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대표님? 지금은 해외에 나가 계시거든…. 근데 대표님은 왜? 무슨 일 있는 거면 먼저 나나 최 실장님께 얘기해 줄래?”
“아…. 별건 아니고요. 그냥 인사드리고 싶어서요. 언제 오시나요?”
“글쎄….”
말꼬리를 흐리고 무엇 하나 확신을 주지 않는 영호의 대답에 솔은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창백한 얼굴에 호리호리한 몸, 칙칙하게 얼굴을 가린 머리와 실망한 기운이 한데 어우러져 영호까지 기운이 빠지는 기분이었다. 하기야, 일개 매니저가 대표의 스케줄을 낱낱이 꿰고 있을 리가 없었다. 피차 자신도 마찬가지였다.
알림 창에 적힌 말대로라면 이제 막 연습생으로 들어온 처지에 덜컥 대표와 면담 같은 걸 할 수 있을 리가 만무했다. 상황 파악이 잘 되진 않았지만, 이 이상한 일이 솔 자신의 마음대로 끝나지 않는다는 것은 확실했다.
일단 YC 엔터에 남아서 흘러가는 대로 뭐든 하다 보면 어떻게든 되겠지 싶었다. 처음에야 어리둥절하고 혼란스러웠는데 시간이 점차 지나니 그냥 그러려니 싶었다. 꿈이라면 언제든 깨 버리면 없던 일이 되는 것 아닌가. 문득 깨어나지 못하면 어떻게 되는 거지? 하는 생각이 꼬리를 물었지만, 솔은 괜히 찜찜한 생각은 하지 말자며 고개를 좌우로 마구 털었다.
“음…. 그건 나중에 따로 얘기하고 아무튼 솔아, 애들이 지금 좀 예민한 편이야.”
“왜요?”
“어어, 그게. 사정이 있어서 4인으로 데뷔 준비를 해 왔었거든.”
“네. 제가 갑자기 끼어들어서요?”
“콕 집어 그것 때문만은 아니고 아무래도 본격적으로 데뷔 윤곽이 잡히니까, 압박감을 많이 느끼고 있어. 그래서 다들 조금 날카로워져 있거든…. 그러니까 너도 힘들고 어려운 일 있으면 꼭 나한테 먼저 말해 줘.”
“……네.”
“그래, 고맙다!”
차에 시달려 머리가 지끈거리는 와중에 그의 표정에서부터 일일이 감정이 티가 나 영호의 눈치를 살피는 게 퍽 피로했다. 무척 어려운 이야기라도 하는 듯, 땀을 뻘뻘 흘리며 우물쭈물해 하는 영호의 모습에 솔은 눈치를 살피며 그가 바라는 답을 내놓았다.
안경을 씌워 둔 감자 같은 모양새의 영호는 말하기 껄끄러운 일엔 말꼬리를 흐리는 버릇이 있는 듯했다.
영호가 말 꺼내기 불편해하는 상황이 무엇인지 대충 짐작이 갔다. 연습실 마룻바닥에서 밥을 먹고 자란 솔이었다. 나이나 기간에 상관없이 포즈를 잡고 서는 순간부터 서로 경쟁자였다.
주연에 다가가기 위한 전쟁. 발레든 현대 무용이든, 한국 무용이든 음악이 시작되면 매일 얼굴을 마주하는 사람들끼리 경쟁해야 한다. 보이지 않는 날카로운 칼날 같은 것이 서로의 사이를 아주 아슬아슬하게 스쳐 지나갔다.
누군가는 열등감을 느끼기도, 누군가는 질투와 증오를 품기도 했다. 하지만 음악이 끝나면 다시 웃으며 그 편협한 인간관계가 전부라는 듯 어울려야 했다.
어린 나이였음에도 솔은 그런 환경의 중심에 놓여 있었다. 피차 아이돌 연습생도 무용과 딱히 다를 바가 없을 것이었다. 어린 시절부터 시작된 연습과 늘 마주치고 서로의 장단점을 극명히도 알고 있는 좁아터진 집단. 그 바닥에 갑자기 어디서 굴러먹었는지도 모를 신입이 들어왔으니 예견된 절차였다.
“참. 그리고 원래 네가 어제부터 합류하기로 했었는데.”
“어제요?”
“응…. 다음부턴 급한 일이 있으면 꼭 연락해 줄래? 시작부터 이렇게 연락 안 되고 시간 지키지 않으면 안 되거든…. 솔아. 널 위해서라도 시간 약속은 철저히 해야 해.”
“네. 앞으론 꼭 연락할게요.”
“그래. 무슨 큰일 있었던 건 아니지? 짐이라고 달랑 옷 몇 개만 와 있고 온다고 한 날에 안 와서 다들 걱정했었어.”
“그냥, 좀 아팠어요.”
“아팠어? 아프고 병원 가야 하면 꼭 나한테 바로바로 말해야 해. 건강이 최우선이야.”
“네, 네. 그런데 어디 가는 거예요.”
“아, 연습실. 지하에 있어.”
영호와 이야기를 들으며 대충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이던 솔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생각 없이 영호를 따라 걷기만 했더니 로비에서 안내 데스크를 지나친 이후부터의 구조가 아리송했지만 구태여 다시 물어보지는 않았다. 여기에 올 일이 또 있을까 싶었다.
한 층 내려왔을 뿐인데 지하라고 공기가 다른 기분이었다. 문이 굳게 닫힌 복도를 지나가자 묘한 긴장감에 솔의 생각이 제멋대로 흘러 다녔다.
스트레스 상황에 놓이면 솔은 집중력을 잃고 이렇게 하등 쓸모없는 생각을 했다. 영호가 무어라 계속 솔에게 말을 걸었지만, 솔은 엉뚱한 생각에 한창이었다. 왜 기획사 연습실은 늘 지하에 있는 걸까. 층간 소음 때문에? 이왕 돈 쓰는 거 층간 소음 없게 빵빵하고 뷰 좋은 곳에 만들면 좋을 텐데. 하긴, 어차피 뷰 좋은 곳에 만들어 줘도 아무 쓸모가 없었을 것이다. 자신도 그러하지 않았던가. 연습 중에 무용수가 볼 것은 거울에 비치는 제 모습뿐이었다.
이 알 수 없는 상황에서도 끊임없이 드는 허튼 생각에 솔의 입가에 웃음이 걸렸다. 층간 소음 때문이라는 생각이 좀 우스웠다. 그가 무슨 생각을 하건 말건, 매니저 김영호는 하고 싶은 말이 더 남았는지 우물쭈물했다.
영호의 어색한 행동을 뒤늦게 발견한 솔이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영호는 어색하게 웃으며 잠시만 기다려 달라며 솔을 남겨 두고 2번이라 써진 문을 살짝 열었다. 조금 열린 문틈으로 음악 소리와 마룻바닥이 고무 밑창에 마찰하는 끽, 끽 하는 소리가 새어 나왔다.
고양이 담을 넘듯 영호가 연습실에 들어가자 소음이 멈추고 정적이 찾아왔다.
솔은 복도에 덩그러니 서서 굳게 닫힌 문을 노려보았다. 머리를 세게 박으면 이 이상한 꿈에서 깨어나지 않을까? 솔은 여전히 이 상황이 꿈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아니 그렇게 믿고 싶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 모든 것이 설명되질 않았다.
갑자기 눈앞에 이상한 알림 창이 떠오르고 자신이 이미 한 차례 살아왔던 스무 살로 되돌아가는 일. 솔은 손을 뻗어 문고리를 잡아 보았다. 서늘한 촉감, 딱딱한 금속의 재질. 그의 모든 감각이 이것은 지극히 현실이라고 외치고 있었지만, 솔은 끝없이 부정했다. 꿈이라면 조금 일탈을 해도 괜찮지 않을까 싶었다. 예를 들자면 이대로 문을 열고 쳐들어간다거나. 뒤를 돌아 그대로 줄행랑을 친다거나. 발바닥이 근질거리던 그 순간, 굳게 닫힌 문 너머에서 날카로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성솔? 그만두는 거 아니었어요?”
“지금 왔어요? 안 올 줄 알았는데.”
“아니야! 얘들아. 어제 아파서 연락을 못 했대.”
“…활동할 때도 몸이 안 좋으면 그런 식으로 연락도 없이 일정 펑크 낼 거래요?”
“태오야. 너까지 왜 그래. 진짜 많이 아파서 연락을 못 했대. 다들 이해하지?”
영호의 대답에 솔은 쓴웃음을 지었다. 대학교 때도 이따금 저런 식으로 솔을 두둔해 주던 동기가 있긴 했었다. 그것도 한두 번이지 반복되면 오히려 저렇게 두둔해 주던 사람들이 더 냉정하게 돌아섰다. 목소리는 각기 달랐지만, 그 목소리 안에 담긴 감정들은 비슷했다. 예상은 했지만, 시작부터 난항일 모양이었다.
솔이 파악한 바로는 ‘사실 솔은 어제부터 합류하기로 하여 약속 시간을 잡아 두었고 아무런 연락도 없이 나타나지 않았다. 멤버들은 솔이 참여하지 않는 것, 혹은 참여한다 해도 시간, 약속 관념이 없는 놈에게 딱히 우호적인 모습을 보여 주고 싶지 않다.’였다. 첫 단추부터 꼬여 버렸지만, 솔은 비실비실 웃음이 나왔다. 대학교 생활 내내 겪었던 일상적인 일이었다. 스무 살 넘게 먹고 성인이라면서 그런 대학에도 우습게도 결국 왕따는 있더라.
모로 보나 거꾸로 보나 그렇게 상황을 만든 건 솔 자신이었다. 지금 벌어진 일처럼 일방적으로 약속을 어기거나 무책임하게 잠수를 타거나 하는 것들 말이다.
자초한 일이라 딱히 원망이 들지도 않았다. 그냥 너무 뻔한 레퍼토리라 ‘꿈에서도 내가 그럼 그렇지.’ 하고 스스로에게 웃음이 났을 뿐이었다.
“아, 꼭 같이해야 해요? 어차피 우리끼리 그간 계속해 왔는데.”
“잘할 거야! 대표님이랑 최 실장님이 너희랑 솔이가 만나면 정말 좋은 그룹이 될 거라고 그러셨어. 진짜 좋은 시너지가 날 거래.”
“좋은 시너지요? 얼마나 대단하시길래.”
“막내야, 태오야, 영호 형 무안하겠다. 우리 잘되라고 그러신 거라잖아.”
“지호야, 고맙다. 그래, 그래. 태오야. 반겨 줄 거지? 가람아? 막내야?”
영호의 물음에 아무런 답이 없었다. 직접 보지 않아도 싸늘할 분위기가 절로 느껴졌다. 솔은 굳게 닫힌 문을 앞에 두고 어색하게 웃었다. 조금 있다가 영호가 부르면 저 어색하기 짝이 없는 공간에 들어가야 했다. 아무리 꿈이고 게임이라지만 이대로 도망치고 싶은 생각이 앞섰다.
‘진짜 도망칠까?’ 불현듯 든 생각에 문고리를 놓고 솔은 곧 실행할 것처럼 몸을 돌렸다. 금방이라도 달려 나갈 듯 무릎을 구부린 순간, 문이 열리며 영호가 솔의 이름을 불렀다.
“솔아! 인사해. 여기는 지금 일단 임시 리더인 태오.”
도망칠 마음을 먹었던 솔은 영호와 눈이 딱 마주치자 도둑이 제 발 저리다고 흠칫, 어깨를 떨었다. 영호가 애써 웃으며 솔을 잡아끌어 연습실 안으로 들여 넣었다. 영호에 손에 끌려 들어가며 솔은 넋이 나간 사람처럼 태오를 쳐다보았다.
짙은 눈썹 아래에 자리 잡은 눈매가 짙어 동물처럼 매섭고 강렬하게 느껴지는 미남이었다. 얇은 점퍼 하나를 걸치고 곧 쓰러질 앙상한 나뭇가지 같은 솔과 달리 남자는 한여름의 뙤약볕 아래에 서 있는 듯 그야말로 여름 같았다. 안타까운 점이 있다면 ‘태오’의 표정이 겨울처럼 싸늘하단 점이었다. 그런 그를 바라보며 솔은 활짝 웃었다. 왜, 웃는 얼굴에 침 못 뱉는다는 말도 있지 않던가.
“태오야…. 뭐 해. 인사 안 할 거야? 득…. 아니 디케이, 우리 막내가 먼저 인사할래?”
“굳이 그래야 해요?”
“윤태오입니다.”
바닥에 널브러져 있던 다른 남자가 눈썹을 한껏 들어 올리며 영호의 말에 대답했다. 막내는커녕 제일 형같이 조금은 험악하게 생겼지만 어쨌든 그가 막내인 듯했다.
웃음을 머금은 솔의 시선이 방황했다.
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디케이와 그 옆에 서 있는 영호, 태오를 번갈아 보며 얼굴에 경련이 일듯 활짝 웃었다.
웃는 얼굴에 침 못 뱉는다더니.
그런 솔을 보며 태오는 마지못해 인사한다는 듯, 손을 내밀며 싸늘하게 말을 내뱉었다. 정중하기 짝이 없다 못해 딱딱한 목소리의 그 한마디가 매서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