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눈앞에 떠오른 새로운 퀘스트에 솔은 미간을 찌푸렸다. 태오의 잘생긴 얼굴 위에 민트색 테두리의 알림 창이 겹쳐 조금 우스웠다. 솔은 태오의 이마 언저리를 지나가는 글씨를 읽으며 현기증을 느꼈다.
퀘스트 이름부터 구렸다. <댄스 신고식>이라니. ‘설마, 이 퀘스트 윤태오가 주는 건가?’ 하는 생각을 잠시 한 솔은 갑자기 등줄기에 솟아나는 소름에 몸을 파드득 털었다. 결국 태오도, 정체불명의 알림 창도 솔에게 지금 당장 춤을 출 것을 종용하고 있었다. 솔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흔히들 말하는 발레, 현대 무용 같은 순수 무용과 실용 무용은 그 결이 달랐다. 물론 큰 맥락에서 보자면 어차피 몸을 이용한 표현이니 다르다곤 할 수는 없었다. 다만 현대 무용, 한국 무용, 발레 이 세 가지조차도 손끝, 발끝의 처리가 달랐다.
하물며 실용 무용은? 그 갈래가 끝도 없었다. 락킹, 힙합, 팝핑, 비보잉, 재즈 댄스, 방송 댄스, 스트릿. 솔의 주특기는 한국 무용이었다. 물론 한국 무용만큼이나 현대 무용으로도 무대에 많이 섰지만 가장 잘하는 것 하나를 뽑자면 한국 무용이었다. 어찌 보면 가장 방송 댄스와는 맞지 않는 부류였다. 아이돌 연습생으로 실력을 보자 하는데 다짜고짜 ‘한량무’ 같은 것을 출 수는 없었다. 그랬다가는 필시 저 잘생긴 태오의 얼굴이 지금보다 더 엉망으로 일그러질 것이었다.
구겨진 태오의 얼굴이 상상이 갔다. 물론 일반적인 연습생이었다면 어찌 되었든 밑바탕이 있다는 것에 좋아했을지도 모르지만, 솔은 데뷔를 앞둔 데뷔조였다. 완성품이어도 태오나 다른 멤버들의 성에 차지 않을 것이었다. 물론 솔이라고 외골수처럼 무용만 해 온 것은 아니었다.
애초에 몸을 쓰는 일은 뭐든 금방 잘 따라 했고, 이따금 연습실에서 의찬, 주환과 어울려 유행하는 춤 같은 걸 추며 놀기도 했었다. 몇몇 기억나는 짧은 동작들이 있었지만, 전문적인 트레이닝을 거친 그들 앞에선 뭘 하든 간에 어설퍼 보일 것이 뻔했다.
하지만 이런 문제보다 더 큰 문제는 춤을 추는 것이 무섭다는 점이었다. 설령 이런 상황이 아니라 스스로가 원해서 추고 싶었다 해도 무사히 출 수 있느냐가 문제였다. 사고 이후, 솔은 마지막으로 춤을 추었던 순간을 떠올려 보았다.
의찬의 닦달에 못 이겨 딱 지금처럼 등을 떠밀려 장난스레 그랑 피루엣(Grand pirouette)을 했었다. 평소엔 내기하듯, 누가 더 피루엣을 많이 도느냐 장난을 치곤 했었는데 두 바퀴를 채 돌기도 전에 솔은 다리에서 강한 통증을 느끼며 바닥에 주저앉아야 했다. 그러고는 다시 일어나지 못했었다. 피루엣도 제대로 못 도는 남자 무용수.
사실상 끝이었다. 여성 무용수와 달리 남성 무용수는 기술적 동작이 주류였다. 턴조차 제대로 못 하는 무용수가 아크로바틱이라니. 춤을 출 생각을 하니 긴장감과 두려움에 살갗이 다 아려 왔다. 거울에 비친 창백한 제 얼굴을 보니 갑자기 덜컥 겁이 몰려왔다. 거울을 통과해 자신을 노려보는 네 쌍의 시선들이 매서웠다. 얼굴이 창백해진 솔은 숙제 검사를 하는 선생님처럼 팔짱을 끼고 버티고선 태오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당장 이곳을 빠져나가고만 싶었다.
“화, 화장실 좀! 화장실 다녀와서 할게요.”
네 사람 앞에서, 아니 그보단 거울에 비치는 제 모습이 더 두려웠다. 솔은 점점 떨려 오는 손을 뒤로 감추며 애써 태연한 척 웃으며 태오에게 말했다. 어떻게든 상황을 회피해 보려는 솔의 변명에 태오의 얼굴이 오히려 무표정해졌다. 잘생긴 얼굴이 싸늘하게 인형처럼 굳자 솔은 그 와중에도 태오가 참 잘생겼단 생각을 했다.
이런 상황에서 쓸데없는 생각을 하는 자신이 우스워 솔은 슬쩍 입꼬리를 움찔거렸다. 팔짱을 끼고 솔을 내려다본 태오는 슬쩍 웃음을 짓는 솔의 얼굴 아래로 그의 생각을 읽을 수 있었다. 솔의 웃음 뒤에 숨겨진 감정은 ‘낭패’였다. 아무리 좋게 봐 주려 해도 좋게 봐 줄 수가 없는 솔의 태도에 태오는 어처구니가 없어 고개를 저으며 코웃음을 쳤다.
“……. 다녀와요. 왼편 코너 돌아서 끝에 있어요.”
태오의 말이 끝나기 매섭게 솔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연습실을 뛰쳐나갔다. 그대로 도망치려, 내려온 길을 되돌아온 솔은 계단 위쪽에서 들리는 영호의 목소리에 황급히 다시 복도 구석에 몸을 숨겼다.
매니저 영호가 계단을 내려오는 소리가 점점 가까워지자 솔은 하는 수 없이 태오가 알려 준 대로 화장실을 향해 뛰었다. 모르는 사람이 보았으면 무척이나 급한 용무가 있는 사람처럼 허겁지겁하였다. 왼편 코너를 돌아 제일 구석. 화장실로 들어온 솔은 맨 끝 칸에 들어가 문을 걸어 잠갔다. 영호가 떠나고 나면 잽싸게 도망쳐야지. 하며 솔은 발까지 살짝 들어 올렸다.
무책임한 마음으로 일단 내빼긴 했는데, 막상 내빼고 나니 앞으로가 문제였다. 수중에 돈은 한 푼도 없었으며 도움을 요청할 연락처도 몰랐다. 가족에게 일어난 사건이 여전히 존재하니 솔에겐 꽤나 큰 보험금이 있을 테지만 문제는 그에게 지갑 자체가 없다는 점이었다. 심지어 밖은 한겨울이었다. 밴을 타고 오는 내내 정신이 없었던 솔이었지만, 차창 밖으로 스쳐 지나가는 눈의 흔적이나 곳곳에 세워진 크리스마스트리를 못 보기는 어려웠다. 솔은 하이틴 영화 속 따돌림을 피해 숨어든 주인공처럼 처량하게 변기 위에 덩그러니 앉았다.
[실패 시, 시스템 종료 (혹은 그에 상응하는 고통)]
[남은 시간 : 00:09:57]
시야 한 귀퉁이에 튜토리얼 퀘스트의 제한 시간이 떠올랐다. ‘실패’하여 ‘시스템 종료’가 되면 어떻게 되는 걸까. 보통 게임에서 퀘스트에 실패하면 어떻게 되더라. 게임을 즐겨 하는 편은 아니었지만, 솔의 생각에 그다지 큰일이 일어날 것 같지 않았다. 물론 그 뒤에 붙은 ‘그에 상응하는 고통’이 거슬렸지만, 어쩌면 퀘스트에 실패하면 이 이상한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을지도 몰랐다. 일단은 시스템 종료니까.
‘좋아. 이렇게 된 거 화장실에서 뻐겨 보자.’
고작 10분이 안 되는 시간이었다. 이대로 가만히 시간을 흘려보내면 어쩌면 더는 이상한 알림 창을 보지 않아도, 원치 않는 명령을 듣지 않아도 될지 몰랐다. 조금 불안하긴 했지만, 지금 솔이 선택할 수 있는 선택지는 이것뿐이었다. 그 네 사람 앞에서 이상할 게 분명한 제 춤을 보여 주고 싶지 않았다. 거울에 비친 자신에겐 더더욱.
솔은 무릎을 한껏 끌어안으며 몸을 더 움츠렸다. 다른 연습실에서도 연습이 한창인지 희미하게 여러 음악이 섞여 들려왔다. 익숙한 노래라도 들릴까 싶었지만, 단 한 곡도 귀에 익은 곡이 없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사고가 난 뒤로 솔의 시간은 멈춰 버렸고 세상에 무지했으며, 무지하려 부단히도 애를 썼다.
그날의 기억을 놓치지 않으려고 어쩌면 스스로 제자리걸음을 반복하고 있는 것일지도 몰랐다. 열여덟 살이라며 자신을 소개하던 디케이, 솔도 딱 그 나이에 멈춰 있었다. 이제 막 스무 살이 된 지금이나 스물다섯 살의 폐인 백수였던 때나 달라진 건 아무것도 없었다.
‘이럴 거면 그냥 사고도 없던 걸로 해 주지.’
제 핸드폰에 들어 있던 낯선 가족사진처럼. 솔은 ‘꿈이든 게임이든 빨리 그냥 끝나 버렸으면 하는 헛된 바람을 내뱉었다. 천천히, 시야 구석에 자리한 숫자들이 빠르게 줄어들듯 솔의 생각도 정신없이 흘러 다녔다. 영호에게 핸드폰을 돌려받아야 한다는 생각과 집에 어떻게 갈까, 꿈에서 깨면 의찬이에게 제일 먼저 전화해야지. 이런 일상적인 생각들이 머릿속을 정처 없이 떠돌았다.
좁디좁은 화장실 한 칸, 등에 닿은 타일이 시릴 정도로 차가웠지만, 오히려 이 좁고 차가운 공간이 솔의 마음을 편하게 만들었다. 이따금 들리는 물이 수도관을 빠르게 내려가는 소리나 똑똑 물방울이 떨어지는 소리에 묘한 안정감을 느끼며 솔은 시야에 떠오른 숫자들이 어서 0이 되길 기다렸다.
이 꿈에서 깨어나면 연습실에 남아 있을 태오를 비롯한 다른 세 사람은 어떻게 될까. 돌아오지 않는 자신을 기다릴까? 이상한 생각이었다. 꿈은 깨면 거기서 끝이었다. 줄 맞춰진 하얀 타일 위로 테두리가 민트색으로 밝게 빛나는 알림 창이 떠올랐다. 어느새 남은 시간은 30초. ‘시스템 종료’라는 건 대체 어떤 것일까. 솔은 태평하게 천천히 줄어드는 숫자를 빤히 바라보았다.
[남은 시간 00:00:00]
마침내 모든 숫자가 0이 되었다.
[<튜토리얼 : 댄스 신고식!> 실패]
[시스템 종료]
“그냥 이렇게 끝나는 건가?”
허무하게 사라지는 알림 창에 솔은 의문을 표했다. ‘혹은 그에 상응하는 고통’이라고 의미심장하게 쓰여 있던 것과 달리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상태 창’이라고 두어 번 말을 뱉어 보았지만, 민트색 테두리의 상태 창은 다시 떠오르지 않았다.
이 이상한 꿈 같은 상황에서 영화처럼 깨어나지도, 그 무엇도 변화하지도 않았다. 고요한 혼자의 시간을 만끽하던 솔은 갑자기 느껴지는 거대한 이질감에 고개를 기울였다. 마치 시간이 멈춰 버린 것처럼 모든 것이 고요해 솔은 털을 세운 고양이처럼 바짝 긴장하고 자리에서 일어나 화장실 칸 문을 조심스레 열었다.
조금 전까지 똑, 똑 제 심장 박동에 맞춰 떨어지던 물소리가 더 이상 들리지 않았고 공기조차 없는 것처럼 모든 소리가 사라졌다. 모든 것이 멈춰 있었다. 멈춰 버린 세상을 인지한 순간. 고2 여름, 그날과도 같은 거대한 충격이 솔을 덮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