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Chapter 11 (12/13)

Chapter 11

『너희들 봤냐? 에녹이 촬영 끝나자마자 난우 막 잡아먹을 듯이 달려들던 거? 아주 짐승이 따로 없더라.』

『예전에 카라무어 페스티벌 때 난우가 먼저 약 먹은 애처럼 앵기던 걸 잊지 말자. 평소엔 내숭 떨다가 분명 둘만 있으면 장난 아닐걸?』

『맞아. 우리 에녹이 완전 맛이 갔을 때부터 내가 정난우 요물이라고 말했잖아! 그 때 그 증거들이 홀라당 드러났고!』

『나 여기서 이런 말하면 좆나 다구리 당할 거 같은데, 나 솔직히, 에녹이 부럽다. T_T 나라도 난우가 저렇게 달려들면 해롱댈 거야. 남자로 성전환 수술하고 나도 몇 달 따라다녀 볼까? 에녹 러브스토리 그대로 벤치마킹해서. 난우가 그런 저돌적인 상대에 약한가?』

『어이, 현실을 외면하지 마. 저돌적이고 그딴 게 문제가 아닌 것 같은데?』

『맞아. 성전환 수술해서 우리 에녹보다 잘생겨질 자신은 있고?』

『더 섹시해질 자신은? 돈 더 잘 벌 자신은?』

『이 씹 새끼들 진짜 잔인해!』

에녹은 제법 진지하게 정난우의 SNS를 사찰하다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리 쫓아다녀도 될 놈 되고 안 될 놈 안 되는 게 인생이라는 거였다. 저도 이렇게 죽도록 맘고생해서 다시 찾았는데 다른 놈이라고 뭐 장밋빛일 리가 없는 거다.

이제 정난우와 제 팔로워들은 거의 싸우다 정든 상태였다. 자기들끼리 서로 투닥투닥하다가도 ‘어떤 놈이 우리 난우一혹은 에녹一 욕했어!’라고 누군가 알리면 무리를 지어 사이버테러를 가는 게 일상이었다.

정난우의 과격 팬들이 제 팬들까지 오염시킨 거다. 이제 두 뭉텅이가 한통속이 돼서 아주 깡패들이 따로 없었다.

캐나다 캘거리에서 그제 마지막 신 촬영이 있었다. 인터뷰 하러 찾아온 취재진들이 몰려올 게 빤한데 루스는 하필 극적으로 눈물을 쏟아내는 장면을 배치해 뒀다. 이것도 다 홍보의 일종이라고 뻔뻔하게 말하던 루스는 이제 정말 장사꾼이 다 됐다.

오케이 사인이 떨어지고 잠시 숨을 고르며 감정을 추스르고 있을 때였다. 그런데 하필이면 그 때 마침 정난우가 촬영 장소에 나타나 버린 거다. 제가 안 달려가고 배기냐 이 말이다.

많이 아프고, 많이 외로웠을 그 몸을 으스러지기 직전까지 안아줬다. 네가 제일 힘든 순간에 내가 도망쳐 버려서 미안하다고, 그렇게 몇 번이고 뇌까렸다. 정난우는 늘 그랬듯 꼭 마주 안으며 말했다.

괜찮아요, 앞으로 같이 있을 거잖아요. 그거면 돼요.

에녹은 품안에서 곤히 자는 정난우를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그새 조금 더 길어진 머리가 이마를 거의 덮고 있었다. 훤히 드러난 이목구비는 촉촉하고 보드라워 보였다. 편안히 감긴 눈꺼풀 위에 살짝 입을 맞추고 나서 소리를 죽여 일어났다.

그대로 나가 전기코드를 찾아갔다. 전 날 가져온 미니 믹서에 자몽을 잘라 넣고 갈았다. 두 잔 만들어서 돌아갔을 때, 정난우는 멍하니 앉아 눈을 깜빡이고 있었다. 잠이 덜 깼는지 저를 보자마자 두 팔을 벌렸다.

다가가 잔을 사이드테이블에 내려 두었다. 상체를 수그려서 푹 싸매 안아주며 말했다.

 “좋은 아침.”

 “네. 좋은 아침.”

맞닿은 맨살 감촉이 좋은지 정난우는 흐느적거리며 몸을 비벼왔다. 에녹은 피식 웃으며 귓바퀴를 깨물었다.

 “얘가 아침에 유혹하면 자칫 큰일 난대도 통 들어먹질 않네.”

 “유혹한 건 아니지만…… 그런데 왜요? 이제 촬영도 다 끝나서 개봉

전까지는 프로모션 스케줄만 남은 거잖아요.”

 “그런 말은 꼭 한가하니까 안아주세요, 하는 것 같아. 그러니까 그만 꼬리치고 일단 주스부터 마셔.”

몸을 일으켜 잔을 내밀었다. 정난우는 억울한 표정을 짓긴 했지만 두 손으로 공손히 받아 꼴깍꼴깍 삼켰다. 나란히 주스 한 잔 씩을 비우고 침대에서 한 30분을 노닥거렸다. 영화 촬영 스케줄이 끝이 나니 정난우는 신이 나는지 평소보다 말이 많았다.

 “정운이가 아무래도 이번 콩쿠르에서 삼 등 안에 들 것 같아요. 우승하면 좋겠지만 아직 어리니까 딱 수상하는 것만 목표로 하라고 했거든요. 만약 이번에 수상하면 우리나라에서는 두 번째예요. 크리스가 첫 번째였거든요.”

 “그래, 대단하네.”

정난우의 한 토막 대화에 녹아 있는 두 사람의 이름이 다 마음에 안 들었다.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면서 에녹은 그냥 대강 맞장구만 쳐 줬다.

강도영은 한 달 쯤 전 문서 상자를 보내 왔다. 죄다 한글이라 무심한 눈으로 슥슥 훑는데 그 안에 강도영이 남긴 짧은 메모가 있었다.

『난우 친척들의 그간 차용증들과 각서입니다. 내용은 시간 날 때 알아보시고, 꼭 필요한 순간이 아니면 난우에게는 비밀로 해 주세요.』

제가 해석해서 주면 될 걸 그렇게 떡 보내버린 거다. 정난우에게는 비밀이라니 결국 사람을 사든가 제가 한국말을 마스터해야 한다는 뜻이었다. 엿 먹이려는 게 분명했다.

어차피 촬영도 다 끝났겠다, 언어는 차츰 배워둘 거지만 정말 한 가지도 맘에 차는 구석이 없는 놈이었다.

 “자세히 보니까 정운이랑 저랑 눈이 좀 닮은 것 같아요. 다른 곳은 다 자기 친아빠 닮은 것 같은데…… 에녹이 보기엔 어땠어요?”

 “하나도 안……닮진 않았고, 뭐 어떻게 보면 눈매는 좀 비슷한 것 같기도 하고.”

어쩐지 그렇게 애틋하게 보더라니, 역시 제가 의처증 같은 게 있어서가 아니었던 거다. 이런 대형 이슈는 정말 상상조차 못했다.

정난우의 울타리에 갑자기 두 명이 더 들어찼다. 강도영이 손 털 낌새가 보여 흡족해하던 참에 맞은 날벼락이었다.

성인이 되자마자 독립하는 걸 당연하게 생각해 온 에녹에게 한국식 가족애는 이해 불가능한 영역이었다. 그에 더해 어릴 때 생이별한 경력까지 있으니 정난우가 더 유별나지는 걸 막을 길이 없었다.

안 그래도 제가 영화 작업에 들어가면 스케줄 때문에 주말부부나 마찬가지인데 툭하면 한국 가자고 조를 기세였다. 에녹은 영원히 계속될 것 같은 신혼을 기뻐해야 할지 슬퍼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정난우는 뽀얗게 접힌 눈 꼬리를 문지르며 웃고 있었다. 용기 내서 어머니와 대화하고 온 날부터 내내 이렇게 실실거렸다.

에녹은 피식 웃다가 아프지 않게 뺨을 깨물었다. 정난우는 아련히 눈가를 좁히며 말했다.

 “이제 한가해졌으니까 다음에 제 엄마들이랑 같이 밥 먹으러 가요.”

그래. 그 얘기 왜 안 나오나 했다, 내가.

에녹은 까만 머리카락을 슥슥 쓸어 넘겨주었다. 나른히 내리뜬 눈으로 기꺼이 고개를 끄덕였다.

 “원한다면.”

 “영화 개봉하면 다 같이 보러 가고요.”

 “그렇게 해.”

 “엄마가 에녹 참 잘 생겼대요.”

 “앞으론 더 잘 생겨질 거라고 전해 드려.”

 “…여기서 더요?”

정난우가 눈을 둥그렇게 떴다. 에녹은 한쪽 팔을 스윽 들어 올리며 말했다.

 “체중 조절했잖아. 근육들이 너무 날씬해졌어. 이제 촬영 끝났으니까 다시 잘 먹고 웨이트 트레이닝해서 이전 몸으로 돌아가야지. 근육이 줄어(1줄잘림).”

에녹이 희미하게 눈웃음을 지었다. 정난우는 멀거니 눈을 깜빡거리며 생각에 잠겼다.

그러고 보니까 그와 처음으로 살을 섞기 시작한 건 그가 체중조절에 들어간 지 두 달이 조금 넘었을 때였다. 볼 때마다 미세하게 날렵해지기 시작해서 크게 체감을 못했다.

잠자코 내려다보던 에녹이 침묵을 밀어내며 물었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아. 우리 처음 만났을 때. 에녹의 몸이 어땠더라 곰곰이 떠올려보려고 했는데 기억이 잘 안 나서요.”

 “안 날 만 하지. 나 몸값 비싼 거 내가 제일 잘 알아. 아무데서나 안 벗어.”

에녹은 반쯤 농담 섞어 말했다. 정난우는 그렇구나, 하며 고개를 주억거리다 궁금한 눈빛을 했다.

 “그런데 근육을 복구하는 거랑 섹스가 무슨 상관이 있어요?”

 “파워가 다르지.”

 “……파워?”

정난우는 맹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했다. 에녹의 목 안에 낮은 웃음이 고여 들었다. 차가운 눈동자 위로 열은 정염이 일렁거렸다.

 “정력은 하체 근력과 밀접한 관계가 있어. 거기에 지구력까지 더해지면 남자는 밤에 무적이 되는 법이지. 더 세게, 더 빠르게, 더 오래.”

에녹은 빙긋 웃으며 정난우의 가랑이 사이로 허벅지 한쪽을 구겨 넣었다. 슬쩍 무릎을 들어 다리를 벌리자 매끈한 뺨에 열꽃이 올라왔다. 에녹은 통통한 엉덩이를 맘껏 주무르며 살짝 입술을 마주 댔다. 그 상태로 속삭였다.

 “내가 아주 끝내준다니까. 근육 빼기 전에 안겨 봤으면 어제도 더 해 달라고 졸랐을 걸?”

정난우는 조금 난처하게 웃으며 대꾸했다.

 “에녹은 이대로도 충분할 것 같아요…….”

에녹은 웃는 낯짝으로 혀를 찼다. 아직 뭘 모르는 거다. 말해 줘도 이해 못할 테니 몸으로 가르쳐주는 수밖에 없었다.

에녹은 엉덩이를 톡톡 두드려주며 화제를 돌렸다.

 “이러고 있다가 비행기 시간 늦겠다. 그만 일어나자. 생일파티 하러 가야지.”

정난우는 네, 하며 얼른 몸을 일으켰다. 발가벗은 몸으로 곧장 욕실로 달려가는 뒷모습을 보며 에녹은 또 피식 웃었다.

정난우와 그의 매니저들, 그리고 에녹, 이 넷은 이제 절친처럼 익숙한 덩어리로 오렌지카운티 공항에서 내렸다. 나란히 몸을 실은 리무진은 곧장 에녹의 집으로 달렸다. 오늘의 파티장소였다.

리무진이 주차장에 멈춰 서자 일행들은 캐리어를 끌었다. 정난우는 오늘도 달랑 바이올린 하나만 맸다. 매니저들은 집 밖에서부터 활짝 열린 입을 하고서 입장했다.

인기척을 느낀 루스가 1층의 다이닝에서 걸어 나왔다. 그는 오늘의 파티를 위해 먼저 와서 기다리던 중이었다.

케이터링 서비스를 예약해 두고 내내 자다가 조금 전에 일어났다. 그의 뒤로는 파티 초대객 자격으로 뉴욕에서 날아 온 이정운도 있었다.

 “이거 장난 아니네요. 할리우드 스타 저택 이런 거 잡지 같은 데 실릴 땐 그러려니 하고 넘겼는데…….”

한태영이 새삼스런 눈으로 에녹을 힐긋거리며 중얼거렸다. 루스가 그의 손에서 캐리어 하나를 덜어가며 한마디 거들었다.

 “살롱만 봐도 견적이 나오지 않습니까. 돈을 아주 쏟아 부었죠.”

루스 역시 처음 이 집에 왔을 때 조금 기가 막혔던 추억이 있었다. 소파, 카펫, 스탠딩 조명에 인테리어 소품까지 다 알만한 브랜드였다. 공간 마다 나름의 통일감도 살리면서 고급스러운 게 아주 정성스럽게 고른 티가 났다.

에녹은 원래 은근히 과소비와 먼 남자였다. 사고 싶은 건 다 사는 성격이긴 한데 사고 싶은 게 의외로 없는 놈이었다. 스무 살 때 샀던 팬텀도 사고만 안 났으면 여태껏 타고 있었을 거다.

그건 집도 마찬가지였다. 꼭 필요해 들여놓은 가구들 속에서 몸만 부대끼던 녀석이었다. 적재적소에 배치된 장식물들을 보며 이번엔 아주 작정을 했다는 게 딱 느껴졌다.

 “주세요. 제가 옮길게요.”

이정운은 에녹이 잡고 있던 캐리어 손잡이를 쥐며 말했다. 에녹이 막 괜찮다고 거절을 하려던 참이었다. 정난우가 먼저 끼어들었다.

 “아냐, 정운아. 비행기 타고 오느라 많이 피곤했을 텐데 그런 것까지 신경 안 써도 돼.”

 “겨우 몇 시간인데요.”

이정운은 무표정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에녹은 제 눈썹이 칼춤을 추는 걸 느꼈지만 침묵을 택했다. 동생이잖아, 그렇게 이해해 보려고 노력 중이었다.

에녹은 한태영에게 턱짓하며 말했다.

 “다들 일층 침실무거나 하나씩 쓰면 돼요. 알아서 짐들 풀어요.”

 “짐은 일단 여기 두고 그 전에 집 구경부터 합시다. 우리 난우 씨 어디서 살지 꼼꼼하게 봐야겠네요!”

 “저도 보고 싶어요!”

한태영과 율리안은 눈을 초롱초롱 빛냈다. 잘난 얼굴에 하도 익숙해져 있던 그들은 이제야 할리우드 배우의 재력을 몸소 체감하며 들떠 있는 상태였다. 연애 결사반대 외치던 과거는 까맣게 잊은 듯했다. 아예 정난우를 껍데기 벗겨 갖다 바칠 기세였다.

에녹이 피식 웃었다.

 “집 구경보다는 일단 내 생일선물부터 공개해야 할 것 같은데. 순서가 그게 맞거든.”

다들 의아한 표정을 했다. 에녹은 첨언 없이 그대로 앞장섰다. 캐리어들은 살롱에 아무렇게나 방치되었다. 정난우가 바싹 그 곁에 달라붙고 나머지도 뒤를 따랐다.

에녹은 1층을 쭉 돌아가더니 구석의 아치형 오픈도어에서 멈췄다. 커다랗고 얇은 입간판 같은 게 입구를 막고 있었다. 에녹은 셔츠 끝자락을 감아쥐고 있는 정난우를 비스듬히 내려다보며 말했다.

 “이 방이 선물이야.”

정난우는 느리게 눈만 깜빡거렸다. 짐작이 가는 바는 있었다. 여기는 에녹이 음악실로 만들어주겠다던 공간이었다. 그 동안은 아직 미완성이라며 절대 못 들어가게 해서 그런가보다 했었다. 뭘 완성해야 된다는 건지는 몰랐지만, 아무래도 그가 부족하다고 생각했던 부분이 충족된 모양이었다.

 “생일 축하해.”

에녹이 담담하게 말하며 장해물을 옆으로 밀어 치웠다. 원래부터 뚫려 있던 오픈도어가 그제야 제 기능을 되찾았다.

크림색의 원형 러그 위에 놓인 새하얀 그랜드피아노가 가장 먼저 눈에 띄었다. 매니저들과 정난우의 눈시울이 동시에 휘둥그레졌다. 한태영이 어리벙벙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여기가 바로 음악인의 지상낙원인가요?”

에녹은 어깨만 으쓱해 보였다. 루스는 문틀에 기대선 채 기막힌 눈을 했다. 피아노와 오르간, 기타, 오디오, 대형 엠프, 그 외 등등 다 그러러니 할 수 있었다. 그런데.

 “네 순정을 돈지랄로라도 티내려는 건 내가 뭐라고 안 하겠는데, 굳이 그랜드하프까지 들여놓은 이유는 뭐냐? 그리고 저건 또 뭐야? 저거 동양 악기 아냐?”

 “가야금이에요.”

정난우가 멍하니 감탄하다 대신 대답했다. 그리고 얼른 다가가 벽에 기대 세워 놓았던 가야금을 내려 바닥에 앉았다. 어디서 났냐는 질문조차 없이 열 두 개의 현을 이리저리 튕겨보기 바빴다.

 “조율이 덜 됐네요.”

정난우는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여기저기 만지기 시작했다. 에녹이 아, 하며 발을 옮겼다.

 “그거 튜너 써서 직접 해야 된다고 했어. 잠깐만. 찾아줄게.”

 “아뇨. 괜찮아요. 저 예전에 한국에서 가야금이랑 협주한 적 있었어요. 신기해서 튕겨도 봤고요.”

매니저들이 저택의 위용에서 에녹을 달리 봤다면, 이번에는 정난우의 명성을 절감할 차례였다. 튜너 없이 현을 조율하는 건 정난우에게 식은 죽 먹기였다. 수납장에서 튜너를 찾으려던 에녹은 좀 얼이 빠졌다가 이내 눈가를 접었다.

 “그래. 네 귀가 제일 정확하겠지.”

이리저리 눌러보고 뜯어도 보다가 정난우는 약간 어설픈 아리랑을 연주했다. 현의 길이를 눈으로 더듬어 가며 음의 높낮이를 기억해 뒀다. 고개를 갸웃하고 또 한 번, 그리고 또 한 번씩 반복될 때마다 음의 연결은 급속도로 매끄러워져 갔다.

한태영은 곧장 휴대폰 인터넷 창을 열어 유튜브에서 가야금 연주 영상을 검색했다. 그 중 비교적 단순해 보이는 걸 가장 큰 볼륨으로 재생시켰다.

 “난우 씨, 이거. 이거! 할 수 있겠죠?”

한태영은 정난우가 할 수 있으리라 믿어 의심치 않으며 기대 섞인 눈을 빛냈다. 정난우의 귓바퀴가 정신없이 쫑긋거렸다.

갑자기 귓속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음의 흥수에 일순 당황했다. 아직 현 하나에 담긴 고유 음색들을 다 익히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현대 가요였지만 당연히 그게 어떤 곡인지도 몰랐다. 정난우는 가만히 듣다가 손을 움직였다. 차분히 대표음들부터 따서 현에 실었다. 중간 중간 끼어드는 리듬은 시간이 흐를수록 조금씩 채워져 갔다.

그 광경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루스는 문득 실소했다. 이런 표현 입 밖으로는 때려 죽여도 못 내뱉지만, 음악을 사랑하는 한 사람으로서 정난우와 한 시대를 같이 사는 건 정말 축복이었다.

이제 정난우가 클래식의 미래라는 것에 이견을 달 사람은 없었다. 카라무어 페스티벌 이후 정난우에게 적대적이었던 소수의 비평가들마저 하나 둘 태도를 바꿨기 때문이었다.

한 때 SNS 테러당하고 시름시름 앓던 독설가 존 레이만 역시 마찬가지였다. 정난우의 연주는 정신적 후유증 치료비를 선불로 받지 않고서는 들어줄 수 없다고까지 했던 그가, 처음으로 항복을 선언했다.

『내가 그토록 기다리던 이상적인 바이올리니스트가 오늘 태어났다. 이제 드디어 나도 정난우의 열성팬들에게 공감할 수 있게 되어 진심으로 기쁘다.』

하지만 또 흠씬 까였다. 너 따위 인정은 필요 없다며 또 극성 맘들이 한바탕 뒤집고 간 탓이었다. 난우는 원래부터 최고였어, 그들의 주장은 비논리적이며 또한 논리적이기도 했다.

정난우의 가야금 연주가 끝났을 때 모두 한 마음으로 박수를 쳤다. 정난우는 부끄러운 듯 쭈뼛쭈뼛 가야금을 다시 정리해 뒀다. 그리고 옆에 딱 붙어 있는 에녹에게 물었다.

 “근데요, 에녹. 이건 어떻게 살 생각을 했어요?”

에녹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대답했다.

 “너 처음으로 LA 내 집 온 날 그랬어. 어릴 때 바이올린 눕혀 놓고 가야금 튕기듯이 놀았다고. 루스랑 한이 가야금에 대해서 묻고 답하고 그랬던 거 갑자기 생각나서 구했지.”

 “난 취해서 다 잊었는데, 그런 것도 기억해요?”

 “기억력 끝내준다고 몇 번을 말해. 아무튼 마음에는 들어?”

 “네. 정말 맘에 들어요. 고마워요.”

정난우는 선물 받은 사람답게 활짝 웃었다, 에녹은 살짝 올라온 뺨을 손바닥으로 살살 치며 미소 지었다.

 “그럼 됐어. 저기 하프도 갖고 놀아. 가야금인지 뭔지 저건 열두 줄 밖에 없어서 금방 적응했는데 하프는 어때? 딱 봐도 줄 겁나 많아 보이는 데.”

 “하프는 현이 마흔일곱 개예요. 이건 한 번도 못 해 봤는데…….”

정난우는 진지한 표정으로 하프 주위를 뱅글뱅글 돌았다. 손가락 끝으로 현들을 죽 쓸어보긴 했지만 그게 끝이었다. 유심히 살펴보다 결국 고개를 흔들었다.

 “이건 이론부터 좀 봐야 할 것 같아요. 손가락으로 연주한다는 것만 알지 다른 건 전혀 모르거든요. 괜히 잘못 건드렸다가 망가질까 겁나네요.”

 “그래. 나중에 인터넷이라도 봐.”

 “네!”

대답하는 목소리가 그 어느 때보다 힘찼다. 다른 것들도 좀 만져보라고 권하자 정난우는 환한 표정으로 음악실 곳곳을 돌아다녔다. 널찍한 공간 곳곳에 배치된 악기들이 차례로 공평한 승은을 입었다.

그랜드피아노에 앉아 소나타를 연주할 때는 행복의 기운이 폴폴 흘러 나왔다. 집 명의 나눠준다고 할 때는 밍밍한 반응이더니만 집 속의 방 한 칸에서 온 세상을 다 얻은 표정이었다. 참 희한한 녀석이었다.

어찌 되었든 딱 좋은 타이밍이었다. 에녹은 비장의 무기를 꺼내들 시점임을 정확히 인지했다. 정난우가 피아노 덮개를 닫고 일어섰을 때였다.

 “하나 더 있어.”

에녹이 구석의 금고로 다가가며 말했다. 마냥 신난 정난우는 금세 따라붙었다. 에녹은 다이얼을 몇 번 돌려 조작하고 열쇠를 꽂아 돌렸다. 끼익, 약간은 뻑뻑한 듯한 금고 문이 열렸다.

다섯 쌍의 시선이 그 안으로 일제히 빨려 들어갔다. 그늘에 잠긴 내부에는 리본 묶인 바이올린 케이스 하나만 덩그러니 들어 있었다.

루스와 매니저 둘은 어떤 막연한 예감을 느꼈다. 저 금고는 저 단 하나의 악기를 위해 존재하는 것 같았다. 그리고 어쩐지 저 악기의 실체를 알고 싶은 듯 알기 싫은 기묘한 감상을 떠올리고 말았다.

쪼그려 앉은 정난우만 멀뚱멀뚱 눈을 깜빡이다 손을 뻗었다. 리본을 척척 풀고는 케이스를 달랑 집어 들어서 열었다. 모두가 예상했던 대로 바이올린이었다.

에녹이 담담하게 말했다.

 “보증서 있어. 진품 스트라디바리우스야.”

한태영과 율리안이 ‘스트라디바리우스!’ ‘미쳤다!’ ‘저게 얼마짜리……! 등등을 외치며 다급히 숨을 집어삼켰다. 두 사람 모두 턱이 땅에 떨어질 기세였다. 그리고 루스는 기막힌 표정을 이정운은 약간의 호기심 깃든 표정을 했다.

이건 뭔가 싶어 별 생각 없이 요리조리 살펴보던 정난우도 흠칫 고개를 쳐들었다. 촘촘하게 속눈썹 박힌 눈시울이 함지박만 하게 벌어졌다.

씹고 놀기 좋게 통통한 입술은 움찔움찔 움직이는데 정작 말은 못 내뱉고 있었다.

 “침 흘리겠다. 입 좀 닫아.”

에녹은 깊이 허리를 숙였다. 정난우의 아랫입술을 엄지와 검지로 잡아 쭉 끌어올려주며 말을 이었다.

 “바이올리니스트들 꿈이라며. 양쪽 어깨에 스트라디바리우스랑 과르네리 메고 연주여행 다니는 거.”

통곡 같은 과르네리. 아리아 같은 스트라디바리우스.

一라고, 정난우가 말했었다. 그래서 너는 무대 위에서 항상 그렇게 처참하리만치 슬퍼 보이는 건가, 그런 생각을 했었다, 에녹은.

연주자의 감성에는 통곡도 물론 필요하겠지만, 정난우의 그늘 없는 화려한 아리아도 듣고 싶었다. 기회가 오면 무조건 사둬야겠다고 생각했었는데 운이 좋았다. 특히 연애 이후 첫 번째 맞는 생일에 줄 수 있어서 더 뿌듯했다.

 “그…그…그……!”

정난우가 사정없이 말을 더듬었다. 에녹이 한쪽 눈썹을 슬쩍 들어올렸다.

 “그, 그, 그. 뭐.”

정난우는 뇌리를 스치는 토막 기억에 멍해졌다. 두어 달 쯤 전, 인터뷰 도중 한 기자는 스트라디바리우스 한 대가 경매에 나왔단 소식을 알렸다. 호기심은 충만해서 그에 대해 잠깐 이야기를 나누긴 했지만, 물론 제가 가질 수 있을 거라고는 손톱만큼도 생각지 못했다.

과거 전설적인 바이올리니스트의 한 시대를 간직해 화재가 된 이 작은 악기는 일반인들이 상상할 수 없는 몸값을 자랑했다. 기자는 최소 예상 낙찰가만 7백만 불이라고 귀띔해 줬다.

최소 7백만! 최소!

 “사, 산 건 아니죠? 이, 이거, 엄청 비싼 건데…….”

에녹의 미간이 꿈틀 미동을 보였다. 따가운 눈길이 동공을 찔러 와도 정난우는 반응하지 못했다. 어지간히 놀란 모양이었다.

 “그럼 사지, 빌려? 나 빌리는 거 빚지는 거 질색이야. 신용카드, 대출 이런 거 생각도 안 하고 사는 놈이라고.”

 “촬영 하느라…바빴을 텐데, 이걸 어떻게…….”

 “경매에 나왔다는 소식 듣자마자 어머니한테 부탁했어. 내가 낙찰 받아오면 또 기사 뿌려지고 시끄러워질 텐데 그럼 깜짝 선물의 의미도 없잖아.”

에녹은 손끝으로 정난우의 뺨을 톡톡 두드렸다 정신 좀 차려라, 하며 턱짓해 보였다. 한 번 연주해 보라는 소리였는데 정난우는 좀체 활을 쥐지 못했다. 여전히 커다랗게 뜬 눈을 내려 바이올린을 빤히 보기만 할 뿐이었다.

하지만 창백한 뺨에는 점차 발그스름한 열꽃이 피어올라왔다. 그건 마치 10캐럿 다이아몬드 반지로 청혼 받은 아가씨들이나 보여줄 법한 반응이었다.

흡족해진 에녹은 피식 웃으며 정난우의 정면에 무릎을 굽혀 앉았다.

 “좋아?”

정난우는 지체도 없이 열렬히 고개를 끄덕였다. 뜨거운 시선은 여전히 바이올린에 고정되어 있었다.

 “이놈이 몇 백 불짜리 바이올린이랑 뭐가 그렇게 다른데? 막 한 번 긋기만 해도 전율이 일고 그래?”

정난우는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소리 자체로 보면 현대 악기도 명품 악기랑 비교해서 뒤떨어지지는 않아요. 미세한 음색의 차이가 있는데, 그건 취향에 따라 호불호가 갈려서 소리 자체로는 현대 악기를 좋아하는 사람들도 많아요. 다만…….”

 “응. 다만?”

 “예술품 같은 거예요. 수백 년간 많은 솔리스트들의 손을 거치며 소리를 담아낸 악기잖아요. 연주자들은 늙고 결국 흙으로 돌아가도 이 악기만은 피나는 노력과 숱한 감동의 순간들을 기억하고 있어요. 그리고 앞으로도 오랫동안 그렇게 홀로 살아남을 거예요. 그 안에 저 역시 존재할 거라는 거, 아주 영광이죠. 기쁜 일이에요.”

정난우는 바이올린을 제 옆 바닥에 조심히 내려두었다. 그리고 다짜고짜 달려들어 에녹을 와락 끌어안았다. 급습 당한 에녹은 뒤로 기우뚱 기울어 엉덩방아를 찧었다.

 “야, 예고 좀 하고 달려들어.”

핀잔하며 말했지만 에녹은 싫지 않은 표정이었다. 정난우는 무릎걸음으로 더 밀착하며 환히 웃었다.

 “정말 고마워요. 난 뭐 해 줄까요? 말만 해요. 정말 다해 줄게요.”

 “고민해 볼게. 다 들어준다는 약속 절대 잊지 말고.”

에녹은 속으로 이런 저런 음탕한 짓을 염두에 두며 대답을 보류했다. 정난우는 아무 의심도 없이 냉큼 고개를 끄덕이고는 금고 안의 새 송진을 꺼냈다. 에녹은 열심히 활 털에 송진을 바르는 모습을 흐뭇하게 내려다보며 청했다.

 “연주해 봐. 이놈이랑 어울리는 걸로.”

정난우는 풀어둔 현을 조이며 잠시 고민하다 고개를 돌렸다.

 “정운아. 너 프로코피에프 바이올린 소나타도 외워?”

갑자기 날아온 질문에도 이정운은 당황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몇 번이요?”

 “이 번. 같이 해 볼래?”

이정운은 주저 없이 피아노 의자에 앉았다. 정난우가 현을 점검하는 동안 맞잡아 깍지 낀 손을 잠깐 풀었다. 프로코피에프고 베토벤이고 바이올린 소나타라면 사실 거의 다 외우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이정운은 제대로 된 피아노 소나타 하나를 익히기도 전에 바이올린 소나타부터 손끝에 실었다. 특별히 배운 것도, 열망이 있던 것도 아니었다. 그저 그는 어머니가 하는 걸 따라하고 싶었던, 피아노 치는 꼬마였을 뿐

이었다.

두 사람의 눈빛이 부드럽게 오고갔다. 정난우가 웃어 보였다. 이정운의 입술도 희미한 곡선을 그렸다.

정난우가 현을 긋는 순간, 이정운의 손가락도 건반을 눌렀다.

『Prokofiev, Violin Sonata No.2 in D major』

이정운의 어머니이자 정난우의 어머니, 김혜영의 많은 시간은 정난우의 음반과 피아노가 차지했다. 그녀는 정난우의 음악을 틀어 놓고 어린 이정운을 옆에 앉혀 둔 채 피아노를 치고는 했다.

정난우의 데뷔 음반이 전 세계에 뿌려졌을 때부터 시작된 일상이었다. 그녀는 편집증처럼 정난우의 모든 음반과 모든 영상을 수집했다. 수많은 밤 짓무른 눈물을 삼키며 그리워했던 제 아기가 상처 가득한 선율을 쏟아내는 걸 듣고 또 들었다.

그것은 그녀가 스스로에게 내리는 형벌이었다. 현명한 어머니가 되고 싶었으나 결과적으로 제 아기를 죽음보다 더 깊은 어둠에 밀어 넣었다는 걸 깨달은 거다. 그 때의 자신이 병들어 있다는 이유를 들어 변명할 수 없다는 것 역시.

그녀의 자살이 미수로 끝나고 병원에서 눈을 뜬 지 며칠 뒤. 남편이 크게 다쳤다. 수시로 들락거리며 저와 아기를 감시하던 남자들도 발길을 끊었다. 언제고 기회가 되면 달아다니라 생각했던 그녀는 남편이 없는 틈을 타 주저 없이 도망쳤다.

옷장에 걸린 남편의 바지 호주머니를 뒤져 가지고 나온 돈 몇 푼. 그건 해남 땅 끝까지 가는 버스비였다. 그녀는 무수한 풍경이 스쳐지나가는 차창을 하염없이 내다보았다. 다시는 볼 수 없을 제 아기가 벌써부터 사무치게 보고 싶어 엉엉 울고 말았다.

이제는 찾고 싶어도 찾을 수가 없는 거다. 외출을 허락받지 못했던 그녀는, 저와 아기가 살던 집의 주소는커녕 동네 이름조차 기억하지 못했다.

기적처럼 다시 찾더라도 평생 제가 엄마라고 말하지 못할 거다. 어찌 되었든 한 번 버린 자식, 무슨 염치로 엄마 행세를 할까. 그저 좋은 양부모를 만나기를 바라는 것밖에 없었다. 저와는 달리 건강하고 현명한 어머니와 남편과는 달리 다정하고 배려 깊은 아버지를 만나기를.

그러나 10여년이라는 엄청난 간극 뒤 그녀는 제가 버린 아기를 브라운관에서 다시 만났다.

수시로 감시를 서는 험상궂은 남자들에게도 종종걸음으로 다가가 귤을 나눠주던 제 아기, 어린이용 바이올린으로도 사랑스러운 연주를 하던 제 아기, 밥이 먹기 싫으면 배 아프다고 귀여운 꾀병을 부리던 제 아기가…….

제가 바라던 대로 양부모는 잘 만났으나, 결국 시력을 잃었다. 영영 그 외롭고 깊은 암흑 속에 아이가 버려졌다. 제가 버린 거였다. 그녀는 으스러지는 가슴을 치며 오열했다.

一난우야……. 만약에 엄마가 그 때 다른 선택을 했더라면, 널 버려두고 홀로 달아날 게 아니라 너와 함께 그 집에서 계속 부서지길 택했더라면, 너는 지금보다 더 행복한 아이로 자랐을까?

정난우의 스트라디바리우스가 절정의 아리아를 불렀다. 이정운의 손가락도 건반 위를 바쁘게 날아다녔다. 리허설도 없이 호흡은 잘 맞았다.

에녹은 금고에 반쯤 걸터앉아 팔짱을 끼고 있었다. 시선은 연주에 몰입해 있는 정난우의 옆얼굴에서 떠나지 않았다.

아무리 많은 곡을 들어도 여전히 자신은 까막귀였다. 다만 정난우의 말에 편견을 가지게 되어선지 몰라도, 화려한 드레스를 입은 프리마돈나의 당당한 독창을 보고 있는 듯했다.

과르네리가 속에 들어찬 눈물을 비장하고 통렬하게 내뿜는다면, 스트라디바리우스는 사교계의 여왕처럼 슬픔을 능숙하게 갈무리해 두고서 도도한 음색을 흘리는 거다. 두 개의 악기를 양 어깨에 멘다는 것에 대한 의미를 어느 정도 알 것 같았다.

연주는 금방 끝이 났다. 함께 호흡을 맞춘 두 사람은 서로를 깊이 바라보았다. 오랜 세월의 공백을 가진 형제는 이렇게 다시 만나 어머니의 꿈을 이뤘다.

따악.

눈앞에서 익숙한 소리가 터지자 정난우는 움찔 고개를 돌렸다. 그와 동시에 긴 다리가 쭉 뻗어 오더니 허리를 감아갔다. 얼떨결에 끌려 금고에 걸터앉은 에녹의 꼰 다리 사이에 몸이 꽉 갇혔다. 왜요? 하며 눈을 맞추자 에녹은 느리게 손을 뻗어 뺨을 어루만져왔다.

 “그 악보에도 내가 있나?”

그가 물었다. 정난우는 가만히 눈을 몇 번 깜빡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뭔데, 그가 재차 물었다. 정난우는 눈가를 접으며 대꾸했다.

 “프리마돈나를 비춰주는 스포트라이트요.”

만족스런 대답에 에녹은 정난우의 눈꺼풀에 입을 맞췄다

스트라디바리우스는 다시 금고의 2층에 공주님처럼 소중히 보관했다. 과르네리는 그 아래 1층에 안착했다. 위아래 나란히 놓인 두 악기는 보기만 해도 매우 황홀해서 정난우는 좀체 눈을 떼지 못했다.

결국 기다리다 못한 에녹이 억지로 금고 문을 닫아버렸다. 정난우는 애타는 듯이 에녹을 올려다보았다. 좀만 더 보면 안 되냐고 물었다가 눈물이 찔끔 날 만큼 세게 뺨을 꼬집히고 말았다.

그리고 그 쯤, 타이밍 좋게 케이터링 서비스가 도착했다. 에녹은 그들에게 다이닝을 안내해 주고 야외 바비큐장으로 나갔다. 테이블 위로 칼처럼 정렬해 있는 와인과 잔들에서 모두가 루스의 손길을 느꼈다.

케이터링 업체에서 준비해 온 커다란 케이크가 한 가운데에 놓여졌다. 정난우가 좋아하는 과일과 생크림의 조합이었다. 촛불에 불이 붙고 생일 축하 노래가 이어졌다. 색색의 폭죽과 샴페인이 터졌다.

여기저기서 흰 거품이 허공으로 치솟았다. 표적이 된 정난우는 본능적으로 에녹의 품으로 뛰어들었다. 거기가 가장 안전하다고 내심으로 늘 생각하고 있었던 거다. 하지만 그 믿음은 배신당했다.

에녹은 기꺼이 정난우를 붙들어 축하객들에게 제물로 바쳤다. 샴페인 거품은 노골적으로 표적을 향해 달려들었다. 까만 머리카락과 품 큰 티셔츠는 금세 흠뻑 젖었다. 물론 도망치지 못하게 뒤에서 안고 있던 에녹 역시 마찬가지였다.

티셔츠 안으로 흘러들어오는 차가운 액체의 느낌에 정난우는 연신 흠칫거렸다. 기꺼이 함께 맞아주는 에녹이 젖은 뺨을 맞대 비벼대며 웃었다. 매니저들도, 루스도, 이정운도, 그 두 사람을 흠뻑 적셔 놓으며 함께 웃었다.

*

12월, 정난우와 에녹은 각기 바쁜 스케줄에 허덕였다. 정난우는 뉴욕 필의 유일한 솔리스트로서 유럽 투어 일정이 잡혀 있었고, 에녹은 크리스마스이브에 개봉을 앞둔 영화의 프로모션 행사에 참석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스케줄을 빼보려고 해도 여의치가 않았다. 왕복 비행시간만 거의 하루였다. 시차도 무시할 수 없었다. 인내와 어울리지 않는 에녹이 터지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수순이었다.

일주일이 넘게 진행된 LA 프레스 정킷 행사가 끝나자 에녹은 과감히 탈출을 감행했다. 하늘에 맹세코 딱 얼굴만 보고 와야겠다고 생각했을 뿐이었다. 하지만 그 소박한 바람은 호텔 앞에서 우연히 맞닥뜨린 루스에 의해 좌절되었다. 그 다음 날 인터넷에는 루스에게 뒷덜미를 붙잡혀 끌려 들어가는 에녹의 사진이 사방팔방 날아다녔다.

그리고 다가온 크리스마스이브. 에녹은 런던 프리미어 투어로 영국에 있었고, 정난우는 유럽 투어 국가 중 하나인 체코에 있었다.

그날 아침 정난우는 일찍 잠에서 깼다. 창문을 통해 내려다본 도시는 크리스마스 준비를 완벽히 마친 상태였다. 곳곳에 보이는 트리와 불 꺼진 꼬마전구들이 밤을 위해 에너지를 비축한 채 숨죽이고 있었다.

1년 전과 다를 바 없이 낭만적인 도시를 내려다보며 손을 풀고 있을 때였다. 베개 위에 올려둔 휴대폰이 길게 몸을 떨었다. 에녹이었다. 바이올린을 내려두고 얼른 전화를 받았다.

 “네, 에녹. 잘 잤어요?”

그는 잠이 덜 깨 잠긴 목소리로 웃으며 ‘응. 너도 잘 잤어?’하고 되물었다. 정난우는 오늘 당신을 만날 생각에 설레서 잘 못 잤다고 솔직히 말했다. 그의 웃음소리가 더 짙어졌다.

《이따 늦지 마. 밤 열한 시야.》

전화를 끊자마자 객실로 매니저들이 왔다. 바이올린을 보관해 두고 그들의 뒤를 따라 나섰다.

지휘자 앤드류 커넬을 비롯해 뉴욕 필 단원들과 호텔 조식을 함께 했다. 스캔들 이후 서먹해진 사람도 있었지만 여전히 친근하게 대해주는 사람들이 남아있어 괜찮았다.

식사 자리에서 에녹의 이름이 거론되는 일은 없었다. 그건 다 앤드류 커넬 덕분이었다. 유럽 투어 첫 도시였던 암스테르담에서 열애설에 초점을 맞추고 정난우를 달달 볶던 기자들에게 호통을 치던 그의 모습을 모두가 기억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이보시오들. 현 시대 최고의 솔리스트에게 궁금한 게 고작 연애 이야깁니까. 그런 게 궁금하면 징그럽게 잘난 낯짝 팔고 다니는 밀리건에게나 물어 보시오! 그 자식이 이 순진한 애 살살 꼬드겨서 커리어에 구정 물을 제대로 튀겼는데 왜 이 애를 들볶고 난립니까! 계속 이대로라면 내 불쾌해서 기자회견 더 못하겠군!」

콧대 높은 뉴욕 필 단원들을 손끝으로 이끄는 카리스마에 승냥이 떼 같았던 기자들도 단박에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그는 그 이후로도 정난우의 스캔들에 매우 예민하게 반응했고, 단원들 역시 궁금해 앓을 지경인데도 결국 아무 것도 묻지 못하는 눈치였다. 주변에서 ‘네 입으로 먼저 말해 줘.’ 눈빛 어택이 끊임없이 찔러 왔지만 정난우는 애써 모른 척 했다.

식사 후 충분히 연습을 해 두고, 피트니스에 다녀와 샤워를 말끔히 한 뒤 호텔을 나섰다. 뒤따르는 매니저들은 없었다. 그들은 혼자 어딜 나가냐며 완강히 반대했지만 개인적인 스케줄까지 그들을 피곤하게 하고 싶지 않았다.

정난우는 택시를 타고 미리 알아봐 둔 시계 매장으로 갔다. 몇 날 며칠을 고민해도 무슨 선물을 해 줘야할지 난감하던 차에, 에녹의 손목시계가 고장 났던 게 떠오른 거다.

옷을 벗고 달려들 때면 그놈의 시계가 늘 거치적거려서 몇 번 던졌더니 맛이 갔다고 했다. 나름 7년 동안 자주 차던 거였다며 혀를 차던 게 뒤늦게 생각이 나 부랴부랴 그 시계매장을 찾았다. 다행이 프라하에 있었다.

정난우는 매장 앞에서 조금 주저했다. 이렇게 직접 발품 팔아가며 쇼핑을 해본 적은 아마 처음일 거다. 까맣고 심플한 배경에 브랜드 이름만 박힌 간판을 빤히 바라보다 결심을 굳혔다. 정난우는 힘 있게 문을 열고 들어섰다.

매장 안은 생각보다 널찍했다. 간판처럼 심플하면서도 고급스러운 인테리어에 괜히 주눅이 들었다. 정난우는 미소로 맞아주는 남자직원에게 얼른 입을 열었다.

 “저, 시계를 사고 싶은데요…….”

그는 능숙한 발음으로 말을 받았다.

 “누가 사용하실 건데요?”

애인이요, 하면 여자시계를 보여줄 거다. 정난우는 적당히 남동생 시계를 찾는다고 둘러댔다. 직원은 정난우를 이끌어 여러 가지 제품을 보여주며 설명을 덧붙였다. 다 그게 그거 같고 무슨 소린지 하나도 못 알아들었다.

한참을 고민하자 가격 때문이라고 생각했는지 직원은 얼마 정도 예상하느냐 물었다. 정난우는 고개를 흔들며 대답했다.

 “가격은 상관없어요. 그 사람이랑 어울리는 거면 좋겠는데, 제가 그런 걸 잘 볼 줄 몰라서…….”

 “흐음. 고객님이랑 많이 닮으셨나요?”

유심히 보는 직원의 시선이 느껴졌다. 정난우는 또 고개를 저었다.

 “아뇨, 그 사람은 굉장히 미남이에요. 머리는 어두운 금빛이고, 눈동자는 투명하고 예쁜 하늘색이에요, 키는 이만큼 크고, 체격은 이 정도…아니, 요즘엔 이 정도…….”

열심히 설명하자 직원이 의아하다는 듯이 물었다.

 “남동생이라고 안 하셨어요?”

헉, 정난우는 속으로 헛숨을 삼켰다. 당황해서 빠르게 눈을 깜빡이자 직원은 어떻게 해석을 한 건지 곧장 ‘아, 죄송합니다.’라며 사과했다. 정말 미안하다는 어투라서 뭔가 단단히 오해가 생겼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아마 저는 지금 입양아가 된 모양이었다. 원래도 입양아인 건 맞았기에 오해라고 하기도 뭐 해서 그저 잠자코 있었다.

 “남동생 취향은 잘 아세요?”

취향?

정난우는 관자놀이를 긁적이며 심각해졌다. 에녹이 입는 옷이나 패션 소품들을 어떻게 표현해야할지 눈앞이 깜깜했다. 보는 눈도 없는데 말주변까지 없으니 여간 곤혹스러운 게 아니었다. 정난우는 잠시 고민하다가 엉뚱한 질문을 했다.

 “저기…… 제가 어떤 스타일인 것 같아요?”

그는 일순 당황한 듯했지만 명품 매장의 직원답게 능숙한 미소를 이어갔다.

 “고객님은 차분하고 수수하시네요. 피부도 참 좋으시고, 성격은 친절하신 것 같고.”

 “…그런 걸 좋아해요.”

그가 다시 말을 잃었다. 이번엔 외곽시야에 걸린 큼직한 입술이 살짝 경직의 기미를 보였다. 정난우는 뭐가 잘못된 건지 깨닫지 못한 채 손가락만 꿈지럭거렸다.

 “일단, 이런 스타일은 어떠세요?”

졸지에 차분하고 수수하며 피부는 좋고 친절해 보이는 시계를 골라야 하는 직원은 일단 심플한 디자인 위주로 추천을 해 줄 수밖에 없었다. 캐주얼보다 슈트를 더 많이 입는다는 말에 직원은 메탈시계를 권했다.

정난우는 그가 내보인 것들을 하나하나 신중히 보다가 하나를 골라 들었다. 깔끔한 정장을 한 직원의 손목에 한 번 채워봤더니 꽤 근사했다. 정난우는 밝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걸로 할게요.”

카드로 계산을 하며 조금 놀랐다. 시계가 원래 이렇게 비싼 건가 싶었던 거다. 이 정도면 서울에 전셋집 하나는 거뜬히 얻을 거다.

이건 내가 공연을 몇 번 해야 벌 수 있는 거지, 하고 뜬금없이 든 궁금증에 정난우는 머릿속으로 주판을 튕겨 보다 금방 관둬버렸다. 수학은 너무 싫었다. 저와 제법 안 맞는 과목이었다.

무사히 고른 선물을 배낭에 넣고 매장을 나와 다시 택시를 탔다. 이번에는 극장으로 갈 차례였다. 오늘 에녹의 영화가 전 서계 동시적으로 개봉했다. 에녹은 같이 보자고 제안했지만 내일까지 기다리는 것도 못 참아서 몰래 예매를 해 버렸다. 내일 함께 보는 자리에서도 모른 척 스크린에 집중할 생각이었다.

극장은 만석이었다. 여기저기서 에녹의 이름이 간헐적으로 튀어나왔다. 근사해, 섹시해, 뭐 대강 그런 평들이 귓전을 스쳤다. 발랄한 아가씨들은 영화보다 그 자체를 더 기다리며 들떠 있는 것 같았다. 문득 궁금해졌다. 그가 매혹적인 미소를 지으며 손을 내밀면 마다할 여자가 있을까.

아마 별로 없지 싶다. 그는 언제든 변심하면 아름다운 아가씨 품에서 잠들 수 있을 거다. 열정적인 애정공세와 뜨거운 밤에 녹아내리지 않는 건 목석뿐일 거다.

생각만 해도 가슴이 아파 왔다. 생경한 질투가 솟아나 뺨이 굳었다. 내 눈에 예쁜 건 왜 남의 눈에도 예뻐 보이는 걸까, 그렇게 말도 안 되는 불평도 뇌리에서 몇 번을 굴렸다.

광고가 흐르는 동안 휴대폰을 꺼내들었다. 반질반질한 액정을 엄지로 꾹꾹 쓸다가 화면을 켰다. 메시지 창을 띄워 철자들을 썼다 지웠다 반복 했다. 한참을 망설였지만 결국 하고 싶은 말을 적어 보냈다. 자신은 솔직 할 때가 가장 사랑스럽다던 그의 말을 믿었다.

짧은 메시지를 전송했을 때, 광고는 끝이 나 있었다. 낮은 조도의 조명들이 남김없이 빛을 잃었다. 까만 암흑과 설렘의 침묵이 아귀를 맞추며 장내를 메웠다.

오프닝 영상이 스크린에 올랐다. 익숙한 선을의 음악도 함께였다. 제가 레코딩한 것들이 러닝타임 중간 중간 튀어나올 거다. 정난우는 휴대폰 소리를 죽였다. 그리고 메고 온 배낭을 품에 안은 채 느리게 고개를 들었다.

사람들의 눈을 마주보는 건 여전히 불안하고 두려웠다. 보통사람들은 단순하게 나누는 그 감정의 교류가 제게는 여전히 중첩된 트라우마로 남아 있었다.

에녹은 이 굳어진 공포를 엄마의 손목에 남은 자상과 비슷하다고 말했다. 영영 깨끗이 지워질 수는 없다 하더라도 세월의 정성에 풍화되어 흐려질 수 있는 거라고 했다.

그는 요 몇 달 간 트레이닝 명목으로 DVD를 함께 시청하는 것에 열을 올렸다. 처음에는 자신이 촬영했던 영화를 함께 보는 걸로 시작하더니, 나중에는 장르도 다양하게 골라왔다.

절로 움츠러드는 몸은 그의 품에 틈 없이 갇히면 천천히 긴장이 풀어졌다. 귓가에서 중얼거리는 음성도 경직된 폐를 말랑하게 풀어놓아 주는 데에 한몫 했다.

힐끔힐끔 훔쳐보듯 화면을 보는 시간이 점차 늘어날 때마다 에녹은 즐거워했다. 차갑게 끓는 눈동자가 반짝반짝 빛 가루를 빨아들 때, 그의 육감적인 입술이 흐리게 미소 지을 때, 그 얼굴이 너무 예뻤다. 너무 예뻐서 더 보고 싶었기 때문에 의욕은 자연히 따라왔다.

오프닝 영상은 순식간에 지나갔다. 일순 까맣게 암전된 스크린, 영상이 되살아나기 전, 휘파람 소리가 제일 먼저 귀를 잡아끌었다.

아, 에녹이다.

듣는 순간 알아챘다. 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바람소리였다. 처연하고 애잔한 떨림이 가슴에 먹먹하게 젖어들었다. 곧이어 그의 모습이 스크린에 나타났다.

그 순간 여기저기 탄식이 쏟아졌다. 날카롭게 다듬어진 얼굴, 시린 달빛이 녹아드는 눈빛, 하얀 김을 흘리는 입술, 사람들은 그의 아름다움에 취했다.

모든 불안이 일거에 증발했다. 정난우는 에녹의 조점 없는 눈에 깊숙이 빨려 들어갔다.

영화에서 에녹은 세 번을 울었다. 연인이 죽었을 때, 그녀를 회상하며 약에 취했을 때, 그리고 아픔을 깨고 나와 화려한 비상의 시작점에 섰을 때였다.

낯선 이들의 눈물이 어두운 습도를 높였다. 젖은 공기가 끝도 없이 밀려와 전신을 뒤덮었다. 에녹의 비현실적인 미모는 비탄을 곱절로 튀겨 놓는 장치일지도 몰랐다.

영화 속 무대 위에 오른 에녹은 피를 토하듯이 제 음악을 흩뿌렸다.

그건 음악이 아니었다. 격정의 통곡에 비해도 모자람이 없었다. 고통의 전율이 간악한 탈을 쓰고 관객들을 조롱하는 거다.

험한 세상에 맨몸 하나로 사투를 벌이던 에녹이 가여워서 저도 울었다. 깨지고 부서지고 완전히 주저앉은 그가 눈부신 날개를 단 모습이 반가워서 또 울었다.

스크린을 찢고 들어가 그를 감싸 안아주고 싶었다. 그의 전신에서 흐르는 역한 녹물을 모조리 핥아주고 싶었다. 그럴 수만 있다면 몇 날 며칠을 배탈로 고생해도 참을 수 있었다.

엔딩 크레딧이 시작되자 정난우는 멍해졌다. 혼란이 폭격처럼 뇌수를 헝클어놓았다. 좀체 이해가 가지 않는 거다.

왜 내가 저기에 있지?

해저까지 침몰해 빈사상태에 이르러있던 현실감각이 아주 느리게 부유했다. 묵직한 물결 아래 잠들다 막 깨어난 사람처럼 머리가 몽롱했다. 뜯어 먹힌 해초가 몸을 감싸고 진흙덩어리가 산소 대신 폐를 채웠다.

정난우는 천천히 눈을 한 번 깜빡였다. 고여 있던 눈물이 다시 젖은 뺨을 타고 굴렀다. 가장 예민한 청각이 제일 먼저 깨어나 익숙한 소리를 꾸역꾸역 주워 담았다.

꿈속에서도 연주할 수 있을 것처럼 익숙한 선을…….

…아, 그랬다. 이건 멘델스존이었다. 검무를 추던 꼬마아가씨는 오늘도 보이지 않았다.

그럼 저기에 있는 나는…….

그 순간, 모든 오감이 동시다발적으로 수면 위를 향해 솟구쳤다. 정난우는 발작하듯 소스라쳤다. 다급히 삼킨 공기가 내장을 터뜨릴 듯 부풀렸다. 심장이 터질 듯이 뛰었다.

저건 카라무어 페스티벌 때였다. 검게 물들어 있던 흉기 같은 음표들이 천사의 깃털처럼 나부끼던 그날이었다. 단단하게 웅크리고 있던 제 작은 세계가 산산조각 나고, 핏빛의 무대에 황금빛 볕이 내리쬐던 혁명의 날인 거다.

베네치안 극장의 아름다운 조명 아래 제 얼굴은 온통 젖어 있었다. 턱 끝에서는 뜨거운 눈물방울들이 뚝뚝 흘러내렸다. 순식간에 개조 당한 멘델스존의 선율이 파도처럼 덮쳐왔다.

짜게 젖은 입술이 파들파들 떨렸다. 이제야 깨달은 거다. 에녹, 필름 속 그의 반쪽은 자신이기도 하다는 걸.

그럼 나는 누굴 위해 울었던가.

필름 속의 에녹은 저이기도 했고 아니기도 했다. 뒤틀어 박제해 둔 제 반쪽짜리 인생을 관객들은 동정했다.

그들이 동정하는 건 에녹일까, 아니면 정난우 자신일까.

온 몸이 바늘에 찔린 듯 고통스러웠다. 그건 깨달음을 뒤따른 형벌일지도 몰랐다. 마땅한 일이었다. 저는 더 아파야 했다.

자신은, 단 한 번도 스스로를 가여워해 준 적이 없었다. 울어준 적도 물론 없었다. 그저 아프면 참았다. 고통스러워도 견뎠다.

저 반쪽짜리 상처투성이를 가장 사랑해줬어야 했던 사람은 타인이 아닌 바로 나였는데…….

관객들은 나갈 채비를 잊고 화면을 응시했다. 저 바이올리니스트가 영화의 실제 인물이야, 웅성거리는 작은 목소리들은 귓전에서 고스란히 튕겨져 나갔다.

「…누구보다 아름다운 날개를 달아 주고, 비로소 자유롭게 하늘을 날게 할 거예요.」

밭은 숨이 입김처럼 눈앞에서 흩어진다. 일그러진 채 울렁거리는 시야가 환각을 끌어왔다.

분명 저 무대 위의 자신은 세상이 무너진 사람처럼 눈물을 쏟아내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이 종말이 아니라는 건 제가 제일 잘 알았다.

새 시대와 충돌한 제 등 뒤에 루스가 달아준 투명한 날개가 보였다. 깃털 하나의 미세한 결까지 세세하게 보이는 작은 날개가 펄럭였다.

불현듯 겨드랑이 뒤쪽이 간질거렸다. 정말로 날개가 돋아나고 있는 걸지도 몰랐다. 그 괴상한 희열감을 억누르지 못해 몸을 웅크렸다. 진회색의 바지는 이미 흠뻑 젖어있었다.

어느 날 에녹은 말했다.

「가끔 박 터지게 운 좋은 놈들은 자다가도 복이 굴러와. 하지만 신은 모두가 그렇게 날로 먹게 빚어주질 않지. 나머지는 다 행복을 쟁취해가며 살아야 돼. 나는 박 터지게 운이 좋은데다가 최선을 다해 행복을 좇으며 살아 왔어. 조금 더 쉽게 가질 수 있다고 해서 내가 노력하지 않는 삶을 살아왔던 건 아니라고. 하나 예를 들어볼까. 내가 만약 쉽게 가질 수 없는 것들 앞에서 체념하는 데에 익숙했더라면 너는 날 봐 주지 않았겠지. 우리는 스치듯 지나가고 영원히 다시 만나지 못했을 거야. 너와 나는 평생 어느 한 부분을 잃고 살면서도 상실의 공허를 깨닫지도 못하며 살아 갔겠지.」

쟁취하는 행복이 얼마나 짜릿한 건지 네가 알았으면 해, 그렇게 나직이 덧붙이던 그의 말이 점잖은 질책이었음을, 이제야 깨달았다.

정난우는 그래서, 처음으로 저를 위해 목을 놓아 울었다. 그간 쌓아둔 것이 셀 수도 가늠할 수도 없어 한참을 퍼내도 끝이 안 보였다. 델 것 같은 눈물이 얼굴을 적시고 바지까지 전염시켰다.

방치해 둬서 미안해. 가여워해 주지 않아서 미안해. 사랑해 주지 못해 미안해. 이제껏, 너 혼자만 아프게 둬서.

너무, 미안해.

억누르지 않고 날 것으로 토해내는 울음소리가 온 사방에 젖어들었다.

공연이 끝나고 정난우는 호텔에서 편한 옷으로 갈아입었다. 면바지와 티셔츠, 겉에는 도톰한 파카를 걸친 뒤 호텔을 나섰다. 모자도 선글라스도 없었지만 이제는 불안하지 않았다.

밤은 깊었지만 도시의 낭만은 잠들지 않았다. 택시를 잡아타고 달린 곳은 그와 함께 했던 자리였다. 눈발 날리던 거리, 핫 와인을 팔던 가게, 그의 손을 붙잡고 처음 걸음마를 했던 곳.

당연한 말이지만 하나도 변하지 않았다. 정난우는 에녹과 나란히 서 있었던 그늘 진 구석 자리에서 휴대폰을 꺼냈다. 약속시간인 11시까지는 아직 20분이 남아 있었다.

평온하게 시간을 죽이며 그의 메시지를 보고 또 보았다. 극장에서 전송했던 한마디에 대한 대답이었다.

『얘가 왜 이래? 너 그거 진심이야?』

제가 보낸 문자는 ‘저 에녹이 조금이라도 바람피울 것 같으면 화날 것 같아요.’였다. 그도 바빴는지 답장은 무려 세 시간이나 뒤에 와 있었다. 하나가 아니었다. 여러 개였다.

『그거 질투야? 어떻게 화낼 건데? 막 때리고 나만 봐 달라고 떼쓰고 몸으로 들이대서 홀리고 그러게?』

『응? 어떻게 할 거냐니까?』

『야! 사람 찔러 놓고 수습 안 하는 거 진짜 못된 짓이야. 얘가 어디서 이런 걸 배웠어? 당장 대답 안 해?』

일부러 안 한 게 아니라 영화 보기 전에 진동까지 말살시켜 놓은 걸 까먹었을 뿐이었다. 그 다음엔 타이밍을 놓쳐서 애매해진 탓에 차라리 만나서 말하겠다고 마음을 먹은 거다.

무슨 말을 해 줘야할지 곰곰이 생각하던 때였다. 기다리던 전화가 왔다. 에녹이었다. 정난우의 얼굴에 완연한 미소가 번졌다. 얼른 휴대폰을 귓가에 대며 말했다.

 “네, 에녹. 저 먼저 와 있었어요.”

《나도 막 왔어. 자, 정면을 본다. 실시.》

 “…에?”

정난우는 멍하니 고개를 들었다. 현란한 빛을 뿜어내는 꼬마전구들이 온 사방에 한 가득이었다. 시린 듯 알알한 눈을 가늘게 뜨고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크리스마스이브, 늦은 밤에도 거리에는 연인들이 넘쳐났다. 거리악사들도 아직 자리를 뜨지 않았다.

《트리 앞에 있어. 나 보여?》

정난우는 먼 곳으로 시선을 떠밀었다. 어둠을 먹고 사는 짐승처럼 꿈틀거리는 대형트리는 쉽게 찾을 수 있었다. 누군가가 휘휘 손을 흔들어 보였다. 그다지 좋지 않은 시력은 그 미려한 얼굴을 담지는 못했다. 하지만 느낌만으로 알 수 있었다.

 “아…… 보여요. 왜 거기에 있어요? 저 여기서 기다리라고 해 놓고.”

그러자 그가 나직이 웃으며 대답했다.

《우리 꼬마 정난우. 얼마나 컸나 보려고 그러지.》

정난우는 고개를 가우뚱했다 그가 말을 이었다.

《걸음마 시작한 지 일 년 됐다. 그동안 나랑 열심히 트레이닝 했으니까 맨 정신으로 사람들 헤치고 여기까지 와 봐. 올 때까지 인내를 붙들고 기다려 줄 테니까.》

그와 자신의 사이에는 무수한 사람들이 있었다. 지나치고, 되돌아오고,  떠돌았다가 완전히 떠나갔다. 정난우는 끊어진 휴대폰을 쥔 채 망연히 눈을 깜빡거렸다.

인파를 꿰뚫는 법은 아직 배우지 못했다. 이제 혼자서도 거리를 걸을 수 있지만 가장자리에 붙어 다녀야 가능한 거였다.

그가 용기를 주듯이 저 멀리에서 다시 두 팔을 흔들어 보였다. 훤칠한 그의 모습이 돌부리처럼 시선을 잡아끌었다.

상장 박동이 속도를 올렸다. 하얀 입김이 얼어붙은 그늘에 녹아들었다. 두려움은 아니었다. 낯설었다가 점차 익숙해지는 맥박은 설렘에 더 가까웠다.

정난우는 주춤 한 발을 내딛었다. 짙은 음영이 발에 채여 흔들렸다. 운동화 밑창에서 이를 갈던 눈밭이 오늘은 없었다.

그러니까 괜찮다. 괜찮을 거다. 저기서 에녹이 기다리고 있으니까.

정난우는 경직해 있던 허벅지에 힘을 불어넣었다. 느리게 시작된 걸음에도 차츰 속력이 붙었다. 낯선 이들은 조심히 걷는 저를 이상하게 바라보았다. 이것도 상관없었다.

그의 얼굴이 점차 또렷하게 보였다. 머플러로 코 아래를 덮었다. 훤히 드러난 윗부분엔 대형트리의 꼬마전구들이 경쟁하듯 내뿜는 색색의 빛들이 무수히 스쳤다.

문득 그가 사탕 흔드는 유괴범처럼 코트 앞섶을 펄럭여 보였다. 어서 와, 조금만 더, 무언의 다독임이 관절을 녹일 듯 다가와 힘을 불어넣었다.

정난우는 심호흡을 한 번 크게 한 뒤 주먹을 말아 쥐었다. 그리고 그대로 달려갔다.

여유로운 행인들의 틈을 비집는 건 생각보다 그리 어렵지 않았다. 밑이 보이지 않았던 끔찍한 구렁텅이는 겁먹은 것만큼 깊은 곳이 아니었다. 들여다 보려하지 않았기에 여태껏 몰랐을 뿐이었던 거다.

턱까지 차오른 숨이 물 폭탄처럼 허공에 터졌다. 균형 잃지 않는 제 다리가 뿌듯했다. 기다리던 에녹의 눈이 놀라움에 커지는 모양이 가슴 저미게 근사했다.

정난우는 화려한 장식을 번쩍이는 거대한 트리의 조명 아래 망설임 없이 투신했다. 에녹은 깊이 눈웃음을 지으며 팔을 벌렸다.

그의 코트는 오늘도 활짝 열려 있었다. 정난우는 그 앞섶을 파고들어 그의 뜨거운 상체를 부둥켜안았다. 색색거리는 숨결이 그의 머플러 앞에서 흐드러졌다. 떨리는 목소리가 그 끝에서 엉겨붙었다.

 “(앞쪽 잘림)몰라요.”

협박이었는데 에녹은 황당하다는 듯이 웃기만 했다. 정난우는 그의 머플러를 끌어내려 그의 얼굴을 온전히 보고 싶었다. 하지만 그의 등을 꽉 움켜쥔 손도 포기할 수 없었다.

정난우는 입을 벌려 그의 머플러를 물어서 당겼다. 스르륵 흘러내린 흰 천은 근사한 그의 턱 선을 차가운 공기에 내보였다.

곡선을 그린 그의 입매가 얼핏 굳었다. 내려다보는 눈동자에도 고요가 스쳤다. 정난우는 시리고 달콤한 그의 눈을 열렬히 올려다보며 턱을 치켜 세웠다. 그의 입술이 자석에 끌리듯 따라와 마주 붙었다.

보드랗게 닿은 온기는 알갱이처럼 심장 곳곳에 박혀 있던 것들을 모조리 녹여냈다. 그의 달콤한 숨결을 한껏 폐부에 채워 넣었다.

 “내가…….”

떨리는 입술을 그가 가볍게 베어 물었다. 내리뜬 눈은 당혹과 기쁨 사이에서 일렁거렸다.

 “당신을 행복하게 해 줄게요. 많이 아껴줄게요. 내 일생을 걸고, 당신을 사랑할게요.”

용기 내 기워낸 뒷말에 그의 눈동자가 정지했다. 행인들이 내뿜는 소음이 정적처럼 느껴졌다. 뒤엉키는 눈빛이 장작처럼 타 들어갔다. 서늘한 바람이 싣고 온 눈꽃이 맺히기도 전에 녹아내렸다.

정난우는 틈 없이 마주한 몸을 더 깊이 파고들었다. 그 역시 반사적으로 더 강하게 조여 안았다. 경직해있던 그의 뺨이 점차 풀려가며 웃음기도 함께 휘발했다.

기대에 부푼 눈을 그가 찌르듯 들여다보며 대답했다.

 “나도 내 전부를 걸고 너를 사랑할게.”

정난우는 환하게 웃었다. 튕겨져 나오지 않는 마음이 곱절이 되어 돌아온 거다. 그의 따뜻한 손이 뺨을 어루만졌다. 정난우는 그 손바닥에 제 얼굴을 비비며 청했다.

 “우리 키스해요. 하고 싶어요.”

 “원한다면, 기꺼이.”

에녹은 곧바로 고개를 기울였다. 그의 손이 귓가를 스쳐 뒤로 넘어갔다. 목덜미를 붙들고 후두부까지 크게 감쌌다. 뜨겁게 입술이 맞물렸다. 정난우는 사납게 침투해 들어오는 그의 혀를 한껏 입 벌려 맞이했다. 세차게 뒤엉키는 살덩이는 마지 심장처럼 고동을 가졌다.

자극적인 빛깔들과 따가운 눈초리들이 조금도 두렵지 않았다. 두려울 리가 없었다. 눈부신 태양이 제 품 안에 있었다. 상극을 맞닥뜨린 고독한 암흑도 다가올 엄두를 못 냈다.

뙤약볕 같은 그의 체온에 전신이 맵고 뜨끔거렸다. 피막처럼 제 몸을 질기게 감싸고 있던 녹물이 뜯어져나가고 있는 거다.

그가 꽉 조여 안은 등은 또 문득 간질거렸다. 부패해 악취 흘리는 제 알맹이를 창공에 내던져 줄 날개가 돋아날 거다.

헐떡이며 그의 혀를 마주 얽었다. 밀착한 가슴이 기분 좋게 울렁거렸다. 정난우는 젖어들 듯이 눈꺼풀을 내렸다. 검붉은 장막은 백야처럼 하얀 빛이 터졌다.

정화의 바람 속에서 짧은 꿈을 꾸었다. 그 곳에서 자신은 찬란한 빛을 꿰뚫고 하늘을 날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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