 것도 아니었다. 그저 여러 차례 반복될 연습 한 번인데 네 사람은 이를 악물고 춤을 추고 있었다. 심지어 각각 센터 자리에 위치할 때 파트에 맞춰 노래까지 불렀다. 자신은 고작 그 몇 동작을 반복하고 숨이 멎을 것처럼 헉헉거렸는데 태오를 비롯한 멤버들의 목소리엔 떨림조차 없었다.
‘아이돌들은 다 이렇게 연습하는 건가.’
처음이었다. 사실 TV에 나오는 그들에게 별 관심이 없기도 했었지만 이렇게 연습생들이 연습하는 모습 자체를 처음 봤다. 물론 무용을 할 때 그 누구보다도 치열하게 경쟁했던 그였지만 그것과는 다른 분위기가 있었다. ‘꿈’이라는 목표를 향한 정말 순수한 노력 같은 것이 네 사람의 동작에 어려 있었다. 즐거웠던 일도 자신이 바라서 시작했던 일도 어느 순간 벽에 부딪히면 그때부터 자신을 짓누르는 짐이 되기 마련이었다. 또, 한때는 자신의 심장을 뛰게 했던 일이 끔찍하도록 고통스러운 일이 되기도 한다. 지금의 솔처럼 말이었다.
무표정했던 태오도, 느른해 보였던 가람의 얼굴에도 미소가 어렸다. 숨이 차 인상이 찡그려질 법도 한데 네 사람 모두 입가에 미소를 머금은 즐거운 표정이었다. 솔은 홀린 듯 네 사람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대열의 중간으로 멋지게 턴을 하며 나타난 지호를 보며 솔은 관람객처럼 박수를 칠 뻔했다. 마이크라도 쓰고 있는 것처럼 쩌렁쩌렁한 성량의 지호는 조금의 실수도 없이 매끈하게 고음의 애드립을 소화했다. 네 사람의 움직임은 일사불란했지만, 체계적이었고 그 어디에도 빈자리가 없었다. 좋게 말하자면 완벽했지만 다른 시각으로 보자면 즉 제5의 멤버인 솔의 자리는 없다는 말이었다. 가뜩이나 온갖 문제를 가지고 있는 솔은 네 사람이 연습하는 모습을 보며 더욱더 저 사이에 끼어들 자신이 없어졌다.
그래도 이렇게 앉아 네 사람을 지켜보는 것이 영 솔을 암담하게 만드는 것만은 아니었다. 적어도 네 사람의 움직임을 관찰하고 있자니 대충 몸을 움직이는 것에 대한 감이 잡혔다.
색달랐다. 장르가 다르긴 했지만, 어찌 되었든 솔도 그간의 삶에서 안무를 보고 익히는 것을 주로 삼아 왔다. 생소한 곡이었던 노래는 두 번째가 되자 귀에 익었고 음악에 맞춰 다음 안무도 머릿속에 절로 그려졌다. 한두 번이면 안무를 숙지하기에 충분한 횟수였다. 물론 이걸 행동으로 옮기는 건 별개의 문제였다.
눈에 점점 익어 가는 동작을 머릿속으로 다시 한번 되새겨 보며 바라보고 있자니 슬며시 잠이 몰려왔다. 하루 사이 너무 많은 일이 있었고 몸도 정신도 지나치게 혹사당했다. 긴장이 풀리자 눈꺼풀이 천근만근이었다. 등에 닿은 벽도 처음의 서늘함을 사라지고 체온이 옮겨져 적당한 온도가 되었다. 완전히 지쳐 버린 솔은 어느새 자신도 모르게 음악에 맞춰 고개를 까딱거리며 정신을 놓았다.
“형들, 이 형 진짜 자는데요.”
“이걸 강심장이라고 해야 할지 뻔뻔하다고 해야 할지.”
“그냥 보내자.”
“숙소에?”
“응.”
“어차피 연습할 생각도 없는 거 같고.”
“와. 근데 어떻게 여기서 이렇게 잘 수 있지?”
허스키한 저음의 목소리에 솔의 정신이 돌아왔다. 정신이 바짝 들며 잠에서 깨어났지만, 저를 둘러싸고 들리는 목소리에 솔은 차마 눈을 뜨지 못했다. 소금에 푹 절인 배추 같은 상태긴 했지만, 솔도 자신이 이렇게 깊게 잠이 들 줄은 몰랐다. 음악 소리가 시끄럽도록 울려 댔고 네 남자가 구슬땀을 흘려 가며 연습하고 있는 마당에 그 모습을 보며 이렇게 자 버릴 줄이야.
가장 당혹스러운 건 성솔이었다. 솔은 얼굴에 드리우는 네 사람의 그림자에 애써 잠이 든 척 무표정을 유지했다. 사실 이 상황에 일어나 무어라 말을 하는 것이 더 어색했다. 눈을 질끈 감고 있어 정확하게 알 수는 없었지만 들리는 소리와 느낌상, 지호와 가람, 디케이가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듯했다. 난감함에 진땀을 흘리는데, 한 발짝 멀리서 태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지호 형, 먼저 데리고 들어가요.”
“너는?”
“오늘은 좀 늦을 거 같아요.”
“그래. 어차피 오늘 레슨도 없고, 가끔은 쉬어야지.”
“형, 꼭 트레이너 선생님처럼 얘기하는데. 그러기엔 이미 8시예요.”
“배가 불렀네. 김득용.”
디케이의 지적에 지호의 낮은 웃음소리가 들렸다.
“아, 진짜. 그 이름으로 부르지 말라고요.”
그는 제 본명이 퍽 싫은지 지호의 말에 투덜거렸다. 솔직히 그의 외모에 비해 지나치게 친숙한 느낌의 이름이긴 했다. 사납게 생기기는 했지만 디케이는 도회적인 얼굴에 가까웠다. 그런 주제에 이름은 꽤나 목가적이었다.
디케이의 투정에 세 사람의 얕은 웃음소리가 들렸다. 멤버들 사이의 친밀감이 느껴져 솔은 문득 자신의 친구가 그리워졌다. 의찬, 주환과 함께할 때 의찬은 늘 솔에게 잔소리를 하며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챙겼고 주환은 늘 따뜻한 위로와 부드러운 미소를 보냈었다. 어쩐지 자신의 모습이 디케이와 겹쳐 보였다. 갑자기 두 사람의 모습을 떠올리자 코끝이 찡하니 눈물이 날 것 같았다. 툭 말을 내뱉은 가람이 아니었다면 솔은 또 눈물을 흘렸을지도 몰랐다.
“윤태오. 영호 형 불러서 가. 우리 넷이 갈게.”
“그래. 알았어.”
두 사람 모두 무심한 듯 툭툭 말을 던졌지만 퍽 친해 보였다.
“적당히 하고 들어와.”
“응. 그리고 성솔, 몸이 안 좋은 건 어쨌든 진짜인 거 같으니까 좀 챙겨 줘.”
“…그래.”
“정리는 내가 할게. 먼저 들어가요.”
태오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누군가 솔의 어깨를 잡고 흔들었다.
“솔아. 성솔, 일어나.”
“네! 네…. 네.”
막 깨어난 척 연기가 아니라 솔은 정말 화들짝 놀라 몸을 바로 세웠다. 의찬이나 주환이 아닌 다른 사람과 이런 식으로 접촉하는 것이 솔은 영 부담스러웠다. 솔이 황급히 몸을 일으키자 지호가 활짝 웃으며 그를 바라보았다.
“진짜 깊이 잠들었었나 보네. 엄청 놀라고.”
“아…. 그, 몸이 좀 안 좋아서 잠들었었나 봐요.”
“그래? 너도 힘든 거 같고, 오늘 레슨 없어서 우리 지금 숙소로 돌아가려고.”
“그래도 되는 거예요?”
“응. 뭐 어쨌든 어제 평가 결과 좋아서 생긴 포상이니까.”
솔의 물음에 지호는 어깨를 슬쩍 들어 올려 보였다. 들뜬 얼굴로 널브러진 재킷과 가방을 챙기는 디케이의 모습을 보아 하니 그리 흔한 포상은 아닌 듯했다.
솔이 잠에서 완전히 깨어난 듯 보이자 지호는 그를 내버려 두고 옷가지를 챙기기 여념이 없는 동생들에게 다가갔다. 솔은 웅크렸던 몸을 슬쩍 펼쳤다. 생각보다 오랜 시간 쪼그려 잠이 들었었는지 목덜미하며 오금이 뻑적지근했다. 조심스레 다리를 펼치며 솔은 고개만 살짝 들어 네 사람을 바라보았다.
태오를 제외한 다른 멤버들이 분주히 어질러진 짐들을 챙겼다. 태오가 제가 정리하겠다고 했음에도 가람과 지호는 곳곳에 놓인 물병을 치우고 디케이는 가방 여러 개를 어깨에 걸쳐 멨다.
“숙소 가는 길에 편의점 들르면 안 돼요?”
“안돼.”
디케이의 제안에 물병을 치우던 가람이 단호하게 대답했다.
‘숙소.’
약간 남아 있었던 잠기운이 확 날아가는 단어였다. 이제부터 저 네 사람과 한집에서 부대끼며 살아야 하는 것이었다. 그 말은 즉 합숙하며 정말로 아이돌이 되는 준비를 해야 한다는 뜻이었다. 연습실에서 춤을 추고 멤버들을 소개받고 이런 것까진 그저 어찌어찌 굴러간다는 기분이었는데 함께 산다는 건 솔에게 다가오는 느낌이 확 달랐다.
갑자기 나타난 꿔다놓은 보릿자루인 자신이 저 넷의 삶에 끼어드는 일이었다. 난데없이 벌어진 이 상황을 타개할 다른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고 목숨이 걸려 있으니 안 할 수도 없어 일이 이렇게 진행되고 있었지만, 갑자기 숨이 턱 막히고 암담해졌다.
‘나 진짜 아이돌 연습생 하는 거구나.’
팔다리에 기운이 쭉 빠졌다. 이 어처구니없는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솔은 답답한 마음에 두 손으로 제 얼굴을 벅벅 문질렀다. 손바닥이 이마에 닿자 엄청난 통증이 느껴졌다. 화장실에서 넘어지며 부딪힌 그 부분인 듯했다. 손바닥에 닿는 이마가 열이 나는지 따끈했고 볼록하게 솟아오른 게 혹이 난듯했다. 솔이 인상을 찌푸리며 눈썹을 찡그릴 때마다 느껴지는 통증에 집중하는 사이, 정리를 마친 가람이 그의 앞에 섰다.
“일어나요.”
제 앞에 불쑥 내민 손을 따라 솔은 고개를 들어 가람을 올려다보았다. 흔히들 미남의 기준이라 하는 짙은 쌍꺼풀은 없지만 길게 뻗은 눈매가 큼직했다. 적당한 두께의 눈썹과 하얀 피부, 차분한 인상이 묘하게 나른해 보였다. 미인과 미남 그 사이쯤에 있는 묘한 외모와 달리 그가 내민 손은 뼈 마디마디가 굵직하고 손등 위로 핏줄이 도드라진 퍽 남자다운 손이었다. 솔은 입술을 꽉 깨물고 가람의 손을 붙잡는 대신, 땅을 짚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래도록 쪼그려 앉아 있었던 몸이 비명을 질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