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Chapter 10 (11/13)

Chapter 10

여전히 전화가 안 됐다. 에녹은 부수고 싶은 충동을 달래느라 손 안의 휴대폰을 터뜨릴 듯이 움켜쥐었다.

정난우는 물론 한태영도 율리안도 통화가 되지 않았다. 그들이 한국으로 떠난 지 벌써 일주일이 지났다. 연일 세트장 근처에 모여드는 기자들은 제가 모르는 것까지 알고 있었다.

정난우 씨 어머니가 동성연인에 충격 받아 쓰러졌다, 현재 위독하다, 알고 있느냐, 어떻게 생각하느냐.

메스처럼 차갑게 번득이는 눈은 그저 기사거리 하나 얻어내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었다.

신물이 났다. 그 어떤 코멘트도 하지 않았다. 사실은 대거리할 의욕조차 없었지만 웃는 얼굴을 만들어내는 가면은 건재해 다행이었다.

정난우가 지금쯤 머릿속으로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지. 상상하고 싶지 않은데 자연히 그려졌다. 긍정적인 방향일 거라는 기대는 손톱만큼도 들지 않았다.

초조함에 연일 속은 타들어갔다. 카메라에 불이 꺼지고 도시가 암흑에 잠기면 뜨겁게 박동하는 가슴도 차갑게 잦아들었다.

도축당한 가축처럼 심장은 식어버리고 껍데기만 남는 거다. 고깃덩어리 같은 몸을 옮겨 숙소에 돌아오는 게 할 수 있는 전부였다. 1초에 한 번 움직이는 초침이 시시때때로 목을 졸랐다.

겨우 일주일.

그 정도 참는 건 일도 아니었다. 일주일 아니라 한 달도 기다릴 수 있었다. 그러나 기다림의 길 끝 소실점은 불투명한 안개가 감쌌다. 그 너머에 있는 게 마라톤코스라면 전력 질주한 심장이 터져버릴 건 자명한 일이었다.

정난우는 또 저를 무기력하게 만들어 놨다. 아무 것도 할 수 있는 게 없는 거다. 눅눅하게 젖은 뇌수가 난폭하게 소용돌이치길 여러 번이었다. 맥없이 흘러가는 시간들이 이대로 정난우를 싣고 달아나 버릴 것만 같았다.

허기진 뱃속은 끔찍할 정도였다. 음식물로 해결할 수 없는 종류의 공복감에 매일 몸서리를 쳤다.

그 허기를 채워줄 수 있는 건 정난우뿐이었다. 그 살결을 미친 듯이 핥고 그 체액을 쥐어짜 삼켜야 했다. 그래야만 굳어버린 핏줄들이 다시 후끈하게 움틀 수 있었다.

불순한 생각들이 뇌리를 가득 메웠다. 음습한 만큼 달콤한 유혹에 혈관이 푸르게 꿈틀거렸다. 당장 날아가 애걸복걸하고 싶었다. 네 어머니 못 깨어나시면 나는 정말 버려지는 거냐고 묻고 싶었다.

안 그래도 다져진 고기처럼 만신창이일 녀석에게 억지로 키스하고 강제로 몸을 열지도 모르겠다. 고문처럼 참혹하게 몰아가서 강압적으로라도 약속을 받아내고 싶었다.

까맣게 죽은 눈동자에 대고 애타는 속삭임을 뿌리면 어떨까.

네가 돌아오지 않으면 나는 무너질 거라고…….

모두에게 파국에 가까운 상상이었다. 에녹은 스스로에게 극도의 환멸을 느끼며 치를 떨었다. 걸러내지 않은 험한 욕설들이 마구잡이로 허공에 튀었다.

평생 죄책감에 타 들어갈 정난우를 억지로 곁에 묶어두면, 저라고 온전히 버틸 수 있을 리가 없었다. 하지만 이대로 떠나보낸다 해도 멀쩡하게 이별을 받아들일 수는 없을 거다.

꽉 쥔 주먹 속에서 휴대폰은 침묵의 비명을 질렀다. 침대 곁에 앉아 빈손으로 이마를 감쌌다.

정난우는 아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합의되지 않은 이별의 가능성을 발견한 것만으로도 숨이 턱턱 막혔다. 벼랑 끝에 서 있는 듯한 아찔한 위기감이 조각난 빙하처럼 혈관을 타고 흘렀다.

남겨지는 게 이런 것일 줄은 미처 몰랐다. 상상만으로도 온 몸이 찢기는 듯이 고통스러웠다. 숨구멍도 제 기능을 잃을 것 같았다.

나는 아직 끝낼 준비가 되지 않았는데 상대방은 떠날 준비를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니, 이게 이런 거였다니…….

눈가가 허무하게 떨렸다. 어머니 말이 맞았다. 이제껏 자신은 남의 가슴에 피멍을 들여 놓은 거였다. 이제껏 제가 한 짓들이 다 그런 거였을지 도 몰랐다.

어머니 역시 초대형 스캔들에 극렬한 분노를 쏟아냈다. 어떻게 된 거냐 추궁조차 없었다. 그저 이젠 하다하다 남자까지 건드리냐고, 내가 널 잘못 키웠다고, 평생 남남으로 살자고까지 했다.

어머니마저. 내 어머니마저.

피가 나도록 아랫입술을 짓씹다가 다이얼을 눌렀다. 통화 연결음은 끈질기게 울렸지만 단 한 번도 중도에 끊어지지 않았다.

에녹은 끈질기게 몇 번이고 반복해서 전화를 걸었다. 가슴 속에 울렁이는 이 축축하고 끈덕진 감정을 어딘가 토해내지 않으면 견딜 수가 없었다.

열 몇 번 만에 상대는 전화를 받았다. 차갑게 가라앉은 목소리라도 기다렸지만 그녀는 대꾸조차 없었다.

 “밀리건 여사님.”

제 목소리는 잔뜩 잠기고 탁하게 갈라져 있었다. 혹독한 한파에 몇 날은 족히 구른 듯이 참담했다.

성대를 몇 갈래로 찢을 듯한 신음이 목 안에서 펄펄 끓었다. 그러자 수화부에서 짧게 숨을 들이키는 소리가 넘어왔다. 에녹은 잇새를 꽉 틀어 물고서 중얼거렸다.

 “내가, 빌어먹을. 너무 억울하고 분하고, 미칠 것 같은데.”

습격 직전의 짐승처럼 온 몸의 근육은 팽팽히 긴장한 채 굳어 있었다. 악다문 턱이 하얗게 경련했다. 이마를 덮은 손등에는 푸른 핏줄이 사납게 불거져 나왔다.

 “내가 그렇게 존경하고 사랑하던, 현명한 내 어머니조차 나를 안 믿어. 그것 보라고, 제 감정만 중요해 남을 못 보는 머저리가 이렇게 될 줄 알았다고, 누군가 비웃기라도 하면 내가, 진짜 여기서 돌아버릴 것 같아서, 그래서 내가, 이를 악물고서 겨우 초연한 척 참고는 있는데.”

《…….》

 “핏덩이만 계속 씹는 것처럼 속이 다 진창이야. 그런데 나는 빌어먹게도 내일 또 태연한 얼굴로 촬영을 해야 하고, 기자들한테 시달려야 하고, 그리고 숙소로 돌아오면 또 이렇게 괴로워하겠지,”

거칠어진 숨이 불규칙하게 허공에 흐드러졌다. 알고 있었다. 지금 이 순간 원망해야 할 건 어머니가 아니었다. 그런데도 결국 가장 쉽게 약한 모습을 보일 수 있는 건 그녀뿐이었다.

 “그 녀석이 아주 어릴 때 부모한테 학대당하고 버림받고 눈이 멀었어. 친부모한테 말이야. 그래서 애가 내내 힘들게 살았어. 부서지고 깨지고 그러다 주저앉고, 이제 겨우 내가 좀 보듬어 안아서 일으켜줬더니 다시 주저앉으려고 해.”

《…….》

 “여사님.”

《…….》

 “엄마.”

철들고 나서는 엄마라고 불러본 적이 없는 것 같았다. 항상 고고하고 우아하신 여사님, 우리 여왕님, 그렇게 장난스럽게 부르다 보니까 엄마라는 호칭이 참 낯설었다.

 “부모 잘못 만난 애가 그 지경으로 부서질 수도 있더라. 음악 말고는 아무것도 모르고, 사람들이 하는 말 의심할 줄도 모르고, 원망도 안 하고, 때리면 맞고 아프면 견디고…….”

《…….》

 “걔 이제껏 내내 그렇게 살았어. 어디서 이상한 것만 배워서 툭하면 제 탓이라 그러고, 미안하다 그러고, 불안하게 눈치만 살피고…… 내가 같이 살자고 프러포즈했던 날, 대답이 뭐였는지 알아?”

처음이었다. 누군가를 그렇게 조심스럽게 일으켜 주고, 북돋아 주고, 웃게 해 주고 싶었던 건.

 “당신은 얼마나 단단하냐고, 묻더라. 이 멍청한 게 감정 숨길 줄도 몰라서 나 좋아하는 거 빤히 보이는데 망설여. 내가 다칠까 봐. 자기가 사랑한 사람들 대부분이 그렇게 떠나갔대. 죽거나, 부서지거나. 그리고 지금 양모만 가까스로 남아있다고, 그래서 겁이 났대. 계속 제 걱정은 하나도 안 하고 나만 걱정해. 자기 때문에 내가 뭔가를 잃거나 내가 부서질까 봐.”

《…….》

 “엄마. 나 버리지 마.”

《…….》

 “내가 엄마한테 버림받은 거 알면, 걔 진짜 많이 상처받을 거야.”

《넌 결국! 이 와중에도 네 애인 걱정뿐이니? 네 엄마 속 썩어 들어가는 건 생각도 안 하냐고! 지금 협박하는 거야, 뭐야!》

드디어 카랑카랑한 고음이 고막을 찔렀다. 에녹은 열기 몰린 눈가를 문지르며 고개를 한껏 젖혀들었다. 가슴 깊이 고여 있던 젖은 한숨이 얼굴 위에 녹아들었다.

 “맞아. 나 지금 협박 중이야. 엄마가 나 버리면 내가 걔한테 할 말이 없어. 매달려서라도 붙잡고 싶은데 그럴 수가 없다고.”

《…미친놈.》

 “그래. 미친 거 엄마 아들이지 걔 아니야. 난 좀 구박해도 걔는 좀 예뻐해 줘. 엄마 착하고 순한 애들 좋아하잖아.”

《아주 지랄도 가지가지 하지. 듣기 싫으니까 끊어!》

정말 안 돼? 에녹은 꽉 짓눌린 음성으로 중얼거렸다. 한참 침묵하던 수화부에서 곰팡이 같은 음성이 울렸다.

《엄마 회의 들어가야 돼. 다음에 얘기하고 끊어.》

대답도 하기 전에 완벽한 침묵이 돌아왔다. 진짜 끊었어? 하며 보는데 정말 통화는 종료되어 있었다. 불 밝힌 액정이 저절로 까맣게 죽을 때까지, 에녹은 그저 망연히 눈만 깜빡거렸다.

한참 후에야, 힘없는 실소가 픽 터졌다. 제 어머니는 단지 눈앞의 껄끄러움을 회피하기 위해 어설픈 변명을 할 사람은 아니었다. 그녀가 다음을 기약했으니 분명 끝은 아닐 거다.

혹시나 받을까 싶어 정난우에게도 통화를 시도해 보지만 이 쪽은 그새 꺼져 있었다. 차가운 안내 멘트에 잠시 트였던 목이 다시금 조여들었다.

에녹은 내던지듯 몸을 뉘였다. 스프링에 출렁이는 몸뚱이가 한없이 무거웠다. 매트리스를 뚫고 가라앉아 화석으로 굳어질지도 몰랐다.

보고 싶다.

에녹은 느리게 눈꺼풀을 닫았다. 홀로 질주하느라 감정 소모가 너무 커 피로는 쌓이는데 어디 풀 곳이 없었다. 정난우를 떠올리자면 자꾸 자극적인 것들만 뇌리를 채웠다. 환자복을 입고서 가만히 얼굴을 매만지던 모습에 아파질라 치면, 뜨겁게 몸을 열어 주며 우는 얼굴이 치고 올라왔다.

이래서 남자란 동물이 정말 지긋지긋한 거다. 이 와중에도 달아오르는 몸이 비참했다. 베개 옆에 나뒹구는 셔츠를 움켜쥐고서 얼굴을 묻었다. 퇴원하는 날 입으라고 집에서 챙겨왔던 정난우의 옷이었다.

들숨을 크게 폐 안쪽에 채웠다. 그러나 이제 그 달콤한 체향은 아무리 긁어내도 후각을 달구지 못했다. 같은 향수를 뿌려 봐도 제가 기억하는 향은 손톱만큼도 피어오르지 않았다.

점점 옅어져가다 이내 모두 증발해 버릴 그 향기가, 마치 정난우의 무거운 마음 같아 에녹은 이를 악물었다.

*

정말 피곤하게 사는 놈이다…….

카카는 지긋지긋한 감상을 곱씹으며 발을 재게 놀렸다. 내일 모레 마흔이라는 놈이 참 정력도 좋았다. 정부B와 실컷 뒹굴고 나온 게 바로 조금 전이었다. 해가 하늘 가운데 뜬 휴일 한낮이었다.

도청 이어폰을 귓구멍에 좀 더 쑤셔 박는데 휴대폰이 진동했다. 발신지는 사무실이었다. 전화를 받자마자 상대가 말했다.

《카카. 데이터 분석 결과 나왔어. 정부 세 명 다 놈의 환자였고 다 우울증을 겪었어. 방금 놈이 B를 만나고 나왔지? 그 여자는 사 년 전에 낚아서 지금까지 관계를 유지하고 있어.》

 “병원에 깔아둔 거에선 별 거 없고?”

《별 거 많더라. 나 현역일 때 좆 같이 싸우고 물어뜯었던 프로파일러 새끼 있지? 딱 그 꼴이야. 뭐든 다 안다는 식으로 쿡쿡 찌르다 하나 걸리면 제가 신이라도 된 양 아주 거들먹거리고. 아우, 딱 재수 없어.》

흐음, 카카는 남자의 뒷모습을 주시하며 한 손으로 턱을 쓸었다.

 “그 여자도 마약 양성 반응 나왔나?”

《아, 그것도 이번에 입수했어. 그 새끼 GHB(향정신성의약품의 하나로 일명 ‘물뽕’이라고도 함. 성범죄용으로 악용이 되어 ‘데이트 강간약물’로 불리기도 함.)쓰더라? 근데 이 새끼 참 이번에도 느끼는 거지만 제가 권하지는 않아. 여자가 직접 타 마셔. 놈 집을 털어 봐도 약은 안 나오는데. 그냥 때 되면 심을까?》

그 말은 즉, 함정을 파는 건 어떠냐는 거였다. 카카는 애매하게 치켜올린 눈썹 끝을 엄지로 긁적거렸다. 원하는 바를 꽤 정확히 말하는 의뢰인은, 스토킹 물증을 잡자마자 본격적으로 판을 벌였다.

도청, 감시카메라, 미행, 갖가지 수는 다 짜내라며 통 큰 착수금을 현금으로 뿌려줬다. 웬만한 거물 정치인 하나 바닥에 메다꽂을 만한 액수였다.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내가 원하는 건 놈이 제가 저지른 짓에 대한 합당한 대가를 치르는 겁니다. 털 수 있는 건 다 털어다 주세요. 만약 입증할 방법이 없다면, 그건 후에 논의를 하는 걸로 합시다.」

의뢰인은 이 부분에 관해 일단 보류를 띄워 둔 상태였다. 하지만 그는 ‘정치공작에 꽤 일가견이 있다고 하시던데, 어느 정도까지 가능합니까?’라고 물으며 일말의 가능성은 남겨뒀다. 영 생각이 없는 건 아닌 거였다.

 “그건 차차 생각하고, 또 다른 건?”

《일단 처방전부터 치워내려고 중점적으로 봤는데, 이게 워낙 방대해서 한참 걸리겠는데? 아직까지 별 거는 없어.》

 “최근 삼 년 것들부터 중점적으로 보라니까.”

《그러니까 최근 삼 년 거 말이야.》

카카가 미간을 좁히며 물었다.

 “그걸 아직도 다 못 봤다고?”

《조금만 더 보면 돼. 그리고 그 더 이전으로 넘어갈 거고.》

얼핏 시간 계산을 머리로 굴려봤지만 아귀가 안 맞았다.

 “생각보다 오래 걸리네.”

그 때였다. 한쪽 귀로 통화하며 반쯤 흘려듣던 이어폰에서 심상찮은 기색이 흘렀다. 카카는 곧 다시 전화하겠다며 휴대폰을 호주머니에 넣고 신경을 곤두세웠다.

《죄송합니다. 제가 착각을 하는 바람에…….》

《죄송하면 다야? 내가 뭐라고 했어. 이 멍청한 자식! 밀리건이 있을 때 살짝만 부딪치라고 했잖아! 이렇게 되면 다 쓸모없게 되는 거라고. 밀리건이 사고에 휘말렸어야 하는데 완전히 뒤바뀌었잖아!》

一아아, 그렇지. 지금쯤 열을 낼 때가 됐지.

카카는 피식 웃으며 벽에 기대섰다. 표적이 제 집에 들어가는 바람에 더 쫓을 필요는 없어진 탓이었다. 표적은 제 휴대폰이 이미 예전에 털린 것도 모르고 맘껏 소리를 질렀다.

《네 주제에 십만 불을 벌려면 얼마나 일해야 하는지는 생각해 봤어? 그만한 돈을 받기로 했으면 값을 해야 할 거 아냐! 애새끼 아픈 거 불쌍해서 맡겨줬더니 사고는 또 왜 그렇게 복잡하게 만들어 놔? 경찰이 낌새 못 느낀 건 맞아? 확실해?》

《확, 확실해요. 술도 안 마셨고, 약 끊은 지도 오래 됐고, 그냥 멍하게 있다가 빗물에 미끄러졌다고…….》

《그깟 일 하나 처리 못 하고.》

《죄송합니다.》

에휴, 이 병신아. 왜 사니. 그냥 경찰에 가서 불어버린다고 협박이라도 하지.

화가 난 것도 화가 난 거겠지만, 사례비 깎으려는 표적의 의도가 훤히 보여 카카는 혀를 차고 말았다. 그간 긁어낸 것들로 보면 당연한 관계겠지만 입맛이 쓴 건 어쩔 수가 없는 거다.

현역에 있을 때 많은 종류의 범죄자들을 보고 때려잡기도 했다. 그 중에서 이런 식으로 사람을 가지고 노는 놈들은 정말 못마땅했다.

차라리 총질 칼질 같은 원색적인 범죄가 더 나았다. 마음이 아픈 사람들을 농락하고 파고들어 신이라도 된 것처럼 유세를 떨다니, 의뢰인의 독기가 충분히 이해가 갔다.

표적의 통화가 끝나자 카카는 미련 없이 돌아서서 근처 오피스텔로 갔다. 급히 얻어 세팅해 둔 임시 사무실은 최첨단 장비들이 사방을 채우고 있었다.

데이터 분석에 열을 올리느라 인사도 안 하는 동료를 내버려두고 일지부터 썼다. 표적의 동선을 살피며 꼼꼼하게 기록해 둔 걸 그대로 옮겨 적고 나서 모니터를 살폈다.

표적은 무언가를 깊이 생각 중이었다. 휴대폰을 들었다 놨다 반복하다가 욕설을 내뱉곤 했다. 요즘 그의 머릿속을 온통 휘저어대고 있는 게 누군지 알고 있었다.

바이올리니스트 정난우.

의뢰인이 가장 예민하게 반응하는 이름이기도 했다. 카카는 일만 받을 뿐 그 뒷배에는 관심을 두는 법이 없었다. 그게 서로가 좋은 걸 알기 때문이었다. 이번 사건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일이 진행되어가며 자연스레 알게 되었다. 미국 전역을 넘어 땅이 있는 곳이라면 아마 죄 한바탕 뒤집어 놓았을 대형 스캔들이 터진 이상 모를 수가 없는 거다.

표적이 뭔가를 결심한 듯 전화기를 들었다. 카카는 재빨리 헤드폰 하나를 집어 썼다. 다이얼이 울렸다. 상대가 어눌한 목소리로 받았다. 두 사람의 대화를 기록하며 카카는 점점 인상을 찌푸렸다. 그리고 통화를 끝냈을 때, 또 의뢰인에게 전화를 걸 수밖에 없었다.

《무슨 일 있습니까?》

의뢰인이 탁하게 잠긴 목소리로 물었다. 카카 역시 깔끔하게 사실만을 대답했다.

 “지금 있는 건 아니고, 앞으로 있을 것 같습니다.”

의뢰인이 한숨을 지었다. 나지막이 욕설 씹는 소리도 어렴풋이 섞여들었다. 씨발 새끼, 하는 것 같았다. 죽여주는 얼굴로 내뱉는 욕설이 아주 입에 착착 감겼다. 카카는 휘파람을 불어주고 싶은 걸 참았다.

처음 일을 맡겼던 남자는 꽤 냉철하고 약간은 한 발 물러선 느낌이었는데, 그가 토스해 준 의뢰인은 그와 정반대였다. 제 입장에서는 지금의 의뢰인, 에녹 밀리건 쪽이 훨씬 편했다.

《어떤 부분에서요?》

 “놈이 방금 처음으로 약 얘기를 꺼냈어요. 직접 구할 모양인데 자기가 먹을 건 분명 아닐 거고, 계속 정난우, 정난우, 혼자 중얼거리는 게 아무래도 표적을 바꾼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요약하자면 그 새끼가 정난우한테 약을 쓸 생각인 것 같다, 이거?》

 “제 감은 그렇게 말하네요. 보통 무너뜨리고 싶은 상대가 유명인이라면 약 하나로 그릴 수 있는 그림은 많습니다. 어떤 식으로건 스캔들 만들기 참 좋으니까요. 그걸 먹여서 정난우 씨를 직접 어떻게 하겠다는 건지, 아니면 당신과 엮을 건지는 잘 모르겠네요.”

의뢰인이 따가운 침묵을 전송했다. 카카는 잠시 기다리다 물었다.

 “따로 경호원 붙여두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이미 붙였습니다. 눈치 못 채게 따라다니고 있어요.》

어지간히 싸고도네, 카카는 장난스럽게 입 꼬리를 늘어뜨리며 생각했다. 긴 한숨 뒤에 의뢰인이 말했다.

《놈을 털어내는 것 말고 내가 하나 더 부탁할 게 있습니다.》

 “말씀하시죠. 합당한 보수만 주시면 뭐든 합니다.”

《일이 끝맺음되기 전에 정난우가 미국에 오게 되면, 특별히 당신이 잠깐 맡아줬으면 합니다. 가능하겠습니까?》

에녹은 지체 없이 물었다. 카카는 한쪽 눈썹을 비뚤게 올리며 대꾸했다.

 “전 경호 전문이 아닌데요. 그 분야라면 다른 사람을 소개시…….”

《아뇨. 당신이어야 합니다. 경호원은 충분히 더 쓸 거예요. 내가 당신에게 원하는 건 보호가 아닙니다.》

보호가 아니라면 뭐죠, 카카는 의아하다는 듯이 물었다. 수화부에 낮은 음성이 이어졌다.

《은폐입니다.》

칼 같은 내심을 내비치는 에녹의 목소리엔 금속 같은 한기가 스며들어 있었다. 카카의 아리송함은 더욱 깊어졌다.

〔세상에, 얼굴이 왜 이러니…….〕

최순애가 눈물을 글썽이며 얼굴을 매만졌다. 정난우는 어설픈 미소를 짓다 고개를 숙였다. 그녀의 손에는 오늘도 보자기로 감싼 찬합이 들려있었다. 결국 다 얹히고 가끔은 식도를 역류하기도 하는 음식물들이었지만 그래도 그 마음이 고마웠다.

〔들어오세요.〕

최순애의 뒤로는 그녀의 남편과 김혜영, 이정운도 있었다. 유학 준비에 콩쿠르 준비까지 바쁠 텐데 자꾸만 시간을 낭비하는 게 마음에 걸렸다. 거실에 들어와 정난우는 이정운에게 말했다.

〔정운 학생, 이래저래 정신 없을 텐데 이렇게 자주 안 와도 돼요. 어머님 몸도 안 좋으신데 뭐 하러 자꾸 와요.〕

〔어머니 마음이 불편하다고 하셔서요. 어차피 펜션도 한동안 문 닫기로 해서 어머니도 일은 없으세요. 저도 오후에 세 시간 정도 내는 건 괜찮고요.〕

예의바르게 말하지만 제법 고집이 느껴지는 어투였다. 말려도 안 들을 게 분명했다. 정난우는 더 거절하기도 피로해 말문을 닫았다.

소파로 가 털썩 앉자 김혜영이 조심히 말을 붙여왔다.

〔요새 뭘 통 잘 못 먹어서 제가 죽을 좀 쒀 왔어요. 호박죽…좋아하죠? 어머님이 그러시던데…… 그것 말고 전복죽도 있어요. 카스텔라도 만들어 왔으니까 좀 먹어 봐요.〕

〔그래. 난우야. 내가 가져온 음식들은 네 매니저들 주려고 만든 거니까 일단 잘 넘길 수 있는 것부터 먹어 봐. 응?〕

호박죽. 카스텔라.

참 그리운 음식들이었다. 정난우는 멍하니 김혜영의 발치를 보았다. 뼈가 드러난 마른 발등을 조금 더듬어 올라가면 따뜻해 보이는 치마가 있었다. 발목에 걸린 치맛단은 청결하고 고운 색이었다.

긴 시선에 떠밀린 듯 그녀가 뒷걸음질을 쳤다. 정난우는 자리에서 일어나 이정운이 들고 있던 작은 박스를 받아 들었다.

〔고맙습니다. 잘 먹을게요.〕

〔네 매니저들도 부를까?〕

〔아뇨. 항상 바쁘게 돌아다니니까 이럴 때 좀 쉬게 두려고요.〕

정난우는 고개를 저으며 소파에 앉았다. 상자에서 보온병부터 꺼내 들었다. 뚜껑을 돌려 열자 군침 도는 냄새가 훅 끼쳤다. 고구마와 팥이 조금 들어간 호박죽이었다. 잊고 있던 공복감이 몰려왔다.

〔고맙습니다. 잘 먹을게요.〕

죽은 아직 따뜻했다. 한 숟가락 입에 넣자 달콤한 맛이 미각을 물들였다. 간간이 씹히는 고구마와 팥의 식감도 좋았다. 불어먹지 않아도 될 만큼 적당한 온도여서 한 그릇을 금세 비웠다.

고구마가 들어간 카스텔라는 입 안에 들어가자마자 사르르 녹았다. 따뜻하게 데운 우유와 함께 한 덩이를 순식간에 해치웠다.

최순애가 놀란 눈으로 물었다.

〔웬일로 이렇게 잘 먹어? 속은 괜찮니?〕

〔네. 입맛에 맞네요. 얹히는 느낌도 없고요.〕

정난우는 흐리게 웃으며 대꾸했다. 빈속이 채워지니 가시 돋친 신경도 조금은 무뎌졌다.

더 먹고 싶은 생각은 없어 수저를 완전히 내려두었다. 그러자 김혜영이 얼른 매실차를 따라 주었다. 그녀의 손에는 모처럼 들뜬 기쁨이 묻어 있었다. 잠자코 차도 받아마셨다. 부대낌 없이 부드럽게 넘어간 것들은 요동치는 법 없이 위장에서 얌전히 부식되어 갔다.

김혜영이 성심을 기울여 만들어온 그 음식들은, 제가 배앓이를 할 때마다 엄마가 해 주던 것들이었다.

배앓이는 제 무기였다. 편식하면 안 된다고 타이르는 엄마를 휘두를 수 있는 무기. 엄마 나 배 아파, 하고 칭얼거리면 엄마는 늘 속았다. 아니, 속아주셨던 걸 거다.

최순애와 김혜영이 식기들을 수거하기 시작했다. 정난우는 제 눈앞에서 왔다 갔다 하는 주름진 손들을 가만히 지켜보다 불쑥 팔을 뻗었다. 막 숟가락을 들던 김혜영의 손목을 붙들며 물었다.

〔손, 데셨어요?〕

〔아…… 냄비에 좀…… 별 건 아니에요.〕

반사적으로 그녀는 손을 비틀어 빼냈다. 정난우는 저항 없이 악력을 풀었다.

〔음식 안 해 오셔도 돼요. 제가 알아서 잘 먹을게요.〕

〔이, 이건 정말 실수였어요. 내가 원래 잘 안 이러는데, 그러니까 정말 신경 안 써도 돼요.〕

그녀는 안 그래도 긴 소매를 허둥지둥 끌어내리며 말했다. 그렇게 손가락까지 덮지 않아도 어차피 손목 같은 건 안 보일 텐데 괜한 걱정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화상 연고는 바르셨어요?〕

말없이 느리게 고개만 끄덕이는 모습이 외곽시야에 걸려 있었다. 소파에 앉은 채 잠시 망설였지만, 역시나 그녀의 얼굴을 바라볼 용기가 돋아나지는 않았다. 병원에 입원해 있을 때 에녹에게서 조금 더 충전을 받아 뒀어야 했던 거다.

겁쟁이, 바보, 정난우는 스스로를 힐난하며 그대로 욕실로 들어갔다. 양치를 하고 찬물로 샤워까지 하고 나왔지만 면회 시간은 아직 한참 남아 있었다.

〔누나. 저 한 시간만 눈 좀 붙일게요.〕

최순애는 반색하며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매니저들은 자신이 직접 객실로 찾아가 식사를 챙겨주겠다고 했다. 안심하고 침실로 들어갔다.

기운 없는 몸은 금세 피로에 젖어들었다. 탄력 있는 매트리스가 전신을 집어삼키는 듯했다.

실내 공기는 훈훈했지만 열은 한기가 느껴졌다. 이불을 덮어 봐도 그 묘한 으슬거림은 좀체 잦아들지가 않았다.

노는 베개 하나를 품에 안고 눈을 감았다. 체온 없는 푹신함이 조금은 서글펐다. 뜨끈한 몸으로 꽁꽁 품어주던 에녹의 살 냄새가 그리웠다. 그리움이 사무쳐 턱 끝이 가늘게 떨려 왔다.

이유 없이 화가 났다. 치민 울화가 생소해서 또 화가 났다. 저를 둘러싼 모든 상황을, 처음으로 맹렬히 원망했다. 에녹을 만나기 전까지 자신은 빛 한 줌 들지 않아 꽁꽁 얼어붙은 세계에 갇힌 채 살아 왔다.

그것만으로는 안 됐던 걸까. 나는 도대체 얼마나 더 아프고 멍들어야 행복해질 수 있을까.

행복해지고 싶었다. 사랑하는 사람들이 건강하게 살아있는 따뜻한 세계가 간절히 고팠다. 원했던 건 단지 그 정도였는데, 신은 희망의 경계에서 번번이 저를 나락으로 밀어뜨렸다. 겨우 용기 내 움켜쥔 사랑의 대가로 다시 겨울의 문턱에 서 있는 거다.

이제는 익숙해질 법도 하건만…….

지저분하게 꼬리를 무는 상념에 억지로 제동을 걸었다. 이제 와 하늘을 원망한들 나아질 건 조금도 없었다. 다만 따뜻한 위로는 간절히 필요했다.

정난우는 베개 밑에서 녹음기를 소환시킬 수밖에 없었다. 들으면 그리움이 짙어져 피하려고 애를 쓰는데 그게 맘처럼 잘 안 됐다.

재생 버튼을 눌렀다. 귓가로 무성의한 박자감각을 뽐내는 자장가가 반주 없이 흘렀다. 수면 유도제로도 나아지지 않는 불면을 치료하는 특효약이었다. 다만 효과는 좋은데 중독 성분이 너무 강했다. 그래서 도저히 끊을 수가 없는 거다.

눈꺼풀에 점점 무게가 실렸다. 감은 눈 안의 검붉은 장막도 점차 완전한 까만색으로 물들어갔다.

잘 자, 내가 너의 요람을 받아줄게.

수면의 늪이 정수리까지 차올랐다. 양수 속에 잠긴 듯이 편안한 꿈속에서 정난우는 엄마의 치맛자락을 꼭 움켜쥐고 있었다.

비가 오고 있는 걸까.

자꾸만 뺨에 물방울이 떨어져 내렸다. 거친 손이 그 물기를 조심조심 거둬냈다. 그녀의 속삭임이 안개처럼 흩어졌다.

난우야…….

*

 “미안해, 벤자민. 내가 당신을 속였어.”

몰리가 색색거리는 호흡을 섞어 말했다. 벤자민의 초점 나간 눈이 정신없이 허공을 헤맸다. 그는 떨리는 손을 뻗어 욕조를 가득 채운 물을 휘저었다. 참방참방 작은 물결이 일어 허공에 무수한 물방울을 뿌렸다.

벤자민은 비릿한 냄새에 미간을 좁혔다. 가슴이 터질 듯 달아올라 부풀었다. 몰리의 새된 숨결이 감염되듯 제게도 옮겨왔다.

 “피…피 냄새가 나, 몰리…… 어디 다친 거야?”

주체할 수 없이 떨리는 손이 몰리의 가녀린 어깨를 쥐었다. 좀 더 더듬어 올라가고 싶었지만 그녀는 늘 얼굴만은 허락해주지 않았다.

 “날 용서하지 마. 내가 한 짓들, 모두 다.”

 “무슨 말이야, 몰리. 당신은 내게 용서받을 짓을 하지 않았어.”

몰리는 벤자민을 서럽게 응시했다. 일그러진 눈 밑으로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녀가 말했다.

 “나는 당신이 생각하는 만큼 아름답지도, 천사 같지도 않아.”

벤자민은 그녀를 병원으로 옮겨야한다고 생각했다. 피 냄새가, 너무 짙었다. 등 뒤 열린 문 뒤에서 하우스키퍼의 발자국이 가까워졌다. 벤자민은 번개같이 고개를 돌리며 소리쳤다.

 “몰리가 다친 것 같아요!”

다급해진 발소리가 문 밖에서 멈췄다. 그 순간, 비명소리가 날카롭게 허공에 뻗어나갔다. 구급차를 부르겠다며 그녀는 도망치듯 사라졌다. 벤자민은 이상하리만치 빠르게 이 상황을 파악했다.

 “너 무슨 짓을…….”

벤자민의 초점 없는 눈은 더 어지럽게 움직였다. 심장은 전력으로 질주하듯 날뛰었다. 몰리는 오한에 짓눌린 듯 몸을 떨며 가는 목소리를 흘렸다.

 “내 얼굴을 만져 봐.”

벤자민은 불안했다. 떨리는 손으로 그녀의 목을 더듬고, 턱을 쓸고 올라갔다. 손끝에 감기는 피부는 믿을 수 없을 만큼 울퉁불퉁했다. 파인 골마다 뜨거운 물기가 고여 있었다.

 “화상자국이야. 실제로 보면 더 흉측하지. 당신이 이런 날 보는 게 두려웠어. 당신이 날 떠날까봐……내가, 내가 그 자를…….”

죽였어. 당신을 어둠 속에서 꺼내 빛으로 내던져 주고 싶어 했던 그 사람을 내가 죽였어. 당신을 내 곁에 구속해 두기 위해서.

몰리의 시야가 점점 흐트러졌다. 애써 눈을 떠 보려하지만 눈꺼풀은 자꾸만 무너져 내렸다.

 “미안해…….”

나의 벤자민, 나는 내 안의 악마에게 영혼을 내 주고 타락해 버렸어. 아름다운 몰리, 사랑스러운 몰리, 당신이 나를 그렇게 부를 때마다, 그 목소리가 너무나 달콤해서 정말 내가 아름다운 여인이 된 것 같았지.

그러나 거울을 보면 늘 차가운 현실로 돌아오고 말았어. 거울 속에 갇힌 나는 화상에 일그러진 얼굴을 가진 추한 여인이었으니까.

이렇게나 아름다운 당신이 빛을 되찾으면, 그 눈부신 재능으로 내 손이 닿을 수 없는 곳까지 날아오를 것 같았거든. 그래서, 그래서 내가 당신을 내가 가진 암흑 속에 가둬놓은 거야.

이제 눈을 뜨고 더 큰 세상을 봐 줘. 우리들을 멸시하고 조롱하고 차별하던 사람들을 내 몫까지 똑바로 노려봐 줘. 그들이 무심히 짓밟거나 외면해 왔던 우리 같은 사람도, 충분히 사랑받을 가치가 있었다는 걸 증명해 줘.

이제 와 이런 말 역겹겠지. 하지만 당신만큼은, 이제 그만 차별받았으면 좋겠어. 그게 내 마지막 소원이야.

몰리의 가느다란 숨이 끊어지는 순간, 벤자민은 함께 숨을 멈췄다. 떨리는 손을 뻗어 흔들어 봐도 돌아오는 건 물소리 뿐이었다.

짐승처럼 울부짖었다. 그는 툭 떨어진 그녀의 고개를 끌어안았다. 들끓는 오열이 젖은 공기를 온통 휘저었다.

왜 그런 말을 하는 거야, 몰리. 나는 당신이 원한다면 영원히 앞을 볼 수 없어도 상관없어. 당신이 원하는 게 나와 함께 차가운 세계에서 차별 받고 살아가는 거였다면, 나는 기꺼이 그렇게 했을 거야.

당신과 함께라면 어디든 좋다고 했잖아. 몇 번이고 말했잖아.

一차별을 견디는 것에서조차 나는 프로라고.

오케이 사인이 떨어졌다. 루스는 완벽하다고 기꺼이 소리쳐 줬다. 스태프들 대부분이 갈채를 보냈다. 죽은 척 안겨있던 아만다 역시 극찬을 건네며 물속에서 일어섰다.

에녹은 그 누구에게도 반응을 돌려주지 못했다. 그대로 욕실 벽에 어깨를 기댄 채 주저앉아 있었다. 붉은 물이 흰 셔츠에 흠뻑 감겨 몸이 떨렸다. 아니, 어쩌면 다른 이유로 떨리는 걸지도 몰랐다.

에녹은 좁은 욕조 벽에 팔을 올려 그 위에 얼굴을 묻었다. 현실의 경계를 훌쩍 넘어 왔으면서도 눈물은 여태 끊어내지 못했다. 차갑게 젖은 팔뚝은 뜨거운 눈물의 덧옷을 입었다.

속살에 착 감긴 그의 어깨가 잦아들 듯싶다가 다시 떨리기 시작했다.

억누르다 간헐적으로 새 나오는 고통스런 통성이 물비린내를 뒤덮어갔다.

에녹의 숨죽인 오열이 들뜬 세트장에 서서히 침묵을 불러왔다. 루스도, 촬영감독도, 자리를 뜨던 신인 여배우도, 붐 마이크를 들고 있던 스태프마저도 얼어붙은 채 그 자리에 붙박였다.

그들 모두가 에녹을 바라보았다. 상처받은 짐승처럼 끓는 울음소리는 구슬프다고 하기에도 모자랐다. 그는 마치 피를 토하듯이 눈물을 쏟아냈고, 내장이 모두 끊어진 듯이 고통스러운 목소리를 냈다.

루스는 에녹을 집어삼킨 환영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고개를 돌렸다. 아무리 피도 눈물도 없다는 평을 받는 저라도 저 꼴은 차마 길게 봐줄 수가 없는 거다.

정난우는 음악을 제외한 거의 모든 분야에서 미숙아처럼 어설펐다. 그의 정신적 성숙도는 후하게 쳐 줘 봐야 열 살. 그러나 그 자라지 못한 내면에도 불구하고, 그는 차별을 견디는 것에서조차 프로가 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변하지 않으면 생존 자체가 불가능했을 테니까.

정난우의 수많은 절망들은 피비린내 나는 어머니의 마지막 모습에서 시작되었다. 방금 전의 촬영 신은 그것을 투영해 막판에 수정해 둔 장면이었다.

주연배우 에녹에게는 처음으로 건네진 시험의 관문이었다. 그가 과연 얼마나 해줄 수 있을 것인가, 감독인 저뿐 아니라 관련자들 모두가 초조하게 오늘을 맞았다.

기대와 불안을 동시에 느꼈던 건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러나 극적인 장면을 막 끝낸 지금, 아마 지금 이 순간 모두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을 거다.

걱정해야할 건 영화가 아니라 에녹의 너덜너덜해진 마음이었다. 깊이 공감해서 필름에 녹이라고 했더니만 압도되어 버린 거다.

에녹은 정난우를 사랑하는 만큼 상처받았다. 정난우가 겪었을 참혹한 가시밭길에 맨몸뚱이를 굴렸으니 껍데기고 속 알맹이고 남아날 리가 없었다.

복받치는 괴로운 신음은 젖은 공기 아래를 낮게 기었다. 길게 이어지는 흐느낌에 스태프들은 조심히 물러나 자리만 지켰다. 젖은 몸에 걸칠 옷을 가져왔던 스타일리스트도 그에게 다가서지 못한 채 연신 한숨만 푹푹 내쉬었다.

에녹을 보듬어줄 수 있는 건 정난우뿐이었다. 어설픈 표정, 어린아이 같은 말투, 맹목적인 사랑을 전송하는 눈동자, 그 외 정난우의 일부를 담은 무엇 하나만이라도 에녹에게 닿아야 저 상처의 일부라도 아물 수 있는 거였다.

처음으로 맞닥뜨린 열병 같은 사랑에 에녹은 맥을 못 추고 있었다. 저 강한 녀석도 그 사랑의 그림자에 갇히니 그저 평범한 한 남자에 불과했다. 저대로라면 얼마 못 버틸 거다.

무너질지도 모르겠다, 그 대단한 에녹 밀리건이.

루스는 쓰게 한숨을 지으며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윌버, 이제 아무도 널 해치지 못해. 가을이어서 해는 짧아지고 날씨는 추워질 거야. 낙엽은 나무에서 흔들리다가 떨어지겠지. 크리스마스가 되고 눈도 내릴 거야. 넌 살아서 꽁꽁 얼어붙은 아름다운 세상을 맛볼 수 있어. 주커만에게는 네가 커다란 의미가 있으니 그 사람은 절대 널 해치지 않을 거야. 겨울이 지나고, 해가 길어지고, 목초지 연못에서는 얼음이 녹겠지. 참새가 돌아와 노래하고 개구리들이 깨어나고 따뜻한 바람이 다시 불거야. 그 광경과 소리와 냄새를 너는 모두 즐길 수 있어, 윌버. 사랑스런 세상, 소중한 나날들. …샬롯이 말을 멈췄다. 잠시 후 윌버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정난우는 멍하니 천장을 응시했다. 어지러운 빛 가루가 현기증처럼 쏟아져 내려왔다. 식사는 조금씩이나마 안 게워내고 잘 챙기는 중이었지만 몸에 기운이 없는 건 여전했다.

오늘도 귓전에서는 녹음기가 열심히 돌아갔다. 하도 많이 들어 이제는 

다 외울 것만 같은 동화책이었다. ‘샬롯의 거미줄’을 다 읽어준 남자가 못마땅하게 중얼거렸다.

《작가가 좀 미쳤나 봐. 잘 자라나는 꿈나무들한테 이게 무슨 짓이야? 동화책이란 자고로 해피엔딩이어야지. 남겨진 윌버는 평생 샬롯을 그리워 하겠군. 샬롯이 싸질러놓고 간 새끼들이나 돌보면서 말이지.》

에녹의 첨언에 정난우는 정말 오랜만에 웃고 말았다. 충분히 감동적인 이야기라고 생각했는데 그의 불평을 들을 때마다 또 그런 것도 같았다.

남겨진 윌버는 정말 평생 샬롯을 그리워할까? 기억을 부식시키는 시간이 누적되면 또 다른 소중한 상대를 만나지는 않을까?

대답을 들려줄 이는 곁에 없었다. 그의 거친 음성이 다음 동화책을 읊기 시작했다. 정난우는 베개 위에 올려둔 랩톱 컴퓨터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에녹의 사진들은 온라인에 뜨는 순간 날개 돋친 듯이 전 세계를 유영했다.

느리게 손을 뻗어 액정을 한 번 쓸어내렸다. 열게 충혈 올라온 눈과 불그스름한 눈가가 차갑게 지문을 뭉겠다. 늘 그랬듯 마스크와 모자로 꽁꽁 가렸지만 얼굴이 크게 클로즈업되어 그 눈매는 선명하게 보였다.

감정은 잘 추슬렀을까…….

에녹이라면 뭐든 혼자 척척 알아서 하겠지만, 그래도 걱정이 되는 건 어쩔 도리가 없었다. 아기 대하듯 허벅지에 머리를 올려 두고, 붉게 짓무른 눈꺼풀에 얼음주머니라도 대 주고 싶었다.

휴대폰을 만지작거렸다. 한참을 망설이다 화면을 켰는데 아무것도 뜨지 않았다. 방전된 배터리를 교체하고서 전원 버튼을 눌렀다.

곧 액정이 불을 밝혔다. 통화 가능 지역 표시가 뜨자마자 진동이 울렸다. 깜짝 놀라 휴대폰을 떨어뜨렸다. 매트리스 위에 나동그라진 그 조그만 게 발악하듯 몸을 떨어댔다.

환히 불 밝힌 액정에는 목메게 그리운 이름이 떠 있었다. 에녹이었다. 정난우는 우왕좌왕 모니터와 휴대폰을 번갈아 보았다. 이 사람이 저 사람이고, 저 사람이 이 사람인 거다.

어쩌지. 어쩌지. 어쩌면 좋지?

누군가 심장을 다듬이질하는 듯했다. 난타하듯 튀어대는 고동에 귀가 먹먹해질 지경이었다.

숨이 가빠졌다. 머릿속은 엉망으로 헝클어졌다. 굳게 다짐했던 것들이 와르르 무너지고 깨지고 뒤엉키는 거다.

엄마가 먼저인데, 엄마만 생각하기로 했는데…….

그러나 생각과 몸뚱이가 따로 놀았다. 운동을 명령하는 뇌 한구석에 극렬한 혼선이 왔다. 머리는 좀 더 참으라고 하는데 극에 달한 그리움이 거센 저항을 해댔다.

팔이 제멋대로 움직였다. 결국에는 구조를 바라듯 울고 있는 휴대폰을 집어 들고야 말았다. 손끝에 느껴지는 진동은 필사적이고 처절했다. 애써 눌러놓은 갈급증이 순식간에 치고 올라와 화마처럼 활활 타올랐다.

윗입술을 꽉 물었다. 큰 들숨으로 폐를 한 번 채우고, 그러고 나서 전화를 받았다.

 “여, 여보세요…….”

완벽한 침묵이 돌아왔다. 어떠한 반응도 없었지만 아득한 거리에서 뜨겁게 요동치는 무언가는 선명히 자각했다.

정난우는 입술을 꽉 물었다 놓으며 눈을 감았다.

 “에녹…….”

그 때였다. 거칠게 끓는 그의 숨결이 수화부에서 터져 나왔다. 마그마 폭발 직전의 화산재가 뿜어져 나오듯 매캐하고 뜨거운 잔향이 코끝에 머물렀다.

탄식에 가까운 그의 신음 한 토막이 고막을 채웠다. 물기 엉겨붙은 그의 젖은 숨소리가 모든 걸 말해 줬다. 미간이 아릿하게 일그러졌다.

많이 기다렸어요? 내가 많이 아프게 했어요?

《식사는 잘 챙기고 있어?》

원망도 없이 그는 그렇게 물었다. 한없이 낮게 침잠해 들어가는 목소리는 지독하게 갈라져 있었다.

정난우는 울렁이는 목을 한 손으로 주무르며 겨우 대답했다.

 “네. 에녹은…….”

《네가 아무리 날 열 받게 하고 애를 태우고 속을 뒤집어 놔도, 내 몸 안 망가뜨려. 술도 한 방울 입에 안 대고 있어.》

 “…….”

《너 돌아올 거잖아. 그럼 체력유지는 하고 있어야지. …그렇지?》

그는 말끝에서 속삭이듯 물었다. 정난우는 차마 대답하지 못했다. 한참을 말없이 숨소리만 주고받았다. 점점 뜨끈하게 달아오르는 작은 휴대폰이 얼핏 그의 온도까지 상승했을 즈음이었다.

《너 이거 반칙이야.》

그가 무겁게 중얼거렸다.

《내내 안달복달하다 나는 겨우 네 목소리 들었는데 너는 그러고 있냐. 괜히 줬어. 다음번에 만나면 다 박살내버릴 거야. 그따위 꼼수 못 쓰게.》

정난우는 황망히 눈을 내렸다. 녹음기 소리가 그에게까지 훌쩍 건너가 버린 모양이었다. 비겁함을 들켜버린 내심이 뜨끔하게 찢어졌다.

그가 목소리를 누그러뜨렸다.

《아무 말이나 좀 해. 또 언제 받을지도 모르는데. 내내 사람 돌게 만들더니 또 왜 이래.》

 “…아. 그러니까, 그냥 아무것도 안 떠올라서.”

《내가 대사 지정해 줘?》

차라리 그게 낫겠다. 그가 불러주는 대로 말하면 될 거다. 그러나 대답도 하기 전에 그가 성급하게 말했다.

《간단해. 따라해 봐.》

 “…네.”

《나도 보고 싶어 미치겠어. 금방 날아가서 안아줄 테니까 불안해하지 말고 조금만 기다려 줘. 사랑해, 에녹.》

결 갈라진 목소리는 감정 없이 기계적인 단어들을 흩뿌렸다. 마치 교과서를 읽는 초등학생 같았다.

정난우는 잠시 멍하니 눈만 깜빡거렸다. 그는 재촉 없이 잠자코 기다렸다. 그냥, 느껴졌다. 곤두선 그의 청각 세포들이 저 너머에서 숨죽인 파도처럼 일렁거리는 것이.

그 느낌이 너무 선득하게 척추를 저며 왔다. 피할 수가 없었다. 사실은 그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부터 오장육부가 다 녹아내렸다. 머리도 몸도 제 것이 아니었다. 느리게 입을 열었다.

 “저도, 보…보고 싶어요. 우리 어머니 무사히 깨어나시면, 저 좀 봐 달라고, 당신 없으면 매일 울고 싶을 거라고, 어머니한테 빌고 매달려서, 꼭, 꼭 다시 갈게요. 그러니까 에녹.”

《…….》

 “불안해하지 말고 기다려 주세요.”

그가 따라해 보라고 했던 대사들은 살이 덕지덕지 붙었다. 그 육중함에 숨이 막혔다. 이게 제 진심인 거였다. 이런 불효자가 따로 없었다.

어머니가 사경을 헤매는 순간에도 에녹을 놓지 않고 싶어 하는 제 이기심이 새삼 두려웠다. 그런데도 포기가 되지 않아 가슴이 으스러졌다.

 “사랑해요.”

당신이 나를 기다려줬으면 좋겠다. 나 말고는 아무도 품에 안지 않았으면 좋겠다. 내가 아주 오랫동안 돌아가지 못하더라도, 나만을 기다리고 그리워해줬으면 좋겠다.

내가 이렇게 욕심 많은 인간이더라도, 나를 사랑해줬으면 좋겠다.

 “사랑해요, 에녹.”

정난우는 혼신의 힘을 다해 고백했다. 뜨겁게 속 안에서 요동치는 감정의 마지막 한 방울까지 짜내서 그에게 전송했다.

그가 잠긴 목소리로 대답했다.

나 버리지 마.

*

리무진 기사는 입국 전에 착실히 차를 대기시켜 놓고 있었다. 가벼운 캐주얼 차림의 강도영은 배낭을 풀며 뒷좌석에 몸을 실었다. 차가 부드럽게 출발했다.

숨 가쁘게 바쁜 풍경이 차창 안에서 끊임없이 뒤로 넘어갔다. 싱싱한 봄꽃과 나무들이 하늘을 향해 뻗어나가는 5월이었다. 태어난 곳도 거의 머무는 곳도 미국이지만 가끔 공연 차 올 때마다 이 나라는 낯선 듯 익숙했다.

좌석에 길게 누워 휴대폰을 들었다. 곧장 다이얼을 눌러 전화를 걸었다. 통화 연결음은 금방 끊겼다. 힘없는 목소리가 들려 왔다.

《응. 오랜만이야, 형.》

요새 좀 생기가 가득한가 싶었더니 도로 숨죽은 채소 꼴이었다. 강도영은 쓰게 혀를 찼다.

〔호텔이지?〕

《응. 면회시간 되려면 아직 한참 남아서.》

〔어디 호텔, 몇 호?〕

정난우는 의아한 듯 잠시 말이 없었다. 강도영이 먼저 입을 열었다.

〔형 지금 인천공항에서 가는 길이야. 어머님 문병 겸 너 괜찮은가도 보려고.〕

《아…… 바쁠 텐데 뭐 하러.》

〔너 사고 났을 때는 바빴는데 지금은 괜찮아. 호텔 이름이랑 호수 문자로 보내 놔.〕

《응.》

통화를 끝낸 휴대폰을 쥔 채 잠시 생각에 잠겼다. 마지막으로 본 게 작년 가을, 9월이었다. 정난우의 생일. 아무리 피하더라도 그날은 꼭 잊지 않고 챙겼다. 비록 짧게 밥 먹고 차 마시고 헤어진 정도였지만.

훨씬 이전에는 어머님 댁에 함께 놀러가 조출한 파티를 하곤 했다. 매 번 정난우의 어머니는 동네 어른들 도움 없이 진수성찬을 차렸다. 침침한 눈을 한껏 가늘게 뜨며 머리를 툭툭 쓰다듬던 그녀의 모습이 눈에 선했다.

「우리 도영이는 참 날이 갈수록 훤해지네. 이렇게 미남인데.」

저는 그저 빙그레 웃기만 했다. 그녀가 할 말은 항상 뻔했고, 제가 돌려줄 대답도 항상 같았다. 오고가는 눈빛만으로 충분했다.

정난우에게서 도착한 목적지를 리무진 기사에게 알렸다. 멍하니 차창 밖을 올려다보는 도중 이유 없이 긴 한숨이 쏟아져 나왔다.

청명한 푸른 하늘에 흰 구름들이 엇갈리고 뒤엉켜 있었다. 날씨가 참 쓸데없이 좋았다. 차라리 비라도 오면 축축한 고민이라도 해보겠지만 이래서야 그럴 기분조차 들지 않는 거다.

무료한 눈을 내렸다. 금세 죽어버린 화면을 다시 불러왔다. 보면 속이 쓰릴 걸 알면서도 결국 또 들어갔다. 정난우의 SNS, 이거 참 사람 열 받게 하는데 은근 중독성이 있었다.

접속하자마자 헛웃음을 터뜨렸다. 팔로워가 그새 불었다. 분명 올 초까지만 해도 40만도 안 됐는데 이제 무려 400만을 돌파했다. 여느 할리우드 배우 부럽지 않은 유명세를 탄 것만은 확실했다.

강도영은 득도하는 셈 치고서 코멘트들을 읽어나갔다.

『얘들아. 지금 우리끼리 싸울 때가 아닌 것 같아. 이러다 이 개 잡놈들이 우리 난우랑 에녹을 아주 잡게 생겼다고!』

『우리 난우 파파라치 샷 보니까 얼굴 완전 반쪽이던데, 그 개자식들, 그 와중에도 병원 들어가려는 사람한테 벌떼처럼 몰려가더라. 작작 좀 하지.』

『아 그 새끼들 에녹 영화 세트장 근처에도 진을 치고 있어. 기자들이고 파파라치들이고 왜 그렇게 괴롭혀대? 씨발! 말하다 보니까 나도 열받잖아!』

『에녹 촬영 끝나고 찍힌 사진들 보니까 진짜, 완전 상 당한 애 같더라. 그 근사한 얼굴이 세상에 완전 표정 하나도 없고. 기자새끼들이 정난우 엄마 얘기 막 물어본대. 당신 때문에 충격 받아 쓰러진 거라고. 그런데 난우 엄마 상태는 어때? 위독하다며?』

『와, 진짜? 그것들 완전 개 쓰레기네 ! 아 난 난우 팬인데 화나! 난우 엄마 아직 못 깨어나셨어. 나도 실시간으로 검색해 보는데 의료진들이 쉬쉬하는 건지 특별한 소식은 없네.』

뜨거웠던 콜로세움은 화해의 장으로 변모해 있었다. 좀 기가 막히지만 그래도 정난우가 욕먹거나 희롱 당하는 것보다는 훨씬 나은 분위기였다. 다만 에녹에게까지 동정여론이 퍼지는 건 좀 못마땅했지만.

무감각한 눈으로 화면을 밀어내려던 강도영의 눈썹이 일순 미세하게 꿈틀거렸다. 방금 전 읽은 코멘트에서 거슬리는 부분을 뒤늦게 건져낸 탓이었다.

『당신 때문에 충격 받아 쓰러진 거라고.』

이건 어디서 나온 소린지 의아했다. 뇌출혈이라는 소식을 들었을 때는 고령이시니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아예 원인 자체에 의문을 둔 적은 없었다.

뭔가 잘못 알려진 걸 거다. 여론이 반드시 진실만을 싣고 다니는 건 아니었다. 크게 이상하게 생각지 않고 그냥 넘겼다.

평일 낮 한산한 도로는 정체 없이 물처럼 흘러갔다. 정난우의 SNS도 보고, 에녹의 SNS도 잠깐 들어가 보고, 그러는 사이 시간은 훌쩍 흘러 호텔에 도착해 있었다.

강도영은 차에서 내리자마자 인상을 찌푸렸다. 여기저기 카메라를 들고 대기해 있는 것들이 곳곳에 눈에 띈 탓이었다. 수는 그리 많지 않지만 나름 인종박람회였다. 그저 기가 찼다.

배낭을 추슬러 메며 로비로 들어갔다. 곧장 엘리베이터를 타려다 제지 당했다. 돌아보자 호텔 경호원인 듯 검정색 정장을 입은 체격 좋은 남자가 정중히 말했다.

〔죄송합니다, 고객님. 혹시 투숙객이십니까?〕

〔아뇨. 위에 일행 있습니다.〕

〔아, 정말 죄송합니다만 객실 층으로 잠입하려는 기자들 때문에 잠시 프런트에서 확인 좀 부탁드리겠습니다.〕

강도영은 기꺼이 고개를 끄덕였다. 단정한 차림의 직원이 친절하게 웃으며 객실 번호를 물었고,  강도영은 대답했다. 그녀가 놀란 듯이 눈을 크게 떴다.

〔정난우 고객님을 찾아오신 거 맞습니까?〕

〔맞습니다. 전화 걸어보세요.〕

간단한 통화 후에 올라갈 수 있었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 적막한 복도가 눈에 들어왔다. 굳이 호수를 확인하지 않아도 정난우가 묵는 방은 바로 보였다. 경호원 한 명이 문을 지키고 있는 거였다. 미리 말을 해둔 건지 그는 별 말 없이 비켜섰다.

초인종을 눌렀다. 10초도 안 돼 정난우가 문을 열었다. 안으로 들어서며 얼굴을 살피는데 마음이 좋질 않았다. 소파에 털썩 앉는 정난우 옆에 자리를 잡았다. 배낭을 풀어 바닥에 두며 운을 뗐다.

〔얼굴 많이 상했네.〕

무심결에 뻗은 손등이 푸석한 뺨에 가 닿았다. 정난우는 무겁게 눈꺼풀을 늘어뜨렸다.

〔정신도 없고, 입맛도 없고, 그냥 그래서.〕

〔밥은 잘 먹어?〕

입술을 몇 번 씹은 정난우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강도영은 금세 회수한 손으로 제 머리카락을 한 번 흐트러뜨렸다. 그리고 나란히 있는 무릎을 제 무릎으로 툭 밀어내며 타박했다.

〔얌마. 어머니 곁을 지키려면 너부터 건강해야지. 우울해서 먹기도 싫다, 그런 생각 하니까 안 넘어가는 거야.〕

〔…하루 종일 슬픈 생각밖에 안 나. 힘내고 싶은데 그게 잘 안 되니까 나도 속상해.〕

정난우는 한쪽 발로 바닥을 툭툭 밀어내며 중얼거렸다. 우울한 내심이 가시처럼 돋아나 피부가 따끔거렸다.

〔형이 진짜 냉정하게 얘기해 줄까?〕

강도영이 소파 등받이에 몸을 파묻었다. 정난우의 물기 어린 눈동자가 쭉 따라왔다. 시원하게 자른 머리 아래 앳된 얼굴은 여전했다.

순해 보이는 눈, 단아해 보이는 이마와 적당히 솟은 콧대, 얌전히 다물린 입술, 정말 다 그대로였다. 크게 변하지 않은 얼굴을 보고 있자니 마치 10여 년 전으로 돌아간 것만 같았다.

희미한 향수에 젖었다. 말끔히 도려내고 싶은 마음과 되찾고 싶은 욕심이 가슴속에서 충돌했다. 실현 가능성이 제로인 두 가지 열망을 가만히 잠재우며 말을 이었다.

〔난우야. 어머님 칠십 대 후반이셔. 그쯤 되면 어머님뿐만 아니라 다른 노인 분들도 병원신세 많이 지실 연세야. 그러니까 마음 좀 단단히 먹어. 면회 들어가서도 그렇게 내내 축 쳐져 있으면 어머님이 참 기운이 나시겠다.〕

정난우는 시선을 툭 떨어뜨렸다. 그리고 허벅지 위에 놓인 제 손끝이 마주 얽혔다 풀어지는 모양을 한참 응시했다.

〔엄마 돌아가시면 나 어떡해?〕

정난우가 속삭이듯 물었다. 희미한 떨림이 그 안에 녹아 있었다. 반듯한 미간 위로 흐린 주름이 음영을 만들었다.

강도영은 축 쳐진 마른 어깨 위로 한 손을 짚었다.

〔인명은 재천이라고 했다, 난우야. 물론 꼭 깨어나시겠지만, 돌아가셔도 받아들일 수밖에 없어. 너 할 만큼 다 했어. 효도도 많이 했고. 아주 만약에, 정말 불행하게도 돌아가실 수밖에 없다면, 장례 잘 치러드리고 가슴에 잘 묻어드리면 돼. 어머님도 그걸 바라실 거고.〕

현실적인 조언밖에 해줄 수 없는 제가 조금은 착잡했다. 그 남자라면 이 순간에 어떤 말을 할까, 그런 덧없는 생각이 뇌리를 한 번 스치고 사라졌다.

정난우가 침울하게 중얼거렸다.

〔아마 형 말처럼 엄마가 그저 연세 많으셔서 몸이 고장 난 거면 나도 그렇게 생각해보려고 애썼을지도 몰라. 에녹한테 많이 혼나가면서 자학하는 버릇 고치려고 정말 많이 애쓰고 그랬는데…….〕

〔그랬는데?〕

정난우의 얇은 눈꺼풀이 추락하는 잠자리 날개처럼 다급히 떨렸다.

〔엄마가 내 열애설 기사 보고 계단에서 떨어지셨대. 언론에는 자세한 거 안 나갔는데 자발성 뇌출혈이 아니라 외상성 뇌출혈이었어.〕

가만히 어깨를 도닥이던 강도영의 손이 불현듯 멎었다. 무시해 버렸던 헛소리에 눈썹이 저절로 용트림을 했다. 창백하게 굳어있는 정난우의 얼굴을 뚫을 듯이 응시하다 물었다.

〔그게 무슨 말이야? 어떤 씹一씹어 먹을 소리를 누가 했는데?〕

반사적으로 튀어나가려던 욕설을 황급히 공사했다. 정난우는 별 의심없이 대답했다.

〔고모님이…….〕

〔고모? 그一 네 친아빠 누나?〕

또 한 번 거친 언사가 튀어나갈 뻔했던 걸 겨우 참았다. 정난우가 미적미적 고개를 끄덕였다.

그 순간, 강도영의 이목구비가 싸늘하게 얼어붙었다. 불꽃 튀는 눈을 감추려 시선을 내리깔았다. 그는 날카로운 턱을 손끝으로 쓰다듬으며 바닥을 노려보았다.

이 개 잡것들이 하다하다 이젠 별 지랄을 다 하네.

강도영은 표정을 지우고서 정난우의 고개를 억지로 돌렸다. 아무것도 모르는 순백의 표정이 시야에 꽉 들어찼다. 느리게 깜빡이는 눈을 물끄러미 들여다보는 그 짧은 순간, 많은 조각들이 주마등처럼 뇌리를 긁고 지 나갔다.

무료하던 제 삶에 혜성처럼 떨어진 정난우, 격동의 지진이 휩쓸고 간 2년, 뒤따른 폐허와 서로에게 남은 상흔들.

강도영은 세차게 머리를 흔들어 상념을 떨어냈다. 후회는 결국 아무것도 되돌리지 못한다. 어긋나 버린 물꼬는 이미 다른 곳으로 뻗어나가 급류를 만들었다. 받아들이는 것밖에 도리가 없었다.

언젠가는, 정말 다 없어질 거다. 시간은 모두에게 공평하니까.

강도영은 흔들리는 마음을 꽉 틀어쥐고서 말했다.

〔그 여자 번호 찍어. ……아니다. 그러지 말고 네 걸로 전화를 걸어서 나한테 넘겨.〕

정난우는 왜? 했다. 강도영은 대꾸 없이 턱짓만 해보였다. 정난우는 고개를 한 번 갸우뚱하더니 번호를 검색해 휴대폰을 건넸다.

〔형 잠깐 복도에서 통화 좀하고 올게.〕

〔밖에서?〕

강도영은 앉아있으라고 손짓하고는 문을 열고 나갔다. 묵묵히 선 경호원은 여전히 그 자리에 있었다.

강도영은 빈손으로 머리카락을 흐트러뜨리며 통화 버튼을 눌렀다. 여자는 제법 빠르게 받았다. 그 특유의 카랑카랑한 음성이 곧장 건너왔다.

《평소엔 제 고모 알기는 뭣 같이 알더니, 이제야 좀 고맙니? 웬일로 먼저 전화를 다 해?》

〔나 강도영입니다.〕

상대방이 침묵했다. 숨소리조차 건너오지 못했다. 강도영은 복도 벽에 비스듬히 어깨를 기댔다. 조용히 타오르는 눈길이 허공을 찢었다.

〔나 지금 난우 묵는 호텔인데, 와서 나 좀 봐야겠어요.〕

《…….》

〔내가 좀 물어볼 게 있는데 이게 전화상으로는 좀 그러네. 차 보내줄까요?〕

《강 군이 나를 왜요?》

그녀의 어투는 못마땅함과 긴장이 반 정도 뒤엉켜 혼탁했다. 강도영은 피곤하다는 듯이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언제 그런 거 시시콜콜 다 얘기하며 보자고 한 적 있습니까? 군소리 말고 오라면 좀 오세죠. 내가 직접 가서 그 집구석 다 뒤집어엎기 전에.〕

《…허. 참 나. 아니, 어른 상대로 무슨 말버릇이 번번이一》

이 여자는 정말 지긋지긋할 만큼 학습능력이 없었다. 강도영의 눈썹이 사납게 꿈틀거렸다.

〔아, 씨발. 진짜 말 좇 같이 많네.〕

결국 오늘 제대로 완성된 쌍욕이 터져 나오고 말았다. 끓는 입술을 혀로 한 번 축인 그는 다시금 숨죽인 상대에게 말을 이었다.

〔나 그렇게 오래 겪어 놓고 몰라요? 나름 예의 차리고 있는데 왜 들쑤셔서 꼭 사람 입을 걸레로 만들어. 나 지금 좇 같이 열 받아 있으니까 좋은 말로 할 때 튀어 오라고. 난우가 돈 준다고 했으면 총알택시라도 불러서 왔을 거 아냐. 거지처럼 들러붙어 있는 것들이 허세 두른다고 뭐 달라져? 네 시간 줄 테니까 그 안에 오세요. 알아들었습니까?〕

상대는 거친 숨만 몇 번 내뱉더니 전화를 끊었다. 아마 4시간 겨우 다 채울 때쯤에서야 설렁설렁 기어올 거다. 전화를 끊고 돌아서는데 진동이 손바닥에 감겨들었다. 힐끔 내려다보자 탐탁찮은 이름이 보였다.

이 새끼는 이 시간에 잠도 안 자나.

강도영은 평소 하던 버릇대로 전화를 대신 받았다.

 “네, 정난우 씨 전홥니다.”

《…누구야, 너.》

에녹이 대뜸 물었다. 날카롭고 거친 결을 보이는 목소리였다. 강도영은 미간을 좁히며 대꾸했다.

 “크리스토퍼 강입니다.”

《당신이 난우 전화를 왜 받아. 지금 둘이 같이 있습니까?》

 “잠깐 쓸 일 있어서 빌렸는데 마침 그쪽이 전화한 겁니다. 기다리세요. 바꿔 줄 테니까.”

더 대화를 섞을 마음은 없었다. 강도영은 문으로 걸어가 초인종을 눌렀다. 문을 열어 주는 정난우에게 휴대폰을 건넸다.

〔받아. 전화 왔다.〕

얼떨결에 받아든 정난우의 풀린 눈이 발신자를 확인한 순간 휘둥그레 졌다. 초점이 돌아온 건 순식간이었다. 정난우는 당황한 표정으로 입을 어물거리며 강도영을 올려다보았다. 영문을 모르는 강도영이 한쪽 눈썹을 슬쩍 치켜올렸다.

〔왜?〕

〔…아, 아니…….〕

정난우는 응접실 소파에 털썩 주저앉고서도 끙끙거렸다. 한 번 통화를 하면 자꾸만 전화기만 붙들고 있고 싶을 것 같았다. 그래서 또 잠깐 피하던 참이었다.

내가 잘못 바꿔준 건가, 하며 강도영이 조금 반성하고 있을 때였다. 어정찡하게 허벅지 위에 방치해 둔 휴대폰에서 지독하게 끓는 고함이 벼락처럼 허공에 뻗어 나왔다.

《당장 안 받아?!》

정난우는 허둥지둥 휴대폰을 귀에 붙였다. 식은땀이 순식간에 이마에 맺혀 왔다. 등줄기도 서늘한 한기가 긁어내렸다.

 “네, 네! 받았…받았어요!”

《너 나한테 약속한 거 기억 해, 못 해.》

 “…아. 그…저, 제가…이, 일부러 그런 게 아니고…….”

《이 자식이 진짜! 일부러건 아니건 네가 나 없는 데서 그 놈을 만났으면 보고를 바로 해야 할 거 아냐!》

질투로 뒤집힌 목소리는 거칠고 사나웠다. 정난우는 반사적으로 어깨를 움츠린 채 길게 이어지는 고성을 고스란히 두드려 맞았다.

네가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 있냐고, 애달게 전화만 붙잡고 사는 나한테는 그 비싼 목소리도 잘 안 들려주면서 그 놈은 저 몰래 만나는 거냐고, 첫 통화에서 못 쏟아낸 원망과 울분까지 함께 터져 나오는 거였다.

《난 독점욕은 지독한 게 썩어빠지기까지 한 놈이라 상상력도 끝없이 저속해. 정난우, 난 네가 그 놈이랑 단 둘이 있다고 하면 온갖 더러운 의심들에 피가 끓는다고.》

한차례 울화를 쏟아낸 에녹은 질긴 고깃덩이를 씹어 내뱉듯이 말했다. 정난우는 소강된 틈을 타 얼른 입을 열었다.

 “아, 아니에요. 그런 거 정말 아니에요. 약속, 못 지킨 거 미안해요. 멍하니 있다 보니까 아무 생각도 안 나고…….”

정말 아무 생각이 없었다. 잡념이 정수리를 짓밟을 땐 바이올린으로 해결이 되는데, 머리가 텅 비었을 때는 정말 혼 없는 인형처럼 앉아있는 게 요즘의 자신이었다.

 “미, 미안해요. 정말 미안해요. 사과할게요. 의심, …안 하면 안 돼요? 저는…… 정말 그런 거 없는데…….”

에녹은 잠시 살얼음 같은 침묵을 끌어왔다. 고요히 허공을 노려보고 있을 그의 눈동자가 눈앞에 도깨비불처럼 어른거렸다.

얌전히 기다리고 있으려니 긴장에 목이 바싹바싹 타들어갔다. 견디지 못한 입술이 성급하게 벌어지려던 참이었다.

《절대 못 만지게 해.》

그가 경고조로 말했다.

《뺨을 꼬집건 머리를 쓰다듬건 다 허락해주지 말라고. 내가 만진 곳들에 그새끼 지문 남기지 마.》

 “…아.”

《아, 는 뭐가 아, 야. 대답 안 해?》

 “그, 그럴게요! 네, 알겠어요.”

또 화를 내기 전에 냉큼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저도 당신이 아니면 싫어요, 정말이에요, 그렇게 덧붙이자 에녹의 목소리가 한층 누그러졌다. 그는 엉뚱하다면 엉뚱한 질문을 했다.

《내가 물어놓은 자국들 다 사라졌지?》

 “…네.”

《성질나네. 누가 보더라도 내 거라는 도장이 찍혀있어야 하는 건데.》

그가 짙은 한숨 섞어 중얼거렸다.

《살 부대끼며 씹어놓고 싶어서 미칠 것 같다. 촬영 끝나고 돌아오면 몸은 뜨거워지는데, 멀쩡한 애인 놔두고 자위를 할 수도 없고 내가 정말 너 때문에 돌겠다.》

놀리려는 의도도 없이 그냥 담백한 한마디였다. 정난우는 멍하니 눈을 깜빡거렸다. 제 몸에 남은 자국은 사라졌지만 그가 남겨 놓은 열기는 여전했다. 저 역시 그와 피부를 맞대고 이전처럼 뜨겁게 호흡을 나누고 싶었다. 정난우는 희미하게 얼굴을 붉히며 입을 열었다.

 “저…에녹. 조금 힘들어도 참으면 안 돼요?”

《뭘?》

 “저, …그거 싫은데…….”

에녹은 무언의 물음표를 전송해 왔다. 정난우는 침울하게 눈을 내리깔 며 슬쩍 강도영의 기류를 살폈다. 무심한 시선을 빗겨내려 바라보던 강도영이 일순 눈썹을 꿈틀거렸다.

이게 지금 나한테 비켜 달라는 건가.

어물대며 말문을 뭉개고 있는 걸 보아하니 정말 그런 모양이었다. 보내 주자고 한 지 얼마나 지났다고, 정말 기가 막혔다. 강도영은 쓰게 실소하며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그가 눈치껏 다이닝으로 사라지자 정난우는 얼른 말을 이었다.

 “혼자 하지 말아요. 저 그거 싫어요.”

《…무슨 말인지 알아듣게 좀 해. 그러니까 뭐, 혼자 빼 내지 말라는 소리야?》

 “네 에녹이 저한테 약속했잖아요. 저한테만…그…….”

에녹은 어처구니없다는 투로 ‘약속은 네가 먼저 어겼잖아.’하고 반박했다. 할 말이 없었다. 다시 소심하게 입을 다물자 에녹은 한 번 혀를 차더니 달래듯 목소리를 낮췄다.

《아냐. 이제 화 풀렸어. 그런데 무슨 약속을 말하는 건데? 내가 언제 자위 안 하겠다 그런 이상한 소리 지껄인 적 있나?》

정난우는 잠시 망설이다가 더듬더듬 대답했다.

 “약속, 했어요. 분명히, 저한테만…한다고…….”

말끝을 흐리자 침묵이 되돌아왔다. 숨소리마저 증발한 상태가 꽤 오래 지속되었다. 정난우는 어리둥절하게 휴대폰 액정을 한 번 살폈다. 끊어진 게 아니란 걸 확인하고 다시 귀에 붙였을 때였다.

《하…참. 진짜 별  이건 무슨 .》

에녹은 뭔가 미완성형 문장들을 여러 개 흘렸다. 그리고 거친 날숨을 수차례 뱉어낸 다음에서야 정돈된 단어들을 나열했다.

《평소대로 깔짝거리다가는 내가 진짜 그걸 해 버릴 것 같으니까, 담백하게 정리하자. 그러니까 네 말은, 혼자서 싸지 말고 너한테 싸 달라 이 말이잖아. 맞아?》

 “아, 맞아요. 그거예요.”

명쾌한 정리에 정난우의 얼굴이 밝아졌다. 누가 봐 주지도 않는데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또 한차례 고여 든 침묵 끝에서 에녹은 짙게 앓는 소리를 냈다. 그리고 너 진짜 몹쓸 놈이라며 폭언을 던져왔다.

정난우는 제가 또 뭘 잘못했나 싶어 다시금 조마조마해졌다. 입술만 씹길 여러 번, 그가 체념한 어조로 말했다.

《그래……아, …씨발. 그래, 너 다 먹어라. 한 방울도 안 빼고 딱 가지고 있다가 너한테 모조리 다 싸 줄 테니까 받을 준비나 단단히 하고 와. 힘들다고 징징거리기만 해. 묶어두고서라도 네 안에 다 싸 버릴 거니까.》

드디어 바라던 대답이 왔다. 정난우는 모처럼 기분 좋게 웃으며 지체없이 대답했다.

 “네. 그럴게요. 약속.”

그 순간, 그의 끓는 울분이 고막을 찌릿하게 관통했다.

《야, 이 망할 자식아!》

최순애 부부와 이정운 모자는 오늘도 저녁거리를 싸들고 호텔에 찾아 왔다. 정난우에게는 이제 조금 익숙해진 조합이었지만 강도영은 묻는 시선을 던졌다. 정난우가 낯선 이들을 간단히 소개하며 객들을 안으로 들였다.

최순애의 남편과 이정운은 곧장 다이닝으로 향했다. 양손에 들린 찬합을 식탁에 올리고 보자기를 풀 때였다.

중환자실에서 정난우에게 전화가 걸려 왔다. 어머니가 짧게나마 의식이 돌아왔다는 말을 전했다. 지금은 다시 잠들어 있지만 이제 며칠 상태를 두고 보다가 일반병실로 옮기면 된다고도 덧붙였다.

정난우는 휴대폰을 붙들고서 연신 고맙다고 고개를 숙였다. 전화를 끊고는 맥이 풀려 그대로 주저앉고 말았다. 첫 날 중환자실에 들어갔던 이후 처음으로 눈물이 왈칵 터져 나왔다.

〔엄마. 자? 나 왔어.〕

정난우는 힘없이 늘어진 손을 조심히 두 손에 감싸 쥐었다. 귓가에서 한참을 애타게 부르자 주름진 눈꺼풀이 살짝 움직였다. 꼭 쥔 손에서도 미약하나마 반응이 돌아왔다. 애가 타서 더 빠르게 속삭였다.

〔엄마. 눈 뜰 수 있어? 나야. 난우 왔어. 나 좀 봐 줘, 응?〕

마치 그 목소리를 들은 듯 그녀는 눈꺼풀을 힘겹게 말아 올렸다. 초점 흐릿한 눈동자가 한참 허공을 헤맸다. 정난우는 엉덩이와 발을 동동거리며 그 시야 안에 제 얼굴을 필사적으로 구겨 넣었다.

〔나 보여? 엄마, 나 누군지 알아보겠어?〕

후욱. 후욱.

벤틸레이터가 산소를 불어넣는 소리가 어머니의 입술에서 목소리를 앗아갔다. 결국 말하는 걸 포기하고 그녀는 고개만 한 번 끄덕였다. 하도 울어 통통 부은 눈꺼풀 아래 또 눈물이 흘러내렸다.

〔고마워, 엄마. 힘내줘서 정말 고마워.〕

물끄러미 보는 눈동자가 옅은 미동을 보였다. 뭔가를 해 주고 싶은데 몸이 안 움직이는 듯했다. 정난우는 손등으로 뺨을 거칠게 비벼 닦고 그녀의 손을 제 얼굴에 붙였다.

〔엄마. 나 엄청 많이 놀랐어. 엄마 죽는 줄 알고 되게 많이 울었어. 빨리 일어나자. 엄마, 내가, ……내가 정말 잘못했어.〕

뭘.

어머니가 입술만 가까스로 움직여 물었다. 정난우는 떨리는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다 말했다.

〔나 진짜 바본가 봐. 내가 좋아하는 사람은 엄마가 다 좋아할 줄 알았어. 그냥 다, 너무 미안해. 아무 생각도 못 하고 그냥 막 좋아서 내가 엄마 맘 깊이 생각도 안 하고…….〕

어머니의 눈썹이 희미하게 일그러졌다. 주름에 고인 음영이 한층 짙어졌다. 그 때, 말없이 지켜보던 강도영이 옆으로 다가와 포개진 손에 제 것을 얹었다.

〔어머님. 저 도영이에요.〕

도영이. 그녀의 입술이 느리게 단어를 만들었다. 강도영은 느리게 움직이는 불투명한 눈동자가 초점을 맞출 때까지 기다렸다. 그리고 마침내 시선이 맞부딪치자 상체를 수그리며 빙긋 웃었다.

〔우리 난우가 오해를 좀 하고 있는 것 같아요.〕

뭐.

〔어머님 쓰러지신 게 자기 탓이라고 하네요. 그 신문에 난 난우 기사 말이에요. 그거 보고 계단에서 구르신 거라고.〕

…아니야.

〔그렇죠? 이 바보가 의심할 줄도 모르고, 누가 말하면 곧이곧대로 믿어버리는데 제가 참 속상해 죽겠어요. 밥도 잘 안 먹는대요. 자기 때문에 엄마 아프다고.〕

정난우는 멍한 눈으로 강도영과 어머니를 번갈아 응시했다. 지금 오가는 대화를 좀체 이해할 수가 없었다.

나 때문이, 아니라니?

텅 빈 머리로 눈만 깜빡일 때였다 손 안의 바싹 마른 손이 꿈틀 움직였다. 무언의 부름에 황급히 아래로 시선을 내렸다. 어머니의 주름진 얼굴이 곧게 자신을 올려다보았다.

아니야.

그녀가 천천히 고개를 저으며 입술을 움직였다.

아니야, 난우야.

〔그…그럼 왜? 그냥 발 잘못 디뎠어? 왜 떨어졌어?〕

벤틸레이터가 산소를 불어넣는 소리가 가만히 실내를 휘돌았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그녀는 다시 한 걸음 뒤로 물러서 있는 강도영에게 시선을 주었다. 눈이 마주치자 강도영은 고개를 저어보였다.

그래서 그녀는, 함께 고개를 저었다.

기억이, 안 나.

그 때 주치의가 다가와 강도영이 대신 면담을 했다. 푸석한 커트 머리에 화장기 하나 없는 중년 여성은 기계적으로 상태를 설명했다.

고비는 다 넘겼고 뇌압도 정상이고 숨골에 맺힌 피도 깨끗이 사라졌다, 왼쪽 운동신경 마비는 재활이 잘 되면 조금 좋아질 수는 있다, 조금 더 지켜보고 위급 상황이 없다 판단되면 일반병동으로 옮길 거다, 간병인 미리 구해 둬라, 뭐 대강 그런 얘기들이었다.

의사는 마지막으로 궁금한 걸 물었고 강도영은 고개를 저었다. 그녀는 흰 가운을 펄럭이며 옆방으로 사라졌다.

면회시간이 끝나자 강도영은 미련이 뚝뚝 남아 있는 정난우를 겨우 이끌어 밖으로 나왔다. 대기실에는 매니저들과 그 외 여럿이 둘을 기다리고 있었다.

모두가 득달같이 달려와 어머니의 상태를 물었다. 정난우는 그제야 근심 없이 활짝 웃으며 입을 열었다.

〔생각하시는 거 정상이고, 기억도 다 하시는 것 같고, 이제 눈도 뜨셨어요. 기도 절개한 것 때문에 말은 못 하시는데, 그거 떼면 말도 잘 하실거예요.〕

〔아이고 다행이다. 정말 다행이야.〕

최순애가 평평 울며 정난우의 손을 붙들고 연신 도닥였다. 김혜영도 이정운의 팔에 매달려 눈물을 찍어냈다. 고맙습니다, 모두 고맙습니다, 정난우는 모두에게 깊이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매니저들에게도 마찬가지였다.

대기실에 있던 젊은 청년들이 슬쩍 휴대폰을 들어 사진을 찍어댔지만 아무도 제지하지 않았다. 안도가 탈력처럼 몰려와 그런 것쯤은 정말 아무렇지도 않게 느껴지는 거다.

정난우는 제 고모에게도 고맙다며 허리를 숙였다. 그러나 그녀는 삐걱삐걱 고개만 끄덕일 뿐이었다. 그리고 새하얗게 질려 있는 그녀의 얼굴을, 강도영은 싸늘하게 노려보았다.

그래. 기뻐할 수가 없겠지. 버러지 같은 종자들.

강도영은 호주머니에 두 손을 찔러 넣고 느긋한 걸음으로 다가갔다. 그녀는 불안하게 눈을 굴리며 맞잡은 손을 꿈틀거리고 있었다. 아무래도 위기가 지나가니 기회가 찾아온 듯 싶었다.

〔고모님? 저 좀 보시죠.〕

그녀는 나지막한 부름에도 소스라치듯 놀라 고개를 틀었다. 당혹과 긴장이 여실히 뒤섞인 눈빛은 지진이라도 난 듯이 흔들렸다. 심술이 녹아  있는 주름진 얼굴이 파르르 경련했다.

〔왜, 왜요?〕

강도영은 기뻐하는 무리들을 등지고서 그녀의 귓가에 고개를 내렸다.

〔왜인지는 댁이 더 잘 알잖아. 묻지 말고 얌전히 따라오라고. 그리 장밋빛은 아니어도 무탈하게 살 수 있는 여생 조지기 싫으면.〕

딱딱하게 굳어 곧 부서질 것 같은 그녀를 외면하고 돌아섰다. 그리고 여전히 젖은 얼굴로 기쁨을 나누는 정난우에게 다가가 어깨를 짚었다. 정난우가 돌아보았다. 눈물이 씻어낸 눈동자는 그 어느 때보다 청량하게 빛났다.

〔형 잠깐 고모님이랑 할 얘기 있는데, 기다릴래, 아니면 먼저 호텔에 가있을래?〕

〔아냐, 기다릴게. 다녀와.〕

강도영은 고개만 한 번 끄덕여주고는 대기실을 나섰다. 예상대로 그녀는 안 움직이는 다리를 억지로 끌며 따라 나왔다.

여기고 저기고 사람이 너무 많아 너저분한 화제를 굴릴 곳이 마땅치가 않았다. 결국 그나마 한적한 곳을 찾아 벽에 몸을 기댔다.

그녀가 쭈뼛거리며 다가와 정면에 섰다. 초조함이 역력한 표정이었다. 강도영은 빤히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펜션 주인집 거실에 CCTV 있는 거 몰랐죠?〕

대뜸 꺼낸 이야기에도 그녀의 낯은 순식간에 흙색이 되었다. 

〔예전에 손님으로 묵었던 십대들이 한 번 주인집을 턴 적이 있었어요. 도난당한 건 별 거 없었는데, 혹시 강도라도 들어 제 엄마 다칠까봐 난우가 달아놨거든. 그런데 이 맹한 게 우리 고모님 말을 철석같이 믿고 그걸 따로 확인을 안 했네?〕

〔…그, 그런…….〕

〔그거 보기 전에 내가 물어보려고 부른 거예요. 무슨 개소리 하나 일단 먼저 들어보게. 왜 거짓말했어요? 뭐 숨기려고?〕

정난우의 열애설.

그녀가 그 정도에 충격을 받을 리가 없었다. 기가 막히고 황당해하기는 하겠지만, 그렇게 혼절해서 뒤로 넘어갈 정도였다는 건 도무지 납득이 가지 않는 거다. 그 정도는 그녀를 열심히 설득하던 제가 제일 잘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어머님. 우리 난우 저렇게 애 같아서 아무래도 장가 못 갈 것 같은데, 나중에 제가 그냥 데리고 살까요?」

처음 그런 얘기를 넌지시 꺼냈을 때 그녀는 등짝을 후려 팼다. 멀쩡한 남의 아들 가지고 헛소리 말라며 따갑게 잔소리를 했다.

포기 않고 조금씩 포석을 깔아뒀다. 언젠가는, 정말로 서로 떨어지기 싫어 몸살을 앓을 날이 올 것 같았다. 정난우가 조금 더 나이가 먹고 어린아이 태를 좀 벗으면 사랑으로 변하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던 거다.

자신은 정난우에게 어머니가 얼마나 중요한 존재인지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나중을 대비해서 미리 조금씩 얻어맞기로 결심을 한 거였다.

「만약 난우가 저 좋다고 그러면 어쩌실 거예요? 장가 안 가고 저랑 같이 살고 싶다고 하면요.」

어머님은 남자 며느리 볼 생각 없다며 질색하셨다. 개의치 않고 끈질 기게 물고 늘어졌다. ‘만약에’ ‘그러니까 만약에’ 그렇게 작업을 해뒀다. 때려도 달래도 안 되니, 어머님은 왜 자꾸 우리 난우한테 꼬리를 치냐며 한탄하다 끝나는 수준까지 갔다.

「나는 난우가 더 차별 안 받았으면 좋겠어. 이제껏 그렇게 차별받고 살다가 겨우 인정받으려는데 너가 자꾸 달라붙으면 어쩌니.」

「몰래몰래 만나면 되죠. 저 돈도 많고 능력도 많아요. 사람들은 되게 비겁해서 자기가 깔아뭉갤 수 없는 사람은 차별 선상에 두지도 못해요. 제가 난우 지켜줄게요. 해코지하려는 인간들 다 제가 혼내 줄게요.」

「아휴, 도영아…….」

「난우가 막 좋아서 헤어지기 싫다는데 억지로 찢어놓으실 거예요?」

그에 그녀는 대답을 못 했다. 정난우가 상처받아 우는 건 그녀에게도 끔찍한 일일 테니까. 그녀는 그냥 또 꼬리치지 말라는 소리만 퉁명스레 내뱉었을 뿐이었다. 그에 저는 환하게 웃었다. 상황이 그렇게까지 간다면 절대 반대는 못 할 걸 직감한 탓이었다.

뭐. 그 때만 해도, 설마 제가 공들여 쓴 죽을 종마 같은 놈 입에 털어 넣어줄 줄은 꿈에도 몰랐지만.

미끈하게 생긴 얼굴이 자연스레 뇌리에 떠올라 버렸다. 강도영은 또 매우 불쾌해졌다. 무심결에 사납게 미간을 구기자 정난우의 고모가 입술을 푸들푸들 떨었다.

끓는 화가 그녀에게 모조리 튀었다. 이번 기회로 이것들이라도 아주 싹 조져놔야 화병이 안 날 거다. 이 날을 위해 제가 준비해 놓은 것들이 한 가득이었다.

〔묵비권입니까? 뭐, 맘대로 하세요. CCTV 녹화된 거 보면 알겠지. 이제 법정에서 보면 되는 건가?〕

강도영은 매정하게 그녀를 스쳐지나갔다. 성큼성큼 걸어가는데 등 뒤에서 다급한 발소리가 엄습해 왔다. 그녀가 다짜고짜 팔꿈치를 꽉 틀어쥐어 왔다. 강도영은 자연스레 돌아서며 그 손을 가차 없이 털어냈다.

노골적으로 더러운 오물이라도 닿은 듯 굴었지만 그녀는 기분 나빠하기는커녕 덜덜 떨기만 했다. 그녀가 무너질 것처럼 입을 열었다.

〔이, 일부러 그런 거, 일부러 그런 거 아니었어요. 정말, 정말이에요, 강군.〕

그제야 그녀가 진실을 실토하기 시작했다.

샤워기 아래 한참을 서 있었다. 배우 인생 최초로 촬영이 힘들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고단한 건 몸보다 마음이라 약도 없었다. 수압 센 물줄기에 머리를 때려 맞으니 내내 뜨끈하게 달궈져 있던 머리가 그나마 좀 진정이 됐다.

레버를 내려 물을 잠그고 수건을 집어 들었다. 건성건성 몸의 물기를 닦고 젖은 머리 위에 올려둘 때였다. 샤워부스 밖 선반 위에서 날카로운 진동이 울렸다. 혹여나 전화가 올까 싶어 샤워할 때에도 꼭 곁에 두는 휴대폰이었다.

에녹은 다급히 부스 문을 열고 바깥으로 튀어나갔다. 액정에 뜬 이름을 확인하는 순간 맥이 탁 풀렸다. 어머니였다. 힘 빠진 손끝으로 강화유리를 느리게 밀고서 귀에 붙였다.

 “존경하는 밀리건 여사님. 이제 화 좀 풀리셨습니까.”

《아니. 내가 내 잘난 아들 이해해보려고 아무리 고심하고 또 고심해도 화가 치밀어서 단명할 것 같다.》

어떤 부모라도 이런 상황에서는 속이 터질 거다. 에녹은 그 점만큼은 충분히 이해했다. 휴대폰을 어깨와 귀 사이에 꽂아 넣고 가운을 입었다. 욕실 문을 열고 나가자 텅 빈 숙소 거실이 반겨왔다.

《엄마가 가장 화가 나는 건, 네가 누구를 사랑하고 누구를 인생의 동반자로 선택했느냐. 그런 문제가 아니야. 너는 왜 그걸 모르니?》

에녹은 소파에 털썩 앉았다. 축축 늘어진 몸이 가죽을 파고들었다. 

 “그럼 뭐가 문젠데.”

《나는 내 아들이 성년이 돼서 독립하는 순간부터 가장 친한 친구가 되어주고 싶었어. 독선적인 선장이 되어서 네 인생을 통제하고 싶지도 않았고, 길고양이 적선하듯 밥만 줄 생각도 없었어. 그리고 최선을 다해 그렇게 했다고 생각해. 그런데 너는 무슨 노력을 했니?》

 “…노력?”

《왜 엄마마저 나를 안 믿어 주냐고 불평을 내뱉어? 네가 감히 나에게 그딴 소리를 해? 네가 쌓은 얄팍한 신뢰는 생각도 안 하니? 징징거리며 날 탓하기 전에 너를 믿도록 나를 설득시키는 게 먼저가 아니냐고!》

 “…….”

《아주 지겹도록 이 여자 저 여자 만나면서 연애니 사랑이니 떠들어대는 철없는 아들이 남자랑 대뜸 스캔들이 났어. 그럼 엄마가 무슨 생각을 하겠니? 너는 왜 엄마한테 아무런 노력도 하지 않았으면서 엄마가 믿어주길 바라는 거야? 너의 이번 사랑 역시 스쳐지나가는 바람처럼 훌쩍 가 버리지 않을 거라고 엄마가 어떻게 생각을 해. 엄마도 사람이야. 네 장단점 훤히 꿰뚫고 있는 가장 친한 친구였어. 불같은 충동이 아니라 진심이라고, 누군가를 위해 험난한 길도 마다않고 쭉 가겠다고, 그렇게 네가 내 눈을 보고 내 마음을 움직였으면 엄마는 언제나 그랬듯이 네 편이 되어 줬을 거야. 사람들이 아무리 너를 욕하고 비난해도 엄마는 당당하게 네가 내 아들이고, 내 아들은 충분히 근사하고 멋진 남자라고 주장할 수 있어.》

에녹은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구구절절 다 맞는 말이었다. 반박의 여지도 발끈할 틈도 없었다.

《너는 나한테 조금 더 예의를 지켰어야 했어. 떼쓰고 억지 부리기에 앞서서 네가 충분히 성숙한 인간임을 증명했어야 했다고. 연인사이고 모자사이고 사랑과 믿음이 항상 평행선을 그리지는 않는 법이야. 에녹, 엄마는 엄마 자신보다도 너를 더 사랑하고 아끼지만, 네가 이제껏 걸어온 길이 엄마에게 신뢰를 주지는 못했다는 걸 분명히 알아야 해.》

 “미안해. 내 생각이 짧았어.”

순순히 인정하자 수화부가 침묵했다. 격앙되어 올라온 숨은 아주 느리고 완만한 곡선으로 잦아들었다. 에녹은 뜨끈한 이마에 손등을 얹었다.

 “엄마 말 다 맞아. 엄마는 어떤 상황에서건 무조건 내 편이 돼 줄 거라고 생각했던 것 같아. 내가 아무 말 안 해도, 내가 무슨 짓을 해도.”

그러자 조금 진정한 듯했던 어머니가 다시금 왈칵 고성을 쏘아 보냈다.

《내가 미쳤니! 무조건 믿는다는 말이 얼마나 위험한 건데!》

 “그래도 혹시나 내가 뭐 범법 저지르고 그러면 숨겨주긴 할 거잖아.”

《미친 소리 작작해라, 얘! 행여나 그딴 건 꿈도 꾸지 마. 숨겨주기는 커녕 내가 먼저 교도소에 처넣을 거니까.》

 “…와. 무섭네. 그건 좀 아닌 것 같아, 여사님.”

에녹은 헛웃음을 지으며 중얼거렸다. 이게 농담이 아니라는 건 아들인 제가 더 잘 알았다. 어쩐지 오싹했다.

《내 아들은 잘 한 일에는 칭찬을 받고, 벌 받을 일에서는 벌을 받아야 해. 네가 엄마를 매정하다고 느껴도 나는 너를 그렇게 키울 거야.》

 “독하기도 하셔라…….”

《하지만 에녹. 세상 사람들이 너에게 다 등을 돌려도 엄마는 항상 네 곁에 있어. 엄마가 살아있는 한 네가 단 한 순간도 외톨이가 될 일은 없을 거야.》

그녀 식의 다정함에 부드러운 한숨이 흩어졌다. 에녹은 잠시 고인 침묵의 틈바구니에 끼어들어 차분히 대꾸했다.

 “엄마의 교육관을 존중할게. 그리고 난 여전히 엄마를 존경해. 엄마는 내가 아는 가장 현명하고 사랑스러운 여자야.”

《어디 여자애 넘길 때 쓰는 수법을 엄마한테 쓰고 난리야?》

 “…내 신뢰가 이 정도로 바닥이었어?”

에녹은 황망히 되물었다. 이번에는 진심으로 조금 충격 받았다. 밀리건 여사님은 흥, 콧방귀를 뀌었다.

《네 혓바닥 매끈한 건 세상이 다 알아, 얘.》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내가 이런 상황에서 엄마한테 사탕발림이나 하겠어? 결혼까지 약속했던 상대한테 차일까봐 전전긍긍하고 있는 아들한테 그런 소리까지 하고 싶으냐고. 엄마 아들도 상처받는 인간이야.”

에녹은 죽죽 늘어지는 불평을 내뱉었다. 잠시 말 없던 그녀가 긴 한숨을 흘렸다.

《미안해. 엄마도 사람이니 이해해라. 마음이 복잡해서 자꾸만 머리까지 어지러워. 네가 왜 갑자기 남자애한테 꽂혔는지, 안 하던 결혼 소리까지 해 대는지, 추측이야 충분히 가능하다만 일단 보류해 두마. 이건 전화 상으로 판단할 문제가 아닌 것 같아. 그러니까 상황 정리되면 한 번 같이 와. 첫인상이 마음에 안 들어도, 적어도 인격적으로는 대해 줄 테니까 그건 염려 말고.》

 “고마워.”

《이럴 땐 사랑한다고 하는 거야, 이 애송아.》

 “사랑해, 엄마.”

에녹은 모처럼 부드럽게 미소를 지었다. 식사는 잘 먹느냐고 이제야 걱정의 기미가 보이는 어머니의 음성을 가만히 듣다가, 문득 입이 열렸다. 필터를 거치지 않은 날 생각이 언어로 쏟아져 나왔다.

 “난우네 엄마는 왜 우리 여사님처럼 그렇게 강하지 못 했을까?”

그러자 잠시 뜸을 들이던 그녀가 대답했다.

《세상의 엄마들은 모두 강하단다, 에녹. 다만 그에 필요한 최소한의 환경조차 가지지 못한 엄마들이 있을 뿐이야. 엄마이기 이전에 한 인간이니까. 환경에 영향을 받으면서 부서지거나 병들 수 있어.》

에녹은 젖은 머리를 거칠게 헝클어뜨렸다. 어차피 다 소용없는 거였다. 원망한들 정난우의 지나온 길에 갑자기 광명이 들 일은 없을 테니까.

 “아무튼 걔 말이야. 직접 보면 분명히 엄마 마음에 들 거야. 아들 하나 더 생겼다 치고 잘 좀 대해 줘.”

《걔가 내 아들이면 너한테 안 줘, 이놈아,》

가차 없이 돌아온 대답에 에녹은 그만 피식 웃고 말았다. 식사 잘 챙겨 먹겠다고 몇 번을 다짐받고 나서야 통화는 끝났다. 거칠게 보풀 일어난 심장 한쪽이 조금은 달래진 기분이었다.

한 번 걸어 볼까.

에녹은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며 잠시 망설였다. 그렇게 수 분 간 고민하다가 미친 척 결심을 굳혔다. 이번엔 영상통화였다. 목소리만 몇 번 들으니 얼굴이 보고 싶어 죽을 지경이었다. 길게 이어지는 대기화면을 노려 보듯 쳐다보았다.

기적처럼 화면이 바뀌었다. 에녹은 가죽에 파묻어 놓았던 등을 벌떡 세우며 미간을 모았다. 첨예하게 날 세운 시야로 눈이 발갛게 퉁퉁 부은 정난우가 들어왔다.

엄청 울었구나 싶어 말을 잃고 빤히 보기만 했다. 통화 한 번에도 비싸게 굴다가 저한테 싸 달라고 사람 속 뒤집어 놓은 몹쓸 놈이 이렇게 애잔하게 느껴지는 건, 정말 제가 돌아서 그런 걸지도 모르겠다.

《어제 엄마 깨어나셨어요.》

꽉 잠긴 목소리로 정난우가 말했다. 에녹의 눈시울이 천천히 벌어졌다. 내내 무디게 풀어져있던 머릿속에 종이 울렸다. 기괴하리만치 명료한 인지력이 빠른 물살을 몰고 왔다. 희망적인 생각들이 범람했다.

깨어났다. 고비는 넘겼다. 정난우는 금세 안정을 찾을 거다. 이제는 더 이상 완전히 날아가 버릴까 불안해하지 않아도 되는 거였다.

터질 것 같으나 억눌러야 하는 흥분을 에녹은 힘겹게 단전 아래로 끌어내렸다. 뜨겁게 움튼 혈관이 시체처럼 생기 없던 몸을 단숨에 팔팔 데웠다.

정난우는 가만히 숨만 내쉬다가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나 때문에 쓰러지신 거 아니래요.》

안심되고 서럽고 기쁘고, 그 모든 감정이 그 얼굴에 들어 있었다. 굵은 눈물방울이 뚝뚝 흘러 뺨과 턱을 금세 적셨다.

에녹은 마른 입술만 연신 핥다가 입을 열었다.

 “괜찮아. 깨어나셨잖아, 그럼 기뻐해야지 왜 울고 그래. 겨우 얼굴 좀 보나 했더니 사람 맘 아프게.”

《그냥 막…막…… 그래요. 나 때문에 돌아가시면 어쩌나 싶었는데, 다시 정신도 차리시고, 나 때문이라는 것도 아니라고 하시니까.》

 “그래. 괜찮아. 응? 이제 곧 건강해지실 거야.”

《그냥 너무 다행이다 싶어서…….》

정난우는 그 후로 한참을 엉엉 울었다. 저 아픈 거는 독하게 잘만 참던 녀석의 단단한 벽이 완전 물렁물렁해져 버렸다. 주먹 쥔 손으로 끊임없이 훑어대는데도 눈가는 계속 젖어들었다.

에녹은 당장 날아가 저 몸을 품에 안고 저 눈물을 핥아주고 싶어 애간장을 끓였다. 달래다 안 돼서 억지로 화제를 틀어보기로 했다.

 “아, 참. 우리 어머니가 너 나중에 한 번 데려오라고 하셨어. 너 되게 예쁘고 착해 보인대. 친아들처럼 잘 대해줄 자신 있대.”

적당히 과장을 좀 섞었다. 어머니 성품이라면 분명 금방 따뜻하게 맞아주실 거라는 확신이 없는 것도 아니었다. 정난우는 울다 말고 끅끅거리며 무거운 눈꺼풀을 느리게 끔벅거렸다.

《저를…요? 반대 안 하세요?》

 “응. 복잡한 일 정리되면 꼭 같이 오래. 너나 나나 한가해지면 같이 하와이 가서 어머니 만나자. 알았지?”

젖은 눈을 손등으로 몇 번 비비적거리던 정난우는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한 시름 놓아서인지 부드럽게 풀린 입술이 빠끔 벌어졌다.

《조금만 더 기다려 줄래요? 나, 엄마 밥 잘 드시는 것만 보고, 곧 만나러 갈 테니까…….》

말끝은 흐리게 사라져버렸지만 의미는 모두 전해졌다. 음울하게 뛰던 심장 박동이 개선장군을 맞이하는 나팔소리처럼 경박스럽게 튀어 올랐다. 에녹은 녹을 듯이 미소를 지었다.

 “그래. 약속하는 거다.”

《…네, 약속.》

정난우가 새끼손가락을 들어 보였다. 에녹은 덩달아 애가 되어 저도 새끼손가락을 내밀었다.

정난우의 어머니 양명옥은 이틀 후 일반병동으로 옮겨졌다. 일반병동의 가장 큰 장점은 밤을 제외하고는 면회시간에 제한이 없다는 거였다. 내킬 때는 소파에 그냥 드러누워 자도 됐다. 특실로 잡은 터라 남 눈치 안 보고 연주를 해드릴 수도 있었고, 전자레인지며 컴퓨터며 대형 TV며 없는 게 없어 모든 생활이 가능해 보였다.

간병인은 따로 구하지 않았다. 이정운의 모친 김혜영이 자진해서 제가 하겠다고 나섰다. 정난우는 극구 만류했지만 그녀의 뜻이 워낙 강경했다.

왼쪽 팔 다리에 마비가 온 상태라 어머니는 쉽게 몸을 움직일 수가 없었다. 2시간에 한 번씩 자세를 바꿔줘야 하는 건 물론이고 기저귀를 자주 간다거나 자주 씻겨주는 것 등, 생판 남에게 맡기면 모두 허술할 거라고 했다.

강도영 역시, 요즘 어린아이건 노인이건 은근히 구박받거나 학대 받는 일이 종종 있으니 차라리 가까운 사람에게 맡기고 보수를 충분히 주는 게 나을 거라며 거들었다.

생각해보니 다 맞는 말이었다. 결국 정난우는 김혜영에게 깊이 허리를 굽히며 잘 부탁드린다고 거듭 감사를 표했다.

기도절개 자국은 거즈와 반창고로 막아뒀지만 말소리는 여전히 많이 샜다. 그래도 자가 호흡은 괜찮아서 자연히 살이 붙을 때까지 기다리기만 하면 되는 거였다.

그리고 병동을 옮긴 다음 날, 출국을 앞두고 강도영이 마지막으로 병실을 찾았다. 김혜영은 차나 음료를 권했지만 그는 정중히 거절했다.

〔난우야. 나 어머니랑 할 얘기 있으니까 잠깐 자리 좀 비켜줄래?〕 

정난우는 고개를 끄덕이며 휴대폰을 쥐고서 병실을 나갔다. 아마 또 그 애인이랑 옥상에서 노닥거릴 거다. 김혜영도 눈치껏 자리를 비켜줬다.

넓은 병실에 둘만 남자 강도영이 의자를 끌어와 침대 곁에 앉았다. 

〔중환자실 벗어나니까 좀 살 만 하시죠?〕

양명옥은 옅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안, 바빠?〕

말 할 때마다 목에 힘을 더 줘야 하는 그녀는 고작 그 짧은 한마디에도 힘겨워했다. 말씀 안 하셔도 돼요, 하며 강도영은 고개를 흔들었다.

〔난우만큼은 안 바빠요. 이 정도 시간 낼 정도는 충분해요.〕

양명옥은 고개를 끄덕였다. 물끄러미 보는 강도영의 시선은 늘 그랬듯 장벽이 쳐진 것 마냥 속을 들여다볼 수가 없었다.

강도영은 뼈가 드러난 손을 가만히 주무르다 입을 열었다.

〔어머님. 제가요, 난우한테 미안한 게 참 많아요.〕

미안하기는 뭐가, 눈으로 물었다. 강도영은 알아들었는지 흐린 미소를 입술로 그렸다.

〔제가 우리 난우 처음 만났을 때요, 그러니까 난우 열다섯 살 때, 저 그 때 정말 모든 게 지루하고 피곤했어요. 난 단 한 번도 피아노를 치고 싶다고 말한 적이 없는데, 그냥 어느 순간 그렇게 되어 있더라고요. 하루 대부분의 시간을 피아노와 음악을 생각해야 했어요. 그렇지 않으면 최고가 될 수 없으니까, 의당 내 자리여야 하는 걸 다른 사람한테 내 줘야 한다고 하니까…….〕

강도영은 처음 봤을 때부터 원래 좀 냉한 구석이 있었다. 주변에 관심도 없고, 딱히 관련되고 싶지도 않아하고, 그냥 조용히 살다 가고 싶어 하는 노인의 연륜 같은 게 있었다.

〔열 받잖아요. 내 걸 뺏긴다는데, 해야지 어떡해요. 그래서 했어요. 토할 것처럼 엉켜 있는 악보를 보면서 건반을 누르고, 평가 좋은 음반을 질리도록 듣고. …아, 지겹더라고요. 내가 이 짓을 왜 하고 있나 싶고.〕

강도영은 제 곪은 속내를 파헤쳐 풀어놓으면서도 아픈 표정을 짓지 않았다. 눈빛은 무심했고 목소리는 평온했다. 그 괴리감이 양명옥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

저야 배운 게 없어 무식해서 그렇다손 치지만, 저 집 안방마님도 비슷한 거다. 잘 배우고 대우 받으며 살면서도 제 아들 썩어가는 걸 눈치 채지 못한 거다. 자식에게 투영해 꽂아놓은 제 욕심, 그것에 눈이 멀어 제 어린 아들을 일찍이 삭막한 세계에 던져 넣었다. 아장아장 걸어 다닐 나이부터 이미 투쟁을 배워버린 강도영이 건조한 눈으로 제 마음을 끄집어내고 있었다.

〔어머님. 혹시 죽고 싶다는 생각해 본 적 있으세요? 웃기는 얘긴데 저는 가끔 그런 생각을 했어요. 그냥 막 간절하게 이 생을 끊어버리고 싶다 이런 게 아니라, 너무 지겨운 거예요. 내 인생은 깜짝 이벤트 같은 것도 없이 너무 뻔하고 지루하고 재미도 없고…… 그냥 죽어도 상관은 없겠다, 이런 생각을 하루에도 몇 번씩 했어요.〕

이놈아, 차라리 아픈 티라도 내라…….

양명옥은 차마 말을 하지 못해 눈빛을 전했으나 강도영은 받지 못했다.

제가 지나온 길이 메마르고 삭막했던 걸 모르는 거다.

〔그러다 제가 난우를 봤어요. 솔직히 처음에 수녀님이 그렇게 재능이 뛰어난 애가 있다고 침이 마르도록 칭찬을 하는데, 듣기 귀찮더라고요. 뭐 제가 잘 하면 얼마나 하겠어, 이런 생각이 들어서. 특별한 생각도 없었고 그냥 잊었어요. 그리고 리허설을 하러 온 난우를 본 거예요.〕

강도영의 눈이 먼 과거를 짚어 올라가며 가늘어졌다. 바이올린을 끌어 안은 채 의자에 앉아 발장난을 치고 있던 정난우를 기억했다.

다른 단원들은 들뜬 분위기로 서로 속닥속닥 말이 많았는데, 그 아이만 물 위에 뜬 기름 한 방울처럼 유리되어 있었다. 제가 낄 수 없는 주변의 소리로 주워 담느라 귀는 연신 쫑긋거리고, 초점 없는 눈은 한 곳에 멍하니 굳어 있는 걸 보며 곧 깨달았다.

아, 저 녀석 장님이구나.

〔별 기대 없었어요. 앞도 못 보는 애가 오케스트라 단원이라고 앉아 있으니까. 자연히 그런 생각하게 되는 거예요. 장애인이니까 불쌍하다고 껴 줬구나. 별 볼 일 없어도 거절하기 미안하니까 받아줄 수밖에 없는, 뭐 그런 심리 있잖아요. 그런 건 줄 알았다고요. 그래서 그냥 피아노 협주곡 하나 빨리 끝내보자고 했거든요. 그리고 오케스트라 연주가 시작되는데, ……아, 귀에 들어오는 거예요. 제가 의욕은 없어도 나름 가진 재주는 있어서.〕

협주곡을 맞춰보고 난 직후, 이런 데에 있을 애가 아니구나 싶었다. 프로도 아니고 고작 고만고만한 학생들로 구성된 오케스트라에서 제2바이올린 파트에 있다니, 조금 아까운 생각이 들었다.

장애인이라 불쌍해서 끼워 줬나 했던 생각은 틀렸다. 도리어 장애인이라 차별을 받고 있는 거였다. 특별히 가엾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지만 녀석이 궁금하긴 했다. 다른 사람들에게 억지로 제 선율을 끼워 맞추지 않아도 될 때는 어떤 연주를 할까 했던 거다.

제가 직접 반주를 넣어줬던 건 녀석과 이중주를 하고 싶어서가 아니었다. 가이드라인이 필요할 거라고 당연하게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건 정말 어처구니없을 만큼 쓸데없는 걱정이었다.

독주곡 다음에는 곧장 즉흥곡을 제안했다. 정난우는 쭈뼛거리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흥분한 손끝이 건반 위를 자유롭게 날아다녔다. 불안한 것처럼 빨리 뛰는 심장 고동이 리듬 위에 끼얹어졌다.

직후의 감상은, 그저 굉장했다고 밖에 표현할 길이 없었다.

연주가 끝나자 적막이 깔렸다. 취재진들조차 넋을 잃고 녀석을 바라보았다. 잔뜩 주눅 들어 바이올린을 다시 끌어안고 있는 작은 아이는 제가 어떤 기적을 보여줬는지 전혀 자각하지 못했다.

너 진짜 괴물이구나.

강도영은 폭언 같은 감탄을 속으로 중얼거릴 수밖에 없었다. 길들여지지 않은 야생짐승이 사냥을 본능으로 깨우치듯이, 정난우의 온 몸은 음악을 위해 빚어져 있었다.

단순히 악보를 그대로 건반에 실은 자신의 연주는 그야말로 반주에 그쳤다. 그 리허설 무대에서 자신은 조연이었고 주연은 정난우였다.

저를 그렇게 무참히 짓밟은 상대를 처음 봤다. 너무 어이가 없으니까 질투고 뭐고 끼어들 자리가 없었다. 그냥 저 애가 당연히 있어야 할 곳에 데려다 줘야 한다는 사명감만 들었다.

〔그렇게 피아노를 오래 쳤는데 그날 처음으로 즐겁더라고요. 음악이라는 게 그렇게 아름다운 건 줄 몰랐던 거예요, 그 때까지. 저한테 음악은 분석하고 공부해야하는 학문이었거든요.〕

작곡가가 의도한 것들을 최대치로 뽑아서 연주하는 데에만 몰두하던 저는 그냥 기술자에 지나지 않았던 거다. 음악을 왜 예술의 카테고리에 넣는지 그날 알았다. 그리고 이제껏 저는 예술이 아닌 스포츠를 했던 것과 다름이 없다는 것도.

〔그건 진짜 사기였어요. 걔는 솔직히 클래식 판에서 퇴출돼야 돼. 말이 안 되잖아.〕

강도영은 피식 웃으며 농담이라고 덧붙였다. 옅은 한숨을 내쉬고, 이내 그 얼굴에서 웃음기가 증발했다.

〔이건 정말 진심인데요 어머님.〕

강도영은 슬쩍 올린 눈썹 끝을 손끝으로 긁적거렸다.

〔난우 처음에 미국에 데려갔을 때만 해도, 정말 잘 키워줘야지 했어요. 그냥 임시 보호자 정도랄까, 그런 거 해 주려고 했는데 어디서 삐끗하기 시작한 건지는 저도 잘 모르겠네요.〕

네가 날 이렇게 만들었다는 건 결국 변명조차 될 수 없는 거였다. 그저 제가 어리석어 몰랐던 거였다. 누군가의 신이 되기에 저는 매우 불안정하다는 걸.

지팡이 짚고 걸어야 할 놈이 누군가를 지탱해 줄 수는 없는 법이었다.

그런 건 에녹 밀리건 같이 단단한 놈의 역할이었다.

알고 있었다. 태생이 달랐다. 자라온 환경도 달랐다.

인정하고 나니 도리 없이 심장 한 구석이 뻥 뚫렸다. 공허를 메우는 시린 바람에 시원한 듯도, 아픈 듯도 했다.

울분의 찌꺼기는 아주 오래 가겠지만 처음부터 지금까지 정난우가 행복해졌으면 한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았다. 지켜주고 싶어 점차 떠나주기로 했으니, 이쯤에서 정말로 퇴장할 준비를 해야 하는 거였다.

〔깨닫고 보니까 제가 참 어이없을 만큼 이상한 짓을 했더라고요. 난우가 어느새 저만 의지하고 그러는 거 즐기다 보니까…….〕

변명조로 나오려는 말은 조기에 자체 차단해 버렸다.

〔어쨌든 후회가 많아요, 제가. 그래서 그거 갚아주려고 참 더러운 짓도 많이 했거든요. 루머 만들어내는 놈 잡아서 밥줄도 끊어 보고, 그거 그대로 옮기려는 기자 놈 압박도 해 보고, 따지고 보면 제가 사람 여럿 잡았어요. 제가 해줄 수 있는 게 고작 그런 짓들뿐이더라고요. 저한테 어울리는 것도 그런 것들뿐이고.〕

갚아주겠다고만 생각했지, 보듬고 추슬러서 다시 일어서게 할 생각은 하지 않았다. 못 한 게 아니라 안 한 거다. 어차피 그건 제게 버거운 옷이라는 걸 그쯤에서는 깨닫고 있었으니까.

〔그런데 그것도 어쩌면 이번이 마지막이 될 수도 있을 것 같아요.〕 

양명옥은 강도영의 지쳐 보이는 표정에 마음이 짠했다. 말없이 바라보자 강도영이 희미하게 웃었다.

〔이번에 미국 건너가면 제가 그간 보관해 둔 차용증들이랑 각서들 모두 그 남자한테 보내 주려고요. 기사에서 보셨죠? 난우가 좋아하는 사람.〕

차용증이 뭔지는 알고 있었다. 정난우는 내내 강도영에게 빚을 지고 있었기 때문에, 입금되는 돈들은 필요한 부분만 빼 두고 그 때 그 때 강도영의 통장에 이체해 두었다.

큰돈이 필요할 일이 있을 때는 번거롭지만 강도영에게 부탁을 하는수 밖에 없었다. 친척들이 요구하는 금액은 정난우가 생활비 명목으로 남겨 둔 액수를 매번 훨씬 웃돌았다. 결국 그 때마다 강도영의 손을 빌려야하 는 거였다.

그리고 강도영은 차용증만 도착하면 무조건 돈을 내 줬다. 몇 번 화가 나서 뒤집어놓은 적은 있지만 빌려주는 것 자체에 인색하게 굴지는 않았다.

그들은 저들이 뿌린 차용증이 쌓이고 쌓여 가는데도 무감각했다. 펜션 공사 자금 때 생긴 트러블 정도를 제외하고는 정난우도 저도 갚으라는 소리는 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건 이런 기회의 날을 위해 제가 쳐 둔 덫이었다.

〔그 고모라는 여자가 다 불었어요. 스캔들 나자마자 득달같이 달려왔다면서요? 난우가 남자애인 생기면 평생 결혼 안 하는 거 아니냐. 그럼 재산 상속권은 누가 가지는 거냐, 뭐 이런 거 따지려고.〕

그녀가 벌벌 떨며 실토해 낸 얘기들은 악취가 풍겨 도저히 인상을 쓰지 않을 수가 없었다. 도대체 자기들이 무슨 자격으로 정난우의 재산을 통째로 염두에 두고 있는 건지 정말 제 상식으로는 이해가 안 갔다.

그녀는 양명옥을 설득해 호적을 ‘바로 잡으려’ 했다는 말을 했다. 그러다 실랑이가 벌어지고, 자리를 피하려는 양명옥을 붙들다가 실수로 밀쳐 버리고 만 거라고. 정말 실수였다고.

그 뻔뻔한 얼굴을 후려갈기고 싶은 걸 참는 것도 고역이었다. 〔겁먹은 얼굴로 늘어놓는 변명들에 기가 막혔죠. 정말 웬만한 일에는 눈 하나 깜빡 안 할 자신이 있었는데 그 역겨운 얼굴을 보자니 속이 메스꺼워 안면이 절로 구겨지더라니까요. 심지어 어머님 떨어지고 한 번 도망갔대요. 가려다가, 그것만은 너무 양심에 찔려서 다시 돌아가서 구급차 부른 거고요. 근데 사실 과실치상으로 고소해 봤자 얼마 살지도 않을 거고, 그래서 다음 날 각서 내밀면서 지장 찍으라고 했어요. 그 여자뿐만 아니라 그 아들놈도 같이 불러서요. 평생 난우 곁에 얼씬도 안 하고 돈 요구도 더 안하겠다고.〕

강도영은 입술을 비틀어 웃었다.

〔근데 웃긴 게, 이 아들놈이 더 가관이었어요. 고소해도 얼마 안 산다는 걸 알았던 거야. 고소하려면 어디 해 봐라 배짱을 튕기는데, 이것들이 말로 좋게 끝내자니 안 되겠다 싶더라고요. 그래서 그럼 그간 받은 차용증들 다 추심 들어가겠다고 했어요. 능력 있으면 갚고 아니면 모자가 나나란히 교도소 신세 좀 지라고. 그제야 찍 소리 없이 닥치고 지장 찍더라고요. 추심 언제 들어갈지 모르니까 평생 불안해하며 살라고도 못 박아뒀어요. 욕도 많이 섞었어요.〕

어머님, 저 되게 잘했죠.

강도영은 웃으며 말했다. 양명옥의 주름 진 눈가가 희미하게 떨렸다.

〔그 차용증들, 각서들, 그 놈한테 다 줄게요. 이제 난우 저한테 빚도 없고 믿을 만한 애인도 생겼는데 제가 갖고 있을 이유 없잖아요.〕

제가 가지고 있는 정난우의 흔적들이 이렇게 조금씩 사라져 간다. 상실의 무게가 그 자리를 대신했다. 이제 남은 것은 시간이 흐르길 기다리는 것뿐이었다.

〔비행기 시간 맞춰야 되니 저 이만 가 볼게요. 얼른 나으세요.〕

깊이 허리를 숙여 인사하고 돌아서려는 강도영을 양명옥이 붙들었다.

〔고…….〕

강도영은 바람 잔뜩 빠진 미세한 소리를 감지하고 고개를 돌렸다. 양명옥은 목의 절개 부위를 떨리는 손으로 막은 채, 필사적으로 목소리를 뭉쳐 입 밖에 내뱉었다. 주름진 눈가에 물기가 스며들었다.

〔고마워. 도영이…네가, 있어서…난우…… 우리 난우…저렇게, 잘된 거, 나…알아…… 도영아, 정말…고마워…….〕

그 차가운 눈매가 여리게 떨리던 그 순간을, 많은 걸 제 안에만 묻고서 떠나던 외로운 등을, 양명옥은 아마 평생 잊지 못할 거다.

*

머리를 털며 욕실에서 나왔을 때, 거실 소파에 루스가 앉아 있었다. 웬일이냐고 묻지 않았던 건 예고된 방문이었기 때문이었다. 어제 오후에 사설탐정에게서 연락이 왔다. 일단 1차적으로 정리된 것들을 먼저 받을 건지, 아니면 한꺼번에 받을 건지 결정해 달라는 용건이었다.

컴퓨터 파일들은 어제 제가 직접 받았다. 그리고 문서 형식의 것들은 오늘 오후 루스 앞으로 도착했다. 자신은 주시하는 눈이 많아 수신자를 돌려놓은 탓이었다.

사설탐정은 동료를 시켜 직접 자료들을 실어 왔다. 촬영이 끝나고 다가온 루스는 샤워만 간단히 끝내고 박스들을 가져오겠다고 했고, 에녹은 그러라고 했다.

테이블 위에는 랩톱컴퓨터와 A4용지 박스, 각종 바인더들이 너저분하게 널려있었다. 면바지에 반팔 티셔츠 차림의 루스는 그 중 문서 파일 하나를 보고 있는 중이었다.

에녹은 젖은 수건을 목에 걸고 가운 매듭을 묶으며 다가갔다. 옆자리에 털썩 앉아 박스 안을 힐긋 들여다보니 자료가 어마어마했다. 에녹의 눈썹이 묘한 곡선으로 꿈틀했다.

 “이 새끼는 뒤가 얼마나 구리기에 이 정도까지 나와?”

기가 막혀 묻는 말에 루스가 차분히 바인더 속지를 넘기며 대꾸했다.

 “보면 알아. 생각보다 노다지네.”

 “난우 일이 아니더라도 처넣을 정도는 된다는 거지?”

 “충분하긴 해. 하지만 정말 그걸로 괜찮겠냐?”

루스가 흘리듯이 되물었다. 눈은 여전히 파일 안을 훑는 채였다. 에녹은 옅은 한숨을 지으며 랩톱 액정만 노려보았다.

음성 파일이 날짜순으로 폴더에 정리되어 있었다. 끈질기고 집요한 도청은 주치의의 사생활은 물론 병원 내의 대화 기록까지 낱낱이 담아왔다. 어제 숙소에 돌아와 하나하나 듣는데, 그냥 어이가 없어 웃음만 나왔다.

 “교묘하게 상담으로 농간질 친 거야 특별히 입증합 방법은 없지만, 교통사고 사주 건은 좀 큰데.”

무스가 운을 떼며 음성 파일 하나를 재생시켰다. 그리고 방금 전 외워 둔 구간으로 바를 움직였다. 내장 스피커에서는 주치의의 흥분한 음성이 불순물처럼 탁하게 터지고 있었다.

 “이것만 입증해도 충분히 더 썩을 텐데 안 아까워? 덮을 거냐?”

루스가 묻는 것과 동시에, 놈의 흉악한 고성이 랩톱의 내장 스피커를 울렸다.

《이 멍청한 자식! 밀리건이 있을 때 살짝만 부딪치라고 했잖아! 이렇게 되면 다 쓸모없게 되는一》

에녹은 파일을 닫았다. 스피커는 도로 정적에 잠겼다.

놈이 심부름센터에 맡겼던 국제 소포의 카드에는 ‘에녹 밀리건에게 무슨 일이 생긴다면 그건 모두 당신 탓입니다.’라고 적혀 있었다. 의도가 너무 명확해서 사실 조금 방심했다.

놈의 목적은 어디까지나 정난우를 자극하는 거였고, 과녁에 매달아둘 건 바로 자신이 될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던 거다. 기꺼이 기다려 주마, 하며 대기타던 참에 터진 사고는 저와 루스뿐 아니라 놈에게도 혼란을 가져다주고 말았다.

어쩐지 이상하다고 생각했더니만, 그날의 사고는 놈으로서도 계획에 어긋난 거였다. 그는 에녹 자신을 다치게 해서 정난우의 트라우마를 들쑤실 생각이었다. 그런데 심부름꾼이 긴장한 나머지 실수를 했다.

들키지 않으려 먼 거리를 유지하며 미행을 하던 도중 한 번 놓쳤고, 인근을 헤매다 길가에 정차된 팬텀을 발견하자 확인 없이 그냥 들이받은 거다. 게다가 그 중간에 차 한 대가 갑자기 차선을 바꾸며 끼어드는 바람에 사고는 더 복잡해졌다. 주치의 놈이 잔뜩 졸아 초조해했을 건 불 보듯이 뻔했다.

 “내가 고소인이 될까 해.”

에녹이 문득 입을 열었다. 그제야 고개를 돌린 루스가 미세하게 한쪽 눈썹을 들어올렸다.

 “무슨 말이야?”

 “말 그대로. 이것들부터 일단 찌르고 나서, 한 일이 년 썩어서 해방될 날을 꿈꾸고 있을 때 쯤 내가 거기에 살짝 얹어서 그 희망을 깨부숴주는 거지.”

루스가 허공으로 시선을 비스듬히 올리며 관자놀이를 짚었다. 뭔가 그림이 잡힐 듯 말 듯했다. 에녹이 말을 이었다.

 “이 새끼가 사고 낸 운전자한테 현찰을 건넨 증거를 내밀 거야. 이전의 진료기록도 함께. 접촉사고를 사주했다는 익명의 제보를 받았다고 하려고. 일단 의혹 뿌릴 증거는 입수됐으니 수사가 들어가겠지. 경찰들이 수사의 초점을 어떤 방향으로 잡을 것 같아?”

루스는 팔짱을 끼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일단 경찰들은 먼저 정말 놈이 에녹을 해하려했는가를 알아내려 할 거다. 범죄를 밝혀내기 위해서는 동기가 필요하고, 그 동기는 정난우와의 연결점에서 금방 찾을 수 있었다.

정난우는 놈이 오랫동안 담당하던 환자였다. 때문에 스캔들이 나기 전부터 이미 둘 사이를 알게 됐을 가능성은 높았다.

또한 이 자료들이 넘어간다면 놈이 여자환자들을 꼬여내 긴 관계를 유지했음이 밝혀져 있는 상태일 거다. 그러니 에녹이나 정난우, 둘 중 하나를 스토킹하는 게이로 의심하기보다는…….

 “병적이다 싶을 동성애 혐오 정도?”

의식의 흐름대로 대답하던 루스가 일순 멈칫했다. 그는 짐짓 의외이며 꽤 놀랍다는 눈으로 고개를 틀었다. 시선이 마주친 에녹이 픽 웃으며 대꾸했다.

 “나름 머리 쓰는 거 좋아하는 놈이니까, 차라리 동성애 혐오자라고 하는 게 저한테도 낫다는 건 알 거야. 제 놈이 정난우 스토커다 밝히면 그 때부터 죄는 더 늘어나고, 자기한테 떨어질 가중처벌은 또 눈덩이처럼 불어날 것쯤은 예상 가능하겠지 .”

그랬다. 놈으로서는 최대한 제 죄의 무게를 줄이는 데에 전념할 수밖 에 없을 거다. 직접적으로 형량과 관련된 문제이니 구태여 진실을 밝힐 이유는 없었다. 그렇게 되면 놈이 정난우를 끈질기게 괴롭혀댄 과거의 행적은 은폐가 가능했다.

 “일단 그간의 악질 스토킹만 밝혀져도 기본 삼 년은 더 늘어나니 별 수 없긴 하겠군. 너 머리 좀 굴렸다?”

루스가 흔치 않게 칭찬했다. 에녹은 소파에 더 깊숙이 몸을 묻으며 중얼거렸다.

 “숙소 돌아오면 종일 난우 생각만 해. 어떤 식으로건.”

루스는 젖은 머리를 슥슥 문지르는 에녹을 힐긋 일별했다. 몇 달 전까만 해도 축 쳐진 에녹의 모습은 상상할 수조차 없었는데, 이제는 아예 익숙해지려 했다.

세기의 바람둥이라고 불리던 놈의 속알맹이가 이렇게 순정파일 줄은 저도 전혀 예상치 못했던 거다. 루스는 속으로 혀를 차며 물었다.

 “그런데 네가 고소를 해 버리면 놈이 고의 사고 냈다는 걸 난우 씨가 알게 될지도 몰라. 그건 어쩌려고?”

에녹은 피곤한 듯 왼 손으로 눈두덩을 쓸어내리고는 입술도 쓱쓱 비비적거렸다. 움푹 들어간 깊은 눈매에 쌍꺼풀이 짙게 도드라졌다. 그는 빈손으로 설렁설렁 바인더 커버를 넘기며 목소리를 깔았다.

 “난우는 굳건한 어른들의 보호가 가장 필요한 시기에 너무 심하게 방치 돼서 자랐어. 방치도 모자라 학대당하고 병균취급 받고, 그래서 애가 그 지경이 된 거야. 몸은 자라는데 정신은 어린아이에 머물러 있는 거지. 조금도 크지 못하고.”

 “잘 짚었네.”

루스가 가볍게 긍정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버석한 미소가 에녹의 시원하게 찢어진 눈가에 매달렸다.

 “그래서 나는, 난우가 아직은 보호받아야 된다고 생각해. 유아기에 받았어야 했던 따뜻한 울타리가 여전히 필요하다고 봐. 그 안에서 더 자라야 돼. 무조건적인 믿음도 의심도 위험하다는 걸 알아야 하고, 사람들을 적당히 대하는 법도 깨우쳐야겠지. 억울하다고 생각하면 화를 내고 따질 줄도 알아야 되고…… 가르칠 게 아직 너무 많아. 그게 내내 고민하고 생각을 거듭해 내린 내 결론이야.”

에녹은 손을 뻗어 랩톱의 터치패드를 쓸었다. 마치 소중한 걸 어루만지듯 조심스러운 손짓으로 방금 전 주치의가 접촉사고를 낸 운전자에게 발악하던 음성파일을 선택했다. 그리고 주저 없이 Shift 키와 Delete 키를 동시에 눌렀다.

 “적어도 나는, 걔가 주치의라고 믿었던 사람한테 긴 시간 동안 농락당했다는 것만큼은 몰랐으면 좋겠어. 자기 때문에 내가 표적이 될 뻔했다는 것도. 그건 나중에, 정말 걔가 제 힘만으로 살아갈 수 있을 만큼 단단해지면 알게 되도 늦지 않을 것 갈아.”

 “무슨 말인지 이해했다.”

루스가 동의했다. 에녹이 ‘그리고 또 한 가지.’하며 입을 열었다.

 “그 정신병자 놈이 제가 누구로 인해 그렇게 됐다는 것도 몰랐으면 좋겠어. 정난우 때문에 제 인생이 망가졌다는 걸 알면 출소하고 나서 복수 하겠답시고 또 노릴지도 모르니까.”

화면에는 ‘이 파일을 영구적으로 삭제하시겠습니까?’라는 경고문이 떠 있었다. 망설임 없는 손끝이 엔터를 가볍게 쳤다. 삭제된 파일의 뻥 뚫린 자리는 그 뒤에 것들이 자동으로 메웠다.

루스가 고개를 끄덕이며 격려하듯 에녹의 어깨를 도닥였다.

 “네 결정이 그렇다면 그렇게 해. 덮어.”

사람들을 상대하는 요령이란, 결국 천성이 반이요 나머지 반은 경험에서 체득해야하는 거였다. 정난우에게는 그 경험의 수치가 너무 부족했다. 하필 천성도 순하고 착해 빠지기까지 하니 에녹의 걱정들은 충분히 납득이 갔다.

 “이제 뒤에 더 올 것들까지 정리해서 넘기면 그 새끼는 교도소에서 푹 절어서 나올 거고, 남은 건 기다리는 것뿐이네. 목 빠지겠다.”

아아, 하며 에녹의 몸이 반쯤 무너져 내렸다. 태양처럼 찬란한 광휘가 돌던 이목구비에 그림자가 얼룩졌다. 한창 뜨거울 때 오래도록 생이별 중이니 그럴 만도 했다.

에녹은 보고 싶을 때 못 보고 하고 싶을 때 못 하면 병나는 녀석이었다. 참으려니 속이 다 곪아 터지고도 남았을 거다.

 “난우 씨 어머님은 좀 괜찮아지셨대?”

루스가 넌지시 묻자 에녹은 그제야 조금 그늘 없는 미소를 지었다.

 “요양병원으로 옮겨서 재활 시작하셨대. 복귀 날짜도 잡혔다고 하고.”

 “언젠데?”

 “토요일 카라무어 뮤직 페스티벌에 초청돼 있었던 것부터 스케줄 다시 시작한다고 하더라.”

말로 꺼내놓고 나니 갑자기 가슴이 뛰었다. 에녹의 뺨에 옅은 열꽃이 피었다.

 “나 촬영 끝나자마자 튀어갈 거야. 다른 호텔에 스위트 잡아 놨어. 다음 날 안 늦을 테니까 절대 건드리지 마. 감독이고 스태프고 전화라도 했다가는 나 다음 날 개판 친다.”

에녹은 늘어지는 어투로 살벌한 개소리를 늘어놓았다. 배우가 할 수 있는 가장 비열한 협박이었다. 그날 촬영 분량을 채우지 못한다는 건 일정과 제작비가 늘어난다는 걸 뜻했다.

 “이런 프로 정신도 없는 새끼가.”

가시 돋친 독설에도 에녹은 꿈쩍하지 않았다. 루스는 가운 덮인 에녹의 치골부위를 일견 혐오스럽다는 듯이 일별했다. 팽팽히 솟은 걸 발견한 제 눈을 정수기 물에 뽀득뽀득 씻어내고 싶었다.

정난우는 분명 들이대는 대로 다 받아줄 것 같은데, 저 넘치는 정력에 절절한 그리움까지 더해졌으니 사람 잡는 건 아닌지 걱정이었다. 그리고 제가 왜 이런 걱정까지 해야 하는지 약간의 회의감마저 느꼈다.

 “나 미치겠어. 아, 씨발, 젠장, 보고 싶어 돌 것 같아.”

에녹은 열병 앓는 사람처럼 가물가물 눈꺼풀을 닫았다. 저밖에 모르는 가랑이 사이에 몸을 끼우고 올라타고 싶어 안달이 날 지경이었다. 제 그림자에 짓눌려 우는 얼굴을 핥아주고 싶어서 머리가 아찔아찔했다.

 “냄새 맡고 싶다. 키스도 하고 싶고, 섹스도 하고 싶고…….”

 “닥쳐라, 좀.”

루스는 맘 같아서는 확 밟아버리고 싶었지만, 그간 맘고생 한 거 생각해서 참아 주기로 했다. 토요일이면 고작 나흘 뒤인데 그 새를 못 참아 끙끙거리는 걸 보자니 기가 막혔다.

 “늘어져 있지 말고 빨리 일어나서 정리나 해. 난우 씨 오는 날까지 이 자식 해결 안 할 거냐?”

 “…아. 맞다.”

그제야 에녹의 몸에 바짝 힘이 들어갔다. 두 사람은 다시 문서와 음성 파일에 파묻혔다.

할 일 없는 한태영이 심혈을 기울여 고른 요양병원은 모두의 박수세례를 받았다. 재활시설은 물론이고 입원할 VIP 병실도 훌륭했다. 옥상 정원이나 병원 앞 광장, 주변 산책로까지 나무랄 데가 없었다.

그리고 출국 전 날, 정난우는 병실에서 자기로 했다. 앞으로 자주 또 들어오겠지만 그래도 긴 휴식기의 마지막 밤은 어머니 곁에서 보내고 싶었다.

매니저들은 못 말린다는 듯이 호텔로 사라졌다. VIP실이라고 해도 침대는 하나뿐이니 소파는 김혜영에게 양보했다. 그녀는 또 극구 사양했지만 정난우는 물러서지 않았다.

〔간병하시려면 체력이 필요한데 편히 주무셔야죠. 저 가고 나서도 비싸다고 병원 밥 취소하지 마시고 꼭 두 개 다 시키세요. 과일이든 음식이든 드시고 싶은 거 있으면 다 사다 드시고요. 영수증 찍어두셨다가 일주일에 한 번씩 휴대폰으로 보내 주세요. 저 다 확인할 거예요. 아무것도 산 거 없으면 화낼 거예요.〕

정난우는 어머니가 입원한 뒤 고집이 세졌다. 제가 우겨야 되는 상황에 몰리다 보니 변할 수밖에 없었다. 미적거리며 내뱉은 협박은 조금도 위협적이지 않았지만, 그래도 김혜영은 안절부절 못했다

〔순애 언니가 이것저것 많이 해 오실 텐데…….〕

김혜영이 말을 끝맺기도 전, 알람이 울렸다. 정난우는 움찔 놀라며 얼른 호주머니를 뒤졌다. 액정에는 ‘에녹에게 전화하기’가 떠 있었다.

〔저, 죄송해요. 잠깐 전화 좀 하고 올게요.〕

정난우는 휴대폰을 들고 얼른 병실을 나갔다. 옥상정원의 이미 닫힌 문 아래에서 얼른 다이얼을 눌렀다. 광장에는 카메라를 든 사람들이 있어서 나가기가 껄끄러운 상태였다.

《응…… 좋은 아침.》

빗자루처럼 탁하게 갈라진 음성에 등허리가 움찔 긴장했다.

 “저. 저…….”

《알아. 너 정난우인 거.》

 “…네. 좋은 아침이에요. 여긴 저녁이지만.”

그가 퍼석한 웃음올 터뜨렸다. 어쩐지 전신에서 힘이 빠져 구석에 몸을 기댔다. 이대로 흘러내려 그의 웃음 섞인 목소리에 잠기고 싶었다. 뜀박질하는 심장에서부터 서서히 열기가 피어 전신으로 뻗어갔다.

《여기 시간으로 내일 오후에 뉴욕에 떨어지는 거 맞지?》

 “네. 맞아요.”

《저녁 촬영 신이 좀 일찍 마무리 되면 시간 맞춰 갈 수 있을지도 몰라. 그런데 안 될 수도 있으니까 문자 온 거 없으면 어련히 알아서 잘 오고 있겠거니 해. 절대 매니저들 없이 혼자 나다니지 말고 조신하게 기다리고 있어.》

 “네. 기다릴게요.”

에녹은 그래도 안심이 안 되는지 몇 번이나 확인을 받았다. 그리고 늘 그랬던 것처럼 이번에도 마지막 말은 같았다.

《보고 싶다.》

저도 보고 싶어요, 그렇게 대답하고서야 통화는 끝났다. 정난우는 끊긴 휴대폰을 가슴에 얹고서 한참을 심호흡했다. 얼굴이 터질 듯이 달아올랐다. 목에 걸린 심장소리가 정수리까지 툭툭 진동해 왔다.

다시 만날 수 있다는 게 이제야 실감이 되는 거다. 하루, 정말 하루만 참으면 되는 거라고 거듭 되뇌며 병실로 돌아왔다.

김혜영은 곤히 잠드신 어머니 자리를 봐 드리고 있었다. 욕창이 안 생기게 바지런히 움직이는 그녀의 긴 치마가 침묵의 공기 속에서 팔랑거렸다. 치맛자락 아래 부러질 것처럼 가는 발목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다가갔다.

쿠션을 정리하며 그녀를 도왔다. 그녀는 조금 멈칫했지만 묵묵히 하던 일을 계속했다. 어설프게 돕던 정난우가 머뭇거리며 입을 뗐다. 

〔정운이…말이에요.〕

그녀의 시선이 느껴졌다. 정난우는 괜히 이불을 뒤적거리며 말을 이었다.

〔유학 가는 거, 걱정하지 마시라고요.〕

〔…네?〕

갑자기 던져진 화두에 그녀는 조금 어리둥절해하는 기색이었다. 정난우는 혹여나 말실수할까 싶어서 꼼꼼히 생각을 정리하고 검열했다. 그리고 느리게 뱉어냈다.

〔저는 캘리포니아에 집이 있는데요. 겨울이 참 따뜻해요. 전 눈 오는 날을 좋아하는데 보기 되게 힘들 정도로요. 그래도 뉴욕은 정말 한파라고  불리는 기간도 있고, 눈도 볼 수 있거든요. 그래서 이번에 미국에 가면 뉴욕에 제 애인이랑 작은 집을 하나 더 구하기로 했어요. 겨울에 종종 놀러 가자고…….〕

〔…….〕

〔그런데 아시다시피 제가 집에 가는 날이 드물어요. 저도 워낙 바쁘고 그 사람도 거의 LA에 있을 테고…… 그래서 어차피 거의 비어 있을테니까, 정운이 뉴욕에서 공부할 때 거기에서 살게 하면 어떨까 싶어요.〕

그녀는 당황한 듯 어색하게 두 손을 맞잡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아뇨. 저, 정운이한테 생활비 지원해 주겠다고도 했다면서요. 저 난우 씨한테 월급도 많이 받으니까 그것도 제가 메우려고 했는데 그 정도로 폐 끼치는 건…….〕

〔미국은 월세가 비싸요. 원룸 싼 것만 해도 천 불은 기본으로 넘고요. 그런데 들어가면 소음 때문에 피아노 연습도 제대로 못 하잖아요.〕

〔아, 연습은 디지털피아노로 헤드폰 연결해서 하면 돼요. 정운이도 그렇게 하겠다고 했고요.〕

정난우는 그녀의 거친 손마디를 물끄러미 보다 대꾸했다.

〔줄리아드 예비학교 다니는 애가 디지털피아노로 연습하게 둘 수는 없잖아요. 디지털피아노가 아무리 좋아졌다고 해도 어쿠스릭이랑은 분명 차이가 나요. …아시잖아요.〕

〔…….〕

〔피아노 오래 치셨으니까 그 정도는 아시잖아요.〕

시야의 상단에 걸린 그녀의 붉은 입술이 일순 희미하게 떨렸다. 경직된 침묵 속으로 꽉 억눌린 숨결이 허공에 흩어졌다. 정난우는 깊이 눈을 내렸다.

〔제 말대로 하세요. 제가…….〕

〔…….〕

〔제가 충분히 해드릴 수 있어요. 저 어차피 남들에 비해서 많이 버는 데 쓸 데도 별로 없고, 어차피 노는 공간 빌려주는 거니까 크게 부담 안가지셔도 돼요.〕

잠자코 대답을 기다리며 보송보송한 이불 끝자락을 만지작거렸다. 정말 한참 뒤에야, 김혜영이 거듭 고개를 저으며 떨리는 음성으로 말했다. 

〔아니에요. 정말 그러지 말아요. 내가…… 난우 씨랑 이웃사촌만도 못 한 내가 어떻게 그래요…… 내가 어떻게 난우 씨한테 신세를 지겠어요. 월급 많이 받는 건, 제가 열심히 돌봐드리는 걸로 대신할 수 있지만, 제 아들…… 제 아들…유학하는 것까지…… 그럴 순 없어요.〕

흐려진 말끝에는 수많은 감정들이 얽혀 있었다. 뒤엉켜있는 건 겉도는 대화만이 아니라 제 속도 마찬가지였다. 누군가 먼저 아주 큰 용기를 내기 전까지, 잔인한 빙하기에 갇힌 그 처참한 기억의 흔적들은 영원히 박제된 채 남을 거다.

하지만 에녹에게서 충전해 온 제 용기는 이미 바닥을 보이고 있었다. 두려움이 점차 안개처럼 밀려와 발목에서 찰랑거렸다.

혼자로는 버거웠다. 그 사람이 필요했다.

〔제가 해 드리고 싶어서 그런 거니까, 그렇게 해 주셨으면 좋겠어요. 정운이가 안 살아도 어차피 빈집이 될 거예요.〕

그녀는 움찔 입을 열었다. 하지만 무슨 말을 채 꺼내기도 전, 정난우는 샤워를 하겠다는 핑계를 대며 욕실로 들어가 버렸다.

한 20분 가까이 욕실에 틀어박혀 있었다. 느릿느릿 샤워 퍼프로 몸을 문대고 몇 번이고 행궈냈다. 머리까지 깨끗이 감고 나왔을 때 김혜영은 여전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망부석 같은 모양새였다. 불 끌까요, 나직이 묻자 그녀가 조금 늦은 대답을 돌렸다.

〔머리…말리고 자요. 감기 걸려요〕

그녀의 목소리는 마치 흐느끼듯 가날프게 떨렸다. 늦은 시각이었지만 특실이니 어차피 괜찮을 거다. 정난우는 헤어드라이어로 머리를 꼼꼼하게 말리고 나서 말했다.

〔불 끌게요.〕

〔네.〕

그녀가 소파에 눕고 나서 소등을 한 뒤 간이침대에 누웠다. 간병인용 간이침대는 딱딱하고 좁았지만 벽에 딱 붙여놓아 의외로 안정감이 있었다.

눈을 감고서 가만히 시간을 흘려보냈다. 침대 머리맡에 둔 CD플레이어는 흐릿하게 볼륨을 조절해 둔 음악을 쉼 없이 뱉어냈다. 어머니 꿈자리를 돌봐 드릴 제 음반이었다.

긴 협주곡 두 개가 끝났다. 그 때 쯤 해서, 훌쩍 넘어오는 간헐적 뒤척임이 완전히 숨을 죽였다. 정난우는 벽에 등을 기대며 조심히 옆으로 돌아누웠다.

창문으로 투과해 들어오는 빛 무리는 창백한 바닥의 일부를 비췄다. 빛이 가르는 양 옆으로 그녀와 제가 그늘에 잠겨 있었다

정난우는 어둑한 공간 속에서 느리게 시선을 더듬어갔다.

드라이 펌을 한 짧은 머리, 모양 좋은 이마와 적당히 솟은 콧대, 통통 하고 작은 입술…….

그 옆얼굴은 낯익은 듯 낯설었다. 세월이 긁고 간 주름들을 말끔히 지워내 보고 싶었지만 어차피 희망에 그칠 뿐이었다.

소파에 푹 파묻힌 몸은 이불을 덮고 있음에도 그 가녀린 실루엣을 감추지 못했다. 가끔 호되게 아프다더니 어떻게 견딜까 싶었다. 은근히 잔병치레는 없다고 들었지만, 그것도 저를 안심시키기 위해 이정운이 착한 거짓말을 한 걸지도 몰랐다.

이불 끝에 비죽 나온 상처투성이 발, 그리고 말려 올라간 소매 아래 언뜻 보이는 여린 손목…….

거기까지 시선이 다다랐을 때였다. 정난우는 숨을 멈추며 질끈 눈을 감았다. 가슴 속을 할퀴고 지나가는 시린 통증에 목이 확 메었다.

다시금 에녹의 이름을 입 안에서 간절히 되뇌었다. 그가 곁에 없어서다. 그를 너무 오랫동안 보지 못해서였다.

에녹…부탁이에요. 제게 용기를 주세요.

기도하듯 마음을 모았다. 그의 얼굴, 목소리, 체온, 향기, 그 모든 걸 뇌리에서 되살려냈다. 그러자 거짓말처럼 팔딱거리던 심장이 차츰 정상 속도를 찾아갔다. 굳어있던 입가의 근육들도 점차 풀어졌다.

한참 뒤에야 몸을 일으킬 수 있었다. 혹여 발소리라도 날까 슬리퍼도 신지 않은 맨발로 걸음을 옮겼다. 지척에서 멈춰 바닥에 무릎을 굽혀 앉을 때까지, 숨을 쉬는 것 이외의 미동은 그녀에게서 느껴지지 않았다.

정난우는 그녀를 오래도록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천천히 손을 뻗었다. 소파 옆으로 흘러내려온 그녀의 손목을 조심스레 한 손으로 받쳐 들었다. 그녀의 티셔츠는 늘 한쪽 소매가 보기 싫게 늘어져 있었다. 습관적으로 잡아당겨 감추는 버릇이 있기 때문일 거다.

여름철에도 아마 긴팔을 입고 다니겠지.이 상처를 감춰야 하니까.

희미한 빛 속에서도 손목에 남은 자상은 날카롭고 섬뜩한 선을 그리고 있었다. 세월이 흘러 흐려지고 새 살이 돋아나도 영원히 지울 수 없는 상흔이었다.

그 곳에 남아 있는 처절한 몸부림의 기억이, 동공을 찌르고 망막을 가르고 시신경을 달궜다. 익숙한 피비린내가 훅 몰려와 내장을 쥐어짰다.

빛과 어둠이 섞인 몽롱한 시야가 어지러운 춤을 췄다. 눈동자를 한 꺼풀 덧입힌 물막이 빛을 튕겨내고 어둠을 밝혔다. 부피를 키워가던 가난한 눈물이 결국 무게를 못 이기고 추락했다.

정난우는 초라하고 볼품없는 손등에 얼굴을 묻었다. 꽉 감은 눈에서 하염없이 흘러내린 눈물이 그녀의 생기 없는 피부에 젖어들었다.

엄마…….

그 한 단어만 속으로만 피 토하듯 되뇌었다.

*

입국하자마자 취재 열기가 대단했다. 공항에서부터 진을 치고 있는 기자들은 입국 수속을 마친 정난우가 게이트를 나오자마자 사방에서 플래시를 터뜨렸다.

에녹의 변장술을 잘 마스터 한 정난우는 모자와 마스크로 얼굴을 꼼꼼히 가렸다. 그래도 번득이는 렌즈는 줄곧 따라붙었다. 메니저들과 보디가드들의 틈바구니에 끼어 힘겹게 리무진에 올랐다.

차에 오르자마자 진력이 다 빠졌다. 심심찮게 이런 경우를 겪어 왔을 에녹이 진심으로 대단하게 느껴졌다.

공항에서부터 따라붙은 보디가드들은 둘씩 나눠 리무진과 또 다른 세단에 나눠 탔다. 모두 에녹이 직접 고용한 남자들이었다. 하나 같이 체구가 건장해 그 안에 있으면 뭔가 벽에 둘러싸인 듯 안정감이 있었다. 아마 그것도 고려해 고용했을 게 틀림없었다.

페스티벌의 리허설은 생략했다. 사정을 잘 아는 주최 측에서도 정난우의 실력을 믿고 혼쾌히 동의해 줬다. 그래서 본 공연까지는 2시간의 여유가 남아 있는 상태였다.

매니저들 짐도 풀 겸 호텔에 잠시 들렀다. 짬난 시간에 지친 몸을 좀 쉴 생각이었는데, 보디가드들 중 한 명이 객실 안에까지 따라 들어왔다. 정난우는 혼자 있는 게 편하다고 극구 사양했다. 잠깐의 실랑이 끝에 남자는 말을 듣기는커녕 에녹에게 곧장 일러바쳐 버렸다.

 “미스터 정이 내 밀착 경호를 거부하는데 어쩝니까?”

헉 하고 숨을 들이켠 채 굳어있던 정난우에게 그의 휴대폰이 건네졌다. 왠지 혼날 것 같은 기분이라 망설였지만 결국 받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통화로 연결된 에녹은 간단하지 않은 소리를 간단하게 했다.

《쓸데없는 소리 말고 얌전히 달고 다녀. 공연할 때를 제외하고는 팔짱을 껴도 될 만큼 딱 붙어 있어.》

그렇다고 팔짱을 끼라는 소리는 아니라고도 덧붙였다. 저 불편해요, 침울하게 대답해도 한 톨 먹혀들 낌새가 안 보였다.

그는 촬영이 있다며 그쯤에서 황급히 전화를 끊어버렸다. 고자질쟁이 보디가드와의 어색한 시간이 시작되었다. 소파의 끝과 끝에 앉아 서로 한 마디도 주고받지 않았다. 남자는 통화를 하거나 휴대폰 게임을 하거나 했고, 정난우는 멍하니 앉은 채 숨만 쉬었다.

침묵의 무거움에 압사당하기 직전, 매니저들이 간단히 요기나 하자며 객실에 들이닥쳤다. 정난우는 반갑게 고개를 끄덕였다. 나머지 보디가드들도 함께 불러 룸서비스를 시켜 먹었다.

사람이 많으면 좀 괜찮을 줄 알았더니 착각이었다. 도리어 엄숙한 긴장감마저 흐르는 거다. 정난우와 매니저들은 피부로 느껴지는 살얼음 같은 기류에 괜히 졸아 붙었다. 눈치를 살피느라 너도 나도 오붓하게 체할 지경이었다.

에녹이 고용한 보디가드들은 총 넷이나 됐는데, 에녹에게 고자질한 남자는 그들과 다른 업체인 듯했다.

나머지 셋에 비하면 키도 체구도 훨씬 작았고, 그 혼자만 캐주얼 차림이었다. 그런데도 뭔가 범상치 않아 보였다. 그건 풍기는 분위기라든가 하는 문제가 아니었다.

업계 특성인지 뭔지 거구들이 슬쩍슬쩍 신경전을 걸 때마다 남자는 개 무시로 일관했다. 너희는 떠들어라 나는 배를 채우련다, 그런 속내가 너무 빤히 보여 좀 민망했다. 정말 엄청난 마이페이스였다.

공격만 난무하고 방어는 전무했던 신경전에서, 우습게도 남자는 판정승을 거머쥐었다. 보디가드들은 벌레 씹은 얼굴로 객실을 나섰고, 남자는 역시 식사 후에도 여전히 실내에 남아 있었다.

보디가드 특유의 날 선 경계도 없이 소파에 한량처럼 늘어진 그가 적잖이 신기했다. 정난우는 이례적으로 먼저 말을 걸었다.

 “저기, 뭐 하시는 분이세요……?”

그러자 그가 씨익 웃으며 대답했다.

 “쓰레기통 뒤집니다.”

 “……네. 그러시구나.”

정난우는 멍하니 대꾸하고는 더 말하기를 포기했다. 남자는 칵칵 하고 웃는 이상한 버릇이 있었는데, 그 때에도 그렇게 웃으며 놀라운 말을 했다.

 “저는 업계에서 카카로 통해요. 당신도 카카라고 부르면 됩니다.”

어쩐지 부르기 민망할 것 같았지만 그냥 고개를 끄덕여 줬다.

공연장으로 가는 길 역시 험난했다. 샤워하고 옷을 갈아입은 터라 모자도 마스크도 쓸 수가 없어서 플래시는 더 각박하게 터져 댔다.

카카는 미리 들은 바가 있는 건지 제 티셔츠 밑단을 빼서 정난우의 손에 꼭 쥐어줬다. 그의 품에 안기다시피 해서 옮겨졌다.

팔에 닿은 그의 가슴 근육이 의외로 돌덩이 같아 깜짝 놀랐다. 소파에 삭은 고깃덩어리처럼 늘어져 있던 모습에서는 전혀 상상할 수 없었던 몸이었다.

당연한 말이지만 카토나까지 가는 길에도 베네치아 극장 주위에도 취재진은 넘쳐났다. 한여름 낙원이라 불리는 카라무어 페스티벌답게 잔디정원에도 피크닉을 즐기는 사람들도 넘쳐났다. 사람 머리만 봐도 속이 울렁 거릴 만큼 시달렸다.

장애물 헤쳐 나가듯 뚫고 들어가 대기 장소에서 겨우 손을 풀고 있을 때였다. 한태영이 다가와 손님이 찾아왔다고 알렸다.

안 그래도 모근까지 솟을 것처럼 예민하게 곤두서 있는 매니저들이 공연 전에 낯선 이를 들일 일은 거의 없었다. 정난우는 의아해져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구듯발 소리가 타박타박 다가와 앞에 섰다.

 “오랜만이에요, 난우 씨.”

나직하게 깔리는 음성에 정난우는 아, 하며 미소 지었다. 크지도 작지도 않은 손이 앞으로 불쑥 내밀어져 와 반사적으로 손을 뻗었다. 그러나 그 때, 카카가 날카롭게 손목을 낚아채 자기 쪽으로 끌어당겼다.

 “제가 모르는 분은 정난우 씨와 접촉할 수 없습니다.”

칵칵 웃던 카카의 목소리에는 탁한 무게가 실려 있었다. 칼날 같이 돋은 경계가 그의 전신을 에워쌌다.

그의 등 뒤에 반쯤 몸이 묻힌 정난우가 조금 당황해서 말했다.

 “카카 씨, 이 분은 꽤 오랫동안 제 주치의 선생님이셨어요. 이렇게까지 안 하셔도…….”

그러나 카카는 듣지 않았다. 도리어 나머지 반쪽 몸마저 제 뒤에다 완전히 끌어다 놓았다. 노골적인 보호의 제스처였다.

정난우의 시야가 온통 그의 까만색 티셔츠로 뒤덮였다. 나머지 보디가드들에게 태클 걸렸던 자유분방한 옷차림이었다. 카카가 단호하게 말했다.

 “안 됩니다.”

주치의가 길게 한숨을 허공에 쏘았다. 정난우는 주춤거리며 한 발 옆으로 나와 못내 민망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죄송합니다, 선생님. 제가 요새 상황이 여러 모로 안 좋아서요.”

 “아니에요. 그저 나도 오랜만에 난우 씨 공연 보러 샌프란시스코에서 왔는데 잠깐 얘기 좀 나눌까 했던 겁니다. 시간 오래 뺏을 생각은 없었는데 좀 섭섭하긴 하군요.”

정난우는 쭈뼛쭈뼛 머리를 긁적이며 죄송하단 말만 거듭 되풀이했다. 주치의는 할 수 없다는 듯이 혀를 찼다.

 “아니에요. 공연 끝나고 잠깐 차나 한 잔 해요. 우리 서로 오래 봤는데 전화 한 통으로 이별이라니, 너무 매정하잖아.”

정난우는 힐긋 카카의 주변 기류를 탐색했다. 싸늘하게 잘라내는 제지가 없는 걸 보면 이 정도는 괜찮은 모양이었다. 정난우는 고개를 끄덕끄덕해 보였다.

 “네, 잠깐이면…….”

주치의는 이따 봐요, 하며 돌아나갔다. 카카는 그가 남기고 간 열은 향기를 한참 노려보았다. 한 가지는 인정해줘야겠다. 저 새끼 진짜 집념 하나는 끝내주는 것 같았다.

하긴, 그 정도 끈기 없으면 그렇게 환자들을 질기게 가지고 놀지도 못 했을 테지만.

다시금 손을 풀기 시작하는 정난우를 힐긋 돌아본 그는 휴대폰을 꺼내 문자를 찍었다. 에녹에게 일단 상황을 간략히 전하고 제 동료에게도 메시지를 전송했다.

『로로. 현장에 떴다. 작업 들어가.』

슬쩍슬쩍 눈치를 보던 정난우는 카카가 아무래도 에녹에게 또 고자질 중인 건 아닌지 바짝 의심했다. 하지만 미안하게도 제 휴대폰에 에녹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오는 바람에 의혹은 사라졌다.

긴 통화는 하지 못했다. 오프닝 무대가 곧 있을 거라며 스태프가 알려 온 탓이었다.

《차가 막혀서 한 삼사십 분은 더 걸릴 것 같아 난우야, 절대로 카카가 따라붙지 않을 때는 혼자서 화장실도 가지 마.》

조금 이상하다고 생각했지만 알겠다고 대답하고 전화를 끊었다. 주치의가 다녀간 뒤 카카의 얼굴에서는 웃음기가 사라졌다. 간간이 건네던 농담도 완벽하게 증발했다.

공연 순서는 금방 다가왔다. 정난우는 길게 심호흡을 한 뒤 바이올린을 들고 일어섰다. 근 두 달만의 공연이었다. 데뷔 이후 요양 시기를 제외하면 가장 긴 휴식기였다.

무대로 향하며 가만히 머릿속에 오늘 연주할 악보를 그려 넣었다. 늘 하던 절차였다. 까맣게 동동 떠다니는 음표들은 제 상상 속에서 현에 달라붙어 공명을 일으켰다.

『Mendelssohn, Violin Concerto E minor op. 64』

오늘 공연은 3대 바이올린 협주곡 중 하나로 통하는 멘델스존이었다. 정난우는 그의 음악을 허밍으로 그리며 이미지를 불러왔다.

꼬마 아가씨가 있었다. 바람에 흔들리는 꽃잎과 잔잔히 물결치는 호수를 사랑했던 발랄한 아이였다. 동화처럼 예쁜 사랑을 꿈꿨다. 우아한 귀부인처럼 수줍은 미소를 흉내 내며 피아노 치기를 좋아했다. 허름한 치맛자락을 흩날리며 맨발로 풀밭을 빙글빙글 돌며 춤을 추면 또래 남자아이들이 볼을 붉히며 아이를 훔쳐보았다.

그러나 싱그럽고 발랄했던 소녀는 차가운 세상에 내던져졌다. 투명하고 아름다운 호수 위를 총총 걷길 소망했으나 맨몸으로 부딪친 현실은 몸서리쳐질 만큼 잔혹했다.

꿈속에서 그리던 로맨틱한 사랑은 배신당하고, 친절했던 이웃들은 그녀를 외면했다. 낭랑하고 맑았던 웃음소리는 점점 싸늘한 슬픔과 원망으로 탈바꿈했다.

결국 상처받은 소녀는 세상을 향해 칼을 겨누고…….

그 때, 정난우는 문득 걸음을 멈췄다.

칼을 겨누고…… 그 다음이…….

물처럼 흘러가던 장면들이 까맣게 암전됐다.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는 암흑의 필름이 그 뒷자리들을 채우는 거다.

한 번도 이런 적은 없었다. 당혹감이 밀려왔다.

한태영이 의아한 목소리로 ‘난우 씨?’하고 불렀다. 정난우는 흠칫 놀라 고개를 좀 더 들어올렸다. 한 줌 집어삼킨 호흡이 목젖 아래에서 체한 듯이 막혀버렸다.

시물레이션은 매우 중요한 작업이었다. 이대로라면 무대에 올라가서 아무것도 못할 거다. 절단되어 피 홀리는 공간을 억지로 끼워 맞추려 온 힘을 다했다.

상처받은 아가씨는 세상에 칼을 겨눈다. 독하게 입술을 물고는, 핏빛이 흩어지는 검무…를………

一그 때였다.

필사적으로 되살리려 호흡을 불어넣은 세계가 제멋대로 뒤틀렸다. 심장이 내려앉았다. 불안하게 굳어있던 눈가가 파르르 경련했다.

처음 보는 장면이 해일처럼 밀려와 온 의식을 뒤덮었다. 정난우는 죽음 직전에나 내뱉을 법한 신음을 쏟아냈다. 불신의 그늘이 미간을 틈 없이 메웠다.

말도…안 돼.

정난우는 탄식하듯 중얼거렸다.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 작은 손이 칼자루를 쥐지 않았다. 단단히 못 박인 손은 그대로였지만 독기의 퍼런 날은 어디에 버려뒀나 아무리 둘러봐도, 없었다.

마치,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정난우의 단정한 눈썹이 일순 지독하게 일그러졌다. 눈꺼풀 아래 까만 눈동자도 어지러이 낮은 허공을 더듬어갔다. 소름 같은 감각이 꼬챙이처럼 척추를 꿰뚫었다.

 “난우 씨, 왜 그래요. 어디 아픕니까?”

한태영이 못내 초조한 음성으로 다그쳤다. 정난우는 스치는 실바람처럼 가느다란 목소리로 대답했다.

멸망을 경험했어요, 모든 것이 붕괴되고 아무 것도 남지 않았어요.

그랬다. 그건 붕괴였다. 명실공이 멸망이었다. 한 시대가 끝나듯이 그렇게 소리 없는 격동이 휘몰아쳤다.

그렇다면 그 아이는 이제 어떻게 되는 걸까

근원 모를 불안함이 심장을 비틀었다. 열심히 그 흔적을 좇아갔다. 얼마 안 가 무사히 발견했다. 정난우는 안도하며 고개를 내저었다.

아, 그 아이. 살아남았네요. 희망은 아직 있을 거예요. 숨이 붙어 있어요. 그 아이가 태양을 보네요. 나의 태양, 나에게 그 사람이 있듯이 그 아이에게도 그 아이만의 태양이 있을 거예요.

찾으면 돼요. 내가 고개를 들지 않으면 태양은 마주봐 주지 않아요. 눈은 멀지 않을 거예요, 친절한 태양은 그 아이에게 감당할 수 있을 만큼의 볕을 나눠줄 테니까.

……엄마.

우리 엄마도 그랬을까요. 멀리멀리 날아가 그 곳에서 에녹 같은 사람을 만났을까요. 멍들고 부서져 있던 우리 엄마도 안락하게 쉴 수 있는 품을 찾았던 걸까요.

별 하나조차 뜨지 않았던 밤하늘이 조각났다. 쩍 갈라진 균열들은 마치 낙뢰처럼 주변을 밝혔다. 메마른 눈가가 뜨겁게 달아올랐다.

친숙하고 안락했던 찬란한 어둠이 기괴하게 목을 울리며 바스러졌다. 불꽃같은 어둠을 간직한 가루로 변해 온 사방에 흩날렸다. 그 입자는 빛을 담은 듯, 눈이 아릴만큼 반짝거렸다.

초라한 빛 가루가 척박한 사막에 내려앉는다. 홀씨만도 못할 가벼운 그것들이 황량한 바람에 자꾸만 떠내려간다.

그 초라한 흔적들은 파괴적인 깨달음을 가져와 공허를 채웠다. 빼곡하게 들어차 폐에서는 물소리가 났다. 뇌 주름 하나하나가 바늘땀이 떠지는 듯했다.

암흑은 그저 암흑일 뿐이다. 무색무취의 생명을 잃은 땅인 거다. 제가 살던 찬란한 어둠 같은 건, 실존하지 않는다. 그건 그저 어떻게든 살아남기 위해 제가 만들어낸 허상일 뿐이었다.

그렇게라도 스스로를 세뇌하지 않으면, 그 산소 하나 없는 우주 같은 공간 속에서 숨을 쉴 수조차 없었기에…….

어쩐지 서러움이 북받쳤다.

정난우는 흐리멍덩한 눈을 들었다. 부축해주려는 한태영의 손을 물렀다. 스스로 걸음을 옮겨 무대 위로 올라갔다. 다리는 철근을 심은 마냥 무거웠다.

열렬한 박수 소리가 베네치안 극장을 가득 메웠다. 떠돌고 떠도는 그 익숙한 소리들은 이제껏 살갗을 후려치는 채찍이었다. 상상 속에서 그들은 늘 저를 향해 붉은 눈알을 번득거렸다.

어서 너의 음악을 들려줘, 희열을 빙자한 역병을 뿌려.

제 바이올린은 곰팡이였다. 암수 구별도 없이 홀로 발아해 음험한 영역을 넓히는 세균 덩어리였다. 제가 오르는 무대는 피 냄새 나는 병균들이 득실거리는 배설의 장소였다.

정난우는 객석을 향해 인사했다. 세상이 거꾸러지고 곧 암전되었던 사고의 순간처럼 머릿속은 백지가 되었다.

아니, 그것은 백지가 아니라 백야에 더 가까웠다. 검게 물들어 있던 흉기 같은 음표들이 천사의 깃털처럼 나부꼈다.

그곳에서 그 꼬마아가씨가 웃는다. 멘델스존 속에서 고통에 몸부림치던 그 아이가, 천천히 내려앉는 볕에 잠겨 피투성이 몸을 닦는 거다. 태양은 그 여린 살갗의 상처를 쬐이며 치유해주고 있었다.

정난우는 활을 들었다. 웅성거리던 소음들이 아득한 심해 아래로 사라졌다. 지휘봉 끝을 노려보았다. 흰 지휘봉은 역동적인 궤적을 그었다.

그 순간, 죽음 같은 정적이 혼을 집어삼켰다.

꽃 같은 꼬마아가씨가 춤을 춘다. 잔디를 밟는 맨발이 들꽃의 줄기를 가벼이 스친다.

덜 여문 육체는 풋풋하나 매혹적이었다. 바람결에도 부서질 꽃처럼 가녀려 보이지만, 싱싱한 자연 속에 자란 잡초처럼 생명력이 넘쳤다.

여전히 동화 같은 사랑을 꿈꾸는 아이는 수상가옥에 앉아 석양 지는 호수를 바라보았다. 잘게 너울거리는 수면은 역동하는 금빛 물고기의 낱 비늘들처럼 조각조각 빛났다.

괴테가 끔찍이도 아꼈던 멘델스존은 이렇게 로맨틱하고 낭만적인 사람이었다. 섬세한 감수성과 애틋한 그리움으로 점철된 곡이었다. 그 동안 제가 질리도록 뿌려놓은 멘델스존은 모두 분리수거조차 안 될 쓰레기였다.

처참한 자괴감은 압도적인 희열에 참혹하게 뒤덮였다. 메마른 대지가 반란하듯 일어났다. 짓밟히느라 한 번 움터 보지도 못했던 여린 새싹들이 갈라진 틈바구니마다 고개를 내밀었다.

태양이 쏟아졌다. 빗줄기가 창공을 빼곡하게 수놓았다. 봄비가 내려왔다. 제 이름처럼 따뜻한 비였다. 온 세상이 젖어들었다.

동화를 꿈꾸던 소녀는 성숙한 여인이 되었다. 냉혹한 현실에 깨지고 부딪쳤던 상흔은 새살에 덮여 사라졌다. 그녀는 여전히 소녀처럼 싱그러운 웃음소리를 이웃들에게 전도했다.

온 세상에 깃털 같은 우윳빛 비가 내렸다. 소녀도 호수도 그림 같은 집들도 모두 흔적 없이 뒤덮였다.

강렬한 섬광이 사위를 진동했다. 오로라처럼 휘황찬란한 빛이었다.

무의식에 떠밀려 그 빛을 따라갔다. 급박하게 뛰어 그리움을 부르짖었다. 익숙하고 그리운 향기가 아득히 코끝을 채웠다. 망설임 없이 그 품 안으로 뛰어들었다. 달아오른 몸뚱이가 틈 없이 겹쳐졌다.

완벽하고도 달콤한 안식의 땅이었다. 무대는 이제 핏빛이 아닌 그의 색깔로 온통 물들었다.

황금빛 태양이 내리깔렸다. 필사적으로 떠나갔으나 끝내 벗어나지 못했던 어머니 대신, 그가 함께하는 곳이었다.

우레 같은 함성과 박수가 장내를 메웠다. 제 머릿속에 화석처럼 굳어져 있던 모든 악보가 낱낱이 부서지는 소리였다. 시벨리우스에도 차이콥스키에도 파가니니에도 빠른 혁명의 태풍이 몰아닥쳤다.

정난우는 얼굴 근육을 비틀어 웃었다. 뜨겁게 달아오른 뺨에 열화의 바람이 맺혀왔다.

물기가 허공에 녹아 체온을 앗아갔다. 뺨은 흠뻑 젖었고 몇 번이고 물어뜯은 입술에서는 비릿한 피 맛이 났다.

내 모든 악보에 당신이 생겨버렸다고 말하면 그는 무슨 말을 할까.

슬픔도 기쁨도 모두 그와 함께 있었다. 절망을 논하는 음악에서조차 그가 있었다. 절망에 그치지 않고 이겨내는 법을 가르쳐주는 친절한 남자가 곁에 있어주는 거였다.

이제는 시벨리우스에게 미안해하지 않아도 된다. 자신은 에녹에게서 극복하는 법을 배웠다. 미련하게 견디는 게 아니라 박차고 뛰어나가는 음악을 그에게 들려주고 싶었다.

헐떡이는 숨결이 입김처럼 입술 주변을 어른거렸다. 후끈한 여름밤이 버거웠다. 이보다 더 뜨거운 에녹을 가지고 싶었다.

우왕좌왕 객석에 인사하고 도망치듯 무대를 뛰어 내려갔다. 웅성거리는 객석의 소음은 신경까지 도달해 오지 못했다. 휘청거리는 몸뚱이가 카카의 가슴에서 한 번 무너졌다.

이 향기가 아니었다. 뿌리치듯 밀어냈다. 놀라 굳은 한태영에게 바이올린과 활을 떠안기고 호주머니를 뒤적거려 휴대폰을 찾아냈다. 턱 끝에 방울 맺힌 눈물들이 바닥으로 후드득 몸을 던졌다.

정신없이 누른 다이얼은 용케도 그 사람을 찾았다.

《응. 나 도착했으니까 주차장으로…….》

그의 목소리였다. 불길 같은 갈증에 목이 타 들어갔다. 이게 두려움인지 희열인지 이젠 분간조차 안 갔다. 다만 확실한 건 지금 이 순간 그를 보지 못하면 말라 죽을지도 모른다는 거였다.

정난우는 울부짖듯이 그의 이름을 불렀다.

 “에…에녹…….”

《…너 왜 그래.》

에녹의 탁한 음성이 쉰 것처럼 갈라져 나왔다. 그는 곧장 카카는 어딨냐고 추궁했다.

다른 이를 찾는 그가 야속했다. 내던지듯 휴대폰을 카카의 품에 밀어 넣고 뒤돌아 뛰었다. 당황한 목소리들이 뒤에서 마구잡이로 얽혀댔다.

 “지금 정이, 뛰어가고 있는一”

카카가 짧게 내뱉은 말을 끝으로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공연장 밖은 여전히 붐볐다. 온 사방에서 반질반질한 렌즈들이 번득거렸다. 어쩌면 인간들의 시선일지도 몰랐다. 무엇이든 상관없었다.

모르는 향기들이 사위를 압박해 왔다. 칼날 같은 음성들이 자꾸만 예민한 고막을 들쑤셨다. 정난우는 길 잃은 어린애처럼 사람들 사이를 헤집고 돌아다녔다.

매니저들과 보디가드들은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 정난우를 둘러싸려는 기자들과 한판 전면전을 치러야 했다. 터질 듯한 고성에 낭만적인 밤이 혼탁하게 얼룩졌다

불현듯 정난우의 귀신같은 청력이 낯선 소리를 감지했다. 사이렌이었다.

무슨 일이 났을까. 불이라도 났을까.

그러나 희미하게 솟은 의혹들은 금세 바닥으로 까라졌다. 후텁지근한 공기가 땀 밴 셔츠를 피부에 휘감아 놓았다. 목젖까지 차오른 숨이 무질서하게 습한 공기 속에 나뒹굴었다.

어느 순간, 금속성이 녹은 거친 음성이 아득한 거리에서 거칠게 튀었다. 난우야, 제 이름이었다. 그의 목소리였다.

무작정 그 소리의 근원지를 향해 뛰어갔다. 바닥은 마치 지각변동이 일어나는 것처럼 사납게 울렁거렸다. 자꾸만 거꾸러지려는 다리에 필사적인 힘을 불어넣었다.

드디어 그가 보였다. 그의 아름다운 얼굴은 그새 더 살이 내렸다. 시원하게 찢어진 눈매, 겨울 호수처럼 시린 눈동자, 붉고 도톰한 입술과 깎은 듯한 턱, 그리웠던 그의 얼굴이 시야에서 물비늘처럼 너울거렸다.

그가 마주 달려왔다. 한계를 알린 몸뚱이가 바닥으로 무너질 찰나였다. 단숨에 거리를 좁힌 그가 강하게 허리를 감아왔다.

젖은 얼굴에 그의 단단한 목이 닿았다. 뜨거운 혈관이 꿈틀거리는 그 곳에 헐떡이는 숨을 뭉겠다. 목이 메게 그리웠던 후끈한 체온이 온 몸을 감싸왔다.

 “쉬…… 괜찮아.”

아무것도 모르면서 그는 귓가에서 속삭였다. 그의 길고 예쁜 손가락들이 머리카락 속으로 깊이 침투해 들어왔다. 팔팔 끓는 듯한 머리가 거친 다정함에 축축 녹아내렸다.

등 뒤 아득한 곳에서 뒤엉킨 소음들은 크레셴도와 데크레셴도를 반복했다. 에녹은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그저 고개를 꺾어 내려 귀 언저리 솜털 같은 키스와 속삭임만 뿌렸다.

괜찮아. 내가 곁에 있잖아. 울지 마. 얼마 만에 보는 건데 우는 얼굴부터 보여주고 그래.

숨넘어갈 듯 헐떡이던 울음이 점차 멎어갈 때였다. 등 뒤에서 비명이 들려 정난우는 뜨끈한 숨 한 자락을 입에 물었다. 반사적으로 돌아보려는 고개가 그의 두 손에 꼼짝없이 갇혔다.

 “어딜 봐. 날 봐야지.”

에녹은 단호하게 말했다. 네, 하며 열렬히 올려다보는 눈꺼풀에 입을 맞춰주었다. 에녹은 가시처럼 돋은 신경을 저만치로 떠밀어 보냈다. 놈이 나타났다는 메시지를 받고서부터 내내 모골이 바짝 서 있었다.

무너지듯 기대오는 정난우의 뒤편은 조금 어지러웠다. 경찰의 지시에 따라 머리 위에 손을 얹은 남자가 보였다. 밤의 흥취를 즐기던 이들의 눈들이 어지럽게 움직였다.

그 광경을 짧게 방관하고 있을 때였다. 텁텁하게 셔츠가 달라붙은 가슴 위로 조물조물 뭔가가 매만져왔다.

손, 정난우의 손이었다. 에녹은 침착한 눈빛을 내렸다. 열기 일렁이는 까만 눈동자를 깊숙한 시선으로 찌르고 들어갔다.

 “에녹……?”

정난우의 목소리는 물결처럼 축축하고 사탕처럼 달콤했다. 에녹은 정난우의 귀를 더 꽉 틀어막으며 그대로 고개를 비틀어 숙였다.

입술이 닿았다. 정난우의 눈시울이 크게 벌어졌다. 부드러운 표피가 부대끼는 순간 에녹은 저도 모르게 끓는 탄식을 내뱉었다.

혀를 내밀자 정난우는 허겁지겁 입을 열었다. 달콤한 비음이 연결된 부위에서 잘게 진동했다. 정난우는 얼른 빨아달라고 안달하며 어깨를 들썩였다. 벌어진 늪지 속에 망설임 없이 혀를 끼워 넣었다.

정난우는 움찔 어깨를 움츠렸다. 학, 떨리는 숨결이 흩어졌다. 내리누르는 힘에 못 이겨 뒤로 반 발자국 떠밀렸다.

보고 싶었어.

키스는 또 다른 언어였다. 용암처럼 끓다가 돌처럼 굳을 뻔했던 응어리를 타액과 함께 흘려 넣었다. 눈동자와 동공이 구분이 안 갈 만큼 짙고 까만 눈동자가 금세 약에 취한 듯 풀어졌다.

후들후들 떨리는 정난우의 손이 등을 더듬어 올라왔다. 꾸물꾸물 기어 올라와 살짝 튀어나온 견갑골을 꽉 붙들어 왔다. 그 작은 자극에도 나직한 신음이 목 안에 고였다.

본래 목적은 정난우의 인지력을 바닥까지 끌어내릴 만큼 혼을 쏙 빼놓는 거였다. 등 뒤 상황을 조금도 알아채지 못하게 하려던 꼼수였다. 그러나 이대로 가면 정말 큰일 나지 싶었다.

이미 주변은 경악과 혼돈으로 아수라장이었다. 범인 검거 현장은 뒷전이고 죄 이쪽만 보고 있었다.

에녹은 거칠어지기 직전에 억지로 입술을 떼 냈다. 다시금 헐떡이는 얼굴은 발갛게 상기돼 조르듯 올려다보고 있었다. 익숙하지만 그만큼 치명적인 순간들에서 보여주는 얼굴이 코 아래 있는 거다.

착착 달라붙어 휘감기는 몸은 노골적인 제스처를 보였다. 정난우의 모든 신경은 한 톨도 빠짐없이 저한테만 쏠려 있었다. 등 뒤의 상황은커녕 구경꾼도 의식하지 못하는 거다.

미칠 노릇이라 일단 그 얼굴을 어깨에 기대게 했다. 곁에서 민망한 표정으로 사람들의 시선을 가로막는 매니저들과 보디가드들, 그리고 동물원 원숭이 보듯 둘러싼 이들을 차례로 응시했다.

에녹은 다시금 멀리로 시야를 넓혔다. 정난우의 주치의는 경찰들에게 둘러싸인 채 막 차에 실리는 중이었다. 그가 가진 브리프케이스가 압수되었다. 저 안에는 카카의 작업물이 채워져 있을 거다. 물론 놈의 집 안에도 놈을 썩게 만들 것들은 더 숨어 있었다.

놈을 연행한 경찰들은 빠르게 철수했다. 길게 울리는 사이렌이 소음 속에서 잘게 부서지며 멀어져갔다.

멀리서 카카가 한 손을 들어 보였다. 그의 입술 한쪽이 비죽 올라가는 게 아마 웃고 있는 듯했다. 허공에 뜬 그의 손은 곧이어 엄지를 제외한 손가락들이 구부러졌다.

카카는 돌아서기 전, 휴대폰을 흔들어보였다. 후에 또 연락을 달라는 뜻일 거다. 아니면 잔금을 보내달라는 거든지. 뭐가 됐든 상관없었다.

정난우는 끝까지 아무 것도 몰랐다. 그리고 품 안에 다시 떨어졌다. 여전히 저만 보고 저에게만 매달려 왔다. 그거면 되는 거였다.

에녹은 정난우의 머리카락 속에 입술을 묻었다. 이마에 키스하고, 젖은 뺨에 키스했다. 안도의 한숨이 전신에 나른하게 퍼져나갔다. 이제야 모든게 끝났다는 걸 실감했다.

그리고 그 때, 정난우가 헐떡이며 속삭였다.

 “저…저…….”

응, 말해. 에녹은 정난우의 두 뺨을 꾹꾹 어루만지며 대꾸했다. 젖었다 마른 얼굴은 축축하고 말랑말랑했다.

그 느낌이 좋아 한 번 깨물어볼까 생각하던 순간이었다. 얼굴을 붉힌 정난우가 여전히 홀린 듯 몽롱한 눈을 깜빡이며 입을 벌렸다.

 “저…그러니까…… 먹고 싶어요. 그…….”

에녹의 눈썹이 꿈틀 미동을 보였다. 뭐? 하고 묻자 정난우는 어깨를 움츠리며 눈을 꽉 감았다. 좀 전까지 씹고 놀던 입술이 가늘게 떨리며 달콤한 음성을 뱉어냈다.

 “저, 저 오는 날 저한테…싸 주겠다고, 약속…….”

에녹은 충격 받은 사람처럼 약 1분여간을 동상처럼 서 있었다.

머리가 어지러웠다. 다리를 벌리고 얼른 넣어달라며 우는 얼굴을 상상하기 직전, 다급히 제동을 걸었다. 미친 짓을 저지를 뻔했다.

카메라, 일단 여기를 피해야 했다. 둘이 부둥켜안고 발기한 아랫도리를 비비는 사진이 여기저기 뿌려지는 건 저도 사양이었다.

에녹은 정난우를 훌쩍 업어 메고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한 손으로 호주머니에 넣어둔 차키를 빼 들며 그는 곧장 내달렸다.

뒤에서 매니저들의 기겁한 목소리가 엄습해왔다. 또 누군가 쫓아오고 플래시가 터지고 난리법석이 벌어졌다.

에녹에게는 아무것도 들리지가 않았다. 그저 얼른 주차해 둔 차를 찾아 호텔로 쏠 생각뿐이었다.

뺨을 스치는 여름밤의 공기가 서늘하게 느껴졌다. 그건 아마 제 몸에 서 들끓는 열기 때문일 거다.

올 여름은 유독 무더울 거라고 했다. 그 뜨거운 계절을, 아마도 저는 정난우를 품에 안고 한없이 녹아내린 채 지내게 될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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