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최애를 뽑고 싶어-9화 (9/192)
  • #9

    마음이 조급했다. 시야 구석에는 여전히 남은 시간이 점점 줄어들고 있었다. 시간의 여유가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이미 한차례 최악을 경험한 솔은 불안감과 초조함에 쫓기고 있었다. 본래 매도 먼저 맞는 게 낫다고 어차피 맞아야 할 매라면 빠르게 맞는 편이 심적으로 편안했다. 무엇보다 눈앞에 떠오른 퀘스트 창이 사라지지 않으면 그 어느 것에도 집중할 수가 없을 것 같았다. 솔은 맥없이 태오의 손을 뿌리치고 연습실 안으로 들어갔다. 솔이 돌아오지 않을 거라 생각했는지, 세 사람은 다시금 대열을 맞추고 서 있었다.

    예상치 못한 솔의 재등장 때문인지 디케이가 ‘어, 어?’ 하는 얼빠진 소리를 냈다. 솔은 몸을 움츠린 채 세 사람 앞을 지나쳐 연습실 정중앙에 섰다. 뒤늦게 따라 들어온 태오가 연습실 문을 닫았다.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낯선 음악에 솔은 애써 집중해 보려 애를 썼다. 거울에 반사되는 자신의 모습이 보기 어려워 솔은 눈을 질끈 감았다.

    솔이 중앙을 차지하고 서자 가람이 먼저 구석으로 물러났다. 그가 자리를 비켜 주자 디케이도 지호도 슬쩍 태오를 쳐다보곤 벽에 등을 기대고 서 솔을 지켜보았다. 처음 듣는 빠름 템포의 음악 소리에 솔은 긴장을 풀어 보려고 발을 두어 번 쿵쿵 구르고 골반을 옆으로 빼기도 해 보았다. 음악에 맞춰 몸을 움직여야 했는데 움직여지기는커녕, 가슴이 답답해지고 숨을 쉬기가 영 불편했다.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거칠어지는 숨에 솔은 질끈 감았던 눈을 뜨고 거울에 비친 제 모습을 바라보았다. 숨을 쉴 때마다 살짝 들썩이는 어깨가 무척이나 불안정해 보였다.

    손바닥이 땀으로 축축했다. 떨리는 손끝을 감춰 보려 솔은 다시 한번 손을 세게 털고 깊은숨을 내쉬었다. ‘할 수 있다.’라는 희망적인 의지보다 ‘못하면 죽는 거야.’라는 말이 훨씬 더 마음에 깊게 박혔다. 여태까지의 솔이었다면 이 폭발할 것 같은 불안감을 견디지 못하고 연습실을 뛰쳐나갔을 테지만 이젠 그럴 수 없었다.

    미칠 듯한 불안감보다 실패 시 다가올 고통과 죽음이 더욱 두려웠다. 팔과 다리를 계속 휘저으며 긴장감을 떨쳐 보려 애를 쓰는 사이, 뛰는 듯 빠른 템포의 음악이 끝나고 딱 제 심장 소리만큼 뛰는 리듬의 노래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솔은 크게 한숨을 내쉬고 딱 제 심장 박동 속도로 뛰는 리듬에 맞춰 고개를 까닥였다. 이내 큰 결심을 한 듯 솔은 이를 악물고 팔을 뻗어 몸을 뒤로 뺐다. 몸이 뒤로 넘어가며 둥글게 휜 허리가 드러났고 발끝까지 팽팽하게 텐션이 당겨졌다. 이미 이 동작 하나로도 그가 몸에 습관이 밸 정도로 충분히 오래, 잘 무용을 배워 왔다는 것이 티가 났다. 물에 푹 젖은 솜 인형처럼 팔다리가 무거웠고 가슴이 답답했지만, 솔은 멈추지 않고 몸을 움직였다.

    솔의 춤은 역시나 실용 무용과는 거리가 먼 재질이었으나 한때 천재라는 소리를 괜히 들은 게 아니었는 듯, 그 별거 아닌 움직임에서조차 선이 살았다. 그럼에도 유려한 움직임과 달리 솔은 어차피 여기서 무얼 해도 제대로 표현할 수 없고 네 사람의 기준에도 부합하지 못할 테니 될 대로 되라는 심정으로 아무렇게나 몸을 움직이고 있었다.

    허공을 향해 사선으로 쭉 뻗은 손끝에는 그의 특기인 감정이 가득 실려 있었다. 지금 자신이 느끼고 있는 불안감이 고스란히 담겨 하얀 손끝이 파르르 떨렸다. 점점 빨라지는 박자에 솔은 가볍게 팔을 끌어당기며 허리를 뒤로 휘었다. 뒤로 넘긴 팔이 땅을 짚으며 몸이 둥글게 말리자 조금의 억지도 없이 늘씬한 장신이 수월하게 넘어갔다. 일명 레인보우라고 하는 동작이었다. 너무도 자연스럽고 힘 하나 들이지 않아 동작이 물 흐르듯 가벼웠다.

    난도가 있는 동작은 아니었지만 움직임 하나하나가 수려하면서도 절도가 있었다. 정작 춤을 추고 있는 솔은 심장을 짓씹고 있는 것처럼 터질 듯한 불안감에 비명이라도 지르고 싶었지만 보는 이들은 솔의 몸이 만들어 내는 선에 취해 아무런 부조화도 느끼지 못했다. 그저 동작을 이어 나가면 이어 나갈수록 눈에 띄게 솔의 얼굴이 창백해질 뿐이었다. 불편함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생각보다 버틸 만하다고 판단되자 솔의 동작이 점점 커졌다.

    겁을 집어먹은 것에 비해 참고 인내할 만했다. 목이 졸리는 듯 가슴이 답답하고 움켜잡은 손끝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지만 아무도 알아차리지 못할 것이었다. 음악에 맞춰, 제 불안감을 감추려 솔은 더욱더 빠르고 크게 동작을 소화했다. 빠르게 진행되는 음악에 맞춰 성큼 움직여 스텝을 밟은 순간 솔의 시야에 경고 창이 떠올랐다.

    [특성 ‘비운의 천재 무용수’가 활성화되었습니다.]

    [특성 ‘비운의 천재 무용수’의 활성화로 춤 능력치가 2단계 하락합니다.]

    경고 창이 나타나자마자 마치 송곳으로 정강이를 찌르는 듯한 통증이 찌릿하며 전신을 파고들었다. ‘악’ 하는 소리도 미처 내지 못한 솔의 몸이 균형을 잃고 미끄러져 내렸다. 솔의 동작 하나하나를 관찰하듯 지켜보던 태오가 가장 먼저 반응했다. 성큼, 미끄러지는 솔에게로 한달음에 다가온 태오는 팔을 뻗어 휘청거리는 솔의 손목을 붙잡았다. 하지만 완전히 균형을 잃어버린 솔은 태오의 손길에도 불구하고 그대로 미끄러져 연습실 바닥을 굴렀다. 몸의 절반, 왼쪽 발부터 정강이, 허벅지, 허리까지. 딱 절반에 찌르는 듯한 강한 통증이 느껴졌다.

    이성으론 이것이 그저 환지통처럼 실체 없는 통증임을 알고 있었지만, 몸은 그 통증을 여실 없이 느꼈다. 솔도 잘 알고 있었다. 이 무렵, 갓 스무 살이 되었던 솔은 이미 교통사고에서 얻은 부상을 완전히 회복했다는 걸. 흉터가 남긴 했지만, 일상생활을 하는 데에 아무런 무리도 없었다.

    무용도 마찬가지였다. 이런 통증이 느껴질 리가 없는데, 솔은 춤을 추려 할 때마다 이러한 통증을 느꼈다. 그리고 매번 이렇게 바닥을 구를 때마다 이런 것 하나 견뎌 내지 못하고 모든 걸 망치는 스스로에 대한 모멸감에 온몸을 떨어야 했다. 수치스러웠다.

    바닥에 주저앉은 솔이 한참을 움직이지 않자 지켜보던 네 사람의 안색이 파랗게 질렸다. 태오가 급히 붙잡은 덕에 볼썽사납게 바닥을 구르는 꼴은 면했지만, 지켜보던 사람들을 놀라게 하긴 충분했다.

    “괜찮아요?”

    거의 반사적으로 넘어지는 솔을 붙잡았던 태오는 손에 힘을 풀며 다급한 목소리로 물었다.

    “괜찮아?”

    태오의 목소리를 시작으로 지호와 다른 사람들도 솔에게 상태를 물어 왔다. 모두 한결 감정이 누그러진 목소리였지만. 솔은 정신이 없어 누구의 목소리인지 제대로 인지하지 못했다. 넘어졌다는 부끄러움과 정강이를 마구잡이로 찌르는 듯한 통증에 정신이 쉬이 차려지지 않아 솔은 ‘괜찮다’라는 빈말조차 하지 못했다.

    솔이 얼굴을 구기고 다리를 부여잡은 채 바닥에서 일어나지 못하자 그를 둘러싼 네 사람의 얼굴이 점차 심각해졌다. 자신들이 괜히 되지도 않는 패악질을 부려 솔이 크게 다친 것은 아닌가 걱정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병원 가야 하는 거 아니에요?”

    “득용아, 그 정도는 아니야. 소란 피우지 마.”

    “아, 그러게. 형들, 하지 말자고 내가 계속 그랬잖아요. 어차피 금방 나갈 거….”

    “김득용!”

    인상을 찌푸린 솔을 보며 디케이가 호들갑을 떨자 지호가 엄한 표정으로 소리를 내며 그를 노려보았다. 아이를 혼내는 엄마 같은 모습에 디케이가 입을 ‘합’ 소리를 내며 다물었다. 솔이 아무런 대답이 없자 가까이 다가온 태오가 그의 다리를 조심스럽게 붙잡았다. 타인의 손길이 닿자 그제야 정신을 차린 솔이 뒤늦게 손사래를 쳤다.

    “일어날 수 있어요?

    “괜찮아, 괜찮아요.”

    태오가 상태를 묻자 솔은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통증과 수치심보다도 안도감이 더 컸다. ‘이 꼴을 하고 더 추라는 말은 안 하겠지.’ 하는 위기를 모면했다는 안도감. 연습실 구석에 있는 냉장고에서 가람이 아이스 팩과 생수병을 꺼내 태오에게 건넸다. 연습하다 생기는 작은 부상에 금방 대처할 수 있게 대비해 둔 듯했다. 가람에게서 아이스 팩을 건네받은 태오가 솔의 바짓단을 걷어 올리자 그는 몸을 벌떡 일으켜 제 바짓단을 붙잡았다.

    솔의 얼굴은 온통 땀범벅이었다. 고통도 고통이었지만 춤을 춘 긴장감에서 흐른 땀이었다. 일종의 공포증이나 마찬가지였다. 춤을 추면 부상을 입을 것이며 고통을 느끼게 될 거란 공포증. 그 공포증을 억지로 눌러 내고 춤을 췄으니 진이 쭉 빠졌다.

    솔이 아무리 괜찮다고 사양을 해도 태오는 그의 바짓단을 걷어 올렸다. 하얗게 드러난 종아리 뒤로 선명한 붉은 흉터가 보였다. 다리가 붙잡힌 솔을 둥글게 둘러싼 네 사람 모두 그의 상처를 보았지만, 가타부타 말을 얹는 사람은 없었다. 그저 솔만 입술 짓씹으며 바지를 끌어 내려 흉터를 가리려 했을 뿐이었다.

    태오는 솔의 발목을 붙잡아 고정하고는 살이 쓸려 붉어진 부분에 아이스팩을 대 주었다. 어색하기 짝이 없는 상황에 솔은 늘 그렇듯 ‘하하’ 소리를 내며 웃었다.

    “사소한 염좌도 계속 쌓이고 방치하면 고질병 돼요.”

    “아니. 진짜 괜찮아요.”

    “대고 있어요.”

    “진짜 괜찮은데…. 너무 긴장했었나 봐요.”

    어색함을 지워 보려 꺼낸 솔의 말에 아무도 대답해 주지 않았다. 발목에 대어진 아이스 팩을 붙잡으며 솔의 손끝과 태오의 손등이 살짝 스쳤다. 타인과의 접촉이 어색해 솔이 화들짝 손을 숨기자 태오는 아이스 팩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윤태오. 너는 괜찮아?”

    “괜찮아.”

    태오가 내려놓은 아이스 팩을 주워 발목에 가져다 댄 솔의 눈앞에 다른 아이스팩이 불쑥 내밀어졌다. 강가람이었다. 가람의 물음에 태오는 무덤덤한 얼굴로 대답하며 손목을 두어 번 크게 휘휘 돌려 보였다. 솔이 넘어지는 것을 막으려 붙잡으며 손목에 무리가 간 듯했다. 괜히 자신이 피해를 준 것만 같은 상황에 좌불안석이 된 솔은 머릿속에 굴러다니는 생각을 거침없이 내뱉었다.

    “그런데요. 제가 안 괜찮아야 좋은 거 아니에요? 저랑 팀 하기 싫다면서요. 제가 다쳐서 하차하는 편이….”

    솔의 말에 네 사람의 시선이 다시금 그에게로 집중되었다. 눈총이 따가웠다.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